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7화

167화 쿠구구구구! 단지 하나의 궤적을 그었을 뿐인데, 전투기가 지나가는 듯 공기가 파열되는 소리가 났다. 황금빛이 넘실대는 강기가 스친 자리는 균열을 일으키고 있었다. 치지지지지직! 균열에 뒤얽힌 괴수들은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찢어졌다. 4급이고 5급이고 할 것 없이 날려버리는 황금빛 궤적. 파천검도(破天劍道). 이것이 바로, 하늘을 부수는 검의 길. 단지 하나만 풀어놔도 10분 안에 일대를 멸망으로 몰아갈 수 있는 3급 괴수들마저, 그의 검격을 견디지 못해 연신 비명을 질러댔다. 얼마나 많은 시간 동안 이 검술을 연습했는지는 유중혁 자신도 알지 못했다. 십 년? 이십 년? 아마 암흑 차원의 시간 단층을 이용해 수련했던 것까지 합친다면, 족히 백 년은 넘을 것이다. 그만한 세월을 이루었기에, 유중혁은 인간의 정점에 도달할 수 있었다. ‘아직은 육체 등급이 낮아서 간신히 초입이 한계지만.’ 유중혁은 과부하가 걸려오는 육체를 조절하며 끊임없이 검격을 휘둘렀다. 아무리 그가 강하다고 해도 ‘초월좌’의 힘은 오래 지속 할 수 없었다. 아직 그의 격은 그의 스승인 파천검성에 비하면 많이 모자란 수준이었으니까. 그럼에도, 그의 공격은 일반적인 ‘스킬’의 범주를 아득히 벗어나 있었다. 허공에 터지는 스파크에 괴수들이 폭죽처럼 터져 나가자, 라인하이트마저 경탄을 금치 못했다. [초월좌의 소문은 거짓이 아니었군. 하지만 어떻게 귀환자도 아닌 인간이······?] 라인하이트의 말은 이어지지 못했다. 유중혁의 [진천패도]에서 솟아난 10미터가 넘는 에테르 블레이드에, 방금 전까지 그가 있었던 자리가 통째로 찢겨 나간 것이다. 그야말로 가공할 파괴력. 초월에 이른 [파천강기]의 힘이었다. “조심해요! 사람들이 휘말린다고요!” 유상아가 외쳤지만, 유중혁에게 별달리 뾰족한 수는 없었다. 애초에 그가 잘하는 것은 뭔가를 부수는 것이지, 뭔가를 구하는 쪽은 아니었다. “전설급 설화의 주인이다. 쉽게 해치울 수 없어. <낙원>에 있는 한 놈의 힘은 2급 괴수종 이상이다.” 실제로 라인하이트의 영구기관은 상하긴 했어도 물러나는 기색이 없었다. 오히려 화가 난 듯, 줄기들은 더욱더 가열차게 주변의 인간들을 빨아들였다. “으아아아악!” 인간들을 구출하는 속도보다 영구기관이 자라나는 속도가 더 빨랐다. 게다가 괴수들의 숫자도 아직 많았다. [헤르메스의 산책법]과 [테세우스의 결의]를 사용하여 주변의 괴수들을 하나둘 격살하던 유상아가 입을 열었다. “······끝이 없어요. 대체 이런 괴수들을 왜 숨기고 있었던 걸까요?” “이 괴수들은 <낙원>의 수출품이다.” “수출품이요?” 유중혁은 아주 짧은 순간 허공을 올려다보았다. 그곳에는 ‘결코 개입하지 않겠다’고 했던 도깨비들이 재미있는 구경거리라도 난 것처럼 모여 있었다. [허······ 이거 곤란한데.] [새 농장을 구해야 하게 생겼군요.] 그들의 말이 무슨 뜻인지, 유상아는 곧바로 이해하지 못했다. 넘실대는 괴수들의 파도 속에서 지난 시나리오를 거치며 익숙해진 괴수들의 모습이 보인다. 9급 지하종 땅강아쥐, 8급 지하종 그롤······. “시나리오에 사용되는 괴수들. 모두 어디서 온 것들인지 궁금했던 적 없나?” “다른 세계에서 온······.” “그런 식으로 잡아 오는 것은 한계가 있어. 도깨비들은 바쁘고, 그런 비효율적인 일을 일일이 수행할 만큼 시간이 남아돌지도 않지.” 유상아는 멍한 시선으로 유중혁을, 도깨비들을, 그리고 <낙원>의 괴수들을 보았다. 얼어붙은 그녀보다 먼저 반응한 것은 곁에서 [지옥염화]를 퍼부어대던 정희원이었다. “지금 그 말······.” 유중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낙원>은 <스타 스트림>의 괴수 공급지다. 정확히 말하면 그중의 하나지.” 정희원의 머릿속에서, 지금껏 이해 되지 않던 몇 가지가 강제로 끼워 맞춰졌다. [암흑성 2층]. 모든 시나리오에 개입하던 도깨비가, 처음으로 아무것도 간섭하지 않는 땅. 생각해 보면, 그런 곳이 있을 턱이 없었다. [도깨비들이여! <낙원>은 새로 만들 수 있습니다!] 멀리서, 재생된 라인하이트의 상반신이 영구기관 위로 자라나 있었다. [이번 일로 물량 소진이 제법 있기는 하겠지만, 복구는 금방 이루어질 것입니다! 부디 계약을 취소하지 말아 주십시오!] 그 간절함에 담긴 절망은, 이 자리의 누구도 공유할 수 없는 것이었다. 화신들을 지키기 위해, 그 화신들을 공물로 바쳐야만 하는 세계. 라인하이트는 자신의 신념을 위해 그 신념조차 바치는 괴물이 되었다. 뒤늦게 허공에 떠 있는 도깨비들을 발견한 화신들이 소리쳤다. “도깨비! 도깨비다!” “으으, 시나리오가 시작되고 만 건가······.” “어째서! 어째서 이런 짓을! 우린 아무 잘못도 하지 않았는데!” 도깨비들은 그저 이죽거리며 웃을 뿐이었다. [잘못이라면 했죠. 아무것도 하지 않은 잘못.] [딱히 우리가 의도한 상황은 아니지만요. 하하핫!] 그 광경을 보며, 정희원이 입술을 꾹 깨물었다. 더 이상 두고 볼 수는 없었다. “해치울 방법 없어요?” 물론, 방법은 있다. 여기서 [거신화]까지 발동한 후 초월좌의 힘을 발휘한다면, 그는 힘의 크기만으로 라인하이트를 찍어 누를 수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소모가 너무 크다. 그리고 <낙원> 전체가 통째로 날아가 버리겠지.’ 회귀자 유중혁은 그런 비효율적인 싸움은 선호하지 않았다. “저놈을 죽이려면 영구기관의 뿌리를 없애야 한다.” 영구기관의 핵심 동력원은 뿌리. 그러니 뿌리만 없앤다면 영구기관은 전체를 상대하지 않고도 제압할 수 있다. 문제는 그 ‘뿌리’에 괴수들의 본진이 있다는 것. 그리고 라인하이트조차 통제할 수 없는 강대한 괴수들이 함께 있다는 것이었다. ‘랭킹 6위인 빙하의 악마 세피로츠만 거두었더라도······.’ 계획대로 세피로츠를 동료로 삼았다면, <낙원> 공략은 지금보다 훨씬 수월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세피로츠를 데리러 갔을 때, 세피로츠는 이미 죽어 있었다. ‘나만큼 빨리 랭커를 사냥하는 녀석이 있단 이야기겠지.’ 제일 먼저 떠올린 것은 김독자였지만, 꼭 김독자라는 보장도 없었다. 이번 회차에는 변수가 너무 많아졌으니까. “하지만 지하엔 들어갈 수가 없는데, 어떡하죠?” “들어가지 않는다. 이미 역할은 맡겨 놨어.” 정희원의 눈동자가 동시에 커졌다. “당신, 설마······!” 지금 이곳에 없는 일행이 누구인지, 그녀는 바로 눈치챘던 것이다. 그러나 그녀가 채 말을 잇기도 전에, 유중혁이 말했다. “김독자는 너흴 아무 생각 없이 남겨둔 게 아니야.” 아마도, 그것은 그가 회귀자이기에 가능한 추리였다. 언제나 김독자에게 일방적으로 읽혀온 그였지만, 이번만큼은 그 역시 김독자의 생각을 읽을 수 있었다. [아직 이름이 없는 한 성좌가 씩 웃습니다.] 허공에서 느껴지는 시선을 감지한 유중혁이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 어두운 공동을 몰려 다니는 괴수들의 틈바구니에서, 신유승과 이길영은 서로를 꼭 끌어안은 채 몸을 웅크리고 있었다. 괴수들의 밀집도가 지나치게 높았던 까닭에, 체구가 작은 아이들은 오히려 발견되지 않았다. 크와아아아아! 위기의 순간, 8급 괴수종인 [거대 병정 말벌] 몇 마리를 길들인 것도 도움이 되었다. 말벌들은 신유승과 이길영의 곁에서 혼란한 춤을 추며 괴수들의 시선을 이지러트렸다. 하지만 [말벌의 춤]으로 인식을 흩트리는 것에는 한계가 있었다. 두 아이의 시선이 마주쳤다. ‘어떡할까?’ ‘나도 몰라.’ 비스트 마스터 신유승과, 인섹트 마스터 이길영. 그 둘은 현재 서울에서 가장 강력한 테이머들이었다. 하지만 그런 그들조차도, 이 모든 괴수들을 전부 길들일 수는 없었다. 그런 짓을 했다간 뇌가 터져 죽어버릴 것이다. 실제로 그들이 가능한 [길들이기]의 수준은 4급이 한계였다. 무리를 한다면 3급도 가능하겠지만, 아마 잠시 뿐일 것이다. ‘······이대로 죽는 거야?’ 보다 강력한 괴수들이 주변의 괴수들을 짓밟으며, 일대의 생태는 조금씩 진정되고 있었다. 침을 흘리며 서성이는 [데빌 울프]와, 거대한 송곳니를 드러낸 [어둠 거스러미]들이 쉬익거리는 숨을 내며 주변의 냄새를 맡고 있었다. 겁 먹은 말벌들이 더욱 더 열심히 춤을 췄지만, 이제 들키는 것은 시간 문제였다. 게다가 괴수들 말고도, 위협은 또 있었다. 푸슈슈슛! 괴물들의 틈바구니를 뚫고 날아든 [영구기관]의 줄기가, 두 아이의 기척을 노리며 쇄도했다. 아차, 하는 순간 이길영이 신유승을 안았고, 줄기는 그대로 두 아이를 관통할 것 같았다. 하지만 그 순간, 어디선가 쏘아진 강력한 기파에 줄기의 움직임이 멎었다. 줄기는 당황하는 듯 하더니, 결국 방향을 돌려 아이들을 외면했다. 신유승은 줄기를 멈춘 기파를 따라 고개를 돌렸다. ‘이건 대체······.’ [말벌의 춤]을 꿰뚫고, 정확히 이쪽을 보고 있는 괴수가 있었다. 처음, 신유승은 ‘그것’이 괴수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살아있는 생명체라고 짐작하기에는 너무나 거대했기 때문이다. 그것의 몸체는 공동의 정확히 삼분의 일을 차지하고 있었다. 샛노란 눈이 어둠 속에서 깜빡이자, 신유승은 등골의 모든 털이 쭈뼛 서는 것 같았다. 저건 ‘괴수’가 아니야. 그렇게 밖엔 생각할 수 없었다. 모든 괴수들이 그 존재 앞에 압도되어 있었다. 일대의 모든 소음이 잠잠해졌다. 이지가 없는 녀석들조차, 괴물의 존재감 앞에 경외라도 바치듯 몸을 숙이고 있었다. 그런 말도 안 되는 존재감을 가진 녀석이 흥미로운 눈으로 이쪽을 보고 있었다. 너희들은, 대체 뭐냐. 마치 그렇게 묻고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신유승은 그 질문에 대답할 자신이 없었다. 돌아보니 이길영도 자신과 비슷한 상태였다. 신유승이 먼저 용기를 냈다. “······야.” 그 한 마디에, 이길영이 질겁하며 고개를 흔들었다. “무리야. 저건 절대로 안 된다고.” [다종 교감]을 극한까지 올린 그들은 굳이 말하지 않아도 서로의 의사를 이해할 수 있었다. “어차피 이대로면 죽어.” 조심스레 자리에서 일어난 신유승이, 비틀거리며 괴물을 향해 다가갔다. 부복해 있던 괴수들이 거칠게 으르렁거렸지만 아이는 개의치 않았다. 그 순간 신유승은 자신의 쓸모를 깨달았던 것이다. ‘그래서, 아저씨가 날 이곳에 남긴 거야.’ 자신만이, 이것을 해낼 수 있다. “젠장.” 욕설을 내뱉은 이길영도 후들거리는 다리로 뒤를 따라왔다. 바로 앞까지 다가가자, 괴물의 존재감은 아까와는 비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해졌다. 마치 해볼 테면 해보라는 듯 오연한 괴물의 시선 앞에, 신유승은 발가벗겨지는 기분이었다. [전용 스킬, ‘상급 다종 교감 Lv.5’를 발동합니다!] 투명하게 솟은 아우라가 이내 괴물을 향해 쏘아졌다. 다종 교감. 서로 다른 종을 이해하기 위해 만들어진 스킬. 아우라의 끄트머리가 괴물과 접촉하는 순간, 신유승은 미쳐버릴 것 같은 기억의 범람을 느꼈다. ‘아, 아아······.’ 괴수의 태생이, 끔찍한 기억이 그녀의 머릿속으로 흘러 들어오고 있었다. 이 비참한 <낙원>의 지하에 떨어져, 다른 괴수들을 잡아먹으며 자라온 존재. 먹고, 먹히고, 절망하고, 절규하고. 차마 인간의 언어로 형용할 수 없는 지옥도를 걸어온 괴물. 츠츠츠츠츠츠츠! 과도한 혈액의 흐름을 감당하지 못한 혈관이 터지듯, 신유승의 코와 입에서 피가 쏟아져 나왔다. 피눈물이 맺힌 시야가 붉게 물들고 있었다. 달려든 이길영이 신유승을 제어하려 안간힘을 썼으나, 이미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이 흐르고 있었다. 결국, 이길영도 [다종 교감]을 발동했다. 늘 투닥거리며 싸워왔던 두 아이가, 이 순간만큼은 손을 잡았다. 이길영의 힘이 깃들자, 이해의 통로는 한층 넓어졌다. 하지만 여전히 벅찬 상대였다. 곧 이길영의 코에서도 피가 쏟아졌다. “으······ 으아아아아!” 낯선 괴수의 고통을 이해하며, 신유승은 처음으로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었다. 까드드드드득! 마치 그릇이 깨어지는 듯한 소리와 함께, 신유승과 이길영의 정신이 조금씩 붕괴하고 있었다. 감당할 수 없는 크기의 자아를, 격이 맞지 않는 상대를 길들이려 한 대가였다. 그때, 신유승은 자신의 뒤쪽에서 어떤 시선을 느꼈다. 누군가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저 괴물의 격에 전혀 밀리지 않는 어떤 존재가, 그녀를 보고 있었다. [아직 이름이 없는 한 성좌가 당신을 바라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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