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3화

153화 “······아까 그거 아저씨 얘기지?” “뭐?” “그, 서울 시에 새로운 성좌 어쩌구······.” “아······, 뭐. 그렇지.” 나는 주변에 늘어진 악마종의 시신들을 바라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이지혜의 위기를 보고 놀라서 달려왔는데, 아무래도 너무 과격하게 저질러버린 것 같다. [악마 자작 노소로크]. 코뿔소를 닮은 이 음험한 녀석은, 본래 이번 회차에서 무수한 화신들을 범하고 찢어 죽인 악마종이었다. 무려 귀족급의 악마를 단숨에 제압했으니, 내가 얼마나 강해졌는지 새삼 실감이 났다. 이지혜가 허탈하다는 둣 말했다. “엄청나게 강한 놈이었는데······. 성좌가 되면 대체 얼마나 강해지는 거야?” “내 힘으로 죽인 거 아냐. 다른 설화들의 힘을 좀 빌렸어.” “다른 설화?” [그르······ 너······ 누구······.] 돌아보니, 아직 숨이 끊어지지 않은 노소로크가 이쪽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잠시만.” 콰직! 나는 간단히 발을 내리 찍어 노소로크의 머리를 터트렸다. [당신은 마계의 귀족을 처치하였습니다!] [10000코인을 획득하였습니다!] [아이템 ‘상급 악마의 증명’을 획득하였습니다.] [마계의 하위 종족들이 당신에게서 두려움을 느낄 것입니다.] 본래 악마종을 죽이면 해당 악마종이 따르는 ‘마왕’과 척을 지게 되지만, 이번 시나리오에서만큼은 다르다. [암흑성] 시나리오에 등장하는 모든 악마종들은 새로운 ‘주인’을 기다리는 녀석들이기에 죽여도 딱히 분노하는 마왕은 없다. [일부 성좌들이 당신의 압도적인 무위에 놀랍니다.] [상당수의 성좌들이 당신의 개연성을 의심합니다.] 확실히, 개연성을 의심할 법도 하다. 지금 내 강함은 시나리오의 균형에 명백히 위배되는 수준이니까. 하지만 내가 ‘노소로크’를 손쉽게 쓰러트린 것은 단순히 ‘성좌’가 되었기 때문은 아니었다. [설화, <메시아의 길>의 효과가 일부 적용 중입니다.] <메시아의 길>의 효과인 ‘절대 신성’. 악마족에게는 특효인 이 설화를, 나는 <에덴>에게 빌린 상태였다. [성운 <에덴>이 당신에게 ‘설화 인용’의 대가를 요구합니다.] 슥슥. 허공에 십자 모양의 성호를 긋자, 메시지가 들려왔다. [성운 <에덴>이 당신의 ‘설화 인용’에 기뻐합니다.] ‘인용’을 반복할 때마다 원하는 행동을 해주는 게 귀찮기는 하지만, 설화 표절로 시비 걸리는 것보다는 낫다. 게다가 이번에는 성호만 그어주면 딱히 다른 대가를 요구하지도 않았다. 성좌가 된 기념으로 <에덴>에서 특별히 서비스를 해 주었기 때문이다.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기뻐합니다!] 이게 다 귀여운 우리엘 덕분이다. 다행히 ‘연회’의 일은 잘 해결된 모양이었다. “아저씨······ 그새 종교 생겼어?” 이지혜가 간헐적인 호흡을 몰아쉬며 웃었다. 오른쪽 어깨, 그리고 아랫배의 관통상과 자상들. “미안. 명색이 서울 10위인데 내 꼴이 너무 형편없지?” “지금이 너한텐 제일 힘들 시기야. 앞으로 좋아질 거니까 걱정 마. 자, 지금부터 뼈 맞출 테니까 가만히 있어.” “응? 으아아아아악!” 아무래도 [엘라인 숲의 정기]를 써야 할 것 같은데. 그러나 코트의 품속에는 남은 아이템이 하나도 없었다. 그러고 보니, 한수영에게 죄다 맡겨놓고 죽었었지. 여덟 번째 시나리오에서 죽기 직전, 나는 한수영과 작은 계약을 맺고 그때까지 가지고 있던 아이템들을 죄다 맡겨놓았다. 그럼······ 방법은 하나뿐인가. “도깨비 보따리.” 입을 열자마자, 눈앞에 [도깨비 보따리]의 화면창이 나타났다. [일부 성좌들이 당신의 자연스러운 특권 사용에 의문을 표합니다.] 지금까지는 [도깨비 보따리]를 쓸 때마다 비형이 광고로 가려왔기 때문에, 대부분의 성좌들은 내가 그런 혜택을 누렸다는 걸 알지 못했다. 하지만 이제 성좌도 되었겠다, 눈치 따위 볼 필요가 없다. 나는 곧바로 [엘라인 숲의 정기]를 구입해 이지혜에게 먹였다. “으, 으읍!” “먹고 한숨 자라.” “······고마워, 아저씨.” “뭘. 내 장례식에서 질질 짜줘서 고맙다.” “······나 지금부터 기절할 거니까 말걸지 마.” 이지혜는 그대로 곯아떨어졌다. 잠든 이지혜를 업고 몸을 일으키자,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저씨······?” 뭉클하게 번지는 감각. 돌아보지 않아도 목소리의 주인을 알 수 있었다. [당신의 화신이 당신을 바라봅니다.] 이 느낌이 없었더라면, 나는 곧장 이곳으로 달려오지 못했을 것이다. 울음을 참은 채 이쪽을 보는 신유승을 보며, 아마도 부모의 마음이 이럴 것이라 생각하게 된다. “아저씨!” 허벅지에 폭 안겨드는 신유승을 나는 가볍게 끌어 안았다. “내가 너무 늦었지?” “일주일이나 늦었다고요······.” 일주일. 빌어먹게도, 나는 예정보다 늦게 부활하고 말았다. “가자. 맡긴 물건부터 찾아야해.” * “······일주일이나 지났는데 왜 아직도 안 오는 거야?” 한수영은 암흑성의 바닥에 누운 채 천장을 보다가 문득 그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악마종이 들끓는 암흑성의 미로에서 혼잣말은 미친 짓이었지만, 다행히 그녀의 목소리를 듣고 몰려오는 악마종은 없었다. 왜냐하면, 이미 누군가가 근방의 악마종을 죄다 쓸어버리고 2층으로 올라간 까닭이었다. 물론, 모두 유중혁의 짓이었다. “빌어먹을 주인공 새끼.” 한수영은 속으로 이를 까드득 갈았다. 30분 전, 한수영은 이곳에서 유중혁과 대결했다. 그리고 처참하게 패배해서 지금 이 꼴이 되어 있다. 쥐어 터진 삭신이 쑤시고, 현기증에 머리가 어질어질하다. 악마종? 악마종이 문제가 아니다. 진짜 악마는 유중혁이다. “완전 사기잖아. 그런 새낄 어떻게 써먹겠다고······ 김독자도 돌았지.”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가지 않는다. 서울 랭킹에서 유중혁은 3위고, 한수영은 4위였다. 그런데 이 처참할 정도의 격차는 뭐란 말인가. 그나마 목숨을 잃지 않은 것은 마지막 순간 기지를 발휘해 던진 말 때문이었다. ‘야! 이거 김독자 물건이야! 진짜 빼앗아 갈 거냐?’ ‘······김독자가 왜 네게 물건을 맡겼지?’ ‘그거야······ 내가 제일 믿음직스러우니까 그런 거 아니겠어?’ ‘그럼 너를 죽이고, 내가 가지고 있으면 되겠군.’ ‘나, 나를 죽이면 손해일걸? 김독자도 그렇게 생각할 거라고!’ 그 말에 유중혁은 한참이나 고민하더니, 결국 그녀를 놓아주었다. ‘또 내 앞에서 그놈 이야길 들먹이면 그땐 정말로 죽이겠다.’ 그리고, 곧장 2층으로 올라가 버렸다. 생각하니까 또 열불이 터진 한수영이 소리를 질렀다. “아 십새끼······ 으아아아아! 심연의 흑염룡! 너 최강의 성좌라며! 왜 저놈한테 못 이기는 건데!” [성좌, ‘심연의 흑염룡’이 침음합니다.] [성좌, ‘심연의 흑염룡’이 그것은 자신의 잘못이 아니라 항변합니다.] 한참을 씩씩대던 한수영이 한숨을 내쉬었다. 누가 보면 다중 인격이라 오해할 법한 장면이었다. “그나저나 큰일 났네. 저 새끼 자기 여동생 데리고 올라가던데······ 이대로면 김독자가 싫어할 전개가 될 게 분명해. ······상황이 이 모양인데 김독자는 대체 어디서 뭐하고 있는 거야?” [성좌, ‘심연의 흑염룡’이 그게 무슨 소리냐고 묻습니다.] “그런 게 있어 자식아. 그나저나 그 새끼가 내 ‘증명’ 다 가지고 가서 처음부터 시작해야 할 판이네······.” 한수영은 시나리오 창을 열어 보았다. + <메인 시나리오 # 9 ― 악마의 증명> 분류 : 메인 난이도 : A++ 클리어 조건 : 악마종을 사냥하고, 악마의 증명 9개를 모아 2층으로 가는 제단에 바치시오. 제한시간 : 23일 보상 : 50000코인 실패시 : ― + 악마종의 개체들이 워낙 강력하다 보니 시나리오 자체는 난이도가 좀 있었지만, 강자들이 협력만 잘 한다면 어떻게든 클리어는 가능한 시나리오였다. 이미 주요 그룹들은 힘을 합쳐서 2층으로 올라간 상황. 아무리 그녀가 랭커라고 해도, 이대로라면 다른 상위권 랭커들에게 순위를 내줄 판이었다. [암흑성]의 증명 보상은 꽤 좋은 편이고, 조금만 지체해도 순위는 바뀔 테니까. ‘어떡한다?’ 마침, 복도 반대쪽에서 사람들의 인기척이 들려왔다. 한수영은 차라리 잘 됐다고 생각했다. 어차피 이렇게 된 이상, 다른 녀석들의 증명을 빼앗아 올라가는 수밖엔······. “한수영 씨!” 나타난 이들을 본 한수영이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이게 대체 무슨 일입니까?” “······그냥, 악마종이랑 싸우다 좀 다쳤어. 이현성 씨도 이쪽 미로로 들어왔나봐?” “그렇습니다. 괜찮으십니까?” 그는 순정강철 이현성이었다. ‘왜 하필 나타나도 이 녀석이.’ 이현성이 왔다는 것은 김독자의 동료들도 왔다는 것. 아무리 상황이 급해도, 주요 인물들의 증명을 빼앗을 수는······ 어? “이현성 씨! 함부로 다가가지 마세요!” 예쁘장한 얼굴에 앙칼진 목소리. 이현성과 함께 나타난 네 명의 일행은, 한수영이 알던 사람들이 아니었다. 여자가 다시 한 번 외쳤다. “이현성 씨! 내 말 안 들려요? 함정일지도 모른다고요!” “맞아요! 물러서세요! 얼른 이리로!” “하지만······.” 당황한 이현성이 한수영과 여자들 쪽을 번갈아 보았다. 한수영도 함께 그쪽을 흘끔거리다 말했다. “일행이 바뀌었나봐? 갑자기 하렘을 구축하셨네?” “그게, 미로에서 일행들이랑 떨어져서······.” 이현성이 곤란한 듯 뒷머리를 긁자, 결국 다른 여자들이 달려와 그의 팔짱을 한쪽씩 끼고 잡아 당겼다. “아, 왜 사람 말을 안 들어요! “저건 악마종과 싸워서 생기는 상처가 아니에요. 저 여자 수상해요!” “맞아요!” “하여간 현성씨는 순진해! 이런 세상에선 아무도 믿어선 안 돼요!” 이현성을 끌어 안고 뒤쪽으로 잡아당기는 여자들과,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곤란해 하고 있는 이현성. 한수영은 [특성 간파]를 발동했다. 다음 순간, 눈앞에 떠오르는 이름들을 본 한수영의 입가에 잔인한 미소가 깃들었다. ‘······이것들 봐라? 얘네 걔들이잖아?’ 멸망한 세계에 사람들이 적응하는 방식은 모두 다르다. 정희원이나 이지혜처럼 스스로를 믿고 나아가는 여자들이 있는가 하면, 누군가에게 빌붙거나 그들을 이용하려는 여자들도 있다. 그런데 더욱 재미있는 것은······. “이현성, 그렇게 안 봤는데 사실은 취향이 남다른가봐?” “예?” “쟤네 전부 남자들인데, 알아?” [성별 바꾸기를 좋아하는 한 성좌가 깜짝 놀랍니다!] [여장남자를 좋아하는 한 성좌가 경악합니다!] 한수영의 말에, 여자들이 경악하며 외쳤다. “무, 무슨 소리에요 지금!” “모함하지 마세요!” 목소리만 들어서는 전혀 남자라는 걸 알 수 없는 자들이었다. 그러나 한수영은 이들을 알고 있었다. [위장 복색]과 [금단의 매혹] 스킬을 이용해, 강한 랭커들을 등처먹거나 약자들을 살해하는 4인조 그룹. 이 그룹의 이름을, 한수영은 기억하고 있었다. [핑키즈]. 무슨 걸그룹 같은 이름을 가지고 있지만, 실은 전부 40대 아저씨들이다. “어이, 아저씨들, 어린 여자로 위장하면 좋아? 이현성 당신도 그대로 있으면 저 아저씨들한테 정기 다 빨려서 뒈질걸?” “무슨 개소릴 하는 거야 미친년이!” “현성 씨, 얼른 가요! 역시 이상한 사람이야!” 다른 성별로 분장해서 남을 등처먹고 다니는 일쯤이야, ‘멸살법’의 세계에서는 흔한 일이다. 이 세계에는 ‘핑키즈’보다 더한 악당들도 많다. 그러니, 이 아저씨들은 충분히 갱생이 가능할 수도 있었다. “김독자라면 그렇게 말했을지도 모르지만······.” 한수영은, 김독자와는 다르다. “난 거슬리는 건 그때그때 치워야 직성이 풀리거든.” 아마 이대로라면 이현성은 백 퍼센트 [핑키즈]에게 뒤통수를 맞을 것이다. 그리고 그 피해는, 클리어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겠지. 스르르르르! 한수영의 몸에서 순식간에 늘어난 분신들이 주변을 포위하기 시작했다. 이현성이 황급히 앞으로 나섰다. “무, 무슨 짓입니까!” “비켜. 쟤들 죽여야 되니까.” “이 사람들은 나쁜 사람들이 아닙니다!” 이현성은 전혀 비킬 기세가 아니었다. 딱히 매혹에 당한 것 같지도 않은데도, 이현성은 완강했다. 생각해 보면 이현성 다운 일이긴 했다. 뒤쪽의 [핑키즈]가 감동이라도 한 듯한 눈으로 이현성을 보고 있었다. 짜증이 난 한수영이 말했다. “안 비키면 너도 죽여버린다?” “한수영 씨. 당신이 강한 것은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기세를 거두시기 바랍니다. 저 역시 힘이라면 자신 있으니까요.” “그럼 해보든가!” 늘어난 분신들이 일제히 이현성을 향해 달려들었고, 그 사이 한수영은 ‘핑키즈’를 향해 달려갔다. “죽어라, 변태들!” “그러시면 안 됩니다!” “꺄아악! 살려줘요 현성 씨!” [강철화]를 발동한 이현성이 엄청난 기세로 한수영의 분신들을 쳐 죽이기 시작했다. 그 엄청난 공격력에, 한수영은 저도 모르게 식은땀을 흘렸다. ‘역시 강철검제.’ 눈치를 보던 [핑키즈]가 슬금슬금 달아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이대로라면, 녀석들을 죄다 놓칠 판이었다. 이미 적대적인 인상을 준 마당에 살려둬서 좋을 건 하나도 없는데. ‘그랬다 이거지.’ 이렇게 된 이상, 비장의 무기를 사용하는 수밖에 없다. 한수영이 짓궂은 미소를 지으며 이현성 쪽을 바라보았다. “좋은 거 보여줄까?” 다음 순간, 이현성을 둘러 싸고 있던 한수영의 분신들이 동시에 훌러덩 옷을 벗었다. 허공에 드러난 새하얀 나신들. 얼굴이 새빨개진 이현성이 자신의 눈을 가린 채 주저앉았다. “우, 우아아악! 이게 뭡니까!” 한수영의 본체가 이현성의 머리를 짓밟고 하늘을 날았다. “벌거벗은 여자다!” 허공을 날아 가속한 한수영은, 달아나는 [핑키즈]의 뒷덜미에 순식간에 단도를 꽂았다. 콰아악! “네, 네년이 뭔데 우리를······! 끄아악!” ‘윤우철. 41세. 코인 농장 운영.’ 숨이 끊어진 동료를 보며 다른 [핑키즈]가 울부짖었다. “시발! 우린 아무 잘못도 없다고!” ‘황민규. 43세. 미성년자 성폭행 및······ 뭐였더라?’ 간단히 움직인 단도에, 또 다시 목이 떨어졌다. 변신이 풀린 [핑키즈]가 털이 수북한 무다리를 드러내며 드러누웠다. “사, 살려줘! 살려줘어!” ‘방탁호. 39세. 3회차에서 어린이들을······ 아무튼!’ 스걱! 순식간에 남은 [핑키즈]는 하나 뿐. 벌벌 떠는 여장중년인을 보며, 한수영이 인상을 찌푸렸다. ‘얜 뭐였지?’ 잠시 생각하던 한수영이 그대로 마지막 [핑키즈]의 목을 날리려는 순간, 어디선가 날아온 백청의 마력이 그녀의 단도를 막았다. 그리고 들려오는 담담한 목소리. “그쪽은 잘못 짚었어.” “······뭐?” “그 아저씬 죽이면 안 된다고. 이번 공략에 필요한 사람이야.” 고개를 돌리는 순간,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한수영이 생긋 웃었다. “너무 늦었잖아, 김독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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