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1화
161화
‘내가 죽고 <낙원>이 멸망한다고?’
김독자가 떠난 뒤, 라인하이트는 한참이나 멍한 얼굴로 언덕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처음 그 말을 들었을 때는 어이가 없어서 웃었다. 하지만 김독자의 표정이 변하지 않자, 그 역시 웃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라인하이트는 화가 났다.
아무리 성좌가 된 존재라 해도, 이것은 도를 넘었다. 성좌라 하여 처음부터 최강의 존재는 아니다. <스타 스트림>에서 72좌의 마왕들이 풋내기 성좌들을 집어 삼키는 일은 그리 드물지 않은 일이었으니까.
게다가 김독자는 반쪽 짜리 성좌에 불과했다.
[성좌, ‘심연의 흑염룡’이 ‘김독자’의 말을 좌시하지 말라고 경고합니다.]
그러니 [심연의 흑염룡]이 그를 비호하고 나섰을 때, 라인하이트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심연의 흑염룡]이 누군가?
저 높은 72좌의 마왕들조차 얽히기를 꺼려한다는, 절대악 중에서도 유명한 개차반이 아닌가?
언덕 아래 풍광을 내려다보며, 라인하이트는 자연히 초조한 심경이 되었다.
그랬기에, 오히려 그러지 않은 것처럼 굴었다.
‘낙원은 멸망하지 않는다.’
라인하이트는 늙었지만, 아직 건재했다.
700년 동안 이곳을 혼자 지켜왔다.
그러니, 앞으로도 이곳은 괜찮을 것이다.
시나리오에 고여 미쳐버린 중독좌(中毒座)들이 오더라도, <낙원>에서 싸우는 한 그는 지지 않으니까.
‘오히려 위험한 쪽은······.’
양질의 설화를 이룩한 존재가 [암흑성]에 온다는 것이 얼마나 끔찍한 일인지, 김독자는 아직 모른다.
영구기관의 썩은 열매가 툭 떨어지고, 라인하이트는 모습을 감췄다.
*
그 자리에서 전투가 벌어지면 어쩌나 싶었는데, 다행히 라인하이트는 덤벼오지 않았다.
거기서 싸웠다면 분명 <낙원> 전체가 뒤집어졌겠지.
물론, 나는 싸울 생각이 없었다.
여기서 라인하이트를 꺾는다면 일은 순조로워지겠지만, 나는 엄청난 타격을 입을 것이고 <낙원>의 화신들은 나에 대한 원망을 키울 것이다.
그렇게 되어서는 안 된다.
<낙원>이 붕괴하더라도, 그것은 외부의 적에 대한 분노가 아니라 <낙원> 자체에 대한 분노 때문이어야 한다.
잘못된 것을 알지 못하고 성급하게 일어선다면, 언제고 화신들은 똑같은 궁지에 몰리게 될 것이다.
“······이야긴 끝났어요?”
“네.”
정희원은 언덕 아래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여전히 마음의 갈피를 잡지 못한 얼굴이었다.
아마 나에 대한 의리와, <낙원>이 주는 안락함 사이에서 고민하고 있겠지.
나는 그 고민을 조금 덜어주기로 했다.
“희원 씨. 잠깐 쇼핑이나 좀 할까요?”
우리는 걸음을 맞춰 거리를 걸었다. 시끌벅적한 상점가의 소음들.
“······이렇게 한가하게 걷는 건 오랜만이네요.”
“저도 그렇습니다.”
어색한 침묵이 계속되자, 정희원이 먼저 말을 걸었다.
“나한테 뭐 궁금한 거 없어요?”
“뭘 물어볼까요?”
뭘 물어봐야 할지는 알고 있다.
하지만 알고 있기에, 묻지 않는 것도 있다.
“음······ 좋아하는 색깔이라든가, 아니면 음식이라든가.”
“소개팅에서도 안 물을 법한 질문인데요.”
“······독자 씨 소개팅도 해봤어요?”
나는 살짝 자존심이 상해서 되물었다.
“무시하는 겁니까?”
“그게 아니라······ 독자 씨 살짝 샌님 스타일이니까요. 뭔가 운명적인 만남을 원할 것 같은 느낌이랄까.”
뜻밖에 정곡을 찔린 느낌이었다.
실제로 나는 소개팅을 한 번도 못해봤다.
정희원이 계속해서 말했다.
“우리 그런 이야기 해본 적은 한 번도 없으니까요. 궁금하지 않아요?”
“······.”
“예전에 무슨 일을 하며 살았고, 학교는 어디 나왔는지.”
나는 잠자코 그녀의 이야기를 들었다.
“핸드폰 번호는 뭐고, 사는 곳은 어디였는지. 그리고······.”
풍경이 느릿하게 흘러갔고, 말을 하던 정희원의 목소리는 조금씩 잦아들었다. 말을 하면서, 그녀도 알았을 것이다.
어쩌면 그런 이야기를 하기엔 너무 많은 시간이 지나버렸다는 것을.
그녀가 살았던 동네는 파괴되었을 것이고, 그녀가 쌓아온 역사를 기억하는 사람들은······ 아마, 살아있지 않을 것이다.
그것이 고작 몇 달 사이 우리에게 일어난 일이었다.
한참이나 침묵하던 정희원이 물었다.
“돌아가도······ 이제 예전같은 서울은 없겠죠?”
“없을 겁니다.”
열 번째 시나리오가 끝나면, 서울 돔은 부서지고 화신들은 해방된다.
하지만 그것은 또 다른 지옥의 시작일 뿐이다.
수도 지역의 돔에서만 발생하던 ‘시나리오’가, 이제 전 세계로 확대된다는 뜻이니까.
“그럼······ 우리는 왜 ‘시나리오’를 계속 해야 하는 거죠? 우리가 알던 것들이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은데. 돌아갈 곳도 없는데.”
그리고 그것이, 그녀가 이 <낙원>에 남고 싶어하는 이유이리라.
금호역의 모녀도, 핑키즈 김영팔도.
이곳은, 자신의 <낙원>을 잃은 사람들이 오는 곳이니까.
정희원의 고개가 푹 떨어졌다.
나는 일부러 그 얼굴을 바라보지 않은 채 입을 열었다.
“희원 씨는 칼을 잘 쓰죠.”
작게 숨을 참는 소리가 들렸다.
“우리 중 누구보다 불의 앞에 냉정해요. 특히 강자들의 횡포에는 더욱 민감하죠.”
나는 천천히, 내가 아는 ‘이야기’를 시작했다.
‘원작’에 나오지 않았다고 해서, 내가 정희원을 모르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나는 그 어느 때보다 더, 열심히 원작을 읽고 있는 중이니까.
“항상 일행의 맨 앞에서 싸우고, 한 번도 힘들다고 불평한 적이 없어요.”
정희원은 입을 꾹 다문 채 나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나는 계속해서 말했다.
“상처 받아도 누구한테도 털어놓지 않고, 의심스러운 것이 있어도 그 사람을 믿는다면 묻지 않는 것이 신의라고 생각하죠.”
나는 정희원을 생각했다.
내 수상한 행동들을 믿어주던 정희원.
금호역에서 나를 대신해 싸웠던 정희원.
“누구보다 인간을 불신하지만 실은 정이 많고, 일행이 위험에 빠지면 가장 먼저 달려오기도 하고요.”
도깨비의 농간에 일행들이 뿔뿔이 흩어졌을 때도 필사적으로 일행을 찾아나섰던 정희원.
늘 까칠하지만 실은 작은 농담에도 내 기분이 상할까 조심스럽던, 정희원.
“······.”
“이만하면, 저도 정희원 씨에 대해 조금은 알지 않습니까?”
정희원은 고개를 숙인 채로 말했다.
“저는 그런 사람이 아니에요.”
“하지만 그게 제가 본 정희원 씨입니다.”
내 시선을 피한 정희원이, 조심스레 눈가를 훔쳤다.
“한 번도 그런 이야길 해준 사람은 없었는데······ 독자 씨 소개팅 나가면 잘 하겠네요. 근데 갑자기 왜 그런 얘길······?”
이내 고개를 든 정희원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희미하게 미소짓고 있었다.
하지만 미소로 넘어가서는 안 되는 순간이었다.
“정희원 씨가 시나리오를 계속했기 때문에, 제가 알 수 있었던 것들입니다.”
반쯤 벌어졌던 정희원의 입술이, 그대로 멎었다.
“그렇기 때문에 저는 시나리오를 계속해야 한다고 믿습니다.”
우리가 돌아갈 곳은 없다.
그리고 아마, 머무를 곳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이야기는 계속되고 있다.
그리고 이야기가 계속되기 때문에, 간신히 알 수 있는 것들이 있다.
조심스레 입술을 깨문 정희원이 말했다.
“······너무 어려워서 잘 모르겠어요. 전에 말했잖아요. 나 학교 다니다 말아서······.”
“희원 씨가 어떻게 행동하기를 바라고 하는 말이 아닙니다. 희원 씨는 희원 씨의 방식대로 살아가면 됩니다.”
나는 그 말과 함께 [거래소]를 열었다.
[제작 의뢰를 맡긴 아이템이 도착했습니다.]
타이밍 좋게, 제작을 맡겼던 아이템이 왔다. 화룡종의 뼈와 악마의 심장, 그리고 몇몇 괴수들의 핵으로 만든 아이템이었다.
세상에서 오직 ‘정희원’만이 쓸 수 있는 아이템.
‘원작’에서도 오직 ‘3대 심판자’만이 사용할 수 있던 아이템이었다.
나는 제작 대금 10만 코인을 일시불로 지급하고 아이템을 넘겨 받았다.
[당신은 ‘심판자의 검’을 ‘정희원’에게 주었습니다.]
놀란 정희원이 얼떨결에 검을 받아 들었다.
“이건······?”
“같이 쇼핑하기로 했잖아요? 이건 제가 드리는 선물입니다. 전에 쓰던 칼 망가졌죠?”
“하지만 전 이런 걸 받을 자격이 없어요.”
나는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뇨, 희원 씨만 이 칼을 쓸 자격이 있습니다.”
*
“김독자 진짜 인성 덜 됐네. 정말 이렇게 떠나려고?”
멀어지는 <낙원>. 한수영이 자꾸만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나는 돌아보지 않은 채 대답했다.
“여기서 할 일은 다 끝났어.”
“끝나긴 뭐가 끝나?
원작대로 흘러간다면, 아마 <낙원>은 반드시 파괴될 것이다.
긴 시나리오 끝에 도달한 화신들의 평화는, 무참하게 부서질 것이다.
그럼 내가 막아야 하는가?
그럴 수는 없다.
<낙원>이 있는 한, 이 시나리오는 끝나지 않을 테니까.
“<낙원>은 어차피 내 몫이 아니야.”
“아하, 원작 흐름에 맡기시겠다······ 네가 직접 할 수도 있는데 왜?”
“라인하이트는 지금 잡긴 벅차고, 잡아봤자 안 좋은 설화만 생길 거야. 지지자가 너무 많으니까.”
설화가 꼭 ‘좋은 효과’를 가진 것만 있는 건 아니다.
어떤 설화는, 가지고 있는 것 자체로 능력치가 떨어지는 것도 있다.
그것을 아는 한수영이 입술을 비죽였다.
“뭐, 그건 그렇다 쳐. 그럼 일행들 다 두고온 건 무슨 심리야?”
“일행들도 좀 쉬어야지.”
“뭐? 쉬어? 너 솔직히 말해봐. 실은 삐진 거지? 네가 이것저것 잘 해줬는데, 다들 처음 만난 악마 나부랭이한테 넘어가버렸잖아. 특히 정희원인가 뭔가 하는 걔는······.”
“······정희원은 그럴만 해. 지금까지 충분히 힘들었으니까.”
한수영이 콧방귀를 뀌었다.
“웃기시네. 너 자기가 무슨 짓을 한 지 제대로 알긴 하냐? <낙원>은 곧 멸망할 거야. 그리고 걘 아무것도 모르는 채로 너한테 칼 받고 좋아하고 있다고.”
“스스로 선택했으니, 책임도 스스로 지는 거야.”
“악마 새끼······.”
어떤 상처는 우리를 무너뜨리지만, 어떤 상처는 우리를 더 강하게 만든다. 악마 같다고 말해도 어쩔 수 없다. 그게 내 방식이니까.
한참이나 투덜대던 한수영이 입을 열었다.
“흐음······ 근데 김독자.”
“왜.”
“그럼 나는 왜 데려가는 건데?”
“넌 도움이 되니까.”
입술을 비죽이던 한수영은 갑자기 자신의 분신을 소환해 때리기 시작했다.
······잘 보니 분신의 얼굴이 나를 닮은 것 같다.
그러고 보니 저 분신, 얼굴도 바꿀 수 있는 거였지.
“······뭐하는 거냐?”
“훈련.”
훈련이라기엔 일방적 폭행처럼 보이는데.
게다가 어쩐지 아파 보이는 곳을 집중적으로 때린다.
그렇게 한참이나 나를 두들겨 패던 한수영이 물었다.
“그래서 이제부터 뭐 할건데?”
“사나흘 정도 시나리오 제쳐두고, 히든 피스 찾아 다니면서 설화를 모을 거야.”
히든 피스라는 말에 한수영의 입 꼬리가 작게 실룩거렸다.
“웬일로? 너 메인 시나리오에 열중하는 타입이잖아?”
“이번엔 다른 사람들한테도 좀 맡기려고. 지금까지 나 혼자서 이것저것 하느라 힘들었거든.”
생각해 보면 지금까지 너무 혼자서 애썼다.
유중혁 자식, 뭔가 열심히 하고 있는 것 같지만 은근히 중요할 때는 도움이 안 됐단 말이지.
범람의 재앙때도, 피스 랜드 때도 내가 도우지 않았다면 모두 끝장났을 거고.
보나마나 내가 열심히 시나리오 준비할 동안,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히든 피스나 찾아다녔으니 그 꼴이 난 거겠지.
그러니 이번엔 놈이 제대로 움직여줘야 할 때다.
나는 씩 웃으며 말했다.
“우린 지금부턴 회귀자 흉내나 좀 내보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