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4화
174화
그 시각, 비형은 서울 관리국의 지부에 있었다.
서울 돔의 해방 시나리오가 눈앞에 다가온 시기. 돔 내의 모든 도깨비들은 시나리오의 마무리를 짓기 위해 분주한 상태였다.
관리국의 복도를 거닐며, 비형은 새로 영입된 하급 도깨비들이 교관을 따라 줄지어 움직이는 것을 보았다.
새로 태어난 도깨비들.
그들은 지부의 교육센터에서 기초 교육을 이수하고, 자신만의 채널을 할당받아 이야기꾼으로 거듭난다.
“성좌들의 흥미가 떨어질 때는 개입을 망설이지 마라. 정해진 메인 시나리오에는 직접 개입이 불가하니, 서브 시나리오를 통해 인물들의 갈등 양상을 격화시키거나 상황을 위험하게 조성하라.”
“인물 갈등은 성좌들이 짜증 날 상황을 만들면 안 된다. 나쁜 놈은 나쁜 놈으로, 착한 놈은 착한 놈으로. 이분법을 확실히 하라. 그래야 성좌들이 분노를 풀어낼 대상을 쉽게 정할 수 있다.”
“항상 화신들이 사건의 진행 도중에 있도록 유도해라. 단, 메인이 될 화신을 눈여겨보고 그 화신을 중심으로 사건이 움직이게 만들어라. 단, 지나치게 작위적인 느낌을 주어서는 안 된다.”
교관의 지침들이 들려왔고, 하급 도깨비들은 그것을 메모하기 바빴다.
비형 또한 한때는 저들 중의 하나였다.
저렇게 시나리오의 진행 방법을 공부했고, 웃는 법과 말투 따위를 교육받았다.
너무 낯설지도, 너무 진부하지도 않게.
시나리오 진행에 절대 방해되지 않을 이야기꾼이 되기 위하여.
“옛날 생각이 나는가?”
곁을 돌아보자, 서울 지부의 지부장인 상급 도깨비 바람이 서 있었다.
비형은 긴장하며 표정을 바꾸었다.
바람은 하급 도깨비들 쪽을 바라보며 턱수염을 쓰다듬었다.
“끔찍한 광경이야. 매번 성좌들에게 사이다패스니 어쩌니 하는 소리를 잘도 지껄이면서도, 정작 도깨비들이 정규 교육에서 이수 받는 것은 저런 내용이라니.”
“상급 도깨비께서 말씀하시기엔 다소 부적절한 데가 있는 발언이군요.”
그 지침을 만든 게 당신이잖아.
비형은 속으로 그런 말을 삼켰다.
바람이 쓴웃음을 지었다.
“어쩔 수 없지. 그래도 아직은 저런 시나리오가 잘 팔리거든.”
“예외도 있을 텐데요.”
“있기야 하지. 하지만 그 ‘예외’가 성립하는 것도 저런 평범한 시나리오들이 버젓이 욕을 먹으며 존재하기 때문일세.”
몇몇 하급 도깨비들은 스크린 앞에 모여 서울 돔에서 진행되고 있는 시나리오를 살피고 있었다. 스크린에서는 서울 돔에서 가장 큰 채널에 소속된 화신들의 이야기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비형은 얼굴이 조금 뜨거워졌다.
―그렇다면 죽이는 수밖에 없겠군.
―유중혁 씨! 안돼요!
전장의 한쪽에서는 유중혁과 이수경이 암흑성 2층에서 대치를 벌이고 있었고.
―젠장, ■■에서는 이런 ■■■ 안 나오지 않냐?
―나와. 네가 모를 뿐이지.
다른 한쪽에서는 기문진법에 갇힌 김독자와 한수영이 알 수 없는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비형은 속으로 침음했다.
‘내가 필터링 되는 정보는 대놓고 말하지 말라고 그렇게나 경고했는데, 젠장.’
상급 도깨비 바람이 말했다.
“요즘 자네 채널이 인기가 많더군. 서울 지부에서는 어딜가나 모두 자네 채널 이야기뿐이야. 특히 저 화신······.”
“욕도 많이 먹습니다.”
“저 정도면 양호한 거지. 어쨌든 궁금증을 유발하고 있지 않은가. 요즘 하급 도깨비들이 존경하는 도깨비 1위가 자네라는 걸 알고 있나?”
“그것보다 저를 부르신 이유를 알고 싶습니다만.”
다소 무례하게 보일 수 있는 언행이었지만, 비형으로서는 달리 방도가 없었다. 지금 당장 채널로 돌아가지 않으면 곤란한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바람이 말이 없자, 비형이 다시 한번 채근했다.
“죄송합니다만, 지금 아홉 번째 시나리오가 마지막 국면으로 접어들고 있습니다. 슬슬 채널로 다시 돌아가 봐야······.”
“바로 그것 때문에 자넬 부른 걸세.”
진지한 바람의 표정을 마주하고서야, 비형은 뭔가 일이 잘못되어 간다는 것을 깨달았다.
―쿠구구구구!
스크린 속에서 폭음이 울려 퍼지며, 본격적인 혈투가 시작되었다.
강력한 배후성을 지닌 화신들이 대거 전투에 참전하며, 무분별하게 동조율을 올려대고 있었다. 곳곳에서 개연성 후폭풍의 전조가 보이기 시작했다.
저만한 강도의 전조가 지속된다면, 분명 이계의 신격들이 개입할 당위를 얻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김독자의 안위도 보장할 수 없게 된다.
마음이 급해진 비형이 자리를 뜨려는 순간, 바람이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성좌들이 자네의 개입을 원치 않네.”
현재 비형의 채널은 서울 돔에서 가장 영향력이 크다.
그런데 그런 비형을 서울 지부에 잡아두었다는 건, 이야기하는 바가 매우 명약관화했다.
“서울 지부가 언제부터 성좌들 눈치를 봤습니까?”
“늘 보고 있지. 하급 도깨비 교육 지침만 봐도 알지 않나.”
“그건 표면상으로 그런 것 아닙니까? 주요 시나리오 정책에서는······!”
“다수의 성운들이 이번 시나리오에 불만을 갖고 있네.”
다수의 성운.
비형은 그들이 누구를 가리키는 건지 바로 알았다.
<올림포스>.
<베다>.
<파피루스>.
······.
<스타 스트림>에서 커다란 영향력을 가진 성운들이, 이번 시나리오의 진행에 간섭하고 있었다.
왜?
사실, 비형도 이유는 알고 있었다.
“저 화신 때문이지.”
아무것도 모르는 김독자는, 여전히 한수영과 기문진법 안에서 실랑이를 벌이고 있었다.
“고작해야 화신 하나입니다. 시나리오 전체엔 영향을 줄 수 없습니다.”
“고작해야 화신 하나······ 정말, 그렇게 생각하는가?”
“······.”
“아니, 이젠 화신도 아니지.”
열 번째 시나리오가 끝나기도 전에, 배후성이 없는 화신이 성좌가 되었다. <스타 스트림> 시나리오의 난이도를 고려하면 있을 수가 없는 일이었다.
“저 녀석은 괴물이 될 걸세. ‘고려제일검’ 사태를 잊은 건 아니겠지? 그런 규격 외의 존재가 또다시 나타나서는 곤란해.”
고려제일검 척준경.
한반도 최강의 위인급 성좌가 나타난 사건.
비형 또한 그 당시의 일에 관해 알고 있었다.
시나리오 균형에 맞지 않는 천부적인 재능 때문에 수많은 원성을 샀던 존재. 막대한 개연성 손실을 감수하고 시나리오에서 ‘배제’했더니, 오히려 엉뚱한 차원에서 살아 돌아와 스스로 ‘성좌’가 된 존재.
“고려제일검은 특별한 경우였습니다. 성좌 김독자는 그자보다 더 빠른 속도로 성좌가 되긴 했지만, 잠재력 자체는 높지 않습니다. 잠재력이라면 벌써 초월좌에 오른 유중혁이라는 화신이······.”
“알고 있네. 그쪽도 심상치는 않지. 사실 고려제일검과 더 비슷한 것은 유중혁 쪽이니까. 하지만, 그렇기에 김독자가 더 위험한 걸세.”
비형은 답답한 마음에 소리쳤다.
“성좌들이 가지는 불만이야 어느 정도 이해하고 있습니다. 김독자가 자기 세력에 들어오지 않으니 짜증들이 났겠죠.”
“······.”
“하지만 자기들 딴에 이미 조치를 내린 상황이 아닙니까? 10번 시나리오가 채 지나기도 전에 [운명]을 사용하는 경우가 어디 있습니까?”
“그 화신을 옹호하는군.”
“옹호가 아닙니다! 시나리오의 불공정한 처우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는 겁니다!”
“자네도 그런 말을 할 처지는 아닐 텐데.”
비형은 흠칫 놀랐으나 애써 태연한 척했다.
상급 도깨비 바람이 웃으며 손사래를 쳤다.
“됐네. 애초에 허물을 잡을 생각으로 부른 건 아니니까.”
그 말은 곧, 허물을 잡을 생각이라면 얼마든지 잡을 수 있다는 협박처럼 들리기도 했다. 비형이 머뭇거리다 물었다.
“그럼 왜······.”
“똑똑한 자네라면 알 텐데. 애초에 이상하다는 생각은 해본 적 없나? 왜 성좌들이 벌써 [운명]이라는 과도한 조치를 시행했는지.”
“······.”
“[운명]을 사용할 것도 없이, 사실 대부분의 경우라면 예언자들과의 거래를 통해 [미래시]로 시나리오 경과를 엿보면 되네. 그리고 대상이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를 예측해서, 적당히 개연성 눈치를 보면서 야금야금 미래를 바꿔 나가면 되지. 그런데 이번에는 그렇게 하지 않았어. 왜 그럴까?”
비형도 미처 생각해 본 적이 없는 부분이었다.
미래를 강제하는 힘인 [운명]은 그만큼 성운들에게도 큰 부담을 준다.
김독자를 제외하고도 강력한 화신들은 많다.
그런데 왜 김독자만이 [운명]을 강제당한 것일까.
“설마······?”
성운들이 [운명]을 발호했다면, 어쩌면 그것은 [운명]을 발호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는 뜻. 즉, 그것은······.
상급 도깨비 바람이 고개를 끄덕였다.
“<스타 스트림>의 누구도, 성좌 김독자의 미래를 볼 수 없었다는 뜻이겠지.”
“······어떻게 그럴 수가 있습니까?”
“나도 모르지. 확실한 것은, 많은 성좌들이 김독자가 ■■에 도달할까봐 두려워하고 있다는 것이야. 흠, 아직 이건 필터링이군. 그러니까······ 이 모든 것의 ‘마지막’에 말이지.”
바람은 그 말을 마지막으로 스크린에 시선을 고정했다.
“자네가 해야 할 일이 있네. 만약 이번 일이 끝나면, 자네를 상급 도깨비 심사위에 추천하겠네.”
무려 상급 도깨비 진급 심사가 걸린 일.
벌써부터 바람이 시킬 일이 무엇인지 짐작이 가기 시작했다.
착잡한 눈으로 화면을 보던 비형은 자기도 모르게 품속의 알을 매만졌다.
*
“야, 잘 좀 해봐.”
“알았어.”
종전의 흑염룡 사건 때문인지, 한수영과의 분위기는 조금 미묘해졌다.
아마 한수영이 계속 쓸데없는 시비를 걸어대는 것도, 본인 역시 이 어색한 기류를 자각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성좌, ‘심연의 흑염룡’이 흐뭇한 미소를 짓습니다.]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이 분위기를 싫어합니다.]
척준경의 힘을 소화하는 데는 내 생각보다도 훨씬 오랜 시간이 걸렸다.
벌써 네 시간 째.
나는 설화의 힘을 컨트롤하는 것만으로 진땀을 빼고 있었다.
아마 지금쯤 어머니는 유중혁과 만났을 것이다.
바닥의 쑥을 야금야금 뜯어 먹어보던 한수영이 말했다.
“근데 네 엄마, 내가 보기엔 그렇게 나쁜 사람 같진 않던데.”
“······갑자기 뭔 개풀 뜯어 먹는 소리야?”
“그냥, 둘이 보니까 사이 별로 안 좋은 거 같아서. 뭐, 내가 남의 가정사에 참견할 건 아니다만······ 어쨌든 자식을 챙기긴 하는 거잖아.”
“챙기는 것도 종류가 있지.”
“세상에는 자식한테 아무 관심도 없는 부모들도 많아.”
한수영의 목소리는 무심했기에 더 어둡게 들렸다.
나는 뭐라 쏘아붙여 주려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안 그래도 엄마가 네 얘기 하더라. 너랑 사귀는 줄 아나 보던데.”
한수영이 킥킥 웃었다.
“어머니께서 여자 보는 눈 좀 있으시네.”
“근데 너보단 유상아 씨가 더 낫다더라.”
“······그래서 그 아줌마 언제 죽일 건데?”
우리는 마주 보며 피식 웃었다.
새삼 한수영의 캐릭터가 얼마나 확실한지 깨닫게 된다.
요즘은 이 녀석이 다른 사람보다 더 등장인물 같다.
킥킥대던 한수영이 웃음을 그쳤다.
“이렇게 말하고 있으니 우리도 꼭 등장인물 같네.”
마치 내 속을 읽은 듯한 그 말에, 왜인지 가슴 한구석이 선뜩했다.
한수영은 모르겠지만, 그녀는 실제로 언젠가 ‘등장인물’이 될 것이다.
이성국이 그랬고, 정민섭이 그랬던 것처럼.
나는 등장인물인 사람도, 아닌 사람도 좋아하기에 그게 나쁜 일인지 좋은 일인지는 잘 모르겠다. 다만······ 그때를 생각하면, 나도 잘 알 수 없는 기분이 된다.
왜 나는, 이 녀석이 ‘등장인물’이 되지 않기를 바라는 것일까.
“어? 뭔가 변했는데?”
한수영의 말에 나는 오른손을 내려다보았다. 척준경이 빌려준 설화의 힘이 드디어 안정세에 접어들고 있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준비해. 탈출할 거니까.”
나는 힘이 흐트러지지 않게 조절하며 [부러지지 않는 신념]을 뽑았다.
척준경의 설화를 빌리는 순간, 머릿속에서 그가 살아왔던 궤적이 파노라마처럼 흘러갔다.
「일검에 천 명을 베고.」
「이검에 태산을 베며.」
「삼검에 바다를 가른다.」
그것은 척준경의 삼검식(三劍式)이었다.
살아생전 같은 상대에게 세 번 이상 검을 휘둘러 본 적이 없다 하여 붙여진 기술명.
[당신이 감당할 수 없는 격이 오른팔에 깃듭니다.]
기이이이잉!
[팔주령]이 건 백일봉인에 순식간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내게 빙의한 척준경의 격이 효과를 발휘한 것이었다.
겨우 팔주령 하나만 가지고 만든 불완전한 봉인으로는, 결코 척준경의 힘을 억제할 수 없다.
진짜 백일봉인은 천부삼인 세 개를 다 모은 후에야 효력을 지니니까.
[폭발적인 설화의 흐름이 ‘기문진법’의 공간을 일그러뜨립니다.]
꽈드드드득!
[폭발적인 설화의 흐름이 ‘백일봉인’의 주박을 깨트립니다.]
나는 넘실거리듯 솟아오른 백청강기를 그대로 허공에 쏟아부었다.
제 일식, 일검참천(一劍斬千).
유성우처럼 궤적이 허공을 갈랐고, 그 사이의 공간이 통째로 갈라졌다.
기문진법도, 봉인도.
허상조차 베는 압도적인 파괴 앞에서는 모든 것이 무의미했다.
수만 년에 한 명 나올까 말까 한 위대한 천재가 평생에 걸쳐 쌓아 올린 검술. 오직 파괴만을 위해 만들어진 가장 이상적인 베기.
완전한 힘의 진체를 본 것도 아닐진대, 오래전 근력 100을 달성했을 때와는 또 다른 해방감이 차올랐다.
이것이, 별들이 가진 힘이었다.
일거에 무너지는 진법 속에 현실의 풍경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완전히 미쳐버린 검술이다.
키리오스의 [전인화]를 얻었을 때만큼이나 욕심이 난다.
이걸 내 것으로 만들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책갈피’가 ‘등장인물’에게만 적용된다는 것이 이렇게 아쉬울 데가 없다.
[격의 상승으로 인해 ‘책갈피’ 스킬의 업데이트가 진행됩니다.]
[새로운 기능이 활성화되었습니다.]
······어?
[등장성좌, ‘고려제일검’에 대한 이해도가 아주 미미하게 증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