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화
150화
계승식이 시작되자, 연단의 끄트머리에는 여섯 개의 작은 방이 만들어졌다. 계승식에 참가한 화신들의 숫자와 정확히 동등한 숫자의 방.
―해당 화신들은 즉시 [비밀의 방]으로 이동해 주시기 바랍니다!
<설화 계승식>의 시스템은 간단했다.
화신들은 ‘방’을 통해 성좌들과 비밀스레 만나고, 그들의 조건을 모두 들은 뒤 연단에 올라 계승할 설화를 발표하면 된다.
내 방문 앞에는 <화신 김독자>라는 명패가 붙어 있었다.
나는 유중혁을 향해 말했다.
“조금 이따 보자.”
유중혁은 별다른 대꾸 없이 방 안으로 사라졌다.
방에 들어가 테이블에 앉자, 공간이 일그러지는 듯한 느낌과 함께 바깥의 소리가 완전히 차단되었다.
[비밀의 방].
이곳은 스타 스트림에서도 가장 완벽하게 비밀이 보장되는 장소 중 하나다. 여기서 벌어지는 일들은, 채널의 도깨비들조차 알 수 없다.
[당신은 한 시간 동안 ‘비밀의 방’의 주인이 되었습니다.]
[‘비밀의 방’의 관리 권한이 당신에게 주어집니다.]
[‘비밀의 방’의 최대 사용 시간은 한 시간입니다.]
[시간 내에 가능한 많은 성좌들과 접선하기 바랍니다.]
나는 기대감으로 방문을 바라보았다.
좋아, 첫 번째 손님은 누구려나.
그 순간, 누군가가 방문을 박차고 들어왔다.
노란색 법의와 뒤쪽에 두둥실 떠 있는 성전(聖典).
[화신 김독자. ‘부활의 축일’을 선택해라.]
······아무래도 첫 타자는 인도인 모양이다.
*
[성좌, ‘인류의 시조’가 당신을 노려봅니다.]
<베다>에서 보낸 협상가는 ‘인류의 시조’라는 수식언을 가진 성좌 ‘마누(Manu)’였다. 마누의 설화라면 나 역시 아는 바가 있었다. 물론 내가 인도 설화 따위 알 턱이 없으니, 모두 ‘멸살법’의 덕이다.
「인도의 서사시에 따르면, ‘마누’는 대홍수의 생존자였다. 그는 물고기 한 마리의 생명을 구해준 대가로, 물고기가 준비한 배를 타고 히말라야 꼭대기로 대피함으로써 대홍수를 피할 수 있었는데······.」
······설화를 떠올려 보니 왜 마누가 협상가로 왔는지 알 것 같았다. 마누는 <에덴> 소속의 성좌인 ‘방주의 주인’과 설화의 저작권을 놓고 자주 다투는 성좌였다. 즉, <베다> 소속의 성좌들 중 저작권 분쟁에 한해서는 전문가라 할 수 있는 존재가 바로 이 ‘마누’인 것이다.
“······12월 25일의 주인께서는 직접 오지 않으셨습니까?”
[그 분이 그렇게 한가하신 줄 아느냐? 쓸데없는 소리 말고 너는 그저 대답만 하면 된다. ‘부활의 축일’을 받아들일 것이냐 말 것이냐?]
이런 태도로 나오시겠다?
게다가 설화 당사자인 미트라는 안 왔다 이거지.
[너도 귀가 있다면 알고 있겠지만 <베다>는 <스타 스트림> 최대의 성운 중 하나다. 무수한 신화들이 <베다>에서 최초로 탄생했고, 많은 성운들이 우리 신화를 표절하고 있지. 특히 그 <에덴> 녀석들은······.]
“사적인 이야기는 됐습니다. 그보다 ‘부활의 축일’ 설화를 받아들이면, <베다>는 제게 무엇을 줄 수 있습니까?”
[태양신의 가호가 네게 함께할 것이다.]
“태양신의 가호란 건 뭡니까?”
[그런 것까지 네게 일일이 설명해 줘야 하느냐? 하찮은 필멸자에게······!]
“궁금한 게 하나 있습니다.”
[무엇이냐?]
“그 하찮은 필멸자 타령, 이제 고루한 클리셰라 생각하시지 않습니까? 색다른 이야길 좋아하시는 성좌님들께서는, 대체 언제까지 그런 진부한 대사로 인간들을 멸시할 겁니까?”
눈을 크게 뜬 마누가 나를 노려보았다.
[네놈, 감히 무슨 생각으로 그런 망발을······!]
“물론 이런 생각입니다.”
[당신은 ‘비밀의 방’의 관리 권한을 사용하였습니다.]
[성좌 ‘인류의 시조’를 방에서 추방합니다!]
내 명령어에, 당황하며 뭐라 뭐라 외쳐대던 자칭 인류의 시조는 새하얀 빛을 남기며 사라졌다.
그러게 기회가 있을 때 잘했어야지.
제아무리 상대가 ‘설화급’이라 해도, 기세에 짓눌린 채 빌빌 기어 줄 생각은 없었다. 설화 계승을 끝낸 후라면 모를까, 어쨌든 지금은 내 쪽이 ‘갑’이기 때문이다.
“다음.”
내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누군가 방문을 열고 나타났다.
낡은 왕관을 쓰고 해진 옷을 입은 방랑자의 모습. 누구지?
[화신 김독자, <올림포스>에 가입해라.]
이 자식들, 어디서 단체로 ‘김독자 사용설명서’라도 읽고 온 건가?
[성좌, ‘자신의 눈을 찌른자’가 당신을 향해 웃습니다.]
······자신의 눈을 찌른자?
[나를 아는 모양이군.]
“우리나라에서 대학생이 되면 당신 이야기를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듣거든요.”
[그런가? 의외로군. 동방의 작은 나라에서······.]
‘자신의 눈을 찌른자’. 그는 대학 교양 수업에서 지겹도록 가르치는 ‘오이디푸스 왕’이었다. 간만에 소포클레스에 대한 증오가 샘솟는다.
“그나저나, 그쪽 제안이라면 이미 ‘술과 황홀경의 신’에게 들었습니다. ‘바쿠스의 교주’가 되라는 말씀을 하러 오신 거겠죠?”
[바쿠스? 벌써 그 자가 접근했었던 모양이군.]
뭔가 느낌이 싸했다.
그러고 보니 연회에 참석했던 페르세포네는 ‘올림포스’와 척을 지고 있었고, 디오니소스는 ‘아무도 믿지 말라’는 말을 했었지.
그리고 둘 모두는, <올림포스>에 가입하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그런데 오이디푸스 왕은 처음부터 그 말로 포문을 열었다.
[나는 바쿠스의 제안을 하러 온 것이 아니다. 하물며 ‘부활 설화’의 저작권을 행사하기 위해 온 것도 아니지.]
즉, 오이디푸스 왕은 앞의 두 성좌와는 완전히 다른 제안을 하러 내게 찾아온 것이란 의미가 된다.
······어쩌면, 이쪽이 ‘진짜’ 올림포스의 대표일지도 모르겠는데?
[<올림포스>가 너에게 제시할 설화는 ‘번개의 사육제’다.]
“예?”
나는 깜짝 놀랐다. ‘번개의 사육제’는 3주신 제우스의 설화였기 때문이다.
내 표정을 본 오이디푸스가 묘한 미소를 지었다.
[역시 이 설화를 알고 있는 모양이군. 그래, 네 생각이 맞다. 우리가 제시할 설화는, 다른 ‘성운’들의 부활 설화들과는 격 자체가 다르다.]
“······왜 제게 그런 제안을 하시는 겁니까?”
[나와 운명의 3여신이 네 운명의 편린을 보았기 때문이다.]
······내 운명을?
[조만간 너에게는 ‘번개의 사육제’를 계승할 자격이 생길 것이다. 물론, 내 설화를 계승하여 ‘눈 먼 예언자’를 받아갈 수도 있겠지만······ 이미 예언자란 소문이 있는 그대가 내 설화를 계승하지는 않겠지.]
“잠깐만요. 그게 무슨 소립니까? 왜 제가 그런 운명을······.”
[결정은 너의 몫이다. 하지만 너는 반드시 <올림포스>를 필요로 하게 될 것이다. 다시 만날 때까지 잘 생각하도록 해라.]
오이디푸스는 그 말을 마지막으로 방에서 사라져버렸다.
마음이 조금 심란해졌다.
오이디푸스가 말한 ‘운명’이 대체 뭔지는 모르겠지만, 운명의 3여신이 개입했다면 근시일 내에 내겐 그들이 본 미래와 비슷한 일이 일어날 것이다.
그런데 하필 그리스 계통의 설화를 계승하기에 적합한 사건이라니, 찝찝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쪽 동네의 설화들은 죄다······.
[안녕?]
뭔가가 불쑥 고개를 내민다 싶더니, 어느새 방문 안으로 누군가가 들어와 있었다. 산뜻하고 달콤한 향기. 아름다운 천사의 얼굴이 코앞에 있었다. 마치 소악마(小惡魔)를 연상시키는, 소녀를 닮은 천사.
아무래도 이번 차례는 <에덴>이었던 모양이다.
“······‘방주의 주인’이 올 줄 알았는데, 당신이 직접 왔군요.”
[내가 와서 섭섭해?]
급격하게 시무룩해지는 목소리를 듣자니 갑자기 가슴이 쿵 내려앉는다.
······그 ‘우리엘’이 이렇게 귀여웠다니.
“아뇨, 반갑습니다.”
[보고 싶었어! 김독자!]
우리엘은 거의 기습적으로 나를 꽉 끌어 안았다. 품이 맞닿으며, 그녀가 입은 얇은 실크의 너머로 부담스러운 감촉이 느껴졌다. 악마······. 등이 트인 옷이었기 때문에, 내 양손은 졸지에 갈 곳을 잃고 말았다. 마치 사랑스러운 인형이라도 만난 듯 내 품에 얼굴을 비벼대는 우리엘을 향해, 나는 한숨처럼 대답했다.
“저도······ 보고 싶었습니다.”
[응응!]
조금 난처한 상황이긴 했지만, 나로서도 그녀를 만난 감회는 컸다.
우리엘은 시나리오가 시작되던 그 순간부터 줄곧 나와 함께 해준 성좌였으니까.
“‘메시아의 길’을 선택하라고 오신 거죠?”
[······아, 맞아! 그것 때문에 왔어!]
화들짝 놀란 우리엘이 내 품에서 고개를 들었다.
전혀 기억하고 있던 얼굴이 아닌데.
나를 만난 게 어지간히 기뻤던 모양이다.
[네가 너무 잘 생겨서 그랬나봐.]
“설득력이 넘치는 말씀이시네요.”
우리엘이 생긋 웃으며 말했다.
[김독자, 우리 <에덴>의 설화를 받아줄 거지?]
“그건······ 조금 생각을 해봐야 할 것 같습니다.”
[왜? 우리 설화는 최고라고! 다른 곳이랑 비교할 바가 아냐!]
확실히 그 말이 맞다. ‘메시아의 길’은 부활 설화 계통에서는 최고의 격을 가진 설화니까. 하지만 문제가 있다.
“그 설화를 택하면 소중한 걸 잃잖아요.”
[어? 앗. 그, 그러네. 우리 설화를 선택하면 고자가 될 테니까······. 그건 안 되는데.]
설득될 거라곤 기대도 안 했는데, 뜻밖에도 우리엘은 그게 자기 일이라도 되는 것처럼 크게 동요했다. 내가 고자가 되는 게 우리엘에게 그렇게 큰 문젠가? 왜?
[어, 어떡하지? 메타트론이 김독자 못 데려오면 한 달 동안 인터넷 못하게 한댔는데······ 그치만 데려가면 김독자가 고자가 되고······ 그렇게 되면······ 아, 잠깐만. 고자가 되어도 포지션을 조금 바꿔주면······?]
······뭔 포지션?
[조, 좋아! 김독자! 고자 문제는 너무 걱정하지 마. 내가 어떻게 해서든······!]
우리엘은 혼자서 뭔가 대단한 결심이라도 한 듯한 눈빛이었다.
나는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고자는 싫습니다.”
[응! 그러니까 고자가 되어도 괜찮도록······!]
“다음.”
*
그 후에도 여러 성좌들이 나를 찾아왔다.
<탐라>라든가, <귀옥> 같은 곳도 있었고, 무소속 성좌들이나 단순히 나를 보러 온 위인급 성좌들도 있었다.
특히 한반도의 위인급 성좌들은 내게 여러 격려를 남기고 떠났는데, 아무래도 내가 특정 성운과 관계를 맺는 것을 달갑게 여기지 않는 듯했다.
[자넨 우리 세계의 희망이야.]
[부디 뜻을 굽히지 말게.]
그 마음들이 이해는 갔다.
성좌가 된 직후부터 설화급들에게 시달리며 살아온 위인급 성좌들은, 마음 가는대로 행동하는 내 모습이 무척 부러울 것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협상 시간은 종료되었다.
화신들은 하나 둘씩 연단으로 올라갔다.
제안 받은 설화들을 검토하고, 자신이 계승할 설화를 결정할 때가 된 것이다.
―자, 그럼 계승 결과를 발표하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미국의 ‘셀레나 킴’!
연단의 도깨비는 홈 쇼핑 판매자처럼 신이 난 분위기였다.
좋기도 하겠지.
이 연회를 통해 관리국은 또 엄청난 양의 코인을 벌어들일 테니까.
―‘셀레나 킴’은 성좌 ‘최후의 양심’이 하사한 ‘불굴의 이지스’ 설화를 계승하기로 하였습니다!
와아아아아!
역시 셀레나 킴은 <올림포스>를 택했나······.
‘불굴의 이지스’는 왕의 수호자인 그녀가 택하기에 적합한 설화였다.
식순이 흘러갈수록 머릿속은 복잡해졌다.
누구를 택하면 적이 생기고.
아무도 택하지 않으면 더 많은 적이 생긴다.
‘잘 생각해 보세요. 이게 꼭 누구를 적으로 돌려야만 하는 문제인지.’
페르세포네는 그렇게 말했다.
나는 그 말뜻을 어렴풋이 이해했다.
아마 페르세포네의 말은 모든 ‘부활 설화’를 품으라는 의미였을 것이다.
내 목숨은 하나가 아니고, 다음 번 부활에도 설화를 계승시키려는 이들은 있을 테니까.
하지만 그래도 문제는 있다.
<에덴>과 <베다>는 분명 ‘첫 번째 부활’을 양보하지 않을 것이고, 심지어 내가 그들의 설화를 ‘직접 계승’하게 된다면 분명 그들에 대한 종속 제약도 받게 될 것이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애초부터 화신과 성좌의 관계는 불공정한 것이니까.
잠깐만, ‘공정’이라······?
마침내 유중혁이 일어나 연단으로 나갔다.
―다음 설화 계승자는 서울의 패왕······.
유중혁이 움직이자, 객석에서 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려왔다. 특히나 설화급 성좌들의 눈빛이 묘했다. 반드시 유중혁을 갖고 싶어하는 자들. 그리고 한편으로 두려운 듯한 기색을 보이는 자들······.
순간, 어떤 생각이 떠올랐다.
그리고 유중혁이 입을 열었다.
“나는······.”
디오니소스는 말했다. 누구도 믿지 말라고. 하지만 그건 상대가 ‘성좌’인 경우의 이야기였다.
적어도 나는 이 장소에서 단 한 사람, ‘믿을 수 있는 존재’가 있는 것이다.
나는 연단을 향해 뛰어 올라갔다.
그리고 당황한 유중혁의 손을 붙잡은 채, 하늘 높이 들어 올렸다.
“여러분께 할 말이 있습니다.”
나는 객석을 돌아보며 말했다. 깜짝 놀란 성좌들의 모습.
우리의 모습을 보고 거의 졸도 직전인 우리엘의 표정도 보였다.
나는 그런 성좌들의 모습을 천천히 훑어 보았다.
계승식이 공정하지 않은 이유는, 설화의 계승이 일방적인 ‘후원’의 형태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성좌와 화신이, 결코 대등한 관계가 아니기 때문에 벌어지는 일.
[성좌, ‘해상전신’이 당신의 발언에 주목합니다!]
설화급이 위인급을 얕보는 것은, 그들의 힘이 다르기 때문이고,
성운이 성좌를 얕보는 것은, 그들이 집단에 소속되어 있기 때문이다.
[성운, <베다>가 당신의 발언에 주목합니다!]
“‘우리’는 당신들의 설화를 계승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순간 객석에 어마어마한 정적이 몰려왔다. 엄청난 시선들이 나와 유중혁을 향해 쏟아지며 압력을 행사했다. 내게 손을 잡힌 유중혁이 부들부들 떨며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나는 그런 녀석에게 씩 웃어준 뒤 성좌들에게 말했다.
“‘우리’는 당신들의 설화를 사겠습니다.”
공정하지 않은 게임을 공정하게 만들려면, 일단 상대와 대등해지는 것이 먼저다.
“나와 유중혁에게 설화를 팔고 싶다면, 우리 ‘성운’과 거래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