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0화

160화 나와 정희원은 <낙원>의 중심 상가를 지나 작은 언덕으로 향했다. 보통 성주가 머무르는 곳은 자연히 화려한 내성의 궁정이기 마련이다. [피스 랜드]의 성채도 그랬으니까. 하지만 <낙원>의 성주는 결코 ‘보통’의 존재는 아니었다.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눈을 부릅뜹니다.] [성좌, ‘젊은이와 여행자의 수호자’가 불편한 심기를 드러냅니다.] 언덕과의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에덴>의 성좌들은 격렬한 반응을 보였다. 젊은이와 여행자의 수호자. 아마 새로운 대천사가 나를 주목하기 시작한 모양이다. 간접 메시지에서 느껴지는 희미한 존재압으로 가늠해보자면, 최소 우리엘급인 것 같았다. 아무래도 <에덴> 3대 천사 급인듯 한데. [성좌, ‘긴고아의 죄수’가 당신이 한바탕 날뛰기를 기대합니다.] [성좌, ‘심연의 흑염룡’이 당신의 성흔을 궁금해합니다.] 거기다 제천대성에 흑염룡까지. 간만에 채널 단골 3인방이 모두 모였다. 제천대성은 지난번 성운 창설 때 도움을 받은 것도 있고 해서,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성좌, ‘긴고아의 죄수’가 여의봉으로 코를 후빕니다.] ······간접 메시지만 보면 이 녀석이 그 포스 넘치던 제천대성이라고는 믿기지 않는다. 실은 간접 메시지를 대필시키고 있는 건 아닐까? 가령 그때 봤던 분신이라든가. 어쨌거나, 이제 ‘은밀한 모략가’만 오면 초반 4인방이 모두 모이는 건데······. [성좌, ‘은밀한 모략가’가 흥미로운 눈으로 사태를 관망합니다.] 생각하기가 무섭게, 기어코 마지막 녀석까지 왔다. 은밀한 모략가. 지난번 연회에서 딱 하나 아쉬운 게 있다면, 녀석의 얼굴을 확인하지 못한 것이다. 분명 설화급 중에서도 최상급이 분명한데, 아무리 생각해도 이 녀석의 수식언은 본 기억이 없었다. 갑자기 의문이 든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 정도로 강한 존재가 원작에 안 나올 수가 있을까? [다수의 성좌들이 당신의 행동에 주목합니다.] “다 왔어요.” 정희원의 말과 함께, 나는 언덕으로 올라가는 길목에 멈춰섰다. 언덕 위에는 하얀 칠을 한 벽돌집이 있었다. 언덕 위의 하얀 집이라. 의도한 건진 모르겠지만 취향 한번 독특하다. “저는 여기서 기다릴게요. 무슨 일 있으면 바로 부르세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내가 부른다고 해서 정희원이 바로 달려오지 못할 거란 것쯤은 이미 알고 있었다. 적어도 이 <낙원>에서, 낙원성주를 이길 수 있는 존재는 없을 테니까. 길을 쭉 따라 올라가자, 이윽고 벽돌집 곁에 붙어선 그림자가 나타났다. 훤칠한 키에 조각으로 빚은 듯 아름다운 외형의 사내가 그곳에 서 있었다. “아, 오셨군요.” [제4의 벽]이 없었더라면 나조차도 숨을 멈출 수밖에 없을 정도로 아름다운 외형이었다. 유중혁도 잘 생겼지만, 이 녀석은 아예 인외(人外)라고 밖엔 표현할 수 없을 것 같은 외모다. 말하자면, 악마적인 아름다움이랄까. “죄송합니다만,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이 녀석이 낯을 많이 가리거든요.” 사내는 언덕에 핀 꽃에 물을 주고 있었다. 꽃은 허공을 향해 피어 있었다. 하늘을 집어삼키려는 듯 탐욕스레 꽃잎을 벌리고 있지만, 한편으로 자신은 그저 작은 꽃일 뿐이라는 듯 조신하게 돋아난 암술. 나는 그 꽃의 이름을 알고 있었다. “영구기관(永久機關)이군요.” 본래는 밖으로부터 에너지원을 공급받지 않고 영원히 일을 하는 가상의 기관을 이르는 총칭이지만, 이곳에서는 그저 꽃의 이름일 뿐이다. 사내가 물었다. “이 식물을 알고 계십니까?” “매일매일 새로 피는 꽃이죠.” “식견이 대단하시군요.” 물론 ‘멸살법’을 읽어서 아는 내용이었다. <낙원>의 꽃, 영구기관. 오직 이 언덕에서만 자라는 이 꽃은, 새벽 나절에 봉오리를 틔워 밤이 될 무렵 열매를 맺는다. 열매는 새벽이 되기 전 떨어지고, 식물은 다시 자신의 열매를 비료로 꽃을 피운다. 영구기관은 그것을 영원히 반복하는 식물이다. 사내는 그런 꽃이 무척 사랑스럽다는 듯 말했다. “아무리 봐도 질리지 않는 아이지요. 이 아이의 생명력은 정말 경이롭습니다.” “하지만 잘못 지어진 이름이죠. 정말 ‘영구기관’이었다면 저 꽃은 물 없이도 잘 자라나야 하니까.” “이렇게 아름다운 꽃을 피우는데, 그 정도 흠결은 애교로 볼 수 있지 않겠습니까?” 사내가 너털웃음을 지으며 나를 보았다. “다시 소개하지요. 제 이름은······.” “<낙원>의 성주, 라인하이트 폰 제르바.” 당연히 나는 그를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멸살법’에서 가장 유명한 ‘십악’ 중 하나니까. 라인하이트가 새하얀 미소를 지었다. “반갑군요, 김독자.” 역시, 저쪽도 내가 누군지 이미 알고 있었군. [전용 스킬, ‘등장인물 일람’을 가동합니다!] [해당 인물의 관련 정보가 지나치게 많습니다. ‘등장인물 일람’이 ‘요약 일람’으로 변환됩니다.] + <등장인물 요약 일람> 인물 : 라인하이트 폰 제르바 전용 특성 : 악마 후작 (전설), 불가능한 망상을 좇는자 (영웅) 전용 스킬 : [악마의 눈 Lv.10], [최상급 무기연마 Lv.10], [상급 정신 방벽 Lv.10]······. 성흔 : [낙원의 주인 Lv.10] 종합 능력치 : [체력 Lv.99], [근력 Lv.99], [민첩Lv.99], [마력Lv.99] * 해당 인물의 암흑성 랭킹은 ‘2위’입니다. + 정말 대단한 능력치였다. 종합 능력치는 시나리오의 제한 기준을 돌파했고, 거의 모든 스킬의 숙련치가 최대치에 도달해 있다. 아마 지금 라인하이트는, 이번 시나리오가 가진 ‘한계’ 그 자체일 것이다. 내 시선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라인하이트가 손사래를 쳤다. “너무 적의를 불태우시면 곤란합니다. 영구기관이 상하거든요.” “왜 나를 불렀습니까?” “소문만 무성한 존재가 궁금했습니다. 당신이 이 시나리오에 진입한 순간부터 온갖 존재들이 시끄럽게 떠들었거든요.” 라인하이트는 지금까지 만난 ‘십악’과는 다르다. 공필두나 이설화가 성장 중인 ‘십악’이었다면, 라인하이트는 이미 완성에 가까운 ‘십악’이었다. “당신 같은 존재가 이 시나리오에 들어오다니, 저로서는 위협이 되지 않을 수가 없지요.” “랭킹 2위의 ‘악마 후작’ 치곤 겸손이 과하군요.” “······거기까지 알고 계셨습니까? 사전조사가 철저하십니다.” 녀석의 돌아선 등을 보며, 불쑥 욕구가 솟았다. ······지금 기습할까? 망설여졌다. 놈을 이기지 못할 것 같다거나, 놈을 죽이지 못할 것 같아서는 아니었다. 물론 싸우면 쉽지는 않겠지. 승부의 향방도, 확실히 장담할 수 없다. 하지만 이 망설임의 이유는······. “제 세계에서 [암흑성]은 34번째 시나리오였습니다.” 아마도, 녀석의 <낙원>을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라인하이트는 언덕 아래로 펼쳐진 성채의 정경을 보고 있었다. “팔백년 전, 이곳에 처음 떨어졌던 순간을 기억합니다. 그때 이 평원에는 아무것도 없었지요. 주어진 것은 오직 ‘랭킹’뿐. 화신들은 아무런 시나리오도 내려오지 않았음에도, 서로를 해치고 죽이는 데 여념이 없었습니다.” 나는 처음 평원에 떨어졌을 그들을 상상해보았다. [암흑성]의 모든 존재들은 시간이 지나며 악마화가 진행된다. 그러니 최초로 이 암흑성에 온 화신들도, 처음부터 악마는 아니었을 것이다. “오로지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기 위해, 더 강한 존재가 되기 위해. ‘제한 시간’도 ‘실패 조건’도 없는 이곳에서, 그들은 단지 ‘더 높은 랭킹’만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던졌습니다. 끝없는 전쟁과 학살. 그것만이 이야기가 사라진 곳에서 화신들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시나리오’였으니까요.” 시나리오가 사라졌다고 해서 반드시 행복해지는 것은 아니다. 성좌든 화신이든, 모든 존재는 결국 ‘이야기’를 필요로 한다. 하지만 라인하이트는 그것에 동의하지 않았다. 누군가의 시나리오 속 장난감이 되는 것에 지긋지긋해진 그는, 더 이상 시나리오의 노예가 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저는 이 <낙원>을 만들었습니다.” 나는 라인하이트가 진심이라는 걸 안다. “도깨비들은 이 평원을 ‘무덤’이라 부르지만, 나는 아닙니다. 비록 오랜 세월 끝에 피를 뒤집어 쓴 악마가 되었지만, 나는 오직 시나리오가 사라진 곳에서만이 진짜 삶이 피어날 수 있다고 믿습니다.” 절절한 감상이 담긴 말이었다. 만약 내가 ‘원작’을 읽지 못했더라면, 여기서 그냥 넘어갔을지도 모를 정도로. 「가장 순수한 악」. 작중의 유중혁은, 라인하이트를 그렇게 불렀다. “성좌 김독자. 당신은 ‘다음 시나리오’로 가려는 생각이겠지요.” “그렇습니다.” “포기하십시오. 그런 것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예상대로, 그런 말을 할 줄 알았다. “팔백 년 동안 살면서, 당신과 같은 존재를 처음 본 게 아닙니다.” “······.” “무수한 강자들이 숨겨진 시나리오를 찾아 나섰지만, 누구도 [암흑성]을 클리어 한 자는 없습니다. 모두가 시나리오의 공허 속에 절망하며, 좌절했을 뿐이지요.” 그는 계속해서 말했다. “나는 당신이 그들처럼 되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원하는 게 뭡니까?” “성좌 김독자. 나와 함께 <낙원>을 지켜주십시오. 나는 당신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나는 말없이 그의 곁을 스쳐가 ‘영구기관’의 꽃잎에 손을 댔다. 깜짝 놀란 라인하이트가 나를 만류하기도 전에, 부르르 떨린 꽃이 순식간에 쪼그라들며 열매가 되어 떨어졌다. 떨어진 열매는 급격하게 썩더니 이내 언덕을 굴러 지상으로 떨어졌다. 퍼거걱! 마침 근처를 지나던 경비대가 그것을 보았지만, 그들은 별다른 신경을 쓰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들은 <낙원>의 썩은 부분을 도려내기에 여념이 없었기 때문이다. “으, 으으······ 풀어줘! 잘못했다고!” “겨우 물건 하나 훔쳤다고 이럴 필욘 없잖아!” <낙원>의 범죄자들이 언덕 아래쪽의 지하로 이송되고 있었다. 나는 그들이 어디로 끌려 가는 건지 알고 있었다. [일부 성좌들이 불쾌한 웃음을 흘립니다.] 영구기관이 존재하지 않듯, <낙원>도 공짜로 유지되지는 않는다. 저들은 아마 이 <낙원>의 비료가 될 것이다. 마치, 썩은 열매가 식물의 비료가 되었듯이. 지하 깊은 곳에서 작은 지진파가 일었다. 어디선가, 끔찍한 괴수종의 울음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았다. “라인하이트. <낙원>은 없습니다. ‘영구기관’이 존재할 수 없는 것처럼.” 라인하이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마치, 내가 어디까지 알고 있는 것인지 시험해보는 듯한 눈빛. 하지만 그는 곧 그 여유를 후회하게 될 것이다. “내게 ‘다음 시나리오’를 넘겨 주십시오.” 라인하이트의 눈에, 처음으로 당황의 기색이 스쳤다. “당신이 이미 칠백 년 전에 그걸 찾았다는 걸 압니다. 정확히는, 당신을 비롯한 몇 명의 강자들이 그걸 찾았죠.” “그걸 어떻게······.” “심지어 당신은 그 ‘시나리오’에 도전한 적도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 “하지만 당신은 실패했고, 혼자 살아남았습니다. 그리고 이 <낙원>을 만들었죠.” 꽃잎을 돌보던 그의 손끝이 크게 떨리는 것을, 나는 놓치지 않았다. 그는 사람들에게 삶을 찾아주기 위해 이곳을 만들었다고 했다. 하지만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이곳은 그저 불가능한 시나리오에 대한 도피처일 뿐이니까. “<스타 스트림>의 모든 ‘시나리오’는 자극을 위해 존재합니다. 그런데 이 <낙원>에는 그럴 만한 게 없죠. 모든 게, 너무 평화롭습니다.” “······.” “도깨비들과의 ‘거래’가 언제까지 유효할 거라 믿지 마십시오. <스타 스트림>은 결코 이런 공간을 오래도록 허용하지 않을 겁니다.” 잠시 말이 없던 라인하이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성좌 김독자. 또 뭘 알고 있지?” 말투가 바뀌었다. 그의 전신에서, 희미하지만 무서운 적의가 스멀스멀 흘러나오고 있었다. 아마 방금 그 대화로, 그는 나에 대한 태도를 바꾼 것이다. 기대할만한 조력자에서, 누구보다 위협적인 적으로. “전부 다. 당신이 모르는 것까지.” 나는 멀리서 밀려오는 암운을 보았다. 이런 상황에서 우연히 암운이 몰려올 리가 없으니, 저 비구름은 분명 ‘도깨비’ 놈들의 연출일 것이다. 간섭하지 않는다고 해도, 놈들이 정말로 모든 것을 방관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이 세계는 ‘시나리오가 없는 시나리오’조차 시나리오가 되니까. 나는 가볍게 한숨을 쉬며, 이 비극의 마침표를 준비했다. “라인하이트. 당신은 죽고, <낙원>은 멸망할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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