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4화
154화
내 이야기를 들은 한수영이 어이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너 진짜로 성좌가 된 거야?”
분명 며칠 전까지 화신이었던 녀석이, 성좌가 되어 나타나다니.
기묘하게 느껴지긴 할 것이다.
아마 한수영이 읽은 데까지는, 화신이 ‘성좌’로 거듭나는 이야기는 안 나왔을 테니까.
“그래. 나 성좌야.”
“진짜, 진짜로?”
“그렇다니까.”
한수영은 도저히 믿지 못하겠다는 듯 눈을 끔뻑였다.
“······그게 그렇게 쉽게 되는 거였어?”
결코 쉽지 않았다고 말해주고 싶었지만, 한수영은 들을 계제가 아니었다.
“시발, 너 그럼 이제 시나리오 밖에서 우리 구경하면서 후원질하고 그러는 거냐?”
“그런 건 아냐. 난 시나리오 진행 도중에 성좌위에 올랐기 때문에, 시나리오는 계속 참여해야 해.”
“그럼 뭐가 달라진 건데? 겉으로 봐선 전혀 모르겠는데?”
사실 나도 엄청나게 실감이 나는 것은 아니었다.
설화를 빌린다거나, 다른 성좌 및 성운들과 거래할 수 있게 되었다거나, 나에 대한 성좌들의 태도가 바뀌었다든가······.
[일부 성좌들이 당신의 성장세를 질투합니다.]
[일부 성좌들이 당신이 수식언을 갖는 것을 반대합니다.]
[몇몇 성좌들이 당신에게 적대감을 보입니다.]
하여간, 성좌고 나발이고 질투가 제일 추한 법이지.
이제 막 자라나는 새싹에게 왜 저렇게들 가혹한지 모르겠다.
그런데 그거 아냐?
나도 이제 그거 할 수 있는 거.
[당신이 다른 성좌들을 노려봅니다.]
[일부 성좌들이 깜짝 놀라 당신을 바라봅니다!]
[몇몇 성좌들이 경악하며 마시던 콜라를 토합니다!]
[간접 메시지 사용으로 200코인을 소모하였습니다.]
······역시 간접 메시지를 띄우면 코인이 나가는군.
재미는 있는데, 적당히 써야겠다.
곁을 보니 한수영이 입을 벌리고 있었다.
“바, 방금 메시지 띄운 거 너야? 이름 없는 성좌 어쩌구 그거?”
역시, 한수영 한테는 그렇게 보인 모양이군.
“그래.”
“혹시 지금까지 너 <배후 계약> 안 하고 있었던 게 그것 때문이야?”
“그래.”
“······그럼 난 이미 늦은 거지?”
“그렇다고 볼 수 있지.”
한수영은 미간을 찌푸리며 허공을 올려다보았다.
[성좌, ‘심연의 흑염룡’이 우물쭈물하며 눈치를 살핍니다.]
한숨을 푹 내쉰 한수영이 나를 바라보았다.
“시발······ 존나 부럽네 진짜. 근데 넌 왜 수식언이 없어?”
“그건······.”
왜 나는 수식언이 없는가?
정확한 답은 나도 모른다.
[<스타 스트림>이 당신이 머무를 별자리의 수식언을 찾는 중입니다.]
어쩌면 쌓아온 설화의 개수가 얼마 안 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성좌가 되었는데 수식언이 없다는 것은, 시민권은 얻었는데 살 집이 없는 것과 비슷했다.
“그러니까, 부랑자 신세라는 거네.”
“······아직 다섯 번째 설화가 안 끝났어. 아마 늦어도 이번 설화가 마무리 될 때쯤이면 나도 수식언이 생길 거야.”
[다섯 번째 설화, ‘고독한 메시아’가 현재 진행 중입니다.]
다섯 번째 설화는 성좌의 ‘격’에 큰 영향을 미치는 설화다.
그러니 이 설화가 어떻게 마무리 되냐에 따라서, 내가 머물 별자리의 위치도 정해질 것이다.
······아마도.
그러자 한수영이 야유했다.
“올······ 김독자, 갑자기 좀 멋있어 보인다? 이제 유중혁도 막 처바를 기세네?”
유중혁이라.
나는 주먹을 쥐었다 펼쳐 보았다.
그러자, 이제껏 보지 못했던 메시지가 떠올랐다.
[‘개연성 후폭풍’을 조심하십시오.]
[현재 <스타 스트림>이 당신의 격을 평가 중입니다.]
손끝에서 찌릿하게 느껴지는 감각.
역시, 성좌가 되면 이게 문제다.
그래도, 저 ‘평가’가 진행중인 동안만큼은 괜찮을 것이다.
아직 <스타 스트림>은 내게 적합한 수준의 제약을 모를 테니까.
“지금이라면 이길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진짜?”
어디까지나 ‘지금’이라면 말이다.
주인공이 괜히 주인공이 아니다.
내가 ‘성좌’라는 모험을 감행해야만 따라갈 수 있는 성장력.
그게 바로 유중혁이란 녀석이 받은 어마어마한 특혜니까.
“그보다 내가 맡긴 거나 빨리 돌려줘.”
“쳇, 알겠어.”
[화신 ‘한수영’이 계약을 이행합니다.]
나는 한수영에게서 맡겨 두었던 코인과 아이템들을 모두 돌려 받았다.
한수영이 한숨을 내쉬었다.
“······아쉽네. 잠깐 부자된 기분이었는데.”
“수고비로 2만 코인 줬잖아.”
“60만 코인 넘게 갖고 있었는데, 꼴랑 2만 코인 받았다고 기분 좋겠냐?”
“그럼 도로 내놓든가.”
한수영이 콧방귀를 뀌며 등을 돌렸다.
나는 한수영에게 받은 아이템과 코인을 점검했다.
[보유 코인 : 684,353 C]
그간 참, 많이도 모았다 싶다.
악착같이 벌고 악착같이 저축했으니, 이만큼 모인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이제 성좌가 되었으니 코인을 사용하는 데도 거리낌이 없었다. 내가 가진 코인들이 진짜 힘을 발휘하는 건 지금부터일 것이다.
그럼 슬슬······ 아, 잠깐. 중요한 걸 잊고 있었네.
“한수영, 저건 언제 풀어줄 거냐? 저거 성희롱이라고.”
“어? 이런, 깜빡했네.”
배시시 웃는 한수영과 함께, 나는 아직도 머리를 감싸쥔 채 바닥에 주저앉아 있는 이현성을 향해 다가갔다. 이현성의 주변에는 여전히 훌러덩 옷을 벗은 채 춤을 추고 있는 한수영의 분신들이 있었다.
[등장인물 ‘이현성’이 공포에 떨고 있습니다.]
······.
「강철검제는 여자에게 약하다.」
아무리 ‘멸살법’에 그런 문장이 들어 있다지만, 이건 좀 심한 게 아닌가 싶을 생각이 들 정도였다. 게다가 저건······.
“······진짜도 아니네.”
한수영의 분신들은 얼핏 보면 나신의 여체 같지만, 잘 보면 중요한 부위들이 없었다.
즉, 이현성은 지금 마네킹이나 다름없는 분신들을 보고 저 지경이 되어버린 것이다.
내 말뜻을 알아챈 한수영이 짓궂게 웃었다.
“흐음······ 그거 무슨 뜻이야? 혹시 못 봐서 아쉽다는 뜻?”
“말했잖아. 난 빈약한 체형 안 좋아한다고.”
“······본 적도 없는 게 막말하는 거 아니다.”
“그걸 꼭 봐야 아냐?”
나는 일단 이현성에게 다가가서 등을 두드려 주었다.
“현성 씨, 괜찮아요?”
“도, 독자 씨.”
눈빛이 멍청한 게 아무리 봐도 제정신이 아니었다.
이현성은 유령이라도 보는 듯한 얼굴로 나를 보며 중얼거렸다.
“독자 씨가 왜······ 저도······ 죽은 겁니까?”
제대로 트라우마가 걸린 모양인데. 이죽거리고 있는 한수영을 보고 있자니 짜증이 난다. 만화 같은 상황이었지만, 강철검제 본인에겐 제법 심대한 타격이었을 것이다. 이거, 이번 회차에서 잘못하면 이현성이 고자 루트를 밟을지도 모르겠는데······.
일단은 시간이 지나면서 회복되도록 내버려두는 수밖에 없다.
그때, 옆에서 다른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저기······.”
“······?”
“저는 이만 가봐도 되겠습니까?”
그제야 [핑키즈]의 마지막 멤버가 눈에 들어왔다.
늘씬한 몸매에 예쁘장한 얼굴. 고운 눈썹에 은은한 볼터치가 들어간 뺨.
누가 저 여자의 실체가 40대 아저씨라 믿을까.
“당신 이름이 뭐죠?”
내가 묻자, 예쁜 목소리가 답했다.
“서, 서인아입니다.”
“그거 말고 본명요.”
서인아는 우물쭈물대더니 결국 본명을 토해냈다.
“······김영팔입니다.”
[핑키즈]의 김영팔. 제대로 찾았군.
한수영이 혀를 찼다.
“······저 아저씬 왜 살려둔 거야? [핑키즈]는 나쁜 새끼들이잖아?”
“아직은 아냐. 나쁜 놈들이 ‘될 예정’이지. 그리고 너도 제대로 읽었다면 알겠지만, [핑키즈]는 원래 3인조야.”
“그치만 쟤네는 4명······ 어?”
“저 아저씬 걔네가 본격적으로 활동하기 전에 죽은 사람이야.”
“······그래서 죄목이 기억이 안 났던 거였나?”
“김영팔은 기본적으로 순수한 사람이야. 그래서 [핑키즈]에서 제일 먼저 죽었던 거고.”
김영팔이 끼어들었다.
“저기, 무슨 말씀들을 하시는 건지······.”
“아저씬 닥치고 있어.”
미간을 찌푸린 한수영이 말을 이었다.
“저 아저씨가 순수하다고?”
“그래.”
나도 믿기지 않지만, ‘멸살법’의 설정이 그 따위인 것을 어쩌겠는가.
[성별 바꾸기를 좋아하는 한 성좌가 고개를 끄덕입니다.]
[성별 바꾸기를 좋아하는 한 성좌가 성별 바꾸기를 좋아하는 사람 중에는 나쁜 사람이 없다고 주장합니다.]
실제로 김영팔은 아무도 살해하지 않고 지금까지 살아남았다.
심지어 첫 번째 시나리오에서도.
내가 [곤충 살해]라는 생각을 떠올릴 수 있었던 것도, 모두 첫 번째 시나리오에서 김영팔이 실수로 지나가던 개미를 밟아죽이고 생존한 전례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김영팔은 본인이 왜 살아 남았는지 알지 못했지만.
정말로 ‘운 좋게’ 살아남은 사람.
그게 바로 [핑키즈] 김영팔이었다.
아니, 이제 동료가 다 죽었으니 [핑키]라고 불러야겠군.
한수영이 인정하기 싫다는 듯 중얼거렸다.
“젠장······ 뭐 네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아무튼 쓸모가 있으니까 살려둔 거지?”
“그래.”
“그래서 이제 어쩔 건데?”
“어쩌긴, 다시 시나리오 깨야지.”
“이번 시나리오가 뭔지는 알고 하는 소리지?”
물론 안다.
아주 잘 알고 있다.
“‘서울 돔 해방’을 앞둔 마지막 시나리오잖아.”
아홉 번째 시나리오, [암흑성].
이 시나리오에는, 지금껏 나오지 않았던 존재들이 등장한다.
나는 여전히 공포에 떨고 있는 이현성과 곯아떨어진 이지혜, 그리고 다친 이길영을 돌보는 신유승을 보았다.
아마 다른 일행들도 어딘가에 살아 있을 것이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그 ‘정희원’이 있으니, 암흑성 1층에서 그렇게 쉽게 당하지는 않았겠지.
“너도 알겠지만 1층은 장난이야. 진짜 지옥은 2층 부터지.”
성채에 드러난 특수창으로 바깥의 정경이 보였다. 마인이 되어 돌아다니는 서울의 인파들. ‘최강의 희생양’을 자처하며 힘겹게 지켜낸 보람이 없게도, 서울 시의 절반은 이미 악마종의 수족이 되어가는 중일 것이다.
갸아아아아!
슬픈 듯 절규하는 서울의 화신들.
이미 충분한 절망이 서울을 뒤덮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이야기’는 부족했다.
이야기는, 언제나 부족하다.
도깨비들은 여전히 더 큰 절망을 갈구하고.
성좌들은 여전히 더 자극적인 이야기를 갈망한다.
함께 창밖을 보던 한수영이 말했다.
“역시 진부한 상상력이라니까. 회귀자에, 귀환자에, 환생자에. 그것도 모자라서 이번엔 악마냐?”
“지도 표절한 주제에 무슨······.”
“야, 내가 아니라고 몇 번을······.”
평소처럼 시답잖은 농담을 주고 받다가, 문득 궁금증이 일었다.
“한수영.”
“왜?”
“만약 네가 ‘멸살법’ 작가라면 말야.”
“난 그딴 쓰레기 안 쓰거든?”
“그냥 가정하는 거야.”
툴툴대던 한수영이 입술을 비죽였다.
“······작가라면?”
“네가 ‘멸살법’ 작가라면, 이 세계를 왜 만들었을 것 같냐?”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넌 같은 작가니까 혹시 알까 싶어서.”
“나 같은 일류 작가가 어떻게 삼류 작가의 생각을 알겠냐?”
······물어 본 내가 등신이지.
그런데 한수영이 말을 이었다.
“오히려 내가 너한테 묻고 싶은데 그래.”
“······뭘?”
순간 한수영의 깊은 눈동자와 시선이 마주쳤다.
[전지적 독자 시점]을 사용해도, 한수영의 속은 읽을 수 없다.
하지만 지금은 조금 알 것 같았다.
같은 이야기를 읽어온 사람은, 생각마저 닮아가는 건지도 모른다.
‘넌, 이 세계의 끝을 알고 있어. 그렇지?’
한수영은 분명 그렇게 묻고 있었다.
그러나 언제나 그랬듯,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이 돌아오지 않을 걸 알기에 한수영은 내게서 시선을 돌린 채 창밖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다른 것을 물었다.
“······<시나리오>라는 건 대체 뭘 위해 존재하는 걸까.”
나 역시 창밖을 보고 있었다.
멸망한 서울 위로, 새카만 하늘의 어둠이 보인다.
성좌가 되었기 때문일까.
하늘은 이제 예전과 같은 풍경이 아니었다.
천공을 수놓은 무수한 별자리.
그 별자리들을 끌어안은 <스타 스트림>이 그곳에 있었다.
저렇듯 가까이 붙어 있음에도, 결코 닿을 수 없는 별들.
그토록 많은 별들이 빛나고 있음에도······.
조금도 지워지지 않는, 저 까마득한 심연.
나는 그제야, 뭔가를 조금 알 것 같은 기분이었다.
‘성좌’란 존재들이 늘 무엇을 견디고 있었는지.
어째서 그들이 이야기에 그토록 집착하는지.
그 아득한 감정을 떨쳐내기 위해 나는 입을 열었다.
“아마, <시나리오>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