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5화
165화
“사부!”
유중혁을 발견한 이지혜가 외쳤다. 그러나 유중혁은 그녀를 전혀 신경 쓰지 않고 다시 물었다.
“김독자는 어디 있느냐고 물었다.”
“······독자 아저씨는 왜 찾아?”
유중혁이 대답하려는 찰나, 유미아를 업은 유상아가 선녀처럼 천장에서 내려왔다. 일행들이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그러나 유상아는 반가운 내색을 표하는 대신, 서둘러 말했다.
“독자 씨가 위험해요.”
“네?”
“독자 씨는 지금 어디 계신가요?”
유중혁이 그랬던 것과 마찬가지로, 유상아의 시선이 불안하게 허공을 탐색했다. 그러나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 김독자의 모습. 이현성이 재빨리 대답했다.
“독자 씨는 사흘 전에 벌써 떠났습니다.”
“독자 씨가 위험하다니, 그게 무슨 소리죠?”
정희원도 되물었지만, 안타깝게도 이것저것 설명할 시간이 없었다. 답답했는지 이지혜가 덧붙였다.
“뭔가 잘못 알고 온 거 아니에요? 위험한 건 독자 아저씨가 아니라 우리라고요.”
상황이 이 정도인 줄은 몰랐던 유상아가 대답했다.
“일단 여기서 빠져 나간 다음 설명 드릴게요.”
공동의 소란으로 인해 공동과 연결된 굴에서 괴수들이 대거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이지혜가 소름끼친다는 듯 말했다.
“젠장, 공필두 아저씨가 있었다면······.”
확실히, 공필두가 있었다면 상황은 많이 달랐을 것이다.
공필두의 [무장 성채]는 다수전에 유용한 성흔이고, 다수의 괴수들을 학살하기에 적합한 포지션을 가지고 있으니까.
하지만 공필두와는 [암흑성] 1층에 진입할 때 이미 헤어졌고, 지금은 생사조차 불분명하다.
그나마 유중혁이 있다는 것만이 일행들의 유일한 위안이었다.
단순히 무력으로만 보자면 공필두나 김독자와 있을 때보다도 훨씬 더 큰 힘이 되는 존재. 주먹질 한 방에 산을 부술 거력이 담겨 있었다.
콰아아앙!
[백보신권]으로 다가오는 괴수들을 죄다 쳐날려버린 유중혁이 말했다.
“여기서 싸우면 불리해. 천장으로 빠져 나간다.”
가장 빠른 탈출로를 모색한 유중혁이 괴수들의 길을 열었다. 커다란 마력의 손실도 없이 단순 박투만으로 길을 뚫는 그의 능력은, 가히 인간 탱크에 가까웠다. 아니, 진짜 탱크였다고 해도 저런 위력을 내지는 못했을 것이다. 유상아가 물었다.
“탈출할 수 있을까요?”
“벽에 디딤층을 만들 테니, 알아서 짚고 올라와.”
그 말과 함께 유중혁은 허공을 밟고 날아올랐다.
무림계 귀환자 중에서도 소위 최강의 힘을 가진 존재들만이 사용한다는 [허공답보]였다. 그는 원숙한 동작으로 죽은 괴물들로 탑을 쌓아, 일행들이 밟고 올라갈 길을 만들었다. 그리고 곧장 천장의 벽면을 뚫고 올라가, 도약대로 쓸 수 있는 층을 주먹으로 내놓았다.
보통이라면 일행들을 위해 이렇게까지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번 회차의 유중혁은 달랐다.
무엇이 그를 그렇게 변하게 만들었는지는, 유중혁 자신도 잘 알 수 없었다. 공동을 쩌렁쩌렁 울리는 목소리가 들려온 것은 그때였다.
[정말 뜻밖의 상황이군요. 당신이 ‘화신 유중혁’입니까?]
라인하이트의 목소리.
층을 따라 천장을 주파하던 이지혜가 놀라서 물었다.
“뭐야, 안 죽었어?”
당연한 일이었다.
암흑성 랭킹 2위의 존재가, 겨우 돌무더기에 깔렸다고 죽을 리가 없으니까. 유중혁은 라인하이트의 말에 대답하지 않고 자신이 만든 천장 층계에 서서 일행들을 기다렸다. 이지혜와 이현성, 유상아를 비롯한 선두 그룹이 먼저 올라갔고, 이길영과 신유승의 후미 그룹이 뒤를 따랐다.
신유승이 곁을 지나치려는 순간, 유중혁이 어깨를 붙들었다.
“넌 같이 와선 안 된다.”
“네?”
신유승이 채 대답하기도 전에, 유중혁은 아이를 천장 아래쪽으로 밀쳤다. 입을 벌린 괴수들이 신유승을 기다리고 있었다. 놀란 이길영이 외쳤다.
“유승아! ······뭐야! 이게 무슨 짓이야!”
분노한 이길영이 유중혁에게 주먹을 휘둘렀다. 가볍게 피해낸 유중혁이 이길영의 주먹을 붙들고 말했다.
“너도 같이 가는 게 좋겠군.”
잠시 후, 이길영도 비명을 지르며 신유승을 따라 추락했다.
*
디오니소스의 화신이 자기 할 말만 하고 사라져버린 뒤, 한수영은 심각한 얼굴로 내게 물어왔다.
“······방금 그놈이 한 말, 대체 뭐였어?”
“나도 잘 몰라.”
“모른다고? 너도 필터링 된 거 못 들었어?”
못 들었다. 하지만 대충 무엇을 뜻하는지는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다.
그것은 아마도 이 모든 시나리오의 ‘끝’과 관계된 말일 것이다.
그러니 필터링이 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나는 이제 막 열 번째 시나리오에 도전하는 존재에 불과하고, 성좌가 되었다 한들 모든 정보를 자유로이 취득할 수 있는 건 아니니까.
한수영은 못마땅한 얼굴로 나를 보더니 작게 한숨을 쉬었다.
“······뭐, 그건 그렇다 치고, ‘운명’에 관한 건 어쩔 거야? 올림포스의 성좌가 직접 경고하러 올 정도라면 정말 위험한 거 같은데.”
“그런 거 같네.”
“운명은 완전히 막을 방법이 없는 거지?”
“정말 ‘완전히’ 피할 수 없는 건 아냐. 운명의 실행이 ‘절대적으로 불가능한 상황’이면 운명은 철회되기도 하니까. ‘운명’도 어디까지나 ‘개연성’을 따른다고.”
하지만 그것은 반대로 말하면, ‘약간이라도 실행 가능성이 있는 상황’이라면 절대로 운명을 피해갈 수 없다는 이야기이기도 했다. 뭔가를 생각하던 한수영이 물었다.
“구체적인 메시지 내용은 없어? 그냥 죽는다고 한 거야?”
“그게······.”
사실, 디오니소스는 내게 커다란 개연성 손실을 감수하고 예언 내용을 몰래 전해주었다.
「화신 김독자는, 가장 사랑하는 사람에 의해 죽게 될 것이다.」
솔직히, 나로서는 당혹스럽게 짝이 없는 이야기였다.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라니······.
게다가 그 사람이 날 죽일 거라고?
머뭇거리던 내가 예언 내용을 말해주자, 한수영이 멍하니 입을 벌렸다. 대체 무슨 말을 해야할지 모르겠다는 듯, 그녀는 얼굴이 창백해졌다가 붉어졌다가를 반복하더니 이내 표정이 사라진 채로 물었다.
“가장 사랑하는 사람?”
“그래.”
“······너도 그런 게 있냐?”
어쩐지 기분이 나쁘긴 하지만, 사실 내가 묻고 싶은 말이기도 했다.
한 사람 한 사람 얼굴들을 떠올려 보았지만, 인간적인 호감이 있는 사람은 있어도 ‘사랑하는 사람’은 없었다. 확실히 말해서, ‘사랑’은 내 인생과 가장 거리가 먼 단어였으니까.
“솔직히 없다고 말하는 게 맞겠지.”
내 대답에 한수영의 얼굴에 미미하게 화색이 돌았다.
“그럼 그 ‘운명’은 철회되어야 맞는 거 아냐?”
“얼핏 생각하면 그렇겠지만······.”
“아니면, 이제와서 누굴 좋아하게 되는 건가? 너 혹시 첫눈에 반하는 타입이야?”
“그런 적은 없지만, 그럴 가능성이 없지도 않을 거야.”
운명 메시지가 무려 세 번이나 반복될 정도로 ‘강력한 운명’이다.
혼란스럽다.
내가 누군가를 사랑하게 된다고?
나는 복잡한 얼굴의 한수영을 보며 입을 열었다.
“아니면, 다른 가능성도 있어.”
“······뭔데?”
“원래 ‘운명’은 그렇게 곧이곧대로 해석하는 게 아냐. 너도 그리스 신화 같은 거 봤으면 알 거 아냐? 원래 예언들은 곧바로 알아들을 수 있게 전해지지 않는다고. 비유나 상징투성이지.”
한수영이 고개를 갸웃했다.
“화신 김독자는 가장 사랑하는 사람에 의해 죽게 될 것이다. ······이 당연한 문장에 무슨 상징이나 비유가 있어?”
“그 ‘당연한 문장’이 의외로 다른 의미일 가능성도 생각해 봐야 한다는 얘기야.”
“흐음······.”
그래도 한수영은 작가니까, 의외로 이런 방면의 해석에 있어서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 실제로 한수영은 그럴듯한 가설들을 꺼내기 시작했다.
“그렇게 생각하니까 세 가지 정도 걸리는 부분들이 있는데.”
“뭔데? 말해봐.”
“일단 하나. 굳이 처음에 ‘화신’이 들어간 이유가 있을 것 같아.”
“······화신?”
나도 무심코 넘어간 부분이었다.
“너 이제 성좌가 됐잖아? 그럼 ‘화신’으로서의 너는 이미 죽었다고 봐도 무방한 거지. 아냐?”
그럴듯한 가설이다.
하지만 그 가설이 맞다면, 내가 반쪽짜리라도 성좌가 된 순간 운명은 실현되었다고 봐야 했다. 즉, 굳이 운명 메시지가 반복해서 찾아들 이유가 없는 것이다.
한수영도 그것만으론 뭔가 부족하다고 여겼는지, 두 번째 가설을 내놓았다.
“둘.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말 자체가 비유일 가능성이 있어.”
“<스타 스트림>에서 ‘사람’에 비유될 만한 게 뭐가 있지?”
“음······. 뭔가를 의인화했을 가능성도 있겠네.”
머리를 맞대고 생각해 보았지만, 이 부분에서는 딱히 그럴듯한 해석을 찾을 수 없었다.
그나저나 모처럼 진지한 한수영을 보고 있자니, 이 녀석도 썩 괜찮은 녀석이 아닌가 싶다. 나를 위해서 이것저것 생각해주는 것도 꽤 고맙고.
나는 한수영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지는 황혼 때문인지 한수영의 속눈썹이 유난히 길어 보였다.
이렇게 보니 이 녀석도 예쁘게 생기긴 했다.
사실 한수영이 좀 앳되어 보여서 그렇지, 절대 어디가서 꿀릴 외모는 아니긴 하다.
······잠깐만. 내가 지금 뭔 생각을 하는 건지.
조심해야 한다.
잘못하면 한수영에게 뒈지게 될지도 모르니까.
솔직히 그런 상황이 된다면 이 녀석은 날 망설임 없이 찌를 것이다.
실제로 이미 한 번 찌르기도 했고.
한수영이 다시 입을 열었다.
“마지막으로 생각해봐야 할 건 ‘죽음’이란 단어야. 어쩌면 여기서의 ‘죽음’이라는 게, 말 그대로의 ‘죽음’이 아닐 수도 있어.”
“그럼?”
“사람이 죽을 때가 언제라고 생각해?”
“그야······ 생명이 다했을 때겠지. 심장이 멈추고, 더 이상 숨을 쉬지 않게 되었을 때.”
내 대답에 한수영이 실망한 듯 혀를 찼다.
“하긴, 겨우 그런 수준이니 ‘멸살법’ 같은 소설을 계속 읽은 거겠지······.”
“······괜한 시비 걸지말고. 그럼 뭔뜻인데?”
“넌 만화도 안 보냐? 보통 이럴 때 하는 말 있잖아. 사람이 죽을 때는 언제냐? 그건 사람들로부터 잊혀졌을 때다!”
“그건 만화고. 그래서 뭐, 내가 잊혀지기라도 한단 소리야?”
“예를 든 거잖아 멍청아. <스타 스트림>에서도 성좌가 죽을 때는 모든 존재에게 잊혀졌을 때잖아. 비슷한 가능성을 재고해볼 수 있다는 거지.”
그렇게 들으니 영 가능성 없는 소리도 아닌 것 같다.
<스타 스트림>은 곧 거대한 이야기의 흐름이고, ‘관계’에서 도태된 존재는 자연히 이야기 속에서 사멸하게 된다.
“사람들이 왜 날 잊게 된다는 거지? 단체로 기억상실증이라도 걸리나?”
“잊는다는 게 그런 의미가 아닐 수도 있지.”
그 말을 하는 한수영의 얼굴은, 불현듯 외로워보였다.
그러고 보면, 나는 한수영이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모른다.
한수영이 ‘멸살법’을 표절한 소설을 썼다는 것 외에, 나는 그녀에 대해 딱히 아는 게 없는 것이다.
······심지어 이제 그 ‘표절’에 관한 부분도 확실치가 않다.
지난 번 [거짓 간파]에서는 한수영이 표절을 하지 않은 게 ‘진실’이라고 떴었으니까.
나는 잠시 사이를 두고 물었다.
“그럼 무슨 뜻인데?”
한수영은 잠시 말을 고르는 듯 싶더니, 어두운 얼굴로 입을 열었다.
“김독자, 죽은 사람들은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해.”
그제야 한수영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깨달은 내가 입을 벌렸다.
우리는 반사적으로 떠나온 <낙원> 쪽을 돌아보았다.
······설마?
한수영이 먼저 입을 열었다.
“다시 돌아갈까?”
“······지금 가면 늦어. 벌써 사흘 거리니까. 전력으로 주파해도 하루 안에 도착하기는 무리야.”
“그럼?”
“괜찮아. 지금쯤 최강의 원군이 도착했을 테니까.”
“최강의 원군?”
“그 녀석이야 내가 보낸지 모르겠지만······.”
물음이 이어지기 무섭게, 허공에서 메시지가 떠올랐다.
[암흑성의 누군가가 시나리오 최초로 초월좌(超越座)를 이룩하였습니다!]
역시, 예상대로군.
지금쯤 그 경지에 오를 거라 생각했다.
나는 멀리서 대참사를 일으키고 있을 유중혁을 떠올리며 말했다.
“이제 주인공도 밥값 좀 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