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4화
164화
그 말에, 정희원은 깜짝 놀랐다.
······고뇌한다고?
라인하이트는 누가 봐도 악이다.
이 자는 수많은 화신들을 속여 지하에서 괴수를 양산하고 있다.
그런데 어떻게, 악인이 아닐 수 있단 말인가?
[절대선 계통의 성좌들이 화신 ‘정희원’에게 판단을 맡깁니다.]
라인하이트가 입을 열었다.
“저를 죽이면 <낙원>은 끝날 겁니다.”
그 말에, 타오르던 정희원의 [지옥염화]가 일순 줄어들었다.
희미한 미소를 머금은 라인하이트가 말을 이었다.
“정희원 씨, 실은 이곳의 존재를 예상하셨지 않습니까?”
“무슨······.”
“사실은 알고 계셨을 겁니다. 완전한 <낙원>은 없다는 걸. 아름다운 곳에는 반드시 그림자가 존재한다는 당연한 사실을 말입니다.”
정희원은 대꾸하지 못했다.
몰랐다는 말은 기만이다.
당연히, 그녀도 생각했다. 이곳 또한 뭔가 끔찍한 진실을 숨기고 있을 거라고.
그게 이런 식일 거라고는 생각 못했지만······.
“······대체 괴수를 양산해서 어쩔 셈이에요? [암흑성]을 정복하기라도 할 건가요?”
“아무것도 하지 않습니다. 이들은 그저 <낙원>의 양분일 뿐이에요.”
공동의 중앙에 거대한 나무 줄기가 보였다.
촉수처럼 가닥을 뻗은 가지들이 주변의 괴수들을 탐색하고 있었다.
정희원은, 그 나무 줄기들이 어디로 향해 있는지 깨달았다.
언덕에 피어있던 작은 꽃, 영구기관.
저도 모르게 다리가 후들거렸다.
설마 이 나무는······.
“이상하지 않습니까? [암흑성]에 들끓는 무수한 악마종들이, 왜 이곳만큼은 침범하지 않는 것인지.”
이상하다고 생각하긴 했다.
이곳 <낙원>은 천혜의 요새라고 표현하기엔 부족한 점이 많았으니까.
“[암흑성]에, 왜 이토록 많은 [악마종]들이 생긴 것인지.”
빠르게 움직인 줄기들이 주변의 인간들을 하나둘씩 낚아챘다. 죄수들은 비명을 질렀지만, 반항할 틈은 없었다. 쾌속하게 움직인 줄기들은 죄수들의 몸을 꽁꽁 묶더니 둥치 쪽의 구멍으로 그들을 던져 넣었다.
푸스스스스!
끔찍한 소음이 들렸고, 마치 존재에게서 영혼을 거세하는 듯한 비명이 울려 퍼졌다. 그리고 잠시 후, 나무의 줄기 봉오리가 피었다. 그 봉오리에서 태어날 것이 무엇인지를 직감한 정희원이 몸을 떨었다.
몇 분도 지나지 않아 봉오리 속에서 괴생명체가 태어났다. 방금 나무가 집어삼켰던, 그 인간이었다.
크아아아아아아!
영구기관은, 악마를 만드는 나무였다.
정희원이 치를 떨었다.
“어떻게, 어떻게 이런 짓을······.”
<낙원>의 근처에서 악마종을 찾을 수 없는 이유.
역설적이게도 그것은, 이 <낙원> 자체가 악마종의 생산지이기 때문이었다.
“이곳에서 생산된 악마들은 매달 특정일이 되면 밖으로 배출됩니다. 감옥의 수용 인원에도 한계는 있으니까요.”
라인하이트가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런 눈으로 보지 마십시오. 악마가 된다는 건 꼭 나쁜 일만은 아닙니다.”
“······.”
“그들은 영생할 수 있고, 인간일 적보다 더 강해질 수 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쿠구구구구.
한층 성장한 나무가, 환한 빛을 내뿜더니 <낙원>의 대지에 양분을 공급하기 시작했다.
“자신의 ‘죄’를 바쳐, 다른 존재들의 삶을 지탱할 수 있습니다. 이를테면 순교자 같은 거지요.”
척박한 땅이 기름지게 변하고, [암흑성]에도 농작물이 자랄 수 있도록 생명력을 공급하는 원천. 그것이 바로 영구기관의 역할이었다.
모든 것을 이해한 정희원은 절망했다.
[절대선 계통의 성좌들이 당신에게 선택을 요구합니다.]
만약 여기서 그녀가 라인하이트를 벤다면, 지하 감옥은 붕괴할 것이다.
‘영구기관’은 급격히 시들 것이고, <낙원>의 체제는 망가질 것이다.
사람들은 살 땅과 먹을 것을 잃고, 난립한 괴수들은 그 모든 생명체들을 찢어발길 것이다.
“어째서······ 어째서······.”
그것을 알기에, 정희원은 라인하이트를 죽일 수가 없었다.
더 커다란 참사를 막을 자신이 없었기에, 그녀는 비극의 원천을 단죄할 자신이 없었다.
“누군가는 해야만 했으니까요.”
라인하이트의 얼굴은 슬퍼 보였다.
“시나리오의 패배자들에게도 삶은 계속됩니다. 누군가는 그들을 위한 장소를 만들어야 했어요.”
“정말 그들을 위했다면 시나리오를 계속할 수 있도록 도왔어야죠! 이런 곳을 만들 게 아니라, 사람들을 이끌고 시나리오를 클리어하기 위해 애썼어야 한다고!”
“당신은 모릅니다. 다음 시나리오에 등장하는 적은, 우리가 이길 수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그 음울한 눈빛에, 정희원은 놀랐다.
암흑성 랭킹 2위의 악마 후작.
그 누가, 저런 존재에게 두려움을 심을 수 있는가.
“······뭐가 있는지 알고 있는 거예요?”
“뭐가 있는지는 중요한 게 아닙니다. 그리고 설령 다음 시나리오를 클리어하더라도······ ‘그다음’은 언제나 준비되어 있습니다. 더 많은 실패자를 만들기 위해서.”
“그걸 모두 클리어하면 되잖아요! ‘시나리오’니까. 언젠가 끝이 있을 거 아냐? 스킬을 수련하고, 설화를 쌓으면서 나아가다 보면······!”
“언젠가, 모든 시나리오를 클리어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하십니까?”
정희원이 입을 다물었다.
모든 시나리오의 끝.
그녀의 동료인, 김독자가 도달하고 싶었던 그곳.
라인하이트가 계속해서 말했다.
“그러면 평화가 올 거라고, 그렇게 믿는 겁니까?”
정희원은 욱하는 마음으로 외쳤다.
“그래요. 그렇게 믿어요.”
“왜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단 한 사람이라도, ‘시나리오의 끝’에 도달한 존재가 있기라도 합니까?”
“성좌들이 있잖아요!”
“성좌들?”
“그들은 이 모든 시나리오의 바깥에 존재해요. 즉, 이 시나리오에서 탈출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는 거죠.”
마치 장난감처럼 화신들을 대하는 성좌들.
그런 ‘절대적 존재’들이 있기에, 화신들은 역설적으로 희망을 품을 수 있었다.
언젠가는 그들도 저 자리에 올라설 수 있을 거라고.
이 지옥 같은 시나리오의 바깥으로 도망칠 수 있을 거라고.
“하. 하하, 하하하······.”
라인하이트가 웃었다.
“그렇군요. 성좌들이라. 그 마음 이해합니다. 저도 한때는 그렇게 생각했으니까요.”
“······그게 무슨 뜻이에요?”
“왜 당신은, ‘성좌’들이 모든 시나리오를 클리어했다고 생각합니까? 김독자라는 자가 그렇게 말했습니까?”
김독자가 그런 말을 한 적은 없었다.
머릿속에서 불길한 예감이 스쳤다.
“그들은 분명 ‘시나리오’의 바깥에 있습니다. 하지만, 그저 ‘이 시나리오’의 바깥에 있을 뿐입니다.”
“······.”
“그들은 모두 우리처럼 시나리오를 수행하고 있습니다. 76번이든, 84번이든. 시나리오의 규모와 숫자가 다를 뿐, 그들 또한 우리와 같단 말입니다.”
그런 생각은,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다.
정희원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 그럼······?”
“성좌들은, 그저 시나리오의 도중에 태어난 규격 외의 초강자에 불과합니다. 그들은 신도 아니고, 절대자도 아니에요.”
마치 이 세계의 절대명제를 선언하듯, 라인하이트가 말했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리죠. 시나리오의 ‘끝’에 도달한 존재는, 아무도 없습니다.”
“······.”
“이 세계는, 영원한 지옥입니다.”
정희원은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저 성좌들조차 해내지 못한 것.
저 강대한 존재들조차, 도달하지 못한 장소.
김독자가 나아가고 있는 장소는 그런 곳이었다.
‘그런 걸······ 어떻게 하려는 거야? 김독자 당신은······.’
라인하이트가 말을 이었다.
“그게 제가 <낙원>을 만들 수밖에 없었던 이유입니다.”
정희원은, 멍하니 라인하이트를 올려다보았다.
“하지만 이대로 가면 <낙원>은 언젠가 붕괴합니다. 인간의 숫자는 적어지고, 악마종의 숫자는 끊임없이 늘어나고 있으니까요. 토지를 유지할 양분이, 터무니없이 부족한 상황입니다.”
절망하고 또 절망한 끝에, 그는 절망의 <낙원>을 만들었다.
“제겐 이 나무를 유지시킬 고결한 인간의 영혼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마침, 이번 분기에는 그런 영혼들이 꽤 많이 들어왔죠. 김독자나 당신도 그 중의 하나입니다.”
정희원은 그가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깨달았다.
“······그래서 내가 필요했던 건가요?”
“그렇습니다. 대천사의 선택을 받은 당신이라면 적어도 10년. 성좌가 된 김독자라면 앞으로 200년 이상 <낙원>의 생명력을 유지할 수 있을 겁니다.”
“내가 그딴 부탁을 들어줄 거 같아요?”
“당신은 들어줄 겁니다. 왜냐하면 ‘대천사’의 화신이니까.”
나를 희생하면 <낙원>을 지킬 수 있다.
“당신이 도와준다면, 당분간 경범죄자들을 처벌하지 않아도 됩니다. 수천, 수만 명의 목숨을 구할 수도 있습니다.”
정희원의 어깨가 가늘게 떨렸다.
내 목숨으로 수만 명을 구할 수 있다.
내가 죽지 않으면, 수만 명이 죽는다.
그르르르······.
물고기를 연상시키는 괴수가 바닥에서 꿈틀거리고 있었다.
잘 보니, 그 괴수의 얼굴은 금호역의 여인을 닮아 있었다.
간절한 눈빛으로 정희원을 보는 괴수가 울부짖었다.
“내가······.”
어차피, 버려진 삶이었다.
부모님도, 친구도, 그녀를 기억하는 사람도 모두 죽었다.
시나리오의 끝은 불가능한 것이고.
앞으로의 삶은 무용할 것이다.
“나는······.”
[절대선 계통의 성좌들이 당신을 바라봅니다.]
정희원은 결심했다.
“알았어요. 그러면, 내가······.”
그런 그녀가 죽어서 수만 명을 구할 수 있다면, 그것은 옳은 일이고, 정의로운 일이며, 선한 일일 것이다.
라인하이트의 표정이 누그러지는 것이 보였다.
그런데 마지막 순간, 뭔가가 그녀를 붙잡았다.
‘하지만, 그럼 내 삶이란 건 뭐지?’
그것은 아마도 허무였고.
‘나는······ 대체 뭐였던 거야?’
마지막 남은 삶의 미련이었다.
그리고 그녀는 이미 답을 알고 있었다.
―희원 씨는 칼을 잘 쓰죠.
―우리 중 누구보다 불의 앞에 냉정해요. 특히 강자들의 횡포에는 더욱 민감하죠.
―항상 일행의 맨 앞에서 싸우고, 한 번도 힘들다고 불평한 적이 없어요.
왜냐하면 누군가가, 이미 답을 주었기 때문에.
―정희원 씨가 시나리오를 계속했기 때문에, 제가 알 수 있었던 것들입니다.
아마, 김독자는 처음부터 시나리오의 실체를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저는 시나리오를 계속해야 한다고 믿습니다.
정희원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여기서 죽을 수 없어.”
그래서 그녀는 이기적이 되기로 했다.
살기로, 마음먹었다.
설령 자신의 선택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이 죽더라도.
그것마저 감수하고 살아가기로 마음먹었다.
“아뇨, 그만 죽어주시죠.”
그러나 우리의 의지와 삶은 때로 무관하다.
“그리고 순순히 <낙원>의 양분이 되십시오.”
[지옥염화]를 전력으로 발출하더라도 모두 상대할 수 없는 숫자의 악마종들. 정희원은 표정을 굳히며 모든 마력을 개방했다. 죽을 수 없다. 죽지 않을 것이다.
꽈아아아앙!
순간 뒤쪽의 격벽이 터지며, 사람들이 나타났다.
“희원 씨!”
“아 언니 또 혼자 가면 어떡해요!”
그녀의 삶을 지탱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라인하이트는 당황한 기색이 아니었다.
오히려 잘 됐다는 듯, 그는 미소지었다.
“많은 양분을 얻을 수 있겠군요.”
누가 뭐래도 그는 암흑성 랭킹 2위의 강자.
김독자도 없는 그룹이 두려울 턱이 없었다.
“모두 뒤로 물러서십시오!”
이현성이 일행들을 보호하며 앞으로 나섰다.
아까보다 훨씬 든든해지긴 했지만, 상황이 나쁜 것은 마찬가지였다.
아마 이 싸움에서 누군가는 죽을 것이고, 운이 나쁘면 모두가 죽을 것이다.
김독자가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김독자에게 의지하지 않기 위해 노력했음에도, 결국 정희원은 또 그런 생각을 하고 말았다.
“이곳이 당신들의 ‘끝’입니다.”
그렇게 선언한 라인하이트가 손을 치켜들었다.
그리고 그 순간, 천장의 지반이 통째로 무너졌다. 마치 폭격기가 벙커 버스터를 퍼붓듯, 무식한 폭음이 연달아 울려 터졌다.
콰아아아앙!
쿠구구구구!
가공할 에테르의 폭풍이 영구기관의 가지들을 찢어발겼고, 부서진 지반이 라인하이트와 괴수들 위에 그대로 떨어져 내렸다.
크아아아아!
끔찍한 비명을 지르며 내리깔린 괴수들. 매캐한 폭연 속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더럽게 깊은 곳에도 숨었군.”
내려 앉은 지반 더미 위로 무뚝뚝한 사내와, 그를 뒤쫓는 여인의 그림자가 보였다. 경이와 당혹감 속에서 자신을 바라보는 일행들을 마주 보며, 유중혁이 짓씹듯 말을 이었다.
“······그런데 김독자는 어디 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