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5화
175화
······뭐?
나는 들려온 메시지에 깜짝 놀랐다.
지금까지 ‘성좌’에 대한 이해도가 증가한 적은 없었는데?
혹시나 해서 [책갈피]를 열어보았지만, 딱히 척준경의 수식언이 목록에 추가되어 있지는 않았다.
‘아주 미미하게’라는 수사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아마 1%도 안 되는 수치가 올랐다는 거겠지.
그래도 기대감이 생긴다.
이해도가 계속 오르다 보면, 언젠가 성좌들의 기술도 흉내 낼 수 있는 거 아닐까?
“······이게 뭐야?”
한수영의 목소리에 시선을 돌리자, 후폭풍의 전조로 하얗게 물든 하늘이 불온한 기운을 풍기며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백야였다.
간헐적인 굉음이 울려 퍼지며 벌판 전체가 지진파로 흔들렸다.
충돌한 두 군벌이 평원 곳곳에 너부러져 있었다. 하지만 그들을 죽인 것은 서로가 아니었다.
[모두······ 무릎을······ 꿇어라!]
성좌의 진언. 대체 개연성이 얼마나 막장으로 치닫고 있길래 저런 게 막 들려오는 걸까.
격을 감당하지 못한 다수의 화신들이 고통 속에 몸부림치고 있었다.
하지만 배후성의 가호를 받는 자들, 그리고 강대한 정신력의 소유자들은 굴하지 않았다. 한수영도 그중 하나였다.
“뭐야! 뭔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건데!”
한수영이 답답하다는 듯 외쳤다.
나도, 그녀와 함께 벌판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럴 수도 있다고 생각은 했다.
하지만 이건 너무하지 않은가.
“······개판이네. 지금 다 같이 죽자는 건가?”
동조율을 한계치까지 올린 화신들이 하나둘이 아니었다.
[암흑성] 시나리오가 감당할 수 있는 개연성이 한계치까지 소진되고 있었고, 폭죽이라도 쏘아 올리듯 튀어오르는 후폭풍의 스파크들이 전장 곳곳에서 난무하고 있었다.
―김독자, 듣는 티내지 말고 잘 들어. 이대로라면 넌 죽어.
어디선가 들려오는 비형의 목소리를 들으며, 나는 폐허가 된 전장을 바라보았다.
―‘운명’으로부터 벗어날 방법은 하나뿐이야. 너를 보호해 줄 세력을 찾아. 그렇지 않으면······!
치이잇, 하는 소리와 함께 비형의 목소리가 끊어졌다.
누군가가 비형의 목소리마저 차단하고 있는 것이다.
동시에, 내게 수백 명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위인급은 물론이고 일부 설화급 성좌들까지, 화신과의 동조율을 극대화한 존재들이 나를 노리고 있었다.
찌릿찌릿한 공기를 느끼며, 나는 침을 삼켰다.
척준경이 처음으로 말했다.
[두려운 모양이군.]
“아뇨. 오히려 재밌어졌습니다.”
진심이었다.
[다수의 성좌들이 당신을 바라봅니다!]
[일부 성좌들이 당신의 이름을 연호합니다!]
[연호 보너스로 2000코인을 획득하였습니다.]
척준경이 다시 한번 말했다.
[운명의 벽은 높다.]
“높다 한들 벽이죠. 여차하면 부수면 되고.”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그리하여, 나를 죽일 존재가 누구인지.
그런 건 모른다.
하지만 내가 내 [운명]을 모르듯, 놈들도 나를 모르는 것은 마찬가지다.
“갑시다.”
나는 전장을 질주했다. 이번에는 힘을 숨기지 않았다.
“5번 책갈피, ‘키리오스 로드그라임’을 선택하겠다.”
책갈피의 발동과 동시에 나는 [전인화]와 [소형화]를 발동했다.
[귀환자의 기술이라. 재미있군.]
척준경의 힘으로 전장을 쓸어버릴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남발해서는 안 된다. 겨우 삼검식 중 일 검을 사용한 것만으로도, 오른팔이 거의 넝마가 되어버렸으니까.
나는 [도깨비 보따리]에서 구입한 최상급 체력 회복약을 마구 뿌려대며 전장을 내달렸다.
“모두 비켜!”
내가 지나간 곳에 백청의 궤적이 그려졌다.
귀환자 키리오스의 힘.
성좌의 격에 다다라 10레벨을 돌파한 전인화의 힘이 <무저갱 평원>의 전장을 희고 푸른 궤적으로 갈라 놓았다.
“으아아아악! 뭐야!”
마치 해일이 두 쪽으로 갈라지듯이, 서로 엉겨 붙어 싸우던 화신들이 비명을 지르며 흩어졌다.
“뭐 때문에 싸우는 건진 모르겠지만, 이쯤들 하시죠.”
아홉 번째 시나리오를 해결하기 위해 랭킹을 올리는 건 좋지만, 이런 식으로 서로 소모전이 벌어져서는 좋을 게 없었다.
“가, 가장 못생긴 왕이다!”
“죽었다고 들었는데!”
화신들 중에는 나를 기억하는 자들도 있었다.
“누군지 알았으면, 대충 상황 파악들 되셨죠?”
몇몇 화신들이 무기를 놓고 물러났고, 전의가 꺾인 이들은 뒷걸음질을 쳤다. 눈을 빛내며 나를 보는 자들도 있었다.
[상당수의 화신이 당신에게 경의를 품고 있습니다.]
“여덟 번째 시나리오 때는 감사했습니다. 부활하셨다는 소문이 진짜였군요.”
‘최강의 희생양’ 때 내가 희생했다는 사실을 떠올린 자들도 있었다.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 주자, 그들은 기꺼이 읍을 하며 물러났다.
[당신의 부활 설화가 널리 퍼집니다.]
[당신의 다섯 번째 설화에 ‘중재하는 메시아’의 업적이 추가됩니다.]
아무래도 이쪽은 <낙원>에서 온 세력들인 것 같은데.
아마 이들 중에는 유중혁과 일행들도 포함되어 있겠지.
그렇다면, 반대쪽은······?
“흘흘. 다시 만났구만 젊은이. 그 ‘진법’을 대체 어떻게 빠져나온 거지?”
역시, 이쪽이 ‘방랑자들’이었구나.
나는 걸어오는 이복순을 향해 물었다.
“왜 서로 싸우고 있는 겁니까?”
“왜긴, 너 때문이지.”
이복순.
하얼빈의 저격수를 배후성으로 가졌던 할머니.
“너는 다음 시나리오로 가서는 안 된다.”
“······어머니가 그렇게 말하던가요?”
이복순은 대답하지 않고 달려들었다.
[노강자] 스킬을 통해 근육의 부피가 급격하게 증강한 할머니는, 주변의 화신들을 전차처럼 밀어붙이며 삽시간에 이쪽을 향해 다가왔다.
[성좌 ‘고려제일검’의 가호로 30분 동안 모든 능력치가 10만큼 상승합니다.]
[당신의 모든 능력치가 일시적으로 인간의 한계를 초월합니다.]
나는 노인을 공경하는 편이라 말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의 예의범절은 지키는 편이었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예외다.
“죄송하지만, 이번엔 안 봐드립니다 할머니.”
‘하얼빈의 저격수’는 특정 성좌에게만 강력하게 반응하는 배후성.
즉, 지금의 공격은 오롯이 이복순 개인이 쌓은 설화의 힘이다.
그렇다면 내가 밀릴 리 없다.
[전인화]에 모든 능력치가 100을 돌파하자, 어마어마한 괴력이 내 전신에서 뿜어져 나왔다.
꽈아아아앙!
내 주먹과 부딪친 이복순이 피를 토하며 허공을 날았다.
“김독자를 막아!”
방랑자들의 세력은 내 예상을 뛰어넘었다.
이 정도나 되는 규모를 가지고서 니르바나의 ‘구원교’에 패퇴했었다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그런데 잘 보니, 방랑자들 사이에 이상한 것들도 섞여 있었다.
그르르르!
탁기에 오염되어 마인으로 변한 인간들. 불행인지 다행인지, 나는 저 설화를 알고 있었다. 한수영도 짓씹듯 중얼거렸다.
“빌어먹을, 누가 랭킹 3위의 설화를 얻었나 보네.”
암흑성 랭킹 3위. ‘망자들의 왕’ 데이비츠.
아무래도 방랑자들의 세력 쪽에 그 데이비츠를 해치운 존재가 있는 듯했다. [망자들의 왕]은 전장에서라면 [절망의 낙원] 못지않게 강력한 힘을 발휘하는 설화다.
[망자들의 왕]은 죽은 존재를 언데드로 만들어 싸우게 만들기 때문이다.
“달려 김독자! 여긴 내가 뚫는다!”
열댓 개로 증식한 한수영의 아바타가, 동시에 오른손의 붕대를 풀었다.
녀석의 손에 집약된 검은 에테르는 이내 새카맣게 타오르는 불길로 뒤바뀌어 전장을 휩쓸었다.
화르르르르륵!
나는 한수영이 만든 길을 따라 그대로 달렸다.
마인들의 무리를 제치고, 달려드는 방랑자들 몇을 떨쳐 냈다.
곧 [망자들의 왕]을 사용 중인 조영란의 모습이 보였다.
역시 이 여자가 설화의 주체였나.
조선제일술사에, 기문진법에, [망자들의 왕]까지.
어머니는 정말 다재다능한 수하를 두었다.
있는 대로 마력 회복 물약을 들이켜며 전투에 임하던 그녀는 내 모습을 보더니 깜짝 놀랐다.
“김독자? 어떻게 기문 진법을······. 게다가 [팔주령]의 봉인까지 걸려 있었을 텐데!”
“고생 좀 했죠.”
이를 꾹 깨문 조영란이 이내 마력을 집약하여 도술을 준비했다.
아마 현재 암흑성 랭킹 3위는 이 사람인 모양이다.
“그만 물러서세요. 해치고 싶지 않으니까.”
“그럴 수는 없······!”
다시금 기문진법을 사용하려는 기미가 보여서, 나는 결국 숨겨뒀던 기운을 발출했다. 그러자 묶여 있던 척준경의 격이 한꺼번에 풀려 나왔다.
[성좌, ‘조선제일술사’가 크게 당황합니다.]
기문진법의 도술이 한꺼번에 깨져 나가며, 조영란의 입에서 피거품이 울컥 쏟아졌다. 그녀의 등 뒤에서 스파크가 튀더니 이내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 이 기운은······! 당신이 왜 그곳에 있는 거요!]
급기야, 전우치조차 진언을 쏟아냈다.
그러자 척준경이 대답했다.
[꺼져라.]
[하, 하지만 당신은 그 자의 배후성도 아닌······!]
[두 번 말하지 않겠다.]
[큭······.]
강력한 격의 차이에 짓눌린 전우치가 순식간에 모습을 감추었다.
배후성과의 동조가 해제되자 개연성의 여파를 감당할 수 없게 된 조영란이 비틀거렸다.
그녀가 [망자들의 왕]을 유지할 수 없게 되자, 전장의 균형도 덩달아 무너지기 시작했다.
“아, 안돼. 안된다 김독자!”
나는 조영란을 무시하고 달렸다.
척준경의 가호가 있으니 쏟아지는 공격도 두렵지 않았다. 종합 능력치 세 자리와 두 자리의 차이는 이토록 크다.
5분 정도를 내리 달리자, 마침내 전장의 중심지가 드러났다. 이 전장에서 가장 강력한 스파크를 터뜨리고 있는 장소.
한밤임에도 개연성의 전조로 인해 백야가 찾아온 벌판에서, 내가 아는 사람들이 서로를 향해 칼을 겨누고 있었다.
분신에게 뒤를 맡겨놓고 달려온 한수영이 입을 벌렸다.
“······너네 엄마 괴물이네.”
나도 놀랐다.
설마, 어머니가 저 정도일 줄이야.
분명 아는 정보는 내가 더 많을 텐데······.
쿠구구구구!
츠츠츠츠츳!
어머니는 유중혁과 내 다른 동료들의 공격 속에서도 그들과 대등한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초월좌를 상대로 저만한 전투를 보일 수 있는 화신은, 내가 알기로 존재하지 않는다. 어머니의 등 뒤에서 거대한 곰의 그림자가 일렁이고 있었다.
[가엾은 후손들이여······ 나는 싸움을 원하지 않는다······.]
언젠가 [피스 랜드]에서, ‘야마타노 오로치’가 저와 같은 형태로 강림한 것을 본 적이 있었다.
‘시조의 어머니’는 내 어머니에게 자신의 그림자를 강림시킨 것이었다.
한수영은 [피스 랜드]의 악몽이 떠오르는지 고개를 가로저었다.
“어떻게 저런······ 개연성이 부족할 텐데?”
“팔주령 때문이야.”
어머니의 손에서 환하게 빛나는 천부삼인 [팔주령].
부족한 개연성을 저 강력한 성유물이 대체하고 있는 것이다.
“싸우기 싫다면서 자꾸 때리는 건 뭔데! 으아앗!”
거대한 곰의 그림자가 한바탕 벌판을 휩쓸자 이지혜와 이현성의 신형이 밖으로 튕겨 나갔다. 정통으로 맞아서는 제대로 서 있을 수조차 없는 파괴력. 잘못 달려들었다간 낭패만 볼 상황이었다.
“독자 씨!”
유상아가 제일 먼저 나를 알아보았고, 다른 일행들도 반색하며 내 곁으로 다가왔다. 정희원이 먼저 소리쳤다.
“독자 씨 어머님이랑 대화 좀 해봐요!”
“형, 저 사람 진짜 형네 엄마에요? 유승이가 아까······.”
“독자 씨, 이대로 가다가는······!”
한 사람씩 말해도 모자랄 판에 한꺼번에 대화가 쏟아지니 대답할 겨를이 없었다. 마지막으로 유중혁이 다가왔다.
“너희 어머니께서 내가 마음에 안 드시는 모양이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