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화

15화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잘 알 수 없었다. 자주 호흡이 끊어졌고, 온몸의 근육이 잔뜩 경직되어 좀처럼 말을 듣지 않았다. [소수의 성좌들이 당신의 생존력에 감탄합니다!] [성좌들이 100코인을 후원하였습니다.] 하지만 버텼다. 버틸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에 버텼다. 어둠 속에서 가시가 내뿜는 불빛을 보며 내가 살아 있다는 것을 확인 받았고, 떨어지는 위장벽의 온도를 확인하며 놈이 죽어가고 있다는 확신을 얻었다.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당신의 근성에 감탄합니다.] [성좌가 100코인을 후원하였습니다.] 배가 고플 때는 가시의 끝에 맺힌 농축액에 혀를 가져다 댔다. 흘러나온 농축액에는 어룡의 전신에서 빨아들인 생명력이 담겨 있었다. 해마의 점액을 미리 먹어둔 것은, 탈 없이 이 농축액을 흡수하기 위함이었다. [어룡의 힘을 흡수해 체력이 미미하게 상승합니다.] 당장 능력치 레벨이 오를만한 효과는 아니었지만, 아마 어룡을 탈출할 때쯤이면 적어도 체력 레벨이 2 정도는 상승해 있을 것이다. 고 레벨로 가면 안 먹히지만 코인을 쓰지 않고 체력을 올릴 수 있는 몇 안 되는 꼼수였다. ······역시, 꿈은 아니겠지. 이거 정말 내가 할 수 있는 일이었던 걸까. 난 평범한 독자일 뿐이잖아. 주인공이 아니라고. 당장이라도 소리를 지르며 이불 속에서 깨어날 것 같았지만, 아무리 눈을 깜빡여도 그런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다. ······어머닌 괜찮으실까. 괜찮으시겠지. 다른 사람도 아니고 그 ‘어머니’인데. 바닥에 고인 용해액이 빠져 나갈 때마다 깜빡 잠에 들었고, 차가운 강물이 구강을 통해 들어올 때마다 잠에서 깨어났다. 그리고 마침내 어룡의 소화 작용이 멈췄다. 등을 데우던 내장의 온기가 급격히 식었고, 탄성으로 가득하던 위장은 점점 굳어갔다. 그래서 나는 확신할 수 있었다. 놈이 죽었다. [······정말 대단하군요.] 어둠 속에서 몰아치는 환한 전류. 비형이 흐릿한 형체를 유지한 채 허공에 떠 있었다. [스톤 호그의 가시를 저런 식으로 사용하다니. 미처 생각도 못했어요. 성좌님들, 그렇지 않습니까?] 비형은 희미한 빛을 내뿜는 스톤 호그의 가시를 보며 말했다. [스톤 호그는 주로 해안가에 서식하며 작은 해수종을 먹이로 삼는 녀석이에요. 먹잇감의 표피에 가시를 뿌리 내려 사냥감을 말려 죽이는데, 이걸 설마 소화액 사출구에 박아버릴 줄은······.] 형형한 눈동자를 빛내는 비형의 동공은 나를 보고 있지 않았다. 그러니 저 말들 또한 나를 향한 설명은 아니었다. [극소수의 성좌들이 알고 있었다는 듯 흐뭇한 미소를 짓습니다.] [성좌들이 100코인을 후원하였습니다.] [소수의 성좌들이 뒤늦게 당신의 판단을 이해합니다.] [성좌들이 그런 건 다음부터 혼잣말로 알려달라며 불평합니다.] 나는 성좌들의 메시지를 무시하고, 마지막 농축액을 받아 마셨다. [어룡의 힘을 흡수해 체력이 미미하게 상승합니다.] [체력 레벨이 상승했습니다!] [체력 Lv.11 -> 체력 Lv.12] 이걸로 소기의 목적은 달성했다. 내 곁으로 내려온 비형은, 새카맣게 탄 내 팔을 만지며 말을 이어가고 있었다. [게다가 이 점액······ 어룡의 피식종인 망치 해마의 점액에 이런 효능이 있다는 건 나도 몰랐는데.] 본래였다면 어룡의 소화액과 함께 녹아버렸어야 할 피부였다. 나는 비형을 대신해 입을 열었다. “망치 해마의 점액에는 소화액에 대한 면역이 있어. 아무래도 어룡에게 잡아먹히는 경우가 많다 보니 그런 식으로 진화한 거지.” [소수의 성좌들이 당신의 박식함에 감탄합니다.] 그러자 비형이 뒤통수를 맞은 듯한 얼굴로 나를 보았다. [저기, 설명은 내 몫인데······.] “네가 잘 모르니까 대신 해준 거잖아. 이제 설명은 다 끝났지?” [······그래.] “그럼 보상 줘.” [망할 자식.] 비형의 투덜거림과 동시에, 보상 메시지가 눈앞을 덮었다. [히든 시나리오가 종료되었습니다.] [보상으로 9000코인을 획득하였습니다.] [최초로 7급 해수종 사냥에 성공하였습니다.] [업적 보상으로 1000코인을 획득하였습니다. 9000코인에 추가로 1000코인이라. 아주 짭짤한 소득이다. [보유 코인 : 14800 C] 팔자에도 없던 생존물을 찍은 덕택에 추가로 얻은 500코인까지 합하면 총 소득은 10500코인. 목표치는 훌쩍 넘겼다. [하하, 성좌님들. 잘들 보셨나요? 잠깐 광고 하나 보시고 바로 다음 시나리오 진행 들어가겠습니다!] 그 말과 함께 어디선가 희미하게 광고 소리가 들려왔다. 신규 시나리오 개방 특집 패키지가 8800코인······. 성좌들의 시선이 사라진 사이, 내 곁으로 내려선 비형이 친근한 듯 말을 걸어왔다. [후······ 아주 대단한 생존물이었어. 성좌들 반응도 굉장했다고.] “시간이 얼마나 지났지?” [나흘. 보는 내내 조마조마 했어. 시간도 몰랐던 거야?] “스마트폰이 방전됐어.” 생각보다 훨씬 많은 시간이 걸렸다. 본래 목표는 이틀이었는데······ 하긴, 4회차의 유중혁도 이걸 잡는데 나흘이 걸렸으니, 이정도면 그다지 느린 속도는 아니다. 어쨌거나 해냈다. 기분 좋은 충만감이 전신을 덮으며 자신감이 생겼다. 나는 평범한 사람이고 평범한 능력을 가졌다. 하지만 그렇다고 평범한 일만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우습네.” 기이한 일이었다. 28년 동안 단 한 번도 도움이 되지 않았던 허구가, 이토록 평범한 나를 비범하게 만들어 주다니. [오, 벌써 혼잣말도 하는 거야?] “······.” [너 제법인데? 올바른 화신이라면 혼잣말은 필수지. 물론 작위적이라고 싫어하는 성좌들도 있지만 보통은······.] “시끄럽고, 도깨비 보따리나 좀 열어 줘.” [왜? 살 거 있어?] “살 것도 팔 것도 있지.” [젠장, 그럼 잠시 광고 줄여야 겠네. 성좌님들, 잠시만요. 볼륨 조정 좀 들어갈게요.] 비형이 도깨비 보따리를 여는 동안, 나는 벽에 박힌 가시들을 살폈다. 위장벽이 굳으면서 가시를 중심으로 깊은 균열이 만들어져 있었다. 연해진 위장벽은 이제 내 근력으로도 충분히 깨부술 수 있을 정도였다. 나는 하나 남은 가시로 벽을 깨부수며 조금씩 전진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파란색으로 영롱하게 빛나는 어룡의 코어와 마주쳤다. [어룡의 핵] 7급 이상의 괴수종에게서 발견되는 에테르 코어였다. 가공해서 섭취하면 코인 없이도 마력 레벨을 높일 수 있는 귀품. 씨-커맨더 급의 어룡이라 그런지 품질 상태도 양호했다. 코어를 감싼 살점을 조심스레 잘라 밖으로 나오자, 비형이 어이없다는 듯 나를 바라 봤다. “이거 팔게.” [넌 진짜······.] “물론 너한테 판다는 뜻은 아냐. 도깨비 경매에 올려줘.” 비형은 내게 뭘 물어보기도 지쳤는지 그냥 납득하기로 한 듯했다. [후······ 맘대로 해. 그래서 얼마에 올릴 건데?] “코인으로 안 팔아. 물물 교환으로 팔 거니까.” [젠장, 별 걸 다 아는군.] 비형은 투덜거리면서도 도깨비 경매에 물건을 업로드했다. 욕망이 단순해서 그런지, 생각보다 말을 잘 듣는 녀석이다. “금방 산다는 녀석이 나타날 거야. 그리고 교환 물품은 반드시 ‘부러진 신념’으로 해 줘.” [부러진 신념? 그걸 가진 녀석이 있으려나······ 아무튼 등록했다.] “그래. 그리고 살 물건은······.” 나는 장바구니에 등록된 [백청강기]를 보았다. 역시, 아직 아무도 안 사간 상태다. 대부분의 성좌들은 코인 아이템의 가성비를 잘 모른다. 과금 유도가 심한 ‘도깨비 보따리’의 상품들은 비싸다고 무조건 좋은 게 아닌데도. [잠깐만, 그 전에 잠시 이야기 좀 하지?] 비형의 말과 함께 약해졌던 광고 볼륨이 다시 높아졌다. [길어지는 광고에 성좌들이 불평합니다.] 이미 나왔던 광고가 한 번 더 나오는 것을 보며, 나는 비형이 무슨 말을 할지 직감했다. “계약 얘기인가?” 방송을 끄지 않고 성좌들의 눈과 귀를 가릴 방법은 광고뿐이다. 지금부터 하는 말은 성좌들이 들어서 좋을 게 없으니까. [그래. 긴가민가했는데, 이번 시나리오 보고 조금 확신이 생겼어. 뭐······ 한 번 해 보자고. 뭣하면 내가 조금씩 도와 줘도 되니까.] “그건 이야기꾼 서약에 위배 될 텐데?” [아, 물론 진짜로 도와줄 수는 없고, 그냥 말이 그렇다는 거지. 그보다 계약 할 거지?] “조건은?” [읽어 봐.] 꼴에 도깨비라고 계약서까지 화려하게 준비해 온 모양이다. 나는 허공에 투명한 창으로 떠오른 계약서를 읽기 시작했다. ----- <스트림 계약 동의서> 1. 화신 김독자(갑)은 모든 시나리오가 종료되거나 본인이 사망할 때까지 도깨비 비형(을)과 전속 계약을 맺는다. ----- “······내가 갑이냐?” [하하, 인간들은 그런 거 좋아하잖아? 어차피 아무런 의미도 없는데 말이지. 아무튼 계속 읽어봐.] ----- 2. 화신 김독자(갑)은 모든 시나리오가 종료되거나 본인이 사망할 때까지 결코 배후성을 선택해서는 안 된다. ----- 이것도, 예상했던 바였다. ----- 3. 화신 김독자(갑)은 오직 도깨비 비형(을)의 채널에서만 활동해야 한다. 4. 화신 김독자(갑)과 도깨비 비형(을)은 스트림 계약을 통해 얻는 수익을 나눠 가지며, 그 비율은 상호 협의를 통해 정한다. ······. 10. 화신 김독자(갑)과 도깨비 비형(을)은 이 계약을 어길 시 <스타 스트림>의 율법에 따라 소멸형에 처한다. ----- 나는 마지막 항목까지 꼼꼼하게 계약서를 읽었다. 내가 잘 모른다고 장난질을 칠거라 생각했는데 그런 부분은 보이지 않았다. 딱 한 가지만 빼면. “그런데 중요한 부분이 없네.” [날인 말이야? 그건 그냥 동의한다고 말로 하면 돼. 스트림 계약은 영혼 서약이라―] “비율 얘길 하는 거다.” [아, 아아. 하하. 그렇지.] 자식이 시치미 떼기는. 그게 제일 중요한 부분인데. [5대 5 어때? 대신 네가 내야 할 채널 수수료는 빼줄게. 아, 산정 방식은 알지? 네가 앞으로 받을 후원금에서 정확히 비율대로 나누는 거야. 가령 100코인을 받으면 50코인은 네가 갖고, 50코인은 내가 갖는 거지.] 모든 <스트림 계약>은 이런 식이다. 성좌들은 도깨비의 채널에 화신을 출연 시키고, 다른 성좌들에게서 받은 후원금을 비율대로 나누게 된다. 보통이라면 그렇다. “날 호구로 아냐? 안 해.” [뭐? 하, 하지만 이게 이쪽 업계 기본 정산 비율······.] “난 배후성이 없는 화신이야. 그리고 배후성이 없는 화신을 후원할 때, 성좌들은 도깨비에게 막대한 수수료를 지불해야 하지. 이미 내 덕분에 꽤나 재미 봤을 텐데?” 비형의 턱이 천천히 벌어졌다. 하지만 이제와 그런 표정을 지어 봤자다. “10대 0. 넌 수수료만 받아도 되잖아. 난 한 푼도 안 내.” [뭣?! 그런 말도 안 되는······ 7, 7대 3은 어때?] 단번에 비율이 확 늘어난다. 하지만 양보 따위는 없다. “10대 0.” [씨발 뭔 개 소리야! 그딴 말도 안 되는 비율은―] “싫음 말든가. 그냥 다른 채널로 가지 뭐. ‘길달’ 녀석이 요즘 잘 나가니까, 그쪽에 한 번 부탁해 봐야겠군.” [······8대 2. 나도 더 이상은 양보 못해.] “10대 0.” [······.] 비형의 표정이 위협적으로 변했다. 당장이라도 내 머리를 터뜨릴 듯한 중압감. 하지만 나는 안다. 놈은 절대 이 계약을 포기할 수 없다. 이놈에게 내 존재는 마지막 기회일 테니까. “광고 끝나겠다. 성좌들 불평 하는 거 안 보여?” 결국 포기한 듯 비형이 두 손을 들었다. [제기랄, 알겠어. 그럼 계약 할 거지?] 이거, 생각보다 쉽게 항복하는데. 사실은 9대 1 정도로 양보해 주려고 했건만. ······어쩌면 내가 아는 것보다 뒷돈을 더 많이 받아 처먹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왠지 괘씸한데. “그래. 그리고 한 가지 더.” [뭐? 또 있어?] “계약금은 따로 줘야 할 거 아냐. 5천 코인 내놔.” 비형의 표정이 순간 멍해졌다. [······너, 너 진짜.] 나는 씩 웃었다. ‘갑’이 왜 ‘갑’이라고 불리는지, 왜 인간들이 아무것도 아닌 그 자리에 그렇게나 연연하는지······ 친히 알려 주마 망할 도깨비야. [스트림 계약이 성사되었습니다.] [계약금으로 5000코인을 받았습니다.] 이윽고 광고가 끝나고 성좌들이 다시 돌아왔다. 나는 도깨비의 어깨를 툭툭 두드려 주며 말했다. “자, 그럼 밖으로 나가 볼까.” 이제부터가 진짜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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