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8화

168화 아직 이름이 없는 한 성좌. 그게 누구를 가리키는 말인지, 신유승은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아저씨.’ 단지 시선 뿐이었지만, 사실 많은 인간은 중요한 순간 그 한 사람의 ‘시선’이 없어서 죽는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의 신유승은 운이 좋은 편이었다. [아직 이름이 없는 한 성좌가 고개를 끄덕입니다.] 세상에서 오직 한 사람에게만 주어지는 그 시선을 받으며, 신유승은 다시 발을 내딛었다. 할 수 있다. 다리는 마비되었고, 입술은 말을 듣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그런 확신이 들었다. 한 걸음, 또 한 걸음. 이윽고 아이의 작은 손이 괴물의 외피에 닿았다. 외피에 나 있는 아주 작은 상처들. 깜짝 놀란 괴물이 눈을 크게 떴다. 그제야 신유승은 이 괴물을 똑바로 바라볼 수 있었다. 오히려 시선을 피한 것은 괴물 쪽이었다. “날 똑바로 봐.” 자세히 보니, 상처는 하나가 아니었다. 외피를 덮은 무수한 상처들이, 괴수의 전신을 덮고 있었다. 그르르르르······. 괴물이, 작게 울었다. 아마 지금껏 누구도 보아주지 않은 상처였다. 오랜 세월에 거쳐 만들어진 상처들. 이 상처들이야 말로, 이 괴물의 존재 그 자체였다. 이 상처로 인해 괴물은 강해졌고, 이 상처로 인해 괴물은 외로워졌다. 마치 그 고통을 생생하게 느끼는 것처럼, 신유승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상처받았다고 해서, 괴물이 되면 안 돼.” 신유승은 괴물의 상처를 천천히 매만졌다. 아무리 오랜 시간을 들여도 치유 받을 수 없는 상처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포기해도 된다는 뜻은 아니었다. 기적이란 있다. 마치 김독자가, 41회차의 신유승을 구했던 것처럼. 치유받을 수 없는 사람도, 구원받을 수는 있다. 신유승은 괴물의 전신을 내리 누르는 [영구기관]의 뿌리를 보았다. 아마도, 이 괴물은 평생을 이곳에 묶여 지냈으리라. 품속을 뒤진 신유승의 손에 금빛 열매가 쥐어져 있었다. [고대 야수의 열매.] 언젠가 김독자에게 받은 [랜덤 박스]에서 나온 SSS급 아이템. [길들이기]가 불가능한 상급종 괴수를 길들일 때 사용할 수 있는 소모성 아이템이 바로 그것이었다. 천천히 고개를 숙이는 괴물을 향해, 신유승이 말했다. “같이 나가자.” * 마치 <낙원> 전체가 움지럭대는 듯한 지진파에, 당황한 라인하이트가 소리쳤다. [큭, 크헉, 이, 이게 무슨······!] 갑작스레 붕괴하는 [영구기관]. 식물의 가지와 잎이 조금씩 시들기 시작했다. 공급되던 에너지가 애먼 곳으로 빠져 나가고 있었다. 뭔가가 잘못되어 간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는, 이미 말라 비틀어진 줄기가 허공에서 부서지고 있었다. [크어어어억! 어, 어째서? 어째서 네가······!] 라인하이트가 진액을 토했다. 마치 피를 토하는 듯 꿀렁대며 쏟아지는 진액. 콰지지직! 콰지지직! 무언가가, [영구기관]의 밑동을 파먹고 있었다. 단단한 뿌리를 파고드는 그 섬뜩한 이빨에, 라인하이트는 본인의 신체가 뜯기기라도 하는 듯 비명을 질러댔다. 오래도록 <낙원>의 뿌리에 묶여 있던 존재가, 이제 그 뿌리의 중추를 사정없이 파괴하고 있었다. 쿠구구구구! 이윽고 힘을 잃은 [영구기관]이, 허공에서 무너지기 시작했다. [아, 안 돼. 안 된다······!] 폭발한 지하에서 거대한 뭔가가 솟구쳤다. 아직 세상에 나온 적이 없었기에 등급조차 없는 존재. 거대한 용의 몸체와 악마의 날개, 그리고 곤충의 겹눈을 가진 괴물. 악마종과 충왕종, 그리고 괴수종의 교배로 진화한 궁극의 괴물이 허공을 찢고 날아오르고 있었다. <낙원>의 모든 존재가 그 기적을 보았고, 유중혁 또한 그 중의 하나였다. “······키메라 드래곤.” 저것이야 말로, 이 <낙원>이 만들어 낸 진짜 괴물이었다. 지금은 2급에 육박하는 힘이지만, 그 잠재력은 1급종을 넘어서는 괴수. 밑바닥에서 출발했음에도 최강의 괴수종인 용족(龍族)마저 위협할 수 있는 괴물. 그리고 그 괴물의 등 위에 코피를 질질 흘리는 신유승과 이길영이 타고 있었다. 정희원이 기쁨에 들떠 외쳤다. “유승아! 길영아!” 두 맹랑한 꼬마가, 결국 해낸 것이었다. 크롸라라라라―! 키메라 드래곤의 포효에 <낙원>의 모든 괴수들이 일제히 물러나고 있었다. 다시 지하로 들어가는 녀석들도 있었고, 놀라 그 자리에서 숨이 끊어지는 녀석들도 있었으며, 허겁지겁 흉벽을 넘어 탈출하는 놈들도 보였다. 그 난장판 속에서, [영구기관]에서 분리된 라인하이트가 비틀거리며 달아나는 모습이 보였다. 유중혁은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스가각! [파천검도]의 궤적이 움직였고, 힘이 다한 라인하이트는 그 검을 피하지 못하고 그대로 꿰뚫렸다. “으······ 으으······ 크허헉······.” 검은 피가 그의 입에서 쏟아졌다. 아무리 그가 강력한 악마라 해도, 심장이 꿰뚫린 상태에서 살아남을 수는 없었다. 라인하이트는 서서히 무너졌고, 유중혁을 비롯한 일행들이 그를 향해 다가갔다. <낙원>의 주인이 죽어가며 말했다. “하, 하하······ 그 모든 것이······ 결국은 위대한 격들의 작은 유희에 지나지 않는가······.” 유중혁은 피를 쏟으며 중얼거리는 라인하이트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영구기관]이 사라진 하늘을 보며, 라인하이트가 짧은 숨을 토했다. “믿지 않겠지만, 나는······ 그저 좋은 세상을 만들고 싶었소.” 그 말을 들은 몇몇 사람들이 고함을 질렀다. 모두, <낙원>의 보호를 받던 사람들이었다. 위선자라고 욕하는 자들도 있었고, 당장 라인하이트를 죽여야 한다며 소리치는 자들도 있었다. 이제 <낙원>의 비밀을 알게 된 그들은, 더 이상 라인하이트를 비호하지 않게 된 것이다. 그러나 그들 중 누구도 움직이지 못했다. 왜냐하면, 유중혁이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에. 라인하이트의 눈시울에서 피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나는, 나는 정말로······.” “안다.” 그 단답형의 말에, 라인하이트가 눈을 천천히 끔뻑였다. 유중혁이 다시 한 번 말했다. “모두, 알고 있다.” 알고 있다니. 자신이 살아온 그 삶이 이렇게나 쉽게 긍정되는 것을 보며, 라인하이트가 허탈한 웃음을 터뜨렸다. “이상하군. 어째서······ 정말로 이해 받는 기분이 드는 것인지······.” 유중혁은 말없이 그런 라인하이트를 내려다보았다. 비록 이번 회차는 아니라 한들, 유중혁 또한 라인하이트의 뜻에 동조했던 적이 있었다. 함께 <낙원>을 키우고, <낙원>을 멸망시켰던 기억이, 분명하게 남아 있었다. 마치 그 감정에 보답하듯, 라인하이트가 힘겹게 말을 이었다. “당신들은······ 다음 층으로 갈 생각이겠지?” 다음 층. 그곳은, 이 [암흑성]의 마지막 시나리오가 있는 곳. “당신들은······ 원하는 것을 찾을 수 없을 거야. 이 성은, 그저 성좌들의 놀이터에 불과하니까. 그러니까 조심해. 다음 층엔······.” 그 순간 츠츠츠츳― 하는 소리와 함께 라인하이트의 육체가 폭발했다. 유중혁이 고요히 허공을 노려보자, 도깨비들이 빙글빙글 웃고 있었다. [어허, 미리니름은 금지예요.] [맞아맞아. 그건 재미 없다고.] 그리고 기다렸다는 듯, 성좌들의 메시지가 별빛처럼 쏟아졌다. [다수의 성좌들이 화신 ‘유중혁’의 활약에 감탄합니다!] [절대선 계통의 성좌들이 화신 ‘유중혁’의 판단에 동의합니다.] [일부 성좌들이 <낙원>의 붕괴에 안타까움을 표합니다.] ······. [다수의 성좌들이 150000코인을 후원하였습니다!] 그러나 유중혁의 표정에는 일말의 변화도 보이지 않았다. 기쁨도 슬픔도 드러나지 않는 눈빛. [‘악마 후작 라인하이트’를 처치하였습니다!] [150000코인을 획득하였습니다.] [전설급 설화 ‘절망의 낙원’을 획득하였습니다.] [당신의 암흑성 랭킹이 조정됩니다!] [새로운 메인 시나리오를 획득했습니다.] [메인 시나리오 # 10 ― ‘73번째 마왕’이 임시 개방되었습니다.] 모든 것은, 이보다 더 나을 수 없겠다 싶을 정도로 완벽하게 해결됐다. 그의 계획대로는 아니었지만 암흑성의 랭킹도 올렸고, 코인도 모았으며, 다음 시나리오의 단서도 얻었다. 그런데도······ 이 복잡한 기분은 대체 무엇인지, 유중혁은 좀처럼 알 수가 없었다. 그는 피묻은 자신의 손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으, 은인이시여!” “구원자님이시다!” 누군가가 소리치는 말에 돌아보니, 사람들이 자신을 향해 몰려와 있었다. 마치 메시아라도 받들 듯, 사람들은 그를 둘러싸고 무릎을 꿇거나, 눈물을 닦고 있었다. 그들의 <낙원>을 파괴한 자신에게, 하염없이 감사를 표하고 있었다. “감사합니다! 정말로 감사합니다!” “당신이 아니었다면 우리들은······.” 그 말을 들으며, 유중혁은 다시 자신의 피묻은 손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그제야, 이 찝찝한 감정의 정체를 깨달았다. 그는 원래, 이 사람들을 구할 생각이 없었다. <낙원>의 사람들은 그에게 조금도 중요하지 않았다. 라인하이트가 그들을 <낙원>을 위한 제물로 여겼다면, 유중혁에게도 이 사람들은 시나리오를 클리어 하기 위한 제물일 뿐이었다. “고맙습니다.” 돌림노래처럼 들리는 목소리를 들으며, 유중혁은 생각했다. 대체 언제부터 이렇게 된 것일까. 2회차부터? 아니, 어쩌면 전조는 그전부터 있었을지도 모른다. 이 모든 시나리오를 끝내고, 세계를 구하겠다는 목표. 그 거창한 일념하에, 그는 달리고 또 달려왔다. 그리고 그 고독하고 지난한 주행 위에서, 그는 조금씩 마모되었다. 사람들이 모두 죽으면, 세계를 구하는 것도 의미는 없다. 그럼에도 그는, 사람들의 죽음을 방관했다. 대를 위한 당연한 소의 희생인 것처럼. 라인하이트의 죽음을 본 후, 유중혁은 처음으로 자신의 목표를 다시 생각해보게 되었다. “저, 성함이 어떻게 되시는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그리고 누군가가 그의 이름을 물었다. <스타 스트림>에서 유명세는, 곧 설화의 강함과 직결된다. 저 질문에 자신의 이름을 답함으로써, 그는 새로운 업적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유중혁도 그것을 잘 알고 있었다. 잠시 고민하던 유중혁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내 이름은 김독자다.” * “내 이름은 김독자다.” ‘3인칭 시점’으로 일행들을 관찰하던 나는, 유중혁의 그 말을 듣는 순간 소름에 진저리쳤다. [당신의 다섯 번째 설화에 새로운 업적이 추가되었습니다.] [<낙원>의 주민들이 ‘낙원의 해방자 김독자’를 기억합니다.] [설화 ‘고독한 메시아’가 한층 더 풍부해집니다.] 무슨 상황인지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김독자’의 이름을 연호하는 <낙원>의 사람들을 보며, 나는 패닉에 빠질 지경이었다. 아니, 거기서 왜 갑자기 내 이름이 나와?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진정한 전우애에 눈물을 줄줄 흘립니다.] 한동안 잠잠하던 우리엘 녀석도 흥분하여 날뛰기 시작했다. 예전 같으면 한 마디 쏘아 붙여 줬을텐데, 연회에 다녀온 이후 좀처럼 험한 말이 나오지가 않는다. 아무튼, 유중혁 이 자식······ 정말 알다가도 모를 놈이다. 그 에고이스트가 자기 업적을 남한테 나눠 줄 리가 없는데. 혹시 이제 나랑 친구하고 싶어진 건가? 그럴 리가. 그러고 보니, 나와 한수영을 제외한 모든 일행들이 어느새 한 자리에 모였다. 아니, 공필두도 없긴 한데······ 젠장, 그 양반 또 어디 간 거지? “그래서, 대체 독자 아저씨는 왜 찾은 건데요?” 처음에는 신유승과 이길영이 길들인 ‘키메라 드래곤’에 대한 이야기로 시끌벅적하던 일행들은, 어느새 나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그건······.” 유상아의 설명을 들은 일행들의 표정이 시시각각 변하고 있었다. 나도 놀랐다. 유상아가 설마 모이라이의 예언을 훔쳐 들었을 줄이야. 아마 이쪽도, 디오니소스처럼 나를 살리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아저씨가 죽는다고요?” “사랑하는 사람한테?!” 「화신 김독자는, 가장 사랑하는 사람에 의해 죽게 될 것이다.」 일행들은 크게 당혹스러운 얼굴들이었다. 정희원은 어이가 없다는 듯한 표정이었고, 신유승은 걱정스러운 얼굴이었으며, 이현성은 뭔가를 고심하는 표정이었다. 먼저 입을 연 건 이지혜였다. “근데 그 아저씨 죽어도 다시 살아나잖아. 괜찮은 거 아냐?” 이지혜의 물음에, 유상아가 답했다. “그럼 다행인데, 그 부활이 몇 번이나 가능한 건지도 아직 모르고······.” “<올림포스>의 예언이니, 그렇게 쉽게 피해가긴 어렵지 않을까.” 정희원의 말에 일행들의 얼굴이 다시 심각해졌다. 내가 없는 곳에서 나를 이렇게나 걱정해주다니. 정희원이 물었다. “그래서, 독자 씨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누군데요? 일단 그것부터 알아야 하는 거 아니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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