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3화
163화
나는 순간 잘못 들었나 싶어서 귀까지 팠다.
하지만 메시지는 바뀌지 않았다.
[어떤 거대한 운명이 당신의 죽음을 바라고 있습니다.]
뭐지?
나는 혼란한 마음에 브레이크를 힘껏 밟았다.
급정거로 밀려온 관성에 한수영이 작게 비명을 내질렀다.
“······뭐야? 한창 기분 내고 있는데!”
“조용히 좀 해봐.”
나는 다시 한번 귀를 기울였다. 그러자 이번에는 음성뿐만 아니라 화면으로 메시지가 떠올랐다.
[어떤 거대한 운명이 당신의 죽음을 바라고 있습니다.]
이걸로 세 번째.
나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빌어먹을. 원작에서 ‘운명 메시지’가 세 번이나 들려온 적이 있던가?
나는 생각했다.
아마······ 71회차의 유중혁이 그랬지.
그때 유중혁은 염라대왕의 살생부에 이름이 적혔었다.
제길, 무슨 일이 일어나려는 거지?
한수영이 닦달하듯 물었다.
“왜? 무슨 일인데?”
“누군가가 내 ‘운명’을 읽었어.”
“······운명?”
운명. 그것은 ‘멸살법’에서 ‘개연성’만큼이나 무서운 말이었다.
사실 엄밀히 따지면 이것도 넓은 의미에서는 ‘개연성’을 이용한 힘이었다. 하지만 굳이 변별해서 부르는 이유가 있었다.
왜냐하면 ‘운명’은, 성좌들이 자신들이 가진 누적 개연성 코스트를 이용해 행사하는 힘이었기 때문이다.
“어, 잠깐만. 그거 나도 왠지 아는 이야기인 거 같은데······.”
“아마 원작 초반에도 잠깐 언급은 됐을 거야.”
“운명이라······ ‘미래시’랑 비슷한 거 아냐?”
“비슷한 부분도 있는데, 좀 달라.”
사실은 많이 다르다.
운명을 읽는 것은 단순히 ‘미래의 정보’를 읽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보다 훨씬 위험한 데가 있다.
“‘미래시’가 예측 가능한 미래를 엿볼 뿐이라면, ‘운명’은 예측 가능한 미래를 강요하는 ‘힘’이야.”
한수영이 이해하고 있는 건지 아닌지 알 수가 없어서 나는 설명을 덧붙였다.
“가령 내가 5초 뒤에 엑셀을 밟는다고 가정하자. 그럼 ‘미래시’로 그걸 보면 나는 달리고 있겠지?”
“······뭐, 그렇겠지.”
“그런데 내가 미래의 정보를 알고 있다면, 나는 무슨 수를 써서든 엑셀을 밟지 않을 수도 있을 거야.”
“그럴 수도 있겠지.”
“그런데 ‘운명’은 달라. 만약 누군가가 ‘김독자가 5초 뒤 엑셀을 밟는다’라는 운명을 읽어낸다면, 그 운명은 철회되거나 실현되지 않는 한 ‘강제력’이 발생해. 그러니까 쉽게 말하면······.”
“넌 반드시 엑셀을 밟게 된다는 거구나.”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한수영이 이상하다는 듯 말했다.
“근데 그거 좀 이상한데.”
“뭐가?”
“개연성에 맞지 않잖아. 네 말에 따르면 ‘운명’이라는 건 시나리오에 간섭할 정도의 힘인데, 대체 누가 그런 걸 강요할 수 있다는 거야?”
“······누구겠냐.”
이번 시나리오는 원칙적으로 도깨비의 간섭이 없다.
그러니, 간섭할 놈들은 하나뿐이다.
바로 알아들은 한수영이 답했다.
“아무리 성좌라고 해도 혼자서는······.”
“혼자가 아니니까 문제지.”
“뭐?”
“‘운명’을 읽어낼 수 있는 건 거대 성운들 뿐이야.”
말하기가 무섭게, 전방에서 폭음이 터져나왔다.
쿠구구구구!
가공할 속도로 뭔가가 다가오고 있었다.
지금까지 상대했던 허접한 괴수들과는 차원이 다른 존재.
한수영의 낯빛이 창백해졌다.
“······김독자, 네가 받았다는 운명 메시지, 정확히 내용이 뭐야?”
“내가, 죽는다는 내용.”
“제기랄, 그것부터 말했어야지! 어쩐지 뭔가 잘 풀린다 싶더라니······.”
한수영이 뭐라뭐라 욕설을 내뱉으며 차에서 내리려는 순간.
전방의 폭연 속에서 한 존재가 나타났다.
반사적으로 [부러지지 않는 신념]을 뽑아드는데, 먼저 사내가 입을 열었다.
“김독자. 전할 말이 있어.”
처음 보는 사내였다.
하지만 그의 전신에서 느껴지는 기운이 익숙했다.
본능적으로 적이 아니라는 느낌이 왔다.
“당신은······.”
향긋한 포도주의 향기와 과하게 들뜬 공기를 맡는 순간, 이 자가 누구의 화신인지 감이 왔다.
“······내가 죽을 거란 얘길 하러 온 겁니까?”
만취한 술냄새를 머금은 디오니소스의 화신이, 눈을 하얗게 뜬 채 나를 향해 웃었다.
“오, 알고 있었어?”
디오니소스에 대해서는 좋은 이미지가 남아 있었다. 연회장으로 가던 당시, 그는 나를 위해 진체를 강림해 싸워 준 적이 있었다. 그런데 상황이 이렇게 되면 얘기는 좀 달라진다. 나는 경계하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내 운명을 읽은 게 당신들입니까?”
“그래. 운명을 읽은 건 <올림포스>가 맞아. 그런데 내가 그중 하나냐고 묻는다면, 그건 아니야.”
“그게 무슨 뜻이죠?”
디오니소스의 화신은 그저 미소할 뿐이었다.
그 미소를 보는 순간, 어떤 생각이 스쳐갔다.
“설마 <올림포스>가 분열한 겁니까?”
“역시 똑똑하네.”
······벌써?
이것도 원작의 전개보다 빠르다.
<올림포스>의 균열은 예정되어 있긴 했지만, 적어도 10번 시나리오가 끝난 후 벌어질 일이었다.
“<올림포스> 뿐만이 아니야. 너를 노리는 성좌들이 있다. 아주 강대하고, 힘이 센 녀석들.”
예상은 했다.
그렇지 않으면, ‘운명’ 따위가 발호할 턱이 없으니까.
“왜 저를 노리는 겁니까?”
“그 강한 놈들이 은근히 쫄보라, 네 영향력을 두려워하거든.”
“전 그냥 풋내기 성좌일 뿐인데요?”
“본래라면 그렇지. 그런데 지구에서 시작된 이번 시나리오는 매우 특별해. 어떤 성좌들은 이 시나리오야 말로 우리가 오래도록 기다려 온 시나리오라 믿고 있어. 아아, 그런 표정 짓지마. 딱히 이해하라고 한 말 아니니까.”
그냥 원래 내 표정이 이렇다고 말해주고 싶지만, 디오니소스는 쉴 틈도 없이 말을 이었다.
“아무튼 이번 시나리오가 우리한테 엄청 중요하다는 것만 알면 돼. 그런데 하필 그 시나리오에, 네가 나타난 거지.”
“뭔진 모르겠지만, 제가 방해다 그거군요.”
“그래. 방해가 될 수밖에 없지. 너는 다른 성좌들에 비해 개연성의 영향을 훨씬 적게 받을 테니까. 심지어 다른 화신들에 비해서도 압도적인 성장력과 강함을 가지고 있지. 때문에 일부 성운들은 너를 반드시 포섭하거나, 그렇지 못하면 제거해야 한다고 믿어.”
나는 잠시 디오니소스를 바라보았다.
“······저한테 이 정보를 알려 주시는 이유가 뭐죠?”
사실 이게 가장 궁금했다.
디오니소스는 왜 내게 이런 친절을 베푸는 것인가?
“그야, 네 이야기를 좋아하기 때문이지.”
디오니소스는 너털웃음을 지으며 말을 덧붙였다.
“나와 몇몇 성좌들은, 네가 ■■에 도달할 수 있는 존재라 믿는다.”
*
정희원은 일행들과 그날 내내 낙원의 ‘지하 감옥’에 대해 조사했다. 다수의 인원이 한꺼번에 침입할 방법이 없었기 때문에, 일행들은 각자 흩어져서 방법을 찾기로 했다. 그리고 정희원이 택한 방법은 나름 정공법이었다.
‘섞여서 들어간다.’
오후 무렵이 되어 새로운 범죄자들이 등장했고, 우리엘에게 [은둔자의 망토]를 지급받은 그녀는 ‘지하 감옥’이 열리는 틈을 타 경비대를 뒤쫓았다. 경비대와 구속된 범죄자들은 그녀의 인기척을 느끼지 못하고 지하로 가는 문을 열었다.
감옥은 생각보다 훨씬 깊은 곳에 있었고, 지하도의 어둠은 그녀의 상상보다도 어두웠다.
‘······대체 어디까지 내려가는 거지?’
이해가 가지 않는 깊이였다.
아무리 감옥이라 한들, 이렇게까지 깊은 곳에 수용할 필요가 있는가? 이래서야 옮기는 쪽도 불편할 텐데······.
의문이 드는 순간, 경비대의 걸음이 일제히 멈춰섰다.
기이하게도 그들 모두의 표정에 긴장감이 서려 있었다.
“저기까지만 옮겨! 바로 철수한다!”
마치 들어가면 안 되는 곳에 발을 내딛은 사람들처럼, 경비대는 두려워하고 있었다. 심지어 저 무서운 경비대장까지도 그랬다. 이윽고 두터운 철문이 등장했고, 철문을 열자 쇠창살이 채워진 입구가 나왔다. 몇 겹이나 되는 쇠창살. 인간을 가두기 위해 만들어졌다기엔 과도한 방비의 감옥이었다.
“다들 들어가!”
수화물을 던지듯 죄수들을 몰아 넣은 경비대는, 이내 빠르게 지상으로 걸음을 재촉했다.
“우, 와아악!”
“살려주세요!”
죄수들의 틈에 섞여 들어온 정희원은, 발악하는 사람들을 보며 침음했다.
이 사람들은 대체 왜 여기에 던져진 걸까.
이곳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지?
“으, 으으······ 여긴 대체 어디야?”
죄수들이 비척거리며 주변을 살폈다.
은은한 등이 켜져 있긴 했지만, 사위는 무척 어두웠다. 정희원도 [야간시] 스킬이 없었더라면 진즉에 어둠 속에서 길을 잃었을 정도였다.
‘여기가 감옥이라고?’
아무리 주변을 둘러봐도, ‘감옥’이라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주변 경관은 차라리 자연 동굴에 가까웠고, 죄수들을 구분하는 방도 보이지 않았다.
아니, 애초에 갇혀 있는 죄수들이 보이지 않는다.
‘식량 배급 같은 건 어떻게 이루어지는 거지? 대체 뭐야?’
도무지 알 수 없는 ‘지하 감옥’의 시스템.
당황한 것은 함께 들어온 죄수들도 마찬가지인 듯했다.
“여기서 우리끼리 뭘 어쩌라는 겁니까?”
“저기요! 아무도 안 계십니까?”
겁에 질린 죄수들이 외쳤지만, 돌아오는 말은 없었다.
대신, 어둠 건너편에서 희미한 울음소리 같은 것이 들려왔다.
그르르르르.
정희원은 [심판자의 검]을 천천히 뽑아들었다.
우우우웅.
이곳에 발을 내딛은 직후부터, 검이 더욱 격렬하게 울부짖고 있었다.
‘이건······.’
섬뜩한 감각이 뒷덜미를 스쳐가는 순간, 정희원은 날카로운 목소리로 외쳤다.
“모두 도망쳐요!”
그러나 이미 때는 늦었다. 어둠 속에서 쏜살같이 달려온 괴물들이, 사람들을 덮쳐왔던 것이다.
“으, 으아아아악!”
“살려줘! 끄아아아!”
표범을 닮은 괴생물체들이 사람들의 팔과 다리를 마구잡이로 물어 뜯고 있었다. 장난감처럼 찢겨 나간 사람들의 사지가 핏줄기와 함께 솟구쳤다.
본래는 숨어 있다가 금호역의 여인만 구출해서 나갈 계획이었지만, 이렇게 되면 상황은 달라진다. 거의 레벨 10에 다다른 [귀살]이 귀기를 뿜자, 새빨간 아우라가 그녀의 전신에 휘감겼다.
스가가각!
완벽한 선을 그리는 [검도]. 그 말끔한 선분에 표범들의 몸이 종잇장처럼 갈라졌다. 흥분한 표범들이 뒤이어 그녀에게 달려들었지만, 그녀는 연이은 검격으로 달려드는 괴수들을 깨끗하게 처리했다.
악마종들이 들끓는 이곳에서, 정희원의 힘은 그야말로 최고조였다.
“누, 누구신지 모르겠지만 고맙습······.”
어둠 속을 더듬는 사람들이 그녀의 인기척을 찾으며 감사 인사를 표했다.
그러나 정희원은 그 인사를 받을 감정적 여유가 없었다.
그녀는 너부러진 표범들의 얼굴을 확인하고 있었다.
‘이게 대체 뭐야.’
표범의 얼굴은, 사람의 그것을 하고 있었다.
반사적으로 몸을 일으킨 정희원은 어둠 속을 내달렸다.
모든 감각이 서늘해질 정도의 공포.
그렇게 한참을 달려가자, 그녀의 역량으로는 차마 잴 수 없을 만큼의 거대한 공동이 나타났다. 정확히 말하면 공동은 아니었다. 그 안에는 무수한 괴물들이 들어차 있었으니까.
그르르르······.
그와아아아아!
인세의 마경(魔境)이 이런 모습일까.
5급종은 물론이고 4급종, 3급종. 그 외에 급수를 알 수 없는 녀석들까지.
“이게 <낙원>이라고······.”
금호역의 여인은 찾을 수 없었다.
당연히, 찾을 수 없을 것이었다.
그녀는 이미 이 녀석들에게 먹혔거나······.
그아아아아!
이 녀석들 중, 하나가 되어 있을 테니까.
생명의 기척을 느낀 괴물들이 흥분하고 있었다. 대부분은 악마종과 다른 괴수종의 혼혈이었다. 충왕종의 형태를 띤 녀석, 인외종의 형태를 띤 녀석······ 바깥에서 본 듯한 외형을 가진 놈들도 있었다.
뒤쪽에서 죄수들이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오지 마!”
하지만 그녀의 외침이 닿기도 전에, 지반이 흔들리며 괴수들의 축제가 시작되었다. 공동을 중심으로 개미굴처럼 뻗은 통로 속에서 괴수들이 달려나오고 있었다. 정희원은 입술을 깨물며 [지옥 염화]를 발동했다.
‘혼자 오는 게 아니었어.’
아니, 같이 왔다고 한들 어쩔 수 있을까.
이현성이나 다른 꼬마들이 같이 있었다고 해서.
이 아득한 적들과 맞서 싸울 수 있을까.
차라리, 혼자 온 게 다행인지도 모른다.
“끄아아아아!”
범죄자들이 무참히 먹이로 전락하는 동안, 정희원은 [지옥염화]가 담긴 [심판자의 검]을 휘둘렀다. 불타는 대천사의 염열이 공동을 메우자, 일순 놀란 악마종들이 물러나며 경호성을 발했다.
하지만, 그 대치가 언제까지 계속될지는 알 수 없었다.
불길의 경과를 살피던 괴수들 중 몇몇이 과감히 앞으로 뛰어들려던 순간.
“오셨군요, 대천사의 화신이여.”
그 목소리에, 불길도 두려워 않던 괴수들이 약한 신음을 토하며 물러났다.
돌아보자, 그곳엔 낙원성주 라인하이트가 있었다.
“이제 경비대장을 할 마음이 생기신 겁니까?”
“······이 꼴을 보고도 그런 말이 나와요?”
정희원은 이를 까드득 갈며 말했다.
“당신은 거짓말쟁이야. 낙원? 시나리오의 공포로부터 벗어난 곳? 지금 이딴 곳을 만들어 놓고 그런 말이 나와?”
그녀는 [심판자의 검]으로 라인하이트를 겨누었다.
김독자의 생각이 옳았다.
이 세상에 <낙원> 같은 건 없다.
우리는······ 시나리오를 계속하는 수밖에 없다.
“저를 죽이고 싶으시다면, 그러셔도 됩니다.”
“허락하지 않아도 그럴 거예요.”
당연히 그럴 것이다.
배후성의 힘을 빌려서라도, 이 끔찍한 악몽을 끝낼 것이다.
[‘심판의 시간’을 발동합니다!]
[절대선 계통의 성좌들이 당신의 요청에 고뇌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