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1화
151화
Episode 30. 암흑성
사실, 내가 가장 걱정한 것은 유중혁이었다.
이 녀석은 이 자리의 누구보다 믿을만했지만, 동시에 이 자리의 누구보다 확신할 수 없었다.
정신 나간 유중혁이 당장이라도 손을 뿌리치고 내 얼굴을 갈긴다면, 지금 내 행동은 아무 짝에도 쓸모 없는 것이 될 테니까.
그러나 다행히도 유중혁은 침착했다.
무지막지한 살기가 전해지긴 했지만, 녀석은 놀랍게도 그 분노를 잘 통제한 뒤 비밀스런 메시지까지 보내왔던 것이다.
―이게 무슨 짓이냐.
[등장인물 ‘유중혁’이 ‘한낮의 밀회’를 발동 중입니다.]
······언젠가 구매해뒀던 아이템이 뒤늦게 떠올랐다.
설마 그때 등록해 뒀던 [한낮의 밀회]의 유효기간이 아직까지 남아 있었을 줄은 몰랐다.
나는 일부러 뻔뻔하게 말했다.
―이랬던 게 한두 번도 아닌데, 이제 좀 익숙해져야지.
―뭐?
―너한테 나쁜 조건도 아니잖아. 네가 다른 성좌의 ‘설화’를 계승할 수 없다는 것 정도는 알아.
내 말을 들은 유중혁이 몸을 움찔했다.
―······네놈은 대체 어디까지 알고 있는 것인지 모르겠군.
실제로 나와 함께 ‘성운’을 선언하는 것은 유중혁에게 전혀 나쁜 일이 아니었다. 원작의 진행대로라면, 유중혁은 여기서 어떤 설화도 계승하지 않는다.
그것은 유중혁이 가진 제약 때문이었다.
[회귀자의 제약].
녀석은 사망을 통해 시간을 되돌릴 수 있는 대신, 다른 성좌의 설화를 계승할 수 없다.
[화신 유중혁. 화신 김독자의 말이 사실입니까? 두 분이서 성운을 만들었다고요?]
사태를 지켜보던 진행자 도깨비가 끼어들었다.
모두가 유중혁을 바라보았고, 나도 긴장하며 녀석의 대답을 기다렸다.
“그렇다.”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어쨌든 첫 번째 고비는 넘겼다.
하지만 진짜 고비는 지금부터 시작이었다.
완전한 적막에 뒤덮였던 2층의 좌중 사이로, 누군가가 웃음을 터뜨렸다.
나긋하면서도 부드러운 그 웃음은, 어쩐지 유쾌하기까지 했다.
나는 그 웃음을 통해 페르세포네의 기분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었다.
「김독자, 결국 저질렀군요. 내가 이래서 그대를 좋아해.」
당연히 좋아할 줄 알았다.
페르세포네야 이런 이야기에 환장하는 스타일이니까.
그녀의 웃음에 뒤늦게 다른 성좌들도 웃기 시작했다.
대부분은 2층의 성좌들이었다. 그리고 그들의 웃음은 안타깝게도 페르세포네와는 같은 의미가 아니었다.
[성운, <베다>가 당신에게 실망합니다.]
[성운, <귀옥>이 당신을 경멸합니다.]
주변 성좌들의 반응에 입에 손수건을 물고 있던 우리엘이 인상을 찌푸린 채 중얼거렸다.
[뭐야? 왜들 그래? 보기 좋은데!]
1층의 성좌들은 말없이 이쪽을 올려다 볼 뿐이었다. 동경과 걱정이 뒤섞인 눈빛. ‘해상전신’도, ‘대머리 의병장’도 사달이 날까 긴장한 표정들이었다. 다만, ‘고려제일검’만큼은 흥미롭다는 듯 이쪽을 보고 있었다.
이윽고 웃음 소리가 조금 잦아들자, 보다 직접적인 경멸이 2층에서 날아들었다.
[아직 성좌위에도 오르지 못한 녀석이, 무슨 성운 개설이야?]
[도깨비, 저게 지금 말이 되는 건가?]
[성운이 무슨 개나 소나 개설할 수 있는 건줄 아냐?]
도깨비는 쏟아지는 질문 세례에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게······ 화신 김독자는 분명 <스타 스트림>에게 ‘격’을 인정 받긴 했습니다.]
그 말과 함께, 천장의 스크린에 내가 지금껏 이룬 설화들이 투사되었다.
<왕이 없는 세계의 왕>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내가 사인참사검의 힘을 빌려 [절대 왕좌]를 부수는 장면이었다. 엄밀히 말해, 내 설화는 바로 저기서 시작된 셈이었다.
콰지지지직!
화면 속에서 부서져 나가는 왕좌의 파편. 몇몇 성좌들은 애써 납득하는 듯 고개를 끄덕였고, 일부 성좌들은 경악한 듯 서로를 바라보았다.
[이계의 신격이 깃든 왕좌를 부쉈다고!]
[······정말 저걸로 설화를 열었단 말인가?]
아마 참석자들 중에는 내 정보를 잘 모르는 녀석들도 있는 듯했다.
나도 꽤 유명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아직 부족했던 모양이군.
문득 근처를 보니, 아까 그 러시아 꼬맹이가 멍한 눈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이적에 맞서는 자>
두 번째 설화는 재앙으로 강림한 귀환자 명일상을 쓰러트리고 얻었다.
[일부 성좌들이 당신에게 호감을 표합니다.]
예로부터 ‘귀환자’는 성좌들이 싫어하는 존재이기에, 당연히 성좌들의 호감을 얻기에는 적합한 설화였다.
그때, 성좌들의 표정에 의아한 기색이 떠올랐다.
[······저건 또 뭐지?]
이어서 세 번째 설화와 함께 나타난 것은, 내가 중급 도깨비 바울을 폭행하는 장면이었다. 그 화면에는 나도 조금 놀랐다. 아마 신유승의 복수를 한다고 나섰던 때인 것 같은데······ 설마 저것도 ‘설화’로 포함시켰다고?
꾸에엑! 끄아악!
연달아 터지는 중급 도깨비의 비명에, 당황한 진행자 도깨비가 화면을 빨리감기로 넘겨버렸다. 그러자 성좌들의 원성이 퍼져 나갔다.
[이봐, 방금 그거 뭐야!]
[그, 그게. 하하, 잘못된 자료 화면인 것 같습니다.]
그러나 도깨비의 말과는 달리, 화면에는 설화명이 떠올랐다.
<이야기꾼을 능멸한 자>
그 설화명에 계단참에서 껄껄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고려제일검’이 나를 보며 웃고 있었다.
[미친놈이었군! 하하하하!]
그리고 네 번째 설화명이 떠올랐다.
<재앙의 왕을 사냥한 자>
그것은 [피스 랜드]에서 성좌 [야마타노 오로치]의 그림자를 사냥하며 얻은 것이었다. [전인화]를 발동한 내 전격에 스러지는 오로치의 모습을 보며, 성좌들은 입을 딱 벌렸다.
[설화급 성좌의 그림자를······.]
[벌써 전설급 이상의 설화를 네 개나 쌓았다고?]
성좌들 사이에 혼란이 번져 나갔다.
이윽고 자료 화면이 꺼지고, 도깨비가 말했다.
[아무튼 이런 연유로, 현재 화신 김독자는 성좌위를 앞두고 있는 상황입니다. 만약 이번 계기를 통해 ‘다섯 번째 설화’를 손에 넣는다면······.]
내가 성좌를 노리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던 이들은 당황한 기색이 아니었지만, 몰랐던 성좌들은 깜짝 놀란 모습이었다.
[10번 시나리오가 끝나기도 전에 성좌위에 오른다고?]
[저 놈이 새로운 성좌라니······.]
나는 졸지에 뜨거운 시선을 받고 있었다.
확실히, 이 정도 사건이면 ‘멸살법’ 전체에서도 가공할 일이었다.
10번 시나리오가 끝나기 전에 <스타 스트림>의 인정을 받아 격을 획득한 존재는 극히 일부의 성좌들이나 귀환자들 뿐이었으니까.
혼란스러운 분위기가 가중되는 가운데 입을 연 것은 <베다>의 협상 대표로 참석한 ‘인류의 시조’ 마누였다.
[화신 김독자의 격은 인정하겠다. 하지만 ‘성운’과 관련된 문제는 인정할 수 없어. 여기에는 두 가지 문제가 있다.]
성좌들이 마누의 목소리에 집중했다.
[하나, 우리는 화신 김독자가 충분한 지불 능력을 가지고 있는지 알 수 없다. 성운을 설립하기 위해서는 최소 자금이 필요하다는 걸 알고 있겠지?]
“코인은 충분합니다.”
내 말에 좌중에는 다시 한 번 파란이 일었다.
마누가 의심스럽다는 듯 눈을 가늘게 뜨더니 말을 이었다.
[그건 확인해 보면 알 수 있을 거고. 두 번째 문제는 누가 네 성운을 ‘지지’해 줄 것이냐는 거다.]
나는 몰래 침을 삼켰다.
드디어 진짜 난관이 왔다.
[성운 설립은 최소 다섯 명의 성좌에게 지지를 받아야 하지. 너는 어떤 성좌에게 지지를 받았느냐?]
“그건······.”
내가 쉽게 대답하지 못하자, 마누가 피식 웃었다.
[아니, 애초에 성운의 ‘이름’은 있는 것인가?]
나는 유중혁을 흘끔 바라보다가 되는대로 입을 열었다.
“우리 성운의 이름은······ 김독자 컴퍼니······.”
“이름 같은 건 아직 없다. 그리고 지지자는, 지금부터 구할 것이다.”
뜻밖에도 유중혁이 내 말을 자르고 앞으로 나섰다.
“우리 성운의 지지자가 될 성좌는 없는가?”
하지만 유중혁의 말에도 좌중은 반응이 없었다. 마누가 피식 웃었다.
[그럴 줄 알았어. 시간만 낭비했군. 도깨비. 계승식을 계속 진행하도록······.]
그러나 그때, 처음으로 누군가 손을 들었다.
[올림포스의 ‘명계’는 당신들의 성운을 지지하겠어요.]
[여왕!]
분노한 마누가 페르세포네에게 으르렁거렸다.
그러자 페르세포네도 날카로운 기세를 발출했다.
[내 결정입니다. 무엇이 불만이죠?]
[크윽······.]
아무리 <베다>라고 해도, ‘마누’ 정도의 성좌가 홀로 명계의 여왕인 페르세포네를 거스를 수는 없었다. 결국, 그는 다른 성좌들을 향해 타깃을 돌렸다.
[설마 또 있지는 않겠지?]
[지지한다.]
2층의 최상석에서 들려온 그 목소리에, 성좌들은 다시 한 번 놀랐다.
왜냐하면 그는 바로 ‘제천대성’이었기 때문이다.
[기, 긴고아의 죄수?]
[정말로? 진심인가?]
나는 감사의 의미로 그쪽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제천대성은 귀찮다는 듯 작아진 여의봉으로 귀를 후비며 이쪽을 내려다 볼 뿐이었다.
[에라 모르겠다······ 미안해요 서기관! 나도 지지다!]
급기야 <에덴>의 우리엘까지 지지를 선언했다.
[그리고 성운 이름도 내가 지어줄 거야! 성운 이름은 금단의······ 읍읍!]
주변에 있던 9계급 천사들이 깜짝 놀라 그녀를 만류하는 것이 보였다.
의도야 어쨌건, 고마운 일이었다.
이제 나머지 성좌들은 서로의 눈치만 보고 있었다.
앞서 지지를 선언한 세 성좌들은 모두 다른 존재들의 신경 쓸 필요가 없을만큼 강력한 자들이었다. 하지만, 지금부터는 다르다. 겨우 신생 성운의 설립을 돕기 위해 설화급 성좌인 ‘마누’를 거스르고 싶은 존재는 그리 흔치 않은 것이다.
곁을 보니 유중혁도 반쯤 체념한 기색이었다.
―아무래도 여기까지인 것 같군.
······역시 여기서 막히는 건가.
하지만 나는 개의치 않았다.
―괜찮아. 목적은 달성했으니까.
―뭐?
―어차피 기대도 안 했어. 중요한 건 시간을 끄는 거야.
애초에 나는 여기서 어떤 성좌의 설화도 계승할 생각이 없었다.
그리고 내가 생각하는 ‘원작’대로라면, 이번 ‘연회’의 마지막은 정해져 있었다.
이변이 일어난 것은 그때였다.
[나 ‘고려제일검’이 저들의 성운을 지지하겠다.]
최강의 위인급, 고려제일검이 우리에게 지지를 선언했던 것이다.
그러자 그때까지 꾹 참고 있던 위인급들이 한 번에 일어섰다.
[그렇다면 나 ‘해상전신’도······!]
[이 ‘대머리 의병장’도 가만히 있지는 않겠다!]
1층의 심볼들이 너도나도 지지를 시작하자, 2층의 성좌들은 물론이고 도깨비들까지 크게 당황한 기색이었다.
[자, 잠깐만요! 그렇게 마구잡이로 지지를 선언할 수는······!]
그리고 다음 순간.
[성좌, ‘은밀한 모략가’가 당신의 성운을 지지합니다.]
······응?
은밀한 모략가?
대체 어디에?
[당신은 ‘성운’의 임시 개설권을 획득하였습니다!]
······설마?
쿠구구구구!
연회 홀 전체가 굉음에 휩싸이며, 공간이 크게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나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드디어 이 연회의 끝이 다가왔다.
‘놈들’이 온 것이다.
[······이 기운은?]
[모두 물러서라!]
저 성좌들조차 긴장하는 모습이었다. 곧이어 하늘이 크게 일그러지며, 강력한 스파크가 튀기 시작했다. 마치 하늘이 균열과 함께 쪼개지는 듯한 광경.
[그레이트 홀].
오직 시나리오가 발동할 때에만 나타나는 미지의 홀이, 갑자기 연회장의 상공에 나타난 것이다. 깜짝 놀란 마누가 외쳤다.
[이계의 신격! 감히 이곳이 어디라고 온 것이냐!]
모든 성좌들이 으르렁거리며 제각기 기세를 발출했다.
그러자 하늘의 홀에서, 끔찍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왜... 우리를 초대하지 않았지?
순간적으로 달려든 페르세포네와 우리엘이 나와 유중혁의 귀를 막았다.
외신격의 진언을 막기 위해서였다. 그들이 우리의 앞을 막아섰기 때문인지, 홀에서 풍겨오는 압력이 한층 낮아졌다.
[미안하지만 파티는 끝났어. 그대들은 돌아갈 시간이야.]
[다음에 또 만나!]
페르세포네와 우리엘이 소리침과 동시에, 나와 유중혁의 몸이 투명한 원안에 둘러 싸였다. 성좌들의 힘으로 영체의 공간 전이가 시작된 것이다. 곧 연회 홀에서 벌어질 끔찍한 전투로부터 우리를 구하기 위해서인 듯했다.
그런데, 이계의 신격 쪽이 조금 더 빨랐다.
기다려라...
[이계의 신격들이 당신을 바라봅니다!]
[이계의 신격들이 당신을 바라봅니다!]
마지막 순간 우리엘의 비명이 들렸다.
[김독자!]
그리고 새카만 암흑이 시야를 덮었다.
*
【그대는 누구지?】
【수레에 기록되지 않은 자.】
【설마...】
.
.
.
【■■■■...】
.
.
.
【드디어 ‘마지막 이야기’가 시작되려는가······.】
*
“야, 여기 맞아?”
“괜찮은 거야? 그놈들 오면 어떡해? 해상제독이랑 순정강철이 여기 자주 다녀간다고 그랬다고!”
“그리고 여긴 그 ‘영웅’의 무덤 아냐?”
캄캄한 밤.
광화문의 한가운데에 세워진 묘비 위에, 몇몇 도굴꾼들이 모여 있었다.
지레 겁을 먹은 일행들을 향해, 도굴꾼 이동파가 인상을 찌푸렸다.
“한심한 놈들. 영웅은 무슨 영웅이야? 영웅이 이렇게 쉽게 죽냐?”
이동파가 영웅의 존재에 대해 알게 된 것은 얼마 전이었다.
자신의 목숨을 희생해 서울을 구한 ‘최강의 사나이’.
물론 이동파는 그 소문을 믿지 않았다.
“자, 빨리 파! 시간 없다고. 암흑성 들어간 새끼들 나오기 전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미 아홉 번째 시나리오인 [암흑성]에 참가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동파를 비롯한 그들은 시나리오에 참여하지 않았다.
어차피 메인 시나리오 같은 건 잘난 놈들의 축제일 뿐이니까.
“명색이 영웅의 무덤인데, 분명 좋은 거 한두 개쯤은 묻혀 있겠지?”
“시체도 뒤져봐! 몸 안에 숨겨뒀을지 모르니까!”
“시발, 존나 깊게 묻었네. 어이, 팍팍 좀 퍼봐!”
도굴꾼들은 순식간에 땅을 파고 들어갔다.
그렇게 두 시간 쯤 지났을까.
“다, 닿았다!”
마침내 그들의 삽이, 관뚜껑에 도달했다.
이동파는 두근거리는 마음을 숨긴 채 뚜껑을 열었다.
관 속에는 하얀 코트를 입은 사내가 잠들어 있었다.
이동파가 피식 웃었다.
“영웅? 흥. 잠자는 숲 속의 공주님이구만. 그것도 못생긴.”
“코트는 잘 빠졌네. 일단 이것부터 벗기고······.”
턱!
“우, 우와아아악!”
“뭐, 뭐야······ 와아아악!”
깜짝 놀란 이동파도 자리에 주저앉아 벌벌 떨었다.
분명 방금 전까지 죽어 있었던 영웅이, 도굴꾼의 어깨를 붙잡고 있었다.
그리고 서울의 모든 존재의 귓가에 다음과 같은 메시지가 들려왔다.
[누군가가 다섯 개의 설화를 획득하였습니다.]
[서울의 밤하늘에 새로운 성좌(星座)가 탄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