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9화

169화 다들 근본적인 문제를 생각하지 않고 있었다는 걸 뒤늦게 깨달은 표정들이었다. 그때, 이지혜가 또 입을 열었다. “저······.” 하필 저 이지혜가 먼저 손을 들다니. 뭔가 불안했다. 그런데······. “응, 지혜야. 뭔가 알아?” “아니, 역시 내가 아닐까 해서······.” ······저건 또 뭔 개소리야. 이지혜의 발언에 일행들은 맥이 풀린듯했다. 정희원이 물었다. “뭐? 독자 씨가 너한테 뭔 짓 했어? 그 인간이 드디어 미성년자한테······.” “아니, 그게 아니라······.” “그럼?” “상식적으로 생각해 본 것 뿐이에요. 난 여고생이잖아요. 그러니까 날 안 좋아할 리가······.” 일행들은 이지혜를 무시하고 논의를 계속했다. 다시 의견을 낸 건 정희원이었다. “내 생각엔, 독자 씨가 좋아하는 건 유상아 씨인 것 같아요.” “네?” 깜짝 놀란 유상아가 답했다. 너무 놀라는 표정이라 나까지 상처를 받을 지경이다. “왜 저를······.” “음, 그게 그렇잖아요. 사실 유상아 씨 미모는······ 뭐, 말할 것도 없고.” 일행들이 고개를 끄덕이자, 유상아의 얼굴이 발갛게 물들었다. 정희원이 말을 이었다. “지금도 이렇게 김독자 씨 구하려고 사방팔방으로 뛰어다니고 있고······ 솔직히 내가 김독자 씨라도 유상아 씨 안 좋아하는 게 이상할 것 같은데요.” 확실히, 그렇게 들으니 유상아 씨만한 사람도 없다. 예뻐, 착해, 성격 좋아······. 나무랄 데가 없다. “네? 그건······ 그냥 회사 동료인 것도 있고, 독자 씨한테 도움 받은 것도 있고 해서······.” 곤란하다는 듯 뭔가를 생각하던 유상아는, 잠시 말끝을 흐리더니 갑자기 정희원을 향해 반격했다. “저는 오히려 희원 씨일 거라 생각했는데요.” “어······ 네? 저요?” “네, 제 생각에 독자 씨는 희원 씨를 좋아해요.” 뜻밖의 역습에 당황한 정희원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현성도 흠칫 놀라는 눈치였다. 나로서도 흥미로운 가설이 아닐 수 없었다. “그게······ 희원 씨한테 독자 씨가 친절하신 것 같아서. 장비 같은 것도 유독 잘 챙겨주는 것 같고······ 희원 씨도 독자 씨랑 이야기 할 때 묘하게 잘 웃는 것 같고······.” 확실히, 그런 게 없지는 않은 것 같다. 나는 정희원이랑 대화할 때 무척 마음이 편하니까. 그리고 내가 발견한 ‘등장인물’이라는 점에서, 무척 마음이 쓰이기도 하고. 당황한 정희원이 상기된 얼굴로 손사래를 쳤다. “네? 아니, 잠깐만요. 그건······.” 일행들이 다시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뭔가 느낌이 안 좋다. 가만 있던 이지혜가 갑자기 ‘김독자 쓰레기’라는 말을 중얼거리기도 했다. 아니, 내가 뭘 잘못했다고······. 이번에 끼어든 것은 이길영이었다. “그 ‘사랑’이 꼭 남녀간의 사랑을 말하는 건 아닐 수도 있다고 생각해요!” “그럴 수도 있긴 하지······ 그럼, 길영이 네 생각은 어떤데?” “독자 형은 절 좋아해요.” “독자 씨가 왜?” “그건······.” 그 질문에 이길영은 한참이나 머리를 쥐어 뜯으며 고민하더니, 이내 닭똥같은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자길 좋아할만한 이유를 못 찾은 모양이었다. 이번에 발언한 것은 이현성이었다. “저, 흠흠. 혹시 ‘전우애’일 가능성은······.” 그 말에, 몇몇 사람들이 동시에 유중혁 쪽을 쳐다보았다. 가만히 팔짱을 끼고 있던 유중혁이 눈살을 찌푸렸다. “뭘 쳐다보는 거지?” 움찔 놀란 이지혜와 정희원이 마주보며 소곤거렸다. “······에이, 설마.” “그치? 아니겠지?”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격렬하게 고개를 휘젓습니다!] 그때, 조용히 일행들의 대화를 듣고 있던 신유승이 손을 들었다. “저기······.” 그 순간, 일행들은 암묵적으로 깨달았는지도 모른다. 그들 중에서 내 마음을 가장 잘 알 수 있는 존재는, 어쩌면 나의 화신인 신유승일 것이란 사실을. “그, 그래! 유승아! 얼른 말해봐!” “뭔가 아는 게 있니?” 신유승이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일행들의 표정이 실망으로 물들었다. 그러나, 아직 신유승의 말은 끝난 게 아니었다. “그냥 아저씨 본인한테 물어 보면 되지 않을까요.” “뭐? 독자 씨한테? 어떻게?” 갑자기 서늘한 기분이 되었다. 그러고 보니 아까부터, 신유승이 내 ‘시점’이 있는 곳을 정확히 바라보고 있었다. 언제나 그렇듯, 불길한 예감은 정확했다. 내 사랑스런 화신이, 생긋 미소를 지으며 손가락으로 나를 가리켰다. “아까부터 아저씨, 우리 대화 전부 듣고 있는데요.” ······젠장. * [아직 이름이 없는 한 성좌가 잘못했다고 말합니다.] “다시.” [아직 이름이 없는 한 성좌가 잘못했다고 말합니다.] “한 번 더.” [아직 이름이 없는 한 성좌가 정말로 잘못했다고 말합니다.] 그런 식으로 몇 번이나 사과를 반복한 후에야, 일행들은― 특히 정희원과 유상아는, 간신히 나를 용서해주려는 기색이었다. 정희원이 말했다. “그래서······ 독자 씨가 사랑하는 사람이 누군데요?” 내가 답하려는 순간, 이현성이 말했다. “생각해 보니 이중에 없을 수도 있겠군요.” “엇, 그러고 보니 독자 씨, 그 여성 분이랑 단둘이 같이 떠났잖아요. 이름이······ 한수영이었나?” 정희원도 한 마디를 보탰다. 한수영이라는 말에 유상아의 표정이 굳어졌다. “······지금 그 여자분이랑 같이 계세요?” 한수영을 좋아하지 않는 유상아는 크게 실망한 표정이었다. ······이거 일이 더 심각해지기 전에 단호히 말해줄 필요가 있겠는데. 나는 크게 심호흡을 한 뒤, 간접 메시지를 띄웠다. [아직 이름이 없는 한 성좌가 자신은 사랑하는 사람이 없다고 말합니다.] 순간, 일행들 사이에 알 수 없는 희비가 교차했다. 누군가는 실망한 얼굴이었고, 누군가는 들뜬 얼굴이었다. 아니, 다들 왜 남의 사랑에 그렇게 관심들이 많은 건지······. 정희원이 말했다. “말은 정확히 해야죠. ‘지금은 없다’라는 거잖아요. 운명에 따르면 독자 씨는 반드시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는 거고요.” 뭐······ 틀린 소린 아니다. 정희원이 계속해서 말했다. “아예 질문을 바꾸는 게 좋겠네요. 독자 씬 어떤 스타일 좋아해요? 혹시 우리 중에 가까운 사람은 없어요?” 아니, 그걸 내가 왜 말해야 하는데. “왜 그런 걸 묻는지 의아해하겠지만, 우리한텐 중요해요. 만약 독자 씨가 우리 중 누군가를 좋아하게 된다면, 우리가 그 운명을 막을 수도 있을 테니까.” ······설득력이 아주 없는 소리는 아니었다. 운명의 실행력은 아주 강력하지만, 말했다시피 ‘절대로 피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확실히 내가 누굴 사랑하게 될지 알 수만 있다면, 나는 운명을 거스를 수도 있는 것이다. 일행들이 이렇게나 내 죽음에 대해 걱정하고 있었다니, 내 이야긴데도 내가 미안해질 지경이다. 하지만······. [아직 이름이 없는 한 성좌가 잘 모르겠다고 말합니다.] 결국 정희원이 짜증을 냈다. “아, 왜 이렇게 답답하게 굴어요?” “아저씨, 점수 같은 거라도 괜찮으니까 매겨봐! 지금 뒈지게 생겼는데 예의 차릴 때야?” [아직 이름이 없는 한 성좌가 자긴 그런 건 하기 싫다고 말합니다.] 젠장, 이러다가 간접 메시지 띄우는데 코인 다 쓰게 생겼다. [아직 이름이 없는 한 성좌가, 자기도 자기 마음을 잘 모르겠다고 말합니다.] “와, 김독자 씨 진짜······.” [성좌, ‘긴고아의 죄수’가 새로운 이야기에 흥미를 가집니다.] [성좌, ‘은밀한 모략가’가 당신의 선택을 궁금해합니다.] [성좌, ‘심연의 흑염룡’이 이쪽을 흘끗 거립니다.] [상당수의 성좌들이 당신의 답답함에 고구마를 토합니다.] 심지어는, 성좌들까지 이들의 대화에 참전했다.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당신의 마음을 속이지 말 것을 권고합니다.] [일부 성좌들이 화신 ‘유상아’를 제외하고는 인물이 없음을 천명합니다.] [몇몇 성좌들이 화신 ‘신유승’을 지지합니다!] [친구의 친구를 사랑하는 어떤 성좌들이 화신 ‘이현성’을 지지합니다!] ······개판이군.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좋은 생각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다음 순간, 허공에서 아이템 하나가 내려왔다. + <아이템 정보> 이름 : 호감도 판독기 등급 : SS 설명 : 상대방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 수 있는 아이템이다. 사용 버튼을 누르고 상대방의 이름과 모습을 떠올리면, 자동으로 허공에 호감도가 출력된다. + 그 아이템을 보는 순간 나는 정신이 어질어질해졌다. [호감도 판독기]는 도깨비 보따리의 플래티넘 이상 회원만이 구입할 수 있는 사치품으로, 무려 10만코인이나 하는 아이템이었다. 아니, 고작 이딴 여흥에 10만 코인을 때려부었다고? 미친 거 아냐 진짜? “역시 대천사! 통이 크다니까!” 정희원이 기뻐하며 소리쳤다.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어서 사용해보라며 재촉합니다.] “그럼 누구부터 할까요?” “희원 언니가 갖고 있으니, 희원 언니부터 해봐요.” “어, 음. 그럴까?” 막상 사용할 타이밍이 되니 정희원도 살짝 긴장하는 모습이었다. 긴장되는 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결국 내 마음을 알게 된다는 건데, 내가 왜 이렇게 긴장이 되는 걸까. ······뭔가 발가벗겨 지는 기분이다. 이게 뭐라고, 다들 손을 꼭 쥔 채 판독기에 집중하고 있는 걸 보니, 기분이 정말 이상해진다. 그리고 잠시 후. 삐비비빗, 하는 소리와 함께 메시지가 흘러 나왔다. [화신 ‘정희원’에 대한 성좌 ‘김독자’의 호감도 점수는 54점입니다.] 잔뜩 긴장하고 있던 정희원은, 막상 점수가 나오자 허탈한 모습이었다. “54점? 이거 높은 건가?” “다음은 내가 해볼래요!” 판독기를 빼앗아간 이지혜가 버튼을 누르며 장난스럽게 외쳤다. “김독자의 마음을 알려줘!” [화신 ‘이지혜’에 대한 성좌 ‘김독자’의 호감도 점수는 6점입니다.] “······.” 할 말을 잃은 이지혜가 멍해진 사이, 일행들은 한 번씩 판독기를 사용했다. 이길영과 이현성, 그리고 신유승까지. 점수는 각각 49점, 50점, 56점으로 나왔다. 구석에서 이지혜가 또 “김독자 쓰레기”라는 말을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반면 신유승은 묘하게 들뜬 표정이었다. 마지막으로 남은 것은 유상아와 유중혁 뿐. “저, 중혁 씨 먼저······.” “그딴 소꿉 장난에 어울릴 생각 없다.” 멀리서 괴수들의 시체를 뒤적이던 유중혁이 눈살을 찌푸리자, 차례는 자연히 유상아에게 돌아왔다. 유상아가 판독기를 받아 들었다. 그리고, 판독기를 사용하기 직전. [성좌, ‘가장 어두운 봄의 여왕’이 화신 ‘유상아’에게 특별한 아이템을 선물하였습니다.] 허공에서 천 같은 것이 나풀거리며 내려오더니, 작은 빛과 함께 유상아가 입고 있던 옷이 바뀌었다. 옆이 트인 검정색 차이나 드레스에, 검정색 가터벨트. 갑작스런 복색 변화에 유상아가 말을 더듬었다. “이, 이, 이게 대체······.” 나는 유상아를 필사적으로 흘끔거리며 속으로 욕설을 내뱉었다. 아니, 이 빌어먹을 올림포스 할머니가 진짜······. 아무것도 모르는 정희원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야, 성좌들 이벤트인가?” “상아 누나, 얼른 해봐요.” 그리고 유상아가 버튼을 눌렀다. [화신 ‘유상아’에 대한 성좌 ‘김독자’의 호감도 점수는 481점입니다.] “4, 481점? 미친 거 아니에요? 이거 그냥 확정이잖아?” “독자 씨가 좋아하는 건 역시······.” 얼굴이 새빨개진 유상아가 뭐라고 말을 더듬거리려는 순간,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느꼈는지 이지혜가 입을 열었다. “아니 잠깐만, 이거······ 상아 언니. 저 그 옷 한 번만 빌려주면 안 돼요?” “어, 으, 응.” 근처의 건물에 들어가 잽싸게 옷을 갈아입고 온 이지혜가 의심스러운 눈으로 판독기의 버튼을 눌렀다. [화신 ‘이지혜’에 대한 성좌 ‘김독자’의 호감도 점수는 481점입니다.] 그리고 모두가 말을 잃었다. 내가 아득한 수치심 속에서 아무 말도 못하는 사이, 이지혜가 허공을 향해 비릿한 조소를 퍼부었고, 정희원은 배를 잡고 부들부들 떨었으며, 유상아가 텅 빈 동공으로 중얼거렸다. “가장 사랑하는 건 사람이 아니었네요······.” 이길영과 이현성도 절레절레 고개를 내젓고 있었다. 제기랄, 이래서 내가 이런 거 안 하고 싶었는데······. 신유승은 어깨를 부르르 떨며 내쪽을 보고 있었다. 차마 화신을 볼 면목이 없어 미안하다는 말을 하려는데, 신유승이 먼저 말했다. “아, 아저씨!” 그래, 미안하다 유승아. 내가······. “아저씨! 왜 그래요? 아저씨!” 얼굴이 창백해진 신유승이, 허공을 향해 손을 뻗고 있었다. 뭔가가 이상했다. ······어? 놀란 신유승의 목소리가 멀어졌고, 갑자기 토할 것 같은 현기증과 함께 시야가 빙글빙글 회전했다. 잠깐만. 이거, 설마······. 그리고 다음 순간, 메시지와 함께 의식이 끊어졌다. [당신은 사망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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