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화
159화
더 이상 시나리오를 수행할 필요가 없다.
그 말에, 성채에 모인 모든 사람들이 신경을 곤두세웠다.
“저게 대체 무슨 소리지?”
어떤 사람들은 그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하지만 대부분은 그렇지 않았다.
「보나마나 사기꾼이겠지.」
「······말이 되는 소릴 해야지. 뭐? 시나리오를 수행할 필요가 없어?」
「저놈 혼자 뭔가 독식하려는 계략일 거야.」
누가 뭐래도 아홉 번째 시나리오까지 살아남은 화신들이었다.
금호역의 천인호나, 충무로의 공필두를 제하더라도 서울에는 수많은 사기꾼들이 있었다. 그리고 이곳의 화신들은 그런 협잡꾼들중 하나이거나, 협잡꾼들을 물리치고 이곳까지 온 자들이다.
그러니, 저런 감언이설에 쉽사리 당할 리가 없었다.
마치 그들의 생각을 읽었다는 듯, 흉벽 위의 사내가 입을 열었다.
[믿지 않으시겠지요. 이해합니다. 아홉 번의 시나리오는 결코 길다곤 할 수 없지만, 짧다고 할 수도 없는 시간이니까요. 여러분들이 어떤 일을 겪고, 어떤 삶을 살아 이곳까지 왔을지, 충분히 짐작하고 있습니다.]
사기꾼의 기본은 상대방을 이해하는 척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척’에는 이미 신물이 난 사람들이었다.
“또 그런 말에 속을 것 같아?”
“대체 목적이 뭐야?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데?”
참지 못한 사람들이 먼저 소리쳤다.
그러자, 사내가 희미하게 웃었다.
도저히 사기꾼이라곤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다운 미소였다.
[말 그대로입니다. 여러분은 이제 싸울 필요가 없습니다. 아마 도깨비들에게 설명은 들으셨을 겁니다. 이곳 [암흑성]의 시나리오는 제한 시간도, 실패조건도 없습니다. 똑똑하신 분이라면 이게 무슨 뜻인지 벌써 파악하셨겠죠.]
곁을 보자, 핑키즈 김영팔이 눈을 빛내고 있었다.
[여러분들은 이 ‘시나리오 지역’에서 계속 살아갈 수 있습니다. 전처럼 식사를 하고, 늦잠을 자고, 자기가 원하는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생명권을 존중받고, 시나리오를 깨야 한다는 강박을 잊은 채로······ ‘멸망’이 시작되기 전의 삶을 영위하며 이곳에서 생을 마칠 수 있습니다.]
“생명권? 개소리 하지마라!”
“악마들이 돌아다니는 곳에서 어떻게 살아가란 거야?”
“우린 돌아가야 할 곳이 있다고!”
사람들이 악을 쓰듯 외쳤다.
그러자 사내가 물었다.
[돌아간다? 어디로 돌아가시려는 겁니까?]
“당연히 우리가 살던 곳으로······.”
[설마 그 멸망한 ‘행성’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며, 멸망했다니! 아직 아니라고!”
[이미 다들 알고 계실 텐데요. ‘시나리오’가 시작된 순간, 여러분들의 행성은 오직 ‘멸망’을 향해서만 걸어갈 뿐입니다. 그곳으로 돌아가봤자, 여러분들이 보게 될 것은 폐허뿐이에요. 그렇게 시나리오를 깨고, 또 깨도······ 결국 여러분들이 마지막에 맞이할 것은 파멸이란 말입니다.]
“넌 누군데 그런 말을 하는 거야! 네가 뭘 안다고―”
[압니다. 제가 살던 행성도, 이미 오래전에 ‘시나리오’로 멸망했으니까요.]
동요하던 군중들이 동시에 잠잠해졌다.
이미 오래전에 ‘시나리오’로 자신의 고향을 잃은 존재.
이곳의 그 누구보다도 더 오랫동안 [암흑성]에 머물렀던 사내가, 지금 그들을 향해 말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저는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습니다. 지금 여러분이 계신 이곳보다 안전한 세계는, <스타 스트림> 그 어디에도 없다고.]
처음으로 사람들의 기세가 약해졌다.
여전히 불신의 눈빛은 그득했지만, 적어도 그의 이야기를 들어는 보자는 분위기가 생겨나고 있었다.
누군가가 커다란 목소리로 물었다.
“당신은 대체 누굽니까?”
[제 이름은 라인하이트 폰 제르바. 여러분보다 800년 일찍, 이 땅에 온 사람이자······ 여러분이 보고 계신 이 성채, <낙원>의 주인입니다.]
그리고 성채의 문이 활짝 열렸다.
그 안의 풍경을 확인한 사람들의 표정이 변해갔다.
그 얼굴들을 확인한 라인하이트가, 미소로 말을 맺었다.
[다시 한 번 환영합니다 여러분. 이곳, <낙원>에 오신 것을.]
*
<낙원>.
‘멸살법’에도 <낙원>에 관한 언급은 무수히 많다.
시나리오의 무덤. 화신들의 둥지. 절망의 평원에 핀 꽃······ 많은 존재들이 이곳을 다양한 수사로 묘사했다.
실제로, 그 수사들 중 대부분은 사실이었다.
“이런 곳이 있었다니······.”
나를 제외한 일행들은, 눈앞에 펼쳐진 <낙원>의 정경 앞에 넋이 나가 있었다. 이지혜도, 이길영도, 신유승도, 심지어는 이현성도. 특히 이현성은 눈앞의 광경이 믿기지 않는 듯 몇 번이고 자신의 눈을 비볐다.
중앙의 대로를 중심으로 양쪽에 형성된 주택가와 시장가.
시끌벅적하게 움직이는 사람들의 목소리는 전에 없던 활기로 가득 차 있었다.
“악바구미 다리 팝니다! 한 점 맛보고 가세요! 피로 회복에 좋아요!”
“농원에서 재배한 ‘산초 열매’ 팝니다! 체력회복제로 유용합니다!”
시장의 상인들은 친절했고, 물건 값을 깎는 손님들은 만족하며 셈을 치렀다. 다양한 종족, 다양한 국적의 사람들이 모여 있었지만, 누구도 서로를 차별하거나 위협하는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갑작스레 닥쳐온 밝은 분위기에 성채에 입장한 화신들은 모두 당혹스런 얼굴들이었다.
“이게 대체······.”
조금 전까지만 해도 ‘낙원’이니 ‘평화’니 하는 말들은 그들에게 개소리에 불과했다. 그런데 개소리가, 실질적인 양감을 가지고 눈앞에 존재하고 있었다.
“······낙원이라고?”
어떤 사람들은 너무 놀라 바닥에 주저앉았다.
성급한 화신들 중에는 병장기를 떨어트린 채 숨을 헐떡이는 이도 보였다.
그런 이들에게 친절한 손길이 쏟아졌다.
“괜찮으신가요? 다치신 분들은 모두 이쪽으로 오세요! <낙원>의 진료소는 모든 부상자들을 무상으로 치료합니다!”
“무기술과 심법을 가르쳐 드립니다! 에테르와 마력의 차이를 알고 싶으신 분! 남들 다 쓰는 검기를 쓰고 싶으신 분! 누구든 환영합니다!”
<낙원>의 존재들은 나눔을 아끼지 않았다. 자신들이 가진 지식을 교류했고, 누군가를 돕는 것을 미덕으로 여겼다.
심지어는 종을 넘어서는 교류도 보였다.
머리에 뿔이 달린 악마종이 헤벌쭉 웃으며 이쪽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아, 악마종이다!”
놀란 화신들 몇몇이 병장기를 빼들자, 성채에 대기 중이던 경비대가 재빨리 다가왔다.
“그거 집어 넣으세요.”
“무슨 소리야! 저놈은 악마 새끼······!”
“이곳에서 그런 혐오 표현은 금지되어 있습니다. 저 분도 엄연한 <낙원>의 주민이에요.”
“주, 주민이라고?”
당황한 화신들이 머뭇거리자, 손을 흔들었던 악마가 다가왔다.
“저는 악마종이 맞습니다만. 여러분들을 해치지 않습니다. 악마는 당연히 인간을 잡아먹을거라는 편견이 저를 슬프게 만드는군요.”
감수성 풍부한 그 말투에 화신들이 멍한 얼굴을 했다.
대체 이게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알 수 없다는 눈빛들이었다.
비슷한 광경은 연이어 나타났다.
악마종과 인간, 그리고 인외종들이 힘을 모아 집을 짓는 광경, 어깨동무를 하고 술집에 가거나, 야외 테라스에 나란히 앉아 식사를 하는 모습······.
종종 환영한다는 듯, 이쪽을 향해 제스처를 보내는 이들도 있었다.
마치 여행지 광고 같은 그 풍경에, 일행들은 정신을 못 차리고 있었다.
[등장인물 ‘이현성’이 주변의 풍경에 동요합니다.]
[등장인물 ‘이지혜’가 주변의 분위기에 동요합니다.]
동료들의 심경이 실시간으로 전해졌다.
시나리오가 시작된 후 처음으로 마주한 평화.
마음이 흔들리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평범하게 살아왔던 사람들이 칼 좀 들었다고 해서 본질이 바뀌진 않는다.
모든 것은 불가항력의 결과였을 뿐.
그리고 지금, 처음으로 일행들은 그 ‘불가항력’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유혹을 받고 있었다.
멀리서 정희원의 모습이 보여서, 우리는 그쪽으로 다가갔다. 정희원은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본 적이 있는 여자였다.
“그땐 정말 고마웠습니다. 고맙다는 말씀도 제대로 못 드리고······.”
“아니에요! 잘 지내시는 것 같아서 다행이네요.”
정희원과 말을 나누던 젊은 여자가 내쪽을 흘끗 보더니, 눈을 크게 떴다.
감정의 양상은 빠르게 바뀌었다.
놀라움으로, 두려움으로, 그리고 이내는······ 고마움으로.
“혹시 저 남자 분······.”
“아, 독자 씨······.”
“역시 그때 그 분이시군요! 구해주신 은혜, 지금까지 잊지 않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긴가민가했는데, 여자의 손을 쥐고 있는 어린아이를 보자 기억이 떠올랐다.
“아, 혹시 금호역에서······?”
“기억하시는군요? 다영아, 너도 인사 드려야지.”
“안녕하세요······.”
그들은 금호역에서 철두파와 함께 싸웠던 모녀였다.
우리 일행과 합류하지 않아서 조금 마음에 걸렸었는데, 용케도 지금까지 살아남았던 모양이다. 모녀는 이곳 농원에서 캐온 열매라며, 우리에게 바구니를 한 아름 안겨주었다. 괜찮다며 한사코 거절했는데도 소용 없었다.
“그쪽 도움을 받지 못했더라면 이곳에 오지 못했을 테니까요. 덕분에 다시 시작할 수 있게 됐어요. 정말로 감사드립니다.”
새로운 터전을 찾은 모녀는, 다시 자신들의 생활을 찾은 것처럼 보였다.
도란도란한 모녀의 뒷모습을 보며, 새삼 금호역의 기억이 떠올랐다.
더 많은 사람들을 살려야 했다는 후회와, 그게 그때는 최선이었다는 비겁한 자기위안.
멀어지던 아이가 문득 고개를 돌려 내쪽을 보았다.
배시시 퍼지는 아이의 미소.
온화한 죄책감이 몰려왔다.
내가 베푼 위선에는 과분한 보답이었다.
어쩌면 내가 느끼는 이 기분을, 정희원도 느끼고 있을까.
멀어지는 모녀를 함께 바라보던 정희원이 입을 열었다.
“부활한 거 축하해요. 이번엔 좀 오래 걸렸네요.”
“너무 담백한 반응 아닙니까? 지혜랑 길영인 울고 불고 난리 났었는데요.”
“저도 그래 볼까요?”
“바라지도 않습니다.”
피식 웃으며 돌아 보는데, 정희원의 얼굴에 수심이 어려 있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망설이는 찰나, 그녀가 먼저 입을 열었다.
“······독자 씨, 잠깐 둘이서 얘기 좀 할 수 있을까요?”
*
정희원이 이곳에 온 것은 나흘 전의 일이었다.
[지옥염화]의 힘을 빌어 최단 시간 안에 1층을 클리어 한 그녀는, 누구보다 빠르게 2층으로 올라왔다.
그리고 이곳, <낙원>에 도달했다.
시나리오의 족쇄를 벗을 수 있는 장소.
당연히, 정희원은 그 말을 믿지 않았다.
첫째 날은 모든 것을 불신했고, 둘째 날은 모든 것을 의심했다.
흔들린 것은 셋째 날부터였고, 불행하게도 내가 찾아온 것은 넷째 날이었다. 정희원이 말했다.
“갑자기 ‘시나리오’를 계속 수행하는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정희원은 세뇌 따윌 당한 게 아니었다.
애초에 <낙원>은 존재 자체가 달콤한 마약이니까.
나는 쓰게 웃으며 물었다.
“너무 빨리 흔들리신 거 아닙니까?”
“······어쩌면 줄곧 그래왔는지도요.”
정희원도 쓰게 웃었다.
“이거 놔! 코인 내면 되잖아! 훔친 값 치를게! 이거 놓으라고!”
거리를 걷는 동안, 성채의 경비대에게 끌려 가는 죄수들의 모습이 종종 보였다. 개중 몇몇은 나와 함께 성채에 진입한 자들이었다.
보아하니 본래의 손버릇을 못 버리고 타인의 물건에 손을 댄 듯했다.
끌려가는 사내를 보며, 정희원이 말했다.
“이곳은 서울보다도 치안이 좋아요.”
“그래보이는군요.”
“여러 종들이 서로 차별하지 않고, 힘든 일이 있을 땐 서로를 도와요. 모두가 살 수 있는 집이 있고, 일할 터전이 있어요.”
마치 변명이라도 하는 듯한 말투였다.
“동료들에게 배신 당할 일도 없고, 밤에 나타난 괴수들을 걱정하지 않아도 돼요.”
나는 그런 말을 주워섬기는 정희원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멸악의 심판자 정희원.
이 세계에 들어와, 내가 손수 키워낸 검.
아마도 정희원은, 우리 일행 중 가장 많은 사람을 죽인 여자일 것이다.
나의 ‘불살’을 지켜주기 위해 모든 것을 ‘몰살’시켜야 했던 사람.
“시나리오에 쫓기듯 살지 않아도 돼요. 누군가를 죽였다는 이유로 악몽을 꾸지 않아도 돼요. 그리고 더 이상, 누군가를 잃지 않아도······ 돼요.”
가장 단단한 검은, 가장 부러지기 쉬운 검이다.
가장 단단하다는 이유로, 그 검을 제일 많이 휘두르게 되니까.
그래서 가장 많이 상처받고, 가장 많이 이가 빠진다.
그렇기에, 그 어떤 검보다 빨리 망가진다.
“이곳이 좋다면 이곳에 남으셔도 됩니다.”
내 말에 정희원의 눈빛이 흔들렸다.
나는 그 눈빛을 마주보며 말을 이었다.
“저도, 이곳이 안전한 곳이라 생각합니다.”
그건 거짓말이 아니었다.
“[암흑성]에서 이곳보다 안전한 장소는 없습니다. 아니, 어쩌면······ ‘시나리오’ 전체에서도 이만큼 안전한 곳을 찾기란 쉽지 않을 겁니다.”
인정하긴 싫었지만, 사실은 사실이었다.
실제로 <낙원>은 그런 땅이니까.
“혹시 독자 씨는······.”
무슨 말을 할지 알았기에, 나는 서둘러 답했다.
“네, 저는 여기 머무르지 않을 겁니다.”
“왜죠?”
“여기는 ‘끝’이 아니니까요.”
“······독자 씨는 미래를 알고 있다 했었죠.”
언젠가, 정희원과는 <극장 던전>에서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었다.
그때 정희원은 자신이 미래에 어떻게 되느냐 물었고, 나는 그녀가 미래에 존재하지 않았다고 말해주었다. 왜냐하면 그녀는 ‘원작’에 없던 인물이니까.
내가 미래를 모르는 ‘등장인물’······.
“저는 시나리오를 계속해야 합니다.”
정희원은 내 말에 잠시 뭔가를 생각하는 듯 했다.
그녀는 <낙원>의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웃고, 떠들고, 다시 되찾은 생활에 기꺼워하는 사람들의 모습.
“독자 씨가 생각하는 ‘끝’은 어딘가요?”
“그건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럼, 그 ‘끝’은······ 이곳보다 더 나은 곳인가요?”
다른 사람도 아닌 정희원이 물은 말이었기에, 나는 쉽게 대답할 수가 없었다.
“시나리오를 계속하지 않으면······ 모두가 불행해지는 건가요?”
내가 바라는 이 모든 이야기의 결말이, 정말로 모두에게 이 <낙원>보다 아름다운 장소라 말할 수 있을까.
정말로, ‘결말’에 도달하면 모든 인물들은 행복해질 수 있는가.
우리는 잠시 말없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분명 그곳에 소중한 무언가가 있었던 것 같은데, 그게 뭐였는지 잊어버린 느낌이었다.
잠깐의 꿈에서 깨어났다는 듯, 정희원이 입을 열었다.
“이곳의 성주가 독자 씨를 찾아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