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6화
176화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래도 죽이지는 마.”
“······제압은 해야 한다. 저 여자는 협력할 생각이 없어.”
나는 피로 흠뻑 젖은 어머니를 바라보았다.
그것이 그녀가 흘린 피인지, 아니면 타인의 피인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한계인 것은 명백했다.
간당간당한 개연성으로 어떻게든 승부를 이어가고 있었지만, 체력은 이미 바닥이 났을 것이다. 당연한 결과였다.
그녀는 혼자였고, 이쪽에는 유중혁이 있었으니까.
[피스 랜드] 때였다면 모를까, 초월좌가 된 유중혁은 차원이 다를 정도로 강하다. 아무리 설화급이라고 해도 그림자만으로는 무리다. 최소 진체의 일부가 강림하지 않으면, 초월좌를 제압하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어머니에게 그만한 개연성은 남아 있지 않은 듯했다.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침을 삼킵니다.]
[성좌, ‘긴고아의 죄수’가 당신의 선택에 주목합니다.]
[성좌, ‘심연의 흑염룡’이 당신의 만행을 지켜봅니다.]
나는 일행들을 내버려두고 어머니에게 다가갔다.
“이제 그만두세요.”
[‘제4의 벽’이 희미하게 흔들립니다.]
“대체 왜 그렇게 나를 막는 건데요?”
성좌의 그림자에 묻힌 어머니의 얼굴은 잘 보이지 않았다. 간신히 눈과 입만이 드러난 모습. 닿을 것 같은 거리에 있어도 결코 닿지 못하는 존재. 교도소에 있을 때도, 그리고 지금도. 언젠가부터 이것이 우리의 거리가 되었다.
“말해도······ 들어주지 않을 거······.”
이 사람은, 무엇 때문에 이렇게까지 하는 걸까.
온몸이 피투성이가 되면서까지, 대체 왜.
동료들이 나를 보고 있었다. 부디, 내가 올바른 선택을 하길 바라는 듯한 눈빛들. 나는, 한숨을 쉬며 입을 열었다.
“한 번. 딱 한 번만 들어줄 테니까, 말해봐요.”
나는 그 말이 내 입에서 나왔다는 사실에 놀랐다.
“제대로 이야기를 해보라고요.”
내가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줄은 몰랐다.
스스로도 진심인지 아닌지 알 수 없는 말을, 쥐어 짜내듯 내뱉었다.
어머니의 눈빛이 흔들렸다.
“언제까지 이렇게 있을 수는 없잖아요? 혼자만 알고 있지 말고, 나한테도 말해달라고요. 대체 왜 날 막는지! 어머니가 여기까지 온 이유는 무엇인지! 뭐라도, 뭐라도 좋으니까!”
“내가, 말하면······.”
툭 치면 울음이 쏟아질 것 같은 그 눈을 보는 순간, 나는 지금까지의 모든 이야기가 이어져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녀의 자식이기에, 알 수 있었다.
어머니가 나를 막는 이유는, 어머니가 에세이를 쓴 이유와 같다는 것을.
상처받을 것이고.
부서질 것이고.
지난 삶이 망가질지도 모른다.
“말해봐요.”
길었다는 생각을 한다.
어쩌면 그것은 내가 이미 예상하는 이야기일 것이다.
그토록 무수한 성좌들의 암시가 있었는데, 전혀 예상하지 못하는 것이 이상한 일이다.
그럼에도 나는 어머니의 입으로 직접 그 이야기를 들어야 했다.
그것이 내 삶을 완전히 바꿔 놓더라도, 또다시 벽을 흔들어 놓더라도, 들어야 했다.
왜냐하면 그것이 내 이야기였고, 어떤 이야기는 페이지를 빠뜨리면 뒷부분을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윽고 어머니의 입술이 열렸다.
하지만 이 빌어먹을 시나리오 안에서, 우리 모자의 이야기는 단지 우리 모자의 것만이 아니었다.
[성운, <베다>가 당신의 운명을 바라봅니다.]
[성운, <올림포스>가 당신의 운명을 바라봅니다.]
[성운, <파피루스>가 당신의 운명을 바라봅니다.]
우리를 위한 신파는, 허락되지 않는다.
성운들의 메시지가 떠오르며, 허공에서 강렬한 스파크가 내리쳤다. 머리를 양손으로 감싼 어머니가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나는 고함을 지르며 내달렸다.
그러나 뻗은 손이 어머니에게 닿으려는 순간, ‘시조의 어머니’의 그림자가 나를 붙잡았다.
[성좌 김독자. 그대는······ 이곳을 지나갈 수 없다.]
쿠구구구구!
[팔주령]에 쩌저적 금이 가더니 이윽고 검은 탁기가 용솟음쳤다.
하늘이 찢어지듯 맹렬한 폭음이 울리더니 천공 전체가 소용돌이처럼 회오리치기 시작했다. 그 회오리의 중심지에서 포탈이 열리고 있었다.
[그레이트 홀].
과도하게 뒤틀린 개연성이, 결국 모든 것을 파멸시킬 존재를 소환하고 말았다.
“모두 쳐다보지 마! 눈 감아요!”
홀 사이로 꿈틀대는 촉수를 발견한 순간 나는 소리쳤다. 성좌인 나나 초월좌인 유중혁이라면 모를까, 평범한 화신들은 저런 존재를 보는 것만으로 정신이 붕괴하고 말 것이다.
“······이계의 신격.”
유중혁도 표정이 굳어졌다.
[그레이트 홀] 너머로 넘실거리는 촉수를 보는 순간, 우리는 확신했다.
저것은 ‘이계의 신격’이다.
무려 ‘시조의 어머니’ 급의 존재가 그림자를 희생해 불러낸 신격.
하늘이 갈라진 자리에서 천둥이 내렸고, 일그러진 시공간이 고통스럽게 비명을 질렀다.
[피스 랜드]때와 비슷했지만, 소환되는 녀석의 급이 달랐다.
지금 소환되고 있는 것은, 이계의 신격의 진체였다.
이 정도 규모라면 적어도 삼 분의 일 가량의 진체가 소환될 것이다.
신격의 진체(眞體).
그것은 그림자 따위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격이다.
“유중혁! 지금 막지 않으면―”
“이미 늦었다. 너나 내가 막을 수 있는 수준을 넘었어.”
그저 하늘을 바라보고 있는 것만으로 전신이 부르르 떨려왔다.
성좌의 격을 갖춘 내가 그 정도였다.
[‘제4의 벽’이 강하게 활성화됩니다!]
‘제4의 벽’ 덕분에 조금씩 떨림은 가라앉았지만, 두려움은 변하지 않았다.
지금 저 [그레이트 홀] 너머에 있는 존재는, 지금의 나와 유중혁이 힘을 합쳐도 이길 수 없는 존재였다.
그 무력감 속에서 나는 깨달았다.
지금부터의 싸움은, 화신들의 몫이 아니라는 것을.
츠츠츠츠츠!
쩌저저저저적!
“끄아아아아아!”
심지어 위인급 배후성을 가진 화신들조차 존재의 일부를 보는 순간 칠공에서 피를 흘리며 절명했다. 나와 유중혁은 웅크린 일행들을 보호하며 물러났다. 저 유중혁조차 눈빛이 어두워지고 있었다. 나는 반발하듯 말했다.
“걱정마. 저런 녀석이 강림했는데, 성좌들이 가만히 있을 리가 없잖아.”
별자리의 연회 때도 그랬듯, 성좌들과 이계의 신격은 서로 사이가 좋지 않다. 시나리오의 균형을 해치는 신격이 진체의 일부로 강림한 마당에, 다른 성좌들이 개입하지 않을 턱이 없었다.
제천대성이라든가, 우리엘이라든가, 조금 못 미덥지만 흑염룡 녀석도······.
쿠구구구!
그러나 진체의 일부가 상당 부분 넘어오도록, 성좌들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유중혁이 짓씹듯 말했다.
“······이번 생은 여기까지인지도 모르겠군.”
나로서도 당황스러운 상황이었다.
이계의 신격이 이곳에 강림했는데, 누구도 우릴 도우러 오지 않는다고?
[일부 성좌들이 이계 신격의 강림에 경악합니다!]
[상당수의 성좌들이 일부 성운들의 횡포에 불만을 표출합니다!]
······뭐?
[성좌, ‘긴고아의 죄수’가 성운 <파피루스>에게 적의를 표출합니다.]
[성좌, ‘심연의 흑염룡’이 성운 <베다>에게 송곳니를 드러냅니다.]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성운 <올림포스>의 만행에 분개합니다!]
그제야 나는 깨달았다.
그렇구나. 이 빌어먹을 상황은.
[한반도의 모든 성좌들이 당신이 어떤 성운을 고를지 궁금해합니다.]
모두 나 때문에 벌어진 일이었다.
그리고 메시지들이 차례로 떠올랐다.
[다수의 성운들이 당신이 자신들의 설화를 계승하길 원합니다.]
[해당 설화를 계승하게 되면, 당신의 존재는 강제로 해당 성운에 귀속됩니다.]
.
.
[성운, <올림포스>가 당신이 ‘번개의 사육제’를 계승하길 원합니다.]
[성운, <베다>가 당신이 ‘뇌전의 인도자’를 계승하길 원합니다.]
[성운, <파피루스>가 당신이 ‘태풍 늑대의 주인’을 계승하길 원합니다.]
.
.
[성운들이 당신에게 마지막 선택을 제안합니다.]
[한반도의 모든 성좌들이 당신의 선택을 지켜봅니다.]
나는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
이래서 나는 성좌들을 좋아할 수가 없다.
번개의 사육제.
뇌전의 인도자.
태풍 늑대의 주인.
모두, 자신의 친인척을 살해하는 역사를 가진 성좌들의 설화였다.
동시에, 각 성운에서도 강력하기로는 손에 꼽는 설화들.
아마 저것을 계승한다면, 나는 성운들의 개연성을 빌어 이계의 신격을 격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어머니는 여기서 죽겠지.
유중혁이 나를 보고 있었다.
어떻게 할 거냐고 묻는 듯한 그 눈빛에, 내가 말했다.
“······유중혁. 우리 성운 만든 거 기억하지? 김독자 컴퍼니.”
단순히, 어머니를 구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성운에 소속되면 모든 것이 끝이다.
지금의 내 격으로는 놈들과의 불공정 계약을 이겨낼 방법이 없고, 그렇게 되면 나는 영원히 이야기의 결말에 도달하지 못한다.
“······아직도 그딴 이름을 쓰고 싶어하는군.”
인상을 찌푸린 유중혁이, 내 곁으로 성큼 다가와 검을 뽑았다.
“성운 이름은 내가 정한다.”
어쩌면, 그것이 유중혁 나름의 농담일지 모른다는 생각에 피식 웃음이 난다. 곁에서 느껴지는 초월좌의 기운. 내 가늠자를 한참이나 뛰어넘은 존재가 앞에 현현되고 있음에도, 이상하게 안심이 되었다.
시나리오가 시작된 후 처음으로, 같은 지평선에 섰다는 느낌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나는 밤하늘의 별들을 향해 선언했다.
“나는 네놈들 따위가 내린 운명에 굴하지 않아.”
그 숨죽인 시선들을 향해, 나는 검을 겨누었다.
“내 이야기는 내가 정한다.”
그러자, 어디선가 웃음소리 같은 것이 들렸다.
마치 하찮은 벌레의 선언을 비웃는 듯한 우주의 속삭임.
―불행한 성좌여.
―너는 네 손으로 아버지를 죽일 것이고.
―어머니를 파멸시킬 것이며.
―소중한 것들의 몰락을 지켜보게 될 것이다.
나는 여전히 강림 중인 이계의 신격을 바라보았다.
저것이 강림을 끝내면, 이 [암흑성] 2층은 완전히 지워질 것이다.
[피스 랜드] 때와는 다른 상황이다.
이곳에는 제자가 위기에 빠졌다고 달려와 줄 새침데기 사부는 없었다.
하지만······.
지금 내 안에는, 나만큼이나 [운명]이라는 말에 진저리를 치는 한 성좌가 함께 있다.
[몇백 년이 지나도 하는 짓이 변하질 않는구나. 씹어 처먹을 새끼들.]
고오오오오!
내 안에 빙의한 척준경이 존재감을 풀어내기 시작했다. 위인급 최강인 척준경이 이계의 신격에 대적할 수 있을지, 거기까지는 나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은 믿는 수밖에 없다.
척준경은 ‘이계의 신격’에 절반쯤 먹힌 ‘시조의 어머니’에게 소리쳤다.
[‘시조의 어머니’시여! 왜 이계의 신격들과 거래한 겁니까?]
깊고 웅혼한 분노가 담긴 목소리였다.
[언제부터, <홍익>이 그토록 싸구려가 되었습니까?]
그러자 놀랍게도, ‘시조의 어머니’가 답했다.
[내가 거래를 한 것은······ ‘이계의 신격’들이······ 아니다.]
[그럼 이 상황은 대체 뭡니까?]
[미안하다. 다른 수가··· 없었다. 한반도의 시나리오를 지키려면······ 이 수밖에 없었다. 저 화신은······ 이곳에 있어야 한다. 저 자는 한반도로 돌아와서는 안 된다. 그렇지 않으면 다른 <성운>들이······.]
[설마, 다른 <성운>들과 거래한 겁니까?]
대로한 척준경이 소리쳤다.
[아직도 그 작은 땅덩이에 집착해서, 이젠 후손마저 배반하는 겁니까?]
[너는 모른다. 너는······.]
[대체 이게 무슨 추태입니까? 창세신들은 모두 어디로 갔습니까! 왜 일이 이 지경이 되도록 그분들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 겁니까?]
[창세신들께서는······.]
그러나 ‘시조의 어머니’의 말은 이어지지 못했다.
다음 순간, 내 안의 척준경이 하늘을 오시하는 것이 느껴졌다.
[설마······?]
밤하늘은 대답하는 대신 다음과 같은 메시지를 보냈다.
[특정 성운들이 누구든 ‘고려제일검’을 돕는 성좌는 앞으로 자신들의 적으로 간주하겠다고 선언합니다.]
그러자 마법처럼, 밤하늘의 간접 메시지들이 고요해졌다.
간간이 우리엘과 제천대성의 목소리가 들렸지만, 그들 역시 이해관계나 특수한 이유 때문에 개입할 수 없는 듯했다.
척준경은, 나의 눈으로 그런 밤하늘을 말없이 응시했다.
그 침묵에 섞인 폭발적인 감정을 나는 고스란히 느낄 수 있었다.
척준경의 격노와 슬픔. 한과 설움. 그리고······ 결단까지.
[너는 자부심을 가져도 좋다.]
척준경이 나를 향해 말했다.
[이 빌어먹을 세계의 가장 높은 곳에 있다는 자들이, 고작 너 하나를 두려워하고 있으니.]
“······이제 죽게 생겼는데 자부심이 무슨 소용입니까.”
[너는 죽지 않는다.]
단지 말뿐이었지만, 성좌에게는 그 ‘말’이 곧 존재였다.
운명을 거스르는 부표를 꽂듯, 척준경이 쌓아온 모든 설화가 내 존재에 뿌리를 내리는 것이 느껴졌다.
[내가 너를 죽게 하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