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5화
155화
<스타 스트림>의 무수한 존재들이, 긴 세월을 살면서 한 번씩 던져온 질문 중 하나는 바로 이것이다.
‘시나리오란 대체 왜 존재하는가?’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은 저마다 달랐다.
가령, 귀환자인 키리오스 로드그라임은 이렇게 말했다.
―그것마저 없다면 이 우주는 너무 외롭기 때문이겠지.
또, 성좌 ‘어두운 봄의 여왕’은 같은 질문에 다음과 같이 되묻는다.
―지금 어째서 ‘요리’가 존재하느냐고 묻는 것인가요?
그리고 마왕 ‘아스모데우스’는, 같은 질문에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그것은 더 커다란 멸망을 막기 위한 작은 멸망이다.
누군가 듣는다면, 낭만적이라든가 철학적이라고 말할 법한 대답들.
그러나 ‘낭만’과 ‘철학’이란 애초에 배부른 자들을 위한 사치일 뿐.
그러므로 지금 암흑성 2층의 <무저갱 평원>에 있는 악마 백작 ‘텐타치오’에게, <시나리오>란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좆같아.”
그것은 그의 말버릇이었고, 엄밀히 따지면 그만의 말버릇도 아니었다.
이 공간에 들어온 존재들은 누구나 50년쯤 지나면 그런 말이 입에 붙게 되니까.
물론, 50년씩이나 살아 있을 때의 이야기였지만.
“지겨워.”
마계의 강 [포이닉스]의 지류가 흐르는 드넓은 <무저갱 평원>.
혹자는 어떻게 ‘암흑성’의 2층에 이처럼 거대한 평원이 있느냐고 물을지도 모르지만, 물론 그거야 텐타치오도 알지 못한다.
그가 알고 있는 사실은 둘 뿐이다.
이 거대한 평원의 정점에 올라야 한다는 것.
그리고 그것을, 194년째 못 해내고 있다는 것.
‘빌어먹을, 그때 그 도깨비 놈의 제안만 아니었어도······.’
지금도 194년 전의 기억은 생생했다.
―73번째 ‘마왕’이 되고 싶지 않으십니까?
마왕.
모든 ‘악마종’의 정점이자 숙원.
―······내가 마왕이 될 수 있다고?
3급 악마종으로 살아가며 신분 상승이 요원해진 상황. 아무리 많은 하급 악마종을 잡아 먹어도 좀처럼 오르지 않는 힘. 그 정체기에, 텐타치오는 악마인 자신보다 더 악마 같은 존재의 유혹을 받았다.
―당신에게 부족한 건 ‘힘’이 아닙니다. ‘이야기’지.
―그게 무슨 소리지?
―시나리오에 참가하게 되면, 알게 되실 겁니다.
그렇게 텐타치오는 시나리오 [암흑성]에 투입되었다.
수많은 악마종을 찢어 죽였고, 전 차원에 흩어진 [암흑성]의 1층에서 올라오는 종족들을 학살했다.
194년이 지났을 때, 악마 백작 텐타치오는 ‘암흑성 2층’에서 가장 강한 열 명의 악마 중 하나가 되었다.
하지만 거기 까지였다.
‘이걸론 3층으로 갈 수 없다.’
암흑성의 3층.
마왕의 정수가 잠들어 있는 곳.
그곳으로 가기 위해서는, 먼저 2층의 최강자들을 모두 꺾어야만 했다.
그러나 단순히 코인을 얻고, 힘을 키우는 것만으로는 부족했다.
2층의 최강자들은, 단순히 능력이 강해서 최강인 게 아니었으니까.
그렇다면 그에게 부족한 것은 무엇인가······.
[성좌, ‘매금지존’이 당신의 혼잣말을 원합니다.]
[성좌, ‘매금지존’이 당신의 설정을 궁금해합니다.]
‘설정? 빌어먹을 놈들. 내가 무슨 만들어진 존재인 줄 알지.’
성좌들의 건방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그에 대해 궁금해하는 성좌가 나타났다는 것은 달가운 일이었다.
성좌가 그에 관해 궁금해한다는 것은, [암흑성]의 1층을 뚫고 올라온 새로운 버러지들이 있다는 의미. 그것은 곧, 이제부터 즐거운 유희가 시작될 것이란 뜻이었다.
슈우우우우!
들판에 나타난 것은 일련의 남녀들.
텐타치오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환영한다, 벌레들아. [암흑성]의 2층에 온 것을.”
늘 하는 대사였지만, 텐타치오는 버릇처럼 대사를 즐겼다.
예상대로 버러지 몇 마리가 앞으로 나와 그를 향해 물었다.
“여긴 어딥니까? 당신은 누구죠? 가이드입니까?”
“······혹시 도깨비?”
도깨비라니. 그것은 텐타치오가 제일 싫어하는 말이었다. 그럼에도 그는 그 말을 인내하며 입을 열었다. 왜냐하면 이 인내 뒤에는 달콤한 보상의 시간이 올 테니까.
“[암흑성]의 2층은 적자생존의 세계다. 이곳에서 힘을 인정 받은 존재만이 다음 층으로 나아갈 수 있다. 간단한 룰이지? 어디, 설명이 더 필요한 존재가 있다면 손을 들어 보거라.”
“힘을 인정 받는다는 게 무슨 뜻입니까? 어떻게 하면······.”
“이렇게 하면 된다.”
콰지지직!
순식간에 늘어난 텐타치오의 팔에, 말을 잇던 남자의 머리가 그대로 폭발했다. 깜짝 놀란 버러지들의 표정. 이것이 바로, 텐타치오가 제일 좋아하는 순간이었다.
“뭐, 뭐야!”
“씨발! 역시 함정이었어!”
남자의 목에서 뿜어져 나온 피를 한껏 머금은 텐타치오가 살벌하게 웃었다.
“여왕님을 보호해라!”
모든 화신들이 한꺼번에 달려들었지만, 텐타치오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고오오오!
그의 전신에서 강력한 기세가 뿜어져 나왔다.
악마 귀족의 작위는 오등작이다.
공작, 후작, 백작, 자작, 그리고 남작.
자작이나 남작급은 제법 흔하지만, 백작급부터는 차원이 다르다.
백작급의 악마는, ‘설화’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설화. 특정한 상황이 주어졌을 때만 열리는 ‘이야기’.
[설화, ‘벌레 학살’이 시작됩니다.]
스가가가가각!
“끄아아아악!”
그의 손이 움직일 때마다, 인간들은 정말로 벌레가 터지듯 죽어 나갔다.
194년간 수십만 버러지들을 학살하며 얻은 이 설화는, 자신보다 격이 낮은 존재들에게 그야말로 압도적인 힘을 발휘하는 설화였다.
[성좌, ‘매금지존’이 깜짝 놀랍니다.]
“크하하하하하!”
퍼걱! 퍼거거거걱!
주변의 화신들은 순식간에 시체나 반송장이 되어 너부러졌다.
‘이건 너무 싱겁군.’
쓸만한 화신들도 몇몇 보였지만, 대부분은 쓰레기였다.
기껏해야 5급 악마종으로 변이하면 다행일 법한 수준. 그러다 한순간, 텐타치오의 시선이 멎었다.
“호, 너는 4급 정도는 되겠구나.”
텐타치오는 여자의 목을 잡고 들어 올렸다. 차르르 흩어지는 여자의 머리카락. 부서진 왕관이 주변을 나뒹굴었다.
그녀는 미희왕 민지원이었다.
“네가 이 녀석들의 우두머리겠군.”
강맹한 눈빛이 마음에 든다.
이 여자의 ‘이야기’는 꽤 맛있을지도 모르겠다.
“두 가질 묻겠다. 너흰 어디에서 온 놈들이냐?”
“그, 그런 걸 말해줄 것 같······.”
“너 같은 벌레들은 많이 봐왔지.”
텐타치오가 잔인한 미소를 지으며, 옆을 굴러 다니던 화랑 하나를 짓밟아 터뜨렸다.
퍼어억!
뇌수와 함께 부서지는 두개골을 보며, 민지원의 안색이 하얗게 질렸다.
“자, 잠깐만!”
퍼어억! 퍼어억!
“그만둬! 지, 지구······ 우린 지구에서 왔어!”
텐타치오가 웃으며 되물었다.
“지구?”
풍부한 이야기로 들끓는 그 행성에 관해, 텐타치오는 들은 기억이 있었다.
‘마왕들이 그랬지. 지구는 이야기의 요람과 같은 곳이라고.’
이야기가 많은 곳에는 설화가 발생하고, 설화가 많은 곳에는 풍부한 먹잇감들이 많다. 텐타치오가 입술을 핥았다.
“벌레야. 너희 중 가장 많은 설화를 쌓은 것은 누구냐?”
“으, 으으······ 설화라고? 그게 무슨······.”
역시, 이렇게 말해서는 못 알아듣는 건가.
“너희들 중 가장 강한 인간은 누구지?”
탐욕스럽게 자신을 바라보는 텐타치오의 샛노란 눈을 보며, 민지원이 부르르 어깨를 떨었다.
*
“아, 그래서 ‘시나리오’가 대체 뭔데?”
“······방금 얘기해줬잖아.”
“그렇게 상징적으로 말하면 내가 어떻게 알아들어?”
나는 한수영과 투닥거리며 2층으로 향하는 제단을 찾고 있었다.
가는 길에 몇 마리의 악마들을 더 잡았다.
진행은, 말할 필요도 없이 순조로웠다.
왜냐하면 악마가 나타날 때마다 내가 ‘성좌의 격’을 발출했기 때문이다.
[끼이이이이······!]
시선이 마주친 [어둠 추적자]들이 비명을 지르며 물러나거나 몸을 떨었다.
비록 설화급이라든가 수위권의 위인급 성좌에겐 미치지 못하겠지만, 일단 성좌가 되고 나면 존재감 자체가 달라진다.
즉, 나보다 낮은 격의 존재들에겐 시선이나 발언 만으로도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성좌, ‘긴고아의 죄수’가 너무 쉬운 진행에 실망합니다.]
[성좌, ‘하늘의 서기관’이 당신에겐 더 커다란 역경이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어렵게 가면 고구마라고 난리, 쉽게 가면 재미없다고 난리······.
대체 어느 장단에 맞추라는 건지 모르겠다.
가끔은 이런 날도 있어야 할 거 아냐? 시나리오 열리고 나서 처음으로 ‘쉽게’ 가는 중인데······.
그렇게 일행들을 도와 악마의 증명을 하나씩 모아가고 있던 찰나, 허공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김독좌’님. 팔자 좋아 보이십니다? 보따리도 혼자 막 열어버리고?]
말하는 꼬락서니를 보아하니 누구인지 잘 알겠다.
나는 툴툴대며 메시지를 보냈다.
―갑자기 사라져버린 게 누군데. 중급 도깨비 됐다고 기고만장해서는.
[기고만장하긴 누가! 바빠서 못 온 것뿐이라고! 아무튼······ 늦었지만 축하한다. 설마 내 채널에서 새로운 성좌가 나오다니. 뭔가 감개무량하네.]
―채널은 잘 돌아가고 있냐?
[네가 성좌가 되는 바람에 ‘화신 찾기’ 집단이 대거 탈주할 줄 알았는데······ 오히려 더 잘 되고 있어. 시나리오 참여 중인 성좌 구경하겠다고 다들 몰려와서 지금 완전 북새통이야. 조만간 또 채널 확장해야 할지도 몰라.]
······그 정도란 말인가?
하긴, 화신이 시나리오 진행 도중 성좌로 격상하는 경우는 드문 일이니까.
[근데 너 싫어하는 놈도 만만찮게 생겼으니까, 조심하는 게 좋을 거야. 솔직히 ‘성좌’만 되었다 뿐이지, 완전히 ‘격’을 갖춘 건 아니잖아?]
사실, 비형의 말이 맞았다.
성좌가 되었지만 고유 성흔도 아직 깨어나지 않은 상태였다.
한 마디로 말해서, 지금의 나는 반쪽짜리 성좌에 가까웠다.
[아까 보니까 네가 유중혁 보다 강할 거라는 소릴 하던데, 솔직히 말해서······.]
―내가 더 세.
[오······ 김독자. 평소랑 반응이 다르네? 라이벌 의식 느끼냐?]
―난 성좌고 그놈은 화신이야. 내가 이기는 게 당연하잖아.
[글쎄······ 과연 그럴까?]
―대체 용건이 뭐야? 시비 걸려고 왔냐?
[아, 조만간 그 녀석 태어날 것 같아. 먹일 ‘설화’가 필요해. 네가 따지면 얘 아빠인데, 그래도 부모 노릇은 해야······.]
―알았어. 구해줄게.
[자식, 역시 이해가 빨라서 좋다니까. 그럼 부탁한다.]
아무래도 41회차의 신유승이 깨어날 때가 된 모양이었다.
뒤를 돌아보니, 일행들이 악마들의 시체에서 증명을 수거하고 있었다.
“다들 ‘증명’은 충분히 모았죠?”
신유승이 조심스레 손을 들었다.
“저, 아직 덜 모아서······ 그리고 길영이 것도······.”
“······아, 내가 도와줄게.”
귀찮은 듯 보이긴 했지만, 뜻밖에도 한수영은 신유승을 잘 챙겼다.
뒤쪽에서 이길영을 업고 오던 이현성도 한마디를 했다.
“저, 독자 씨.”
“예.”
“한 번만 만져 봐도 되겠습니까?”
“······그러세요.”
한수영의 악몽에서 간신히 벗어난 이현성은, 아직도 내가 살아난 게 믿기지 않는 모양인지 가끔씩 내 팔뚝을 잡거나 머리통을 잡는 이상행동을 보였다. 감동적인 얼굴로 내 머리를 만지던 이현성이 입을 열었다.
“예전에 군대에서 탄피를 분실한 적이 있습니다.”
“······그거 큰일이었겠는데요. 다시 찾았나요?”
“못 찾았습니다.”
“엄청 혼났겠네요. 근데 그 얘긴 왜······.”
“그 탄피가, 한 달 쯤 있다가 전혀 뜬금없는 곳에서 발견되더군요.”
내 얼떨떨한 표정에도, 이현성은 한없이 진지한 눈빛이었다.
“그때부터 그 탄피를 계속 제 주머니 속에 넣어 다녔습니다.”
“······그거 군법 위반 아닌가요?”
“그렇습니다.”
너무 태연하게 고개를 끄덕여서 놀랐다.
나는 떨떠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근데 그 이야길 왜 갑자기······.”
“그냥, 갑자기 생각이 나서 말입니다.”
그러니까 내 머리통을 보면서 왜 갑자기 그런 이야길 하는 건지 모르겠다.
설마 내 머리통을 잘라서 주머니에 넣어 다니겠다는 뜻은 아닐테고······.
아무튼, 내가 살아와서 기쁘다는 뜻이겠지.
우리는 얼마 지나지 않아 2층으로 가는 제단에 도달했다.
증명은 충분히 모았고, 이제 남은 것은 제단에 증명을 바치고 기다리는 것뿐. 그때, 한수영이 물었다.
“저 아저씨도 같이 가는 거지?”
돌아보니 핑키즈 김영팔이 우물쭈물거리며 서 있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김영팔 씨. 앞장 서세요.”
“예?”
기겁하는 김영팔을 보며, 한수영이 눈을 가늘게 떴다.
“그래서, 저 아저씨는 뭔데?”
“잊었냐? 2층으로 가는 마지막 관문······.”
암흑성의 1층에서 증명을 모두 모은 자들은, 증명을 바친 후 소환되는 ‘악마’를 사냥해야만 다음 층으로 갈 수 있다. 그런데 이 악마는 2층에서 소환되며, 파티를 기준으로 ‘가장 약한 자’에게 걸맞는 수준으로 소환된다.
한수영이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하, 그러니까 제일 약한 저 아저씨를 앞장세우겠다?”
“그렇지.”
“······김독자 치졸함 하나는 최고네.”
“치졸한 게 아니라 전략적이라고 해야지.”
[성좌, ‘긴고아의 죄수’가 당신의 졸렬함에 놀랍니다.]
[성좌, ‘대머리 의병장’이 당신이 성좌의 품격을 보여주길 원합니다!]
······성좌의 품격은 무슨 얼어죽을.
나라고 좋아서 어려운 시나리오만 헤쳐온 게 아니다.
성좌도 됐는데 좀 시원시원하게 갈 때도 있어야지.
한수영이 말했다.
“그럼 이 관문은 쉽게 깨겠네.”
“별 일만 없다면.”
“별 일?”
“가끔 우리 수준과는 상관없는 악마가 소환될 때가 있어.”
나는 그 말을 하며 제단에 증명을 던져 넣었다.
[‘악마의 증명’을 바쳤습니다.]
[당신들을 시험하기에 적절한 악마 수문장이 소환됩니다!]
슈우우우우!
제단에서 눈부신 빛이 솟아 오르며, 악마가 소환되기 시작했다. 화려한 육망성 위에 비치는 스포트라이트. 내 예상이 맞다면, 저기서 나올 악마는 약골 김영팔의 수준에 딱 알맞은 녀석이다. 아마, 2층의 악마 귀족들 중에서도 최약체인 ‘악마 남작 빌레르’겠지.
그리고 그 정도라면, 내가 굳이 성좌의 힘을 쓰지 않더라도 제압할 수 있는······.
[당신을 원하는 악마가 2층에 있습니다!]
······어?
쿠구구구구!
[수준과 무관한 악마가 육망성 위에 소환됩니다!]
뒤이어 들려온 메시지에 한수영의 안색이 굳어졌다.
“씨바······ 뭐야? 이게 네가 말한 ‘별 일’ 아냐?”
[악마 백작 ‘텐타치오’가 강림했습니다!]
······백작?
어깨 위로 드러난 웅장한 뿔.
화려한 임팩트와 함께 육망성 위에 나타난 악마는, 빌레르 따위와는 비빌 수도 없는 강력한 녀석이었다.
고요히 눈을 뜬 녀석이, 잔인한 웃음을 머금은 채 입을 열었다.
“······그렇군. 네가 ‘유중혁’이라는 놈이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