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화

16화 Episode 4. 위선도 선이다 새카만 밤하늘 위로 유성우가 쏟아지고 있었다. 누구나 감탄하지 않을 수 없는 광경이겠지만, 유중혁에게는 아니었다. 「슬슬 시작인가.」 왜냐하면 유성우는 세 번째 메인 시나리오가 시작될 것이라는 전조였으니까. 이제 서울은 시나리오의 절차에 따라 차례차례 멸망해 갈 것이다. 하늘을 쳐다보던 유중혁은 이내 고개를 숙여 한강의 하구를 바라보았다. 얼마 전 어룡의 무리가 대거 하류로 이동한 까닭에 동호대교 인근 풍경은 제법 고적한 편이었다. 「역시 무리였나.」 김독자란 녀석이 한강 속에 들어간 것도 벌써 사흘 전의 얘기였다. 겨우 첫 번째 메인을 깬 수준으로 어룡을 잡는다니, 지나친 요구였을지도 모른다. 「하긴, 3일 만에 어룡을 잡는 건 나도 힘드니까.」 하지만 그 정도가 되지 않으면 데리고 가는 것은 무리라고 생각했다. 그 정도도 못 해낸다면 오히려 방해만 될 뿐이니까. 「예언자라더니 별 것도 아니었군.」 유중혁은 실망스러운 기색으로 눈을 감았다. 그는 다시 혼자서 나아갈 것이다. 어떤 동료도 없이. 별로 대단한 일도 아니었다. 그는 지금까지 줄곧 혼자였으니까. 「이번에는 반드시 바꾼다.」 그렇게 유중혁은 돌아섰다. 그러나 어쩌면, 그는 너무 빨리 돌아섰는지도 모른다. * “잠깐만······!” [뭐, 뭐야?] 눈을 몇 번이고 깜빡였지만 보이는 것은 회백색의 천장 뿐. 나는 여전히 어룡의 안에 있었다. 고개를 돌리니 화들짝 놀란 비형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었다. “······꿈을 꿨어.” [오호, 복선을 깔아 궁금증을 유발하겠다 이거지? 아주 제법인데?] 그런 건 아니지만, 딱히 오해해도 상관없겠다 싶었다. [소수의 성좌들이 당신이 빨리 새로운 장소로 이동하길 바랍니다.] 나는 비형에게 500코인을 지불하고 구입한 ‘엘라인 숲의 정기’를 막 사용하고 잠든 참이었다. 탈진한 채로 움직이는 것은 위험하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엘라인 숲의 정기는 2시간 동안 강제로 숙면을 취하게 만드는 대신 전신의 피로와 상처를 빠르게 회복시켜 준다. 한 마디로, 비싼 값은 하는 아이템이라 이거지. “······슬슬 진짜로 나가볼까.” 적당한 혼잣말을 해주며 찌뿌드드한 몸으로 기지개를 켰다. 방금 꾼 꿈이 아직 선명했다. 어쩌면 꿈이 아니었는지도 모른다. 치지지직. 전류가 흩어지는 소리가 들린다 싶더니, 비형이 말도 없이 사라졌다. 아마 녀석도 자기 할 일을 하러 간 거겠지. 뭔가 안도의 숨이 놓였다. 도깨비와의 스트림 계약. ‘멸살법’에서 비형에 대한 정보를 얻지 못했더라면 결코 시도할 수 없었던 도박이었다. 하지만 신기할 정도로 침착하게, 제대로 해냈다. 진짜 ‘현실’에서는 변변찮은 계약 하나 못 따내던 내가. [전용 스킬, ‘제 4의 벽’이 가동 중입니다.] ······현실이라. 나는 가시를 쥔 오른손에 힘을 꾹 주었다. 정말로 나는 이 세계를 현실이라 생각하는 것일까. [소수의 성좌들은 당신이 어서 행동하기를 원합니다.] 하긴, 그런 고민이나 하고 있을 때가 아니지. 나는 가시를 힘껏 휘둘러 탄성을 잃은 위벽을 까부쉈다. 꽈르르릉, 무너지는 소리와 동시에 물이 쏟아졌다. 나는 한강으로 뛰어들었다. “푸하!” 다행히 다른 어룡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소형 해수종들이 호기심을 가지고 다가오는 모습이 보였지만, 딱히 적의가 느껴지진 않았다. 모든 마물들이 인간을 공격하는 것은 아니다. 동호대교는 저쪽인가. 나는 둥둥 떠오른 어룡의 사체조각 하나를 튜브 삼아, 어설프게 발을 놀리며 뭍을 향해 나아갔다. 차가운 수온에 피부가 따가웠지만 신경 쓸 계제가 아니었다. 그렇게 30분 쯤 헤엄을 치자, 뭍에 손이 닿았다. [소수의 성좌들이 당신을 보며 긴장합니다.] 보통 이런 메시지가 뜬 다음에는 곧바로 위험이 닥쳐온다. [성좌, ‘심연의 흑염룡’이 음험한 미소를 짓습니다.] 나를 고깝게 보는 성좌들에게는 안 된 일이지만, 그리 되지는 않을 것이다. 찾아올 위험이 뭔지는 이미 알고 있으니까. [두 번째 메인 시나리오 지역에 진입하였습니다.] [해당 시나리오 지역의 대지는 깊이 오염되어 있습니다.] [호흡을 참고, 최대한 빠르게 지하로 이동하십시오.] 메시지야 저렇게 설명하지만, 사실 이 시나리오는 시작된 순간부터 지상에 있으면 안 된다. 왜냐고? 지금 내 피부를 보면 알 수 있다. [맹독 안개에 노출되었습니다.] 보랏빛 안개가 닿은 피부가 검게 변색되어 가고 있었다. 갸아아아아! 안개의 근원지를 눈으로 따라가자 끔찍한 울음을 토하는 괴수가 보였다. 체고가 삼십 미터는 훌쩍 넘는 육중한 괴물. 이 안개는 7급 괴수종인 ‘시독 코뿔소’의 방귀였다. 코뿔소는 콧김을 뿜으며 안개 너머의 괴수에게 대항하고 있었는데, 언뜻 비치는 그림자로 봐서는 충왕종(蟲王種)인 듯 했다. 그아아아······. 새로운 세계에서 투쟁을 벌이는 것은 인간만이 아니다. 괴수들 또한 자신의 터전을 위해 싸우는 것이다. 나는 최대한 숨을 참은 채로 움직였다. 어룡과 같은 7급 괴수종이었지만 지금 당장 상대할 수 있는 놈들은 아니었다. 애초에 씨 커맨더를 죽일 수 있었던 것은 그만한 준비가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엘라인 원숭이의 허파’를 사용합니다.] 원숭이의 허파는 20분 동안 정화 장치의 대용품으로 쓸 수 있는 아이템으로, 비형에게서 미리 구입해두었다. [소수의 성좌들이 당신의 준비성에 감탄합니다!] 지상역인 옥수역은 이미 파괴되었다. 이곳에서 가장 가까운 ‘지하역’은 금호역. 아마 다른 사람들도 모두 그곳으로 이동했을 것이다. 나는 시체들을 뜯어 먹는 소형종들을 피해 갓길을 통해 빠르게 움직였다. 20분밖에 시간이 없으니 최대한 빠르게 생필품을 확보한 후 움직여야 했다. 먼저 필요한 것은 옷가지. 어룡의 용해액에 겉옷이 녹아 버렸기 때문에, 걸칠 것이 필요했다. 물론 주변에 걸칠 것은 널려 있었다. 찝찝해서 그렇지. ······아쉬운 대로 어쩔 수 없나. 나는 시체를 뒤져 대충 사이즈가 맞는 옷 몇 개를 주워 입은 후 곧장 근처의 편의점으로 향했다. 비닐봉투 몇 개를 챙겨서 부피가 작고 밀도가 높은 식품들을 마구잡이로 쓸어 담았다. 식품들은 지하로 내려간 후 요긴한 거래 품목이 될 것이다. 그렇게 서너 봉지 쯤 담았을까. 입에 문 원숭이 허파의 색이 점점 까맣게 변하는 것이 보였다. 이제 시간이 얼마 안 남았군.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온 것은 그 때였다. “사, 살려······ 살려줘요.” 아직도 살아 있는 사람이 있었나? 한쪽 구석에 젊은 여자가 몸을 웅크린 채 쓰러져 있었다. 피부 표면에서 오염이 진행되고 있었으나, 상비용 마스크를 쓰고 있었기에 중독 상태가 심하지는 않았다. 무슨 꼴을 당한 것인지 상의는 반쯤 벗겨져 있었고 치마의 실밥이 조금 뜯어져 있었다. “괜찮습니까? 일어날 수 있겠어요?” “으으으······.” ‘멸살법’에 이런 엑스트라가 있었던가? 자세히 살펴보고 싶었지만 시간이 부족했다. 나는 여자를 들쳐 업고 금호역으로 달렸다. 갓길을 돌자 곧장 대로변이 나왔다. 이제 금호역까지 거리는 직선으로 일백 미터. 나는 숨을 흡, 들이킨 뒤 전력으로 대로를 질주하기 시작했다. 멀리서 보이는 3번 출구 표지. ······닫혔군. 그럼 반대쪽은? 재난 상황 때문인지 출구마다 죄다 방화 셔터가 내려가 있었다. 가시로 셔터를 부수고 들어갈 수도 있겠지만, 잘못하면 안쪽에 있는 사람들이 피해를 입는다. “4번, 4번 출구······.” 뜻밖에도 업고 온 여자가 도움이 되었다. 나는 4번 출구 쪽으로 뛰었다. 그리고 때마침 내려가고 있는 방화 셔터를 발견했다. 나는 닫히려던 셔터의 틈새에 가시를 꽂아 넣었다. 누군가가 소리를 질렀다. “씨발, 뭐야!” “문 열어요.” “아, 안 돼! 들어올 수 없어! 떨어져!” “부상자가 있습니다.” “이미 인원은 포화 상태야! 더 이상은 필요 없다고!” 인원이 포화라 받지 않는다고? 이상하군. 그런 전개가 있었나? “그런 건 내가 알바 아니고.” 나는 가시를 지렛대 삼아 끼운 후 있는 힘껏 셔터를 들어 올렸다. 벌어둔 코인으로 근력 레벨도 10으로 만들어 놓았기 때문에, 지금의 나는 성인 남성 대여섯 명 이상의 괴력을 낼 수 있었다. “우와아악!” 콰당, 하는 소리와 함께 반대편에서 셔터를 내리던 사람들이 나동그라졌다. “도, 도망가!” 겁을 집어먹은 사내들이 지하도 안쪽의 어둠 속으로 도망쳤다. 무사히 역 안으로 진입한 나는 셔터를 내리고 여자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안전 지역에 진입하였습니다.] 맹독 안개는 지하까지 내려오진 않는다. 딱히 과학적인 설명이 가능한 얘기는 아니다. 그저 ‘시나리오’ 때문이니까. “이걸 입에 무세요.” 나는 여자의 마스크를 벗기고 내가 물고 있던 원숭이 허파를 물려주었다. 이걸로 완전히 치료되는 건 무리겠지만, 그래도 중화 효과는 있을 것이다. “우움······.” 여자의 입술에서 희미한 신음이 흘러나왔다. 버려져 있던 여자. 나는 문득 여자의 정보가 궁금해졌다. 이 여자도, 원작의 전개대로였다면 거기서 죽었을 확률이 높을 텐데. 목소리가 들려온 것은 ‘등장인물 일람’을 가동하려던 찰나였다. “저기 저 놈입니다!” 어둠 속에서 번뜩이는 손전등 불빛이 다가오고 있었다. 눈을 가늘게 뜨자, 제각기 쇠파이프 같은 것을 하나씩 든 사내들이 희끄무레하게 보였다. [성좌, ‘긴고아의 죄수’가 불청객의 등장에 눈살을 찌푸립니다.] 입을 연 것은 가운데의 덩치 큰 사내. 전신의 밸런스가 잘 잡혀 있는 걸로 봐서 힘깨나 쓰는 녀석이 분명했다. “뭐냐, 네놈은?” 순간, 이상하게도 말문이 막혔다. 보통 이럴 땐 뭐라고 대답해야 하는 걸까. 나는 잠시 생각하다가 유중혁처럼 말해 보았다. “김독자.” “······김독자? 네 이름이냐?” “그래.” “누가 그런 걸 물었어! 넌 뭐하는 새끼냐고!” 더 곤란한 물음이 돌아왔다. “어, 엇! 저 여자는······.” 내 곁에 쓰러진 여자를 발견한 남자 하나가 손전등을 여자 쪽으로 비추었다. “뭐야, 소외 그룹 여자잖아? 너희랑 같이 복귀한 거 아니었어?” “그, 그게 저······.” 사내의 손전등이 여자의 허리 부근에서 희롱하듯 움직였다. “···하, 그런 거였구만. 귀여운 놈들. 어디서 형님 허락도 없이 새끼를 쳐?” “헤, 헷. 죄송합니다.” “무, 물론 철수 형님 먼저······ 헤헤, 그러려고 하긴 했는데.” 철수? 철수라. 그런 이름의 등장인물이 있었나? 기억이 안 나는 걸 보면 생긴 것과 달리 별 볼일 없는 놈이라는 거다. “야, 그 여자 우리한테 넘기고······ 응? 그건 또 뭐야?” 손전등의 불빛이 바닥에 놓인 편의점 봉투에 고정되었다. 위기를 벗어난 것은 괜찮은데, 이거 어쩐지 흐름이 좋지 않다. “그것도 두고 밖으로 꺼져. 그럼 살려는 드리지.” 정확히는 내가 아니라 저 사내들에게 좋지 않다는 뜻이다. [성좌, ‘긴고아의 죄수’가 조무래기의 등장에 짜증을 냅니다.]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눈앞의 불의에 분노합니다.] [성좌들의 요청으로 현상금 시나리오가 발생했습니다!] + <현상금 시나리오 – 방해꾼 제거> 분류 : 서브 난이도 : F 클리어 조건 : 성좌들이 빠른 전개를 방해하는 훼방꾼의 등장에 크게 분개하였습니다. 제한시간 내에 그들을 무력화시키십시오. 제한시간 : 5분 보상 : ??? 실패시 : ??? + 내 이럴 줄 알았지. 불쌍한 자식들. 나는 가시를 쥐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성좌들 중에 미성년자는 없겠지? 그럴 거라 믿는다. 왜냐하면 지금부턴 성인 방송 시간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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