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6화

166화 곁에 있던 한수영이 입술을 비죽였다. “언제 그렇게 친해지셨대? 그 사이코패스랑······.” “딱히 친해지진 않았어.” “그렇게 말하는 것치고는 굉장히 신뢰하는 표정인데?” “착각이야. 그놈을 신뢰하느니 도깨비를 믿지.” 내가 유중혁을 믿는다면 그건 놈의 인성이 아니라 경험을 믿는 것이다. 어쨌든 놈에겐 3회차분의 경험이 있고, 41회차의 신유승에게 들은 여러 가지 정보들도 있으니까. 게다가, 본래 <낙원>은 그 녀석 담당이다. 2회차때도 알아서 잘 했으니, 이번에는 더 잘 해내겠지. 다만······. “······좀 걱정되긴 하네.” 녀석의 인성을 믿을 수 없기 때문에, 완전히 안심할 수는 없었다. 일행만으로 <낙원>의 공략이 가능하도록 여러 가지 준비를 해놓기는 했지만, 그래도 완벽할 수는 없었다. 나는 작가가 아니라 독자고, 유중혁은 언제 회귀할지 모르는 개복치 같은 놈이니까. 지난 번에 정신줄을 잡아 놨으니 좀 나아지긴 했겠지만······. 한수영이 그럼 그렇지, 하는 표정으로 말했다. “뭐······ 정 신경 쓰이면 보고 오든가. 너 어차피 실시간으로 볼 수 있는 스킬 있잖아.” “······알고 있었냐?” “지금까지 모르는 게 등신이지.” 하긴, 한수영은 지난 번에 내가 유중혁에게 빙의하는 것을 봤을 테니까.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말했다. “그럼 다녀올게. 잠깐 부탁한다.” “얼마 줄 건데?” “뭘 매번 코인을 받냐? 한 번 정도는 봉사도 좀 해.” “······그럼 빨리 와. 나 혼자 감당 안 되는 놈들 나오면 답 없으니까.” “뭔 일 있으면 그냥 깨워.” 나는 그대로 눈을 감고 잠에 빠져들었다. [전용 스킬, ‘전지적 독자 시점’ 3단계를 발동합니다!] 곧이어 ‘3인칭 시점’이 발동하며 새카만 심상 위에 나를 생각하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나는 몇 개의 목소리를 제쳐놓고, 제일 넓은 경관이 펼쳐진 화면을 택했다. * 진동은 <낙원>의 중심에서 시작되었다. 지반 전체를 뒤흔드는 강렬한 충격파에 노점상들이 일제히 뒤집혔고, 대로를 걷던 화신들은 놀라 자리에 주저앉았다. “으아아, 뭐야!” “괴수들인가?” 모두가 한 마디씩 해보았지만, 상황을 확실히 파악하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아마도, 너무 오랫동안 평화를 누려왔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언제나 최악의 상황만을 가정해왔던 그들의 대뇌피질은, 이제 가장 안전한 미래만을 상상할 수 있게끔 세뇌되었다. “경비대들이 해결할 거야. 다들 걱정말라고.” “조금만 참아!” 폭음의 중심지에서, 유중혁은 <낙원>의 화신들을 보았다. 그가 아는 얼굴도 있고, 모르는 얼굴도 있었다. 1회차에서 유중혁은 이들을 구하려다 배신당했고, 2회차에서 유중혁은 자신의 손으로 이곳을 멸망시켰다. 그리고 마침내 3회차······. 폭연을 걷고 나타난 유중혁을 붙들며 몇몇 사람들이 물었다. “뭡니까! 대체 무슨 일입니까?” 방금 전까지 과일을 팔거나 농작물을 수확하던 사람들이 두려움에 질린 얼굴로 그를 보고 있었다. 유중혁도 그들을 마주보았다. 시나리오가 아닌 것도, 분명 이야기였다. 유중혁도 알고 있었다. 잘 알았기에 처음 <낙원>을 보았을 때 그는 라인하이트의 뜻에 동조했고, 함께 이곳을 지켰다. “사, 살려주세요! 제발!” 물론 그 모든 일은 허사였다. <낙원>은 시나리오와 다를 바가 없었으니까. 시나리오가 화신들을 착취하며 유지되듯, <낙원>도 화신들을 비료로 지탱되는 곳일 뿐. 몇 번이고 같은 장소의 멸망을 겪으며, 유중혁이 깨달은 것은 한 가지였다. 거대한 이야기는 언제나 작은 이야기들을 잡아먹는다. 오직 그것만이 이야기의 법칙이고, <스타 스트림>의 섭리다. 유중혁은 사람들에게 말했다. “낙원은 곧 멸망할 것이다.” “예?” “스스로 지킬 수 있는 걸 찾아라. 그리고 그걸 지켜라.” 그아아아아아! 유중혁과 일행이 빠져 나온 통로로 폭주한 괴물들이 비집고 나오기 시작했다. 거대한 갈퀴와 발톱이 지하를 헤집고 나오는 것을 보며 화신들이 비명을 질렀다. 뒤늦게 달려온 경비대들이 화신들을 보호하며 나섰지만, 기하급수적으로 쏟아지는 괴수들을 막아내기엔 역부족이었다. “저, 저것들이 왜?” “성주님! 성주님은 어디 계신가!” 거대 괴수들의 발길질 한 번에 다수의 경비대들은 나가떨어졌다. 그나마 경비대장은 제법 선전하는 듯했지만, 간신히 살아 도망치는 게 고작이었다. 유중혁은 다가오는 괴수들의 팔다리를 잘라내며 주변을 살폈다. 곳곳에서 응전 중인 정희원과 이현성이 사람들을 대피시키고 있었다. “······여기까지 살아남은 게 신기하군.” 자신들이 죽을지도 모르는 판에, 이름도 모를 다른 사람들부터 챙기다니. 보나마나 김독자의 영향이겠지. 저런 심성으로 여기까지 온 것은 기적이나 다름없다. “아뇨, 저런 사람들이니까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거예요.” 어느새 곁으로 다가온 유상아를 향해 유중혁이 인상을 찌푸렸다. “너 때문에 괜한 시간을 낭비했다.” “······마지막으로 <올림포스>와 연락이 닿았을 때는 독자 씨가 이곳에 있다고 들었어요.” “정보가 잘못 되었거나, 누군가의 농간이었겠군.” 아니면, 김독자가 모종의 수로 정보를 조작했거나. 어느 쪽이든 유중혁의 입장에서 마음에 드는 상황은 아니었다. 본래 <낙원> 공략은 이런 식으로 이루어지는 게 아니니까. 사실 지금의 <낙원>은, 공략에 제일 부적합한 상태였다. 쿠구구구구! 바닥을 뚫고 올라온 [영구기관]의 줄기가 하늘로 치솟았다. 저것이 바로 악마 후작 라인하이트의 [설화]. 영혼을 파먹고 유지되는 <낙원>, 영구기관(永久機關)의 진체였다. 줄기를 타고 올라온 괴수들이 지상으로 풀려났다. 오랫동안 지하에서 굶주리고 있던 학살자들은 먹잇감들을 발견하자 포효하며 사방으로 흩어졌다. 5급 악마종인 [어둠 추적자]부터 4급 악마 괴수종인 [루벨 타이거], 심지어 이름을 알 수 없는 3급 악마종도 보였다. “끄아아아악!” 그 끔찍한 카니발 속에서 화신들은 성주를 찾았다. 오직 그만이 이 비극에서 그들을 구해줄 수 있는 구원이라 믿는 것처럼. “성주님!” 식물의 줄기가 움직인 것은 그때였다. 촉수처럼 뻗어 나간 덩굴들이 흐느적거리더니 일제히 비산했다. 날카로운 덩굴의 끝은, <낙원>의 백성들을 지키기 위해 괴수들을 꿰뚫었다. 푸슛! 푸슈슛! 크오오오오! 화신들은 환호했다. 그들이 알기로, <낙원>에서 이만한 힘을 가진 존재는 오직 하나 뿐이었다. “성주님이시다!” “성주님!” [모두 안심하십시오.] 라인하이트의 목소리를 들으며, 화신들은 마음을 다잡았다. 우리들의 <낙원>은 쉽게 무너지지 않는다. 다들 그렇게 믿는 듯했다. 매캐한 연기 속에서, 경비대장이 무언가를 발견하기 전까지는. “성주님······?” 줄기의 끄트머리에 봉오리처럼 돋아난 익숙한 얼굴. “으, 으아아아아!” 질겁한 경비대장이 바닥에 주저 앉았다. “괴, 괴물! 괴물이다!” 오래토록 충성을 맹세해왔던 경비대장은, 거대한 식물과 하나가 된 라인하이트를 본 순간 평정심을 잃고 말았다. 자신의 진체를 드러낸 악마종의 모습은, 그만큼이나 끔찍했다. [아, 하인델입니까?] 성주의 진짜 모습을 확인한 경비대장은, 이성을 잃고 그저 공포에 떨었다. 기파를 발산하는 라인하이트의 힘은 그만큼이나 대단했다. 모두 라인하이트의 전설급 설화인 [절망의 낙원] 덕분이었다. [마침 잘 됐군요. 회복할 양분이 필요하던 참이라.] 푸슉! 푸슈슉! 날아든 덩굴들이 경비대를 비롯한 <낙원>의 주민들을 집어 삼키기 시작했다. 파이크처럼 화신들에게 꽂힌 줄기가 소소한 이야기들을 빨아들였고, 메말라버린 주민들은 그대로 미라가 되어 죽거나, 악마종으로 화했다. “그만둬!” 화르르륵! 불타오르는 [지옥염화]의 불길이 몇 개의 줄기들을 불태웠다. 그러나 줄기의 개수는 끝이 없었다. 정희원이 외쳤다. “여긴 당신이 지켜야 할 곳이잖아! 대체 무슨 짓이야!” [당신들이 나타나기 전까지는 그랬죠.] 라인하이트가 조소했다. 그는 줄기의 가장 높은 곳에 상반신만을 내놓은 채로 <낙원>의 풍경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이미 <낙원>은 끝났습니다.] 거대한 영구기관 앞에 공포에 떠는 화신들의 모습. 조금 전까지만 해도 성주를 경외하던 주민들은 이제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이래서 작은 이야기를 살아가는 존재들은 어쩔 수 없는 겁니다. 평생을 작은 나무에 의지하며 살아왔으니, 그것이 실은 숲이란 것도 알지 못했겠죠.] 하나 둘, 화신들은 자신들이 살아온 세계의 정체를 깨닫고 있었다. 아니, 어쩌면 실은 알고 있었지만 줄곧 외면해 온 진실. [그러니 모든 걸 다시 시작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하늘 위로 쏘아진 라인하이트의 줄기가 거대한 우산처럼 <낙원> 전체를 덮기 시작했다. 마치, 그대로 낙원 전체를 흡수하기라도 하려는 것처럼. 그 아득한 스케일에 정희원은 완전히 질려버렸다. 저런 걸 해치울 수 있을까? 인간이, 저런 것과 싸워 이길 수 있을까? 줄기의 한쪽이 거대한 폭발을 일으킨 것은 그때였다. 콰아아아아앙! 굉음과 함께, 허공을 덮던 줄기 가닥들이 터져 나갔다. 마치 <낙원>의 지붕에 거대한 구멍이 뚫린 듯한 모양새였다. [대단하군요. 당신은······.] 라인하이트는 진심으로 감탄한 목소리였다. 구멍이 뚫린 자리 아래에서 오연한 존재감을 풍기는 사내. 말할 필요도 없이, 유중혁이었다. [······인간을 넘어섰군요.] 인간을 넘어섰다. 평범한 수사처럼 들리는 그 말은, 라인하이트쯤 되는 존재에겐 완전히 다른 의미를 가지는 표현이었다. [겨우 아홉 번째 시나리오에서 그런 경지에 도달한 겁니까? 김독자라는 자도 대단했지만······ 당신이야 말로 진짜 괴물이군요.] 유중혁의 전신에서 강대한 존재의 파장. 눈을 감은 유중혁은, 그의 모든 역량을 동원해 한계를 넘어서고 있었다. ‘[염왕의 장갑]에서 근력 레벨 2를 확보하고.’ ‘[극령의 내피]에서 근력 레벨 1을.’ ‘[천총운검]에서 근력 레벨 4를.’ ‘스킬 버프를 통해 근력 레벨 3을 추가로 확보한다.’ 근력 레벨이 100을 돌파하자, 유중혁의 전신에서 고고한 기세가 풍겨 나왔다. 그는 스승 ‘파천검성’의 말을 떠올렸다. ―초월의 첫 번째 과정은 육체의 한계를 넘어서는 것이다. 화신들은 대부분, 자신의 노력만으로 강해지는 것에는 한계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더 좋은 배후성을 얻으려 노력하고, 더 강력한 성좌들에게 잘 보이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하지만 우주는 넓고, 때문에 그런 비겁함에 동의하지 않는 이들도 있었다. 좋은 배후성을 얻지 못했거나, 배후성이 없어도. 그 어떤 절대적 존재의 조력도 없이, 오로지 자신의 노력만으로 온전한 ‘하나’가 되기를 꿈꾸는 자들. ―두 번째 과정은, 모든 스킬을 한계치까지 수련하는 것이다. 세상에 존재하는 스킬들은 결국 누군가가 남긴 ‘성흔’들이 보편화된 것. 그 모든 스킬들을 한계치까지 수련해라. 마치 사다리를 오르듯 시스템의 한계를 궁구하고 또 탐구해라. 성좌들이 설화를 먹어 치우고 자신의 영향력을 키워 강해졌다면, 이들은 자신의 존재를 끊임없이 단련해 하나의 ‘설화’로 만들어냈다. ―마지막 과정은, 올라간 사다리를 걷어차는 것이다. 지금까지 쌓아온 모든 것을 잊어라. 스킬을 잊고, 레벨을 잊고, 이야기를 잊어라. 결국 시스템이 제시하는 길은 수많은 존재들이 ‘보편’으로 택한 길. 중요한 것은 너만의 ‘이야기’를 찾는 것이다. 수련하고, 수련하고, 또 수련하고. 극한의 수련 끝에 스킬의 한계를 넘어선 이들은 그 자체로 하나의 이야기가 된다. 시나리오를 통틀어 성좌에 비견될 수 있는 필멸자의 정점. 자신의 종을 아득히 뛰어넘는 재능과 노력을 겸비한 자들이, 필생의 노력을 통해 이룩할 수 있는 경지. 그 숭고한 노력을 경외하는 뜻에서, <스타 스트림>은 그들이 성좌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들에게 좌(座)의 이름을 허했다. ―그것이, 초월좌(超越座)에 입문할 최소한의 조건이다. 유중혁은 이미 지난 회차에 초월좌에 오른 적이 있다. 이미 한 번 도달한 경지였기에, 다시 한 번 오르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필요한 것은 오직 육체적 조건과 시간뿐. 유중혁의 [천총운검]에 고결한 황금 빛 아우라가 맺혔다. 분명 스킬을 사용하고 있음에도, 그의 머릿속에는 스킬의 사용 메시지가 떠오르지 않았다. 왜냐하면 이것은, ‘시스템’을 이용한 힘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오로지, 회귀자 유중혁이 혼자서 쌓아 올린 힘. “라인하이트, 지난 회차에서는 너를 거뒀었지.” 나무의 규모를 지나 이미 거대한 숲이 된 [영구기관]을 향해, 유중혁이 두 자루의 검을 뽑아 들었다. “이번에는 너를 죽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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