183화
183화
유중혁의 일방적인 통보에 일행들의 반발은 어마어마했다.
“그렇게 멋대로 결정하는 게 어디있어요?”
멋대로 통보를 마친 유중혁이 사라지자, 제일 먼저 정희원이 소리쳤다.
“출발은 사흘 뒤다! 그때까지 랭킹은 알아서 올려라! 그렇게 말하고 가버리면 우리가 알아서 굴러야 해요?”
“그런 말은 그 자식 있을 때 하지 그랬어요.”
“······독자 씨라면 하겠어요?”
“아뇨.”
정희원은 분이 풀리지 않는지 여전히 씩씩거렸다.
“그래도 유중혁 말대로 하는 게 생존확률이 높을 거예요.”
“독자 씬 대체 누구 편이에요?”
“그야······.”
나는 멀리서 이쪽을 노려보고 있는 유중혁을 흘끗 바라보다가, 어깨를 으쓱하며 웃었다.
“일단, 다들 반갑습니다. 이걸로 세 번째 부활이네요.”
그제야 유중혁의 패기에 얼어붙어 있던 일행들도 하나 둘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이길영과 신유승이 내 양 다리에 찰싹 붙었고, 이현성은 살짝 울적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부활하신 걸 축하드립니다. 벌써 몇 번째지만 익숙해지질 않는군요.”
“익숙해져버리시면 슬플 것 같은데요. 일단, 정리를 좀 해보죠.”
유중혁이 일방적으로 통보한 말들은 다음과 같았다.
―팀은 두 개로 나눈다. 내 팀과 김독자 팀. 그리고 할당 인원은 각각 넷 씩이다.
―내 팀에 들어올 인원은 이현성, 공필두, 이지혜, 이설화. 이렇게 넷이다.
―김독자 팀은 정희원, 신유승, 이길영, 유상아. 이렇게 넷으로 하겠다.
결국, 명단은 지금까지 공략에 참가했던 주요 일행 구성과 대동소이한 셈이었다. 쭉 싸워왔던 일행 구성 대로 열 번째 시나리오 공략에도 참가하자는 뜻. 나를 배려한 것일 수도 있고, 자기가 편해서일 수도 있다. 아마 유중혁 성격을 생각하면 후자일 가능성이 농후하지만.
다들 명단 자체에는 큰 불만이 없는 기색이었는데, 유일하게 시무룩해 있는 사람은 이현성이었다.
“저는 독자 씨 팀에 들어가고 싶은데······.”
“어차피 같이 가니까 어느 팀에 들어가든 별 상관은 없을 겁니다.”
“······예.”
나는 이현성의 어깨를 탁탁 쳐주며 일행들에게 고개를 돌렸다.
제일 먼저 눈이 마주친 것은 유상아였다.
너무 간만이라 그런가, 눈을 마주치는 것도 어쩐지 기분이 이상했다. 잠시 그러고 있자니, 정희원이 내 옆구리를 쿡 찔러왔다.
“왜요? 가터벨트랑 차이나 드레스가 아른아른해요?”
“······아직도 그 얘깁니까?”
“워낙 충격적이라서요. 우리끼리 이름도 붙였어요. ‘김독자 가터벨트 사건’이라고. 근데 난 그거 죽어도 안 입을 거예요.”
“바라지도 않는데요.”
그러자 이지혜가 손을 번쩍 들었다.
“난 성능 좋은 거면 입어줄 용의 있어! SSS급으로!”
“그만 놀려라.”
“저도 성능만 좋다면 그 정도는 입을 수 있습니다.”
“현성 씨는 왜······.”
“군인은 장비를 가리지 않습니다.”
그런 군인 정신을 엉뚱한 쪽에서 발휘하지 말아 달라고 충고하려는데, 허공에서 우리엘의 메시지가 들렸다.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가터벨트를 만든 성좌도 남자였다고 말합니다.]
농담이겠지? 빌어먹을.
게다가 ‘성좌’라고?
[성좌, ‘가장 어두운 봄의 여왕’이 빙긋 웃으며 언제 한 번 그를 초청해 오겠다고 말합니다.]
생각해 보면 이 모든 상황은 저 페르세포네 때문이었다. 언제 다시 명계에 가게 되면 꼭 따져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 얘긴 이쯤 하고······ 다들 랭킹은 어떻게 되세요? 참고로 이 명단에 들어가려면 랭킹 10위 안쪽이어야 하는 건 다들 알고 계시죠?”
그러자 일행들이 차례로 대답했다.
처음은 정희원이었다.
“난 4위에요. 이복순 할머니한테 랭킹 넘겨 받았거든요.”
“저랑 신유승은 8위랑 9위에요 형. 아, 그리고 제가 신유승보다 더 높아요!”
“저는 5위입니다. 그리고 공필두 씨는 랭킹 올리러 잠깐 자리를 비웠습니다. 한수영 씨도요.”
그러고 보니 한수영이 있었지.
내 생각을 읽은 모양인지 유상아가 물어왔다.
“한수영 씨는 그 명단에 없었는데, 두고 가실 건가요?”
“아뇨, 데리고 가야 합니다. 한수영은 꽤 도움이 되니까요.”
“······그렇군요.”
유상아는 한수영 이야기가 나오자 힘없이 웃었다.
일행들은 아직 그 녀석이 ‘첫 번째 사도’였다는 걸 모른다.
한수영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그녀 입장에선 거짓말을 하는 기분일 테니, 기분이 안 좋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것도 언제 이야기를 하긴 해야 하는데 기회가 있을지 모르겠다.
곁에서 듣고 있던 정희원이 입을 열었다.
“올라갈 수 있는 건 총 열 명인데, 한수영 씨는 어떻게 데려가려고요?”
“원칙적으론 열 명만 갈 수 있지만, 히든 피스가 있습니다. [암흑성]에서 구할 수 있는 아이템 중에 [식스맨 카드]라는 게 있거든요. 그걸 쓰면 팀이 아닌 사람도 다음 시나리오에 참가할 수 있습니다.”
“······하여간 그놈의 히든 피스. 또 뭔가 우리한테 알려줄만한 건 없어요? 다음 시나리오에 뭐가 나오길래 이런 호들갑인지 우리도 좀 알아야 할 거 아니에요. 항상 유중혁 씨랑 둘이만 속닥대고 있잖아요.”
“속닥대다뇨? 그 표현은 좀 거북한데요.”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콧김을 뿜습니다.]
정희원이 생긋 웃으며 나를 보았다.
“그럼 말해주세요. 김독자 씨는 유중혁 씨랑은 다르다는 걸 보여달라고요.”
주변을 둘러보자, 일행들은 할머니의 전래동화라도 기다리는 손자들처럼 나를 향해 눈을 빛내고 있었다.
내가 이야기꾼이었다면 ‘옛날 옛날에 한 용사가 살았답니다’라는 그럴듯한 서두로 이야기를 열었겠지만, 난 김독자지 김작가가 아니다.
“혹시 ‘마왕’이라는 존재에 대해 들어본 적 있으십니까?”
마왕(魔王).
난데없이 던져진 그 단어에, 일행들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뭐······ 악마들의 왕? 그런 건가요?”
“나 알아요! 애니에 맨날 나와요!”
이길영의 외침에 내가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대충 비슷해.”
‘멸살법’ 설정에 따르자면 좀 다르긴 하지만, 여기서 주절주절 설명하기도 뭣했다.
“열 번째 시나리오는, 그 ‘마왕’과 싸우는 시나리오입니다.”
이현성이 침음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도깨비에, 귀환자에, 촉수 괴물에······ 확실히 지금쯤 마왕 같은 게 나올 때가 됐다고 생각도 했습니다.”
듣고 있던 이지혜가 물었다.
“근데 마왕이면 엄청 센 거 아냐? 악마 후작이란 녀석도 그 정도인데······ 비교하자면 대체 어느 정도로 강한 건데?”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답해주었다.
“성좌급이야.”
‘멸살법’에서 마왕을 이르는 말이 있다.
승천하지 않은 성좌(星座).
말 그대로, 마왕은 현세에 눌러 붙은 ‘성좌’들이다.
안색이 창백해진 이지혜가 다그쳤다.
“그런 녀석을 우리가 어떻게 잡아? 아, 또 아저씨랑 사부랑 둘이서 잡을 건가?”
“아니, 이번엔 다 같이 잡을 거야.”
“······나 안올라가면 안돼?”
“다 같이 싸워야 잡을 수 있어. 나랑 유중혁이 신격을 꺾었던 건 순전히 행운이었어. 두 번이나 그런 요행은 없다고.”
“그래도······.”
“걱정마. 마왕이 ‘성좌’만큼 센 건 사실이지만, 이 위층에 있는 녀석은 그 정도는 아니니까.”
“그럼?”
나는 잠깐 망설였다.
지금 내가 그 정도의 정보를 한꺼번에 토해내도 될까 싶었기 때문이다.
이 정보는 마왕에 관한 것뿐만 아니라, <스타 스트림>의 성좌들에 관한 내용도 포함하고 있으니까.
잠시 생각하던 내가 [그룹 채팅]으로 이야기를 전하려는 순간.
[그건 제가 알려드리죠.]
내 고충을 알았는지, 허공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랜만입니다 여러분. 하, 그동안 말 못해서 얼마나 답답했는지······ 하하, 다들 시나리오 준비는 잘 되어 가시나요?]
비형이었다.
*
본래 <스타 스트림>에서 ‘마왕’으로 인정받는 존재는 72명 뿐이었다.
그들은 성좌들처럼 수식언을 가지고 있으며, 제각기 다른 마계의 통치구를 장악하고 있었다.
비록 ‘성운’에 비할 바는 아니겠지만, 그래도 한 ‘세력’을 이끄는 존재들.
그들은 별자리의 명예에 집착하는 성좌들을 비웃으며 도깨비들조차 버린 대지에 남았다.
그 때문일까. 성좌들은 ‘이계의 신격’ 못지 않게 마왕들을 증오하게 되었는데, 이 [암흑성] 시나리오는 그런 성좌들의 경향을 고려해 만들어진 시나리오였다.
화신들 싸우는 것도 보고, 마왕도 죽이고.
한 마디로 성좌들의 사이다를 위해 만들어진 시나리오랄까.
“아, 제발! 난 안 간다니까!”
질질질질.
사흘 동안, 나는 [암흑성]의 주변부에 숨어 있던 한수영을 찾아냈다.
어찌나 꼭꼭 숨어 있는지, 도깨비 보따리에서 구입한 [구속의 밧줄]과 [인명 탐색]이 없었더라면 찾아내지 못할 뻔 했다. 한수영이 발악하며 외쳤다.
“난 이제 안 싸워! 그냥 여기서 죽치고 있다가 네가 시나리오 클리어 하면 밖으로 나갈 거라고!”
“너도 가야돼.”
“마왕이랑 싸우기 싫단 말야!”
“73번째 마왕은 급조된 녀석이야. 너도 알고 있잖아?”
앞서 말했듯, <스타 스트림>에서 ‘마왕’의 격을 인정받은 존재는 72명 뿐이다. 그런데 이번 시나리오의 타이틀은 [73번째 마왕]이고. 즉, 위층에 있는 녀석은 ‘정식 마왕’은 아니라는 뜻이다.
“그래도 ‘마왕’이니까 지금까지 만났던 녀석들 중에서는 손에 꼽게 강하겠지만, 설화급 성좌들만큼 세지는 않아. 싸워볼 만 해.”
“난이도가 변했을지도 모르잖아. 너랑 같이 다니다가 난이도 변한 게 어디 한두 번이야?”
“메인 시나리오 난이도는 도깨비들이 함부로 바꿀 수 없어. 그건 <스타 스트림>의 관할이니까.”
“도깨비만 위험한 줄 아냐? 사흘 전에 있었던 일 벌써 까먹었어?”
한수영이 이렇게 학을 떼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원작 전개를 아는 녀석이니까 더할 수밖에 없겠지.
“이대로 시나리오 계속 진행하면, 얼마 지나지 않아 일행들 다 전멸할 거야. 지금 <성운>들이 다 너만 노리고 있는 거 알지?”
“······알아. 그래서 나도 잘 준비하고 있어.”
“준비? 아니, 준비한다고 될 일이야? 당장 다음 시나리오에서 뭐가 어떻게 나올 줄 알고?”
마침 야영지에 도착해서, 나는 말없이 일행들 쪽을 가리켰다.
제각기 포메이션을 짜서 훈련 중인 일행들의 모습이 보였다. 그들은 가상의 적을 상정해 놓고 진형을 바꾸며 스킬 연계를 연습하고 있었다.
“길영이랑 유승이는 후방으로! 유상아 씨가 앞으로 나서고, 내가 그 뒤를 맡는다!”
“알겠어요!”
이제까지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침착한 연계 공격들. 일행은 속성을 이용해 중첩 데미지를 주기도 하고, 적의 공격 반경을 이용해 원거리에서 포화를 쏟아내기도 했다. 그 모습을 유심히 보던 한수영이 입을 벌렸다.
“설마 저거······ 마왕 패턴을 분석한 거야?”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얼마나?”
“거의 다.”
불가능한 일도 아니었다.
나는 ‘멸살법’ 텍본을 가지고 있고, 유중혁이 73번째 마왕과 싸운 데이터베이스는 상당히 쌓여 있었으니까. 게다가 유중혁은 2회차에서도 73번째 마왕과 싸워본 적이 있었다. 실질적인 경험과 이론적 빠삭함이 힘을 합쳤으니, 다음 시나리오에 대한 완전 공략도 불가능한 일만은 아니었다.
한수영은 진심으로 탄식한 얼굴이었다.
“······너 진짜 미친놈이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