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9화

149화 다음 차례였던 유중혁도 만만치 않은 인기를 누렸다. 심지어 녀석이 나왔을 때는 약간이지만 2층에서도 소리가 들렸다. <에덴> 쪽에서 내 이름을 함께 연호한 듯한 느낌이 들었는데, 기분 탓인지 어떤지는 모르겠다. [유중혀어어억―!] [최고다 패왕!] [우리 성운에 들어오라고!] <설화 계승식>이 시작되기 전까지는 약간의 시간이 남아 있어서, 나는 1층의 연회석에 앉아 잠시 사태를 지켜 보았다. 위인급이든 설화급이든 성좌들은 모두 경계의 대상이지만, 여기서는 판단을 잘 해야 했다. 딱히 믿을만한 대상을 찾는 것은 아니었다. 디오니소스가 “아무도 믿지 말라”는 말을 한 이유가 있을 테니까. 그러니 내가 지금 찾는 쪽은 ‘믿을 대상’이 아니라 ‘이용할 대상’이었다. “저······.” 쭈뼛거리던 이리스가 내 근처로 다가와 말을 걸었다.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 건지 대강 예상이 간다. 나는 그녀가 먼저 입을 열기 전에 경고했다. “살아남고 싶으면 경솔하게 굴지마.” “네, 네?” 순간 멍해진 얼굴의 이리스가 화들짝 놀라며 허공을 올려다보았다. [소수의 성좌들이 당신의 판단력에 놀랍니다.] [상당수의 성좌들이 당신의 사이다에 5000코인을 후원했습니다.] 천장의 가장자리 패널에 그녀의 얼굴이 큼지막하게 클로즈업 되어 있었다. 얼굴이 빨개진 이리스를 보며 성좌들이 킬킬 웃었다. 이리스가 망연자실해 중얼거렸다. “그, 그게 다 찍히고 있었다고?” 성좌들의 세계에 왔다고 채널이 꺼졌을 거라고 생각하는 게 순진하다. 오히려 우리가 이곳에 온 순간부터, 성좌들은 눈에 불을 켜고 우리의 반응을 지켜보고 있었을 것이다. 특히 2층의 저 음침한 녀석들은 더욱. 아마 이리스와 내가 대기실에서 한 판 붙기까지 했으면 성좌들의 반응은 거의 최고조였겠지. 하지만 그런 즐거움을 주고 싶지는 않았다. 말했다시피 난 놀러온 게 아니다. 그러니 적어도 이곳에서는 우습게 보이고 싶지 않다. “다음부턴 잘 해라 꼬맹아.” 나는 이리스의 어깨를 툭툭 두들겨 준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가 움직이자 1층의 성좌들이 대거 반응해왔다. [김독자! 이리오게!] 1층의 성좌들은 모두 인간형이나 생물형이 아닌, ‘심볼’의 형태를 하고 있었다. 홀로 큰 개연성을 감내하기 힘든 위인급들은 간소화된 상징체를 유지해야 소모되는 코스트를 줄일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얼핏 봐서는 누가 누구인지 알아볼 수가 없었다. 다가온 것은 짤랑거리는 죽장과 신라를 연상시키는 치렁치렁한 금빛 왕관. “‘대머리 의병장’님. 그리고 다른 분은······ ‘매금지존’이십니까?” [오오! 날 기억해주는구만!] [그렇다. 오랜만이구나.] 나를 찾은 것은 한반도의 성좌들이었다. [꼭 한 번 보고 싶었는데, 이렇게 만나게 되는군.] 둥둥 떠 있는 저 ‘안대’는 보아하니 ‘외눈 미륵’인 것 같고······. 그 외에도 ‘황산벌의 마지막 영웅’이나, ‘흥무대왕’으로 짐작되는 상징체들도 있었다. 안 그래도 계백한테는 물어볼 게 있었는데······. [후인 김독자.] 뒤돌아보니, 그곳에는 백원 짜리 동전이 떠 있었다. 백원? 웬 백원? [만나서 무척 반갑네.] “저, 누구신지······?” [섭섭하군. 날 못 알아보겠나?] 잠깐만. 백원 짜리 동전에 나오는 위인이 누구더라? “장군님?” 나는 화들짝 놀라 물었다. 내가 아무리 애국심이 제로에 가깝다곤 해도, 이 사람을 직접 보고서도 마음이 동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 동전이 허공에서 뱅그르 돌며, 앞면에 새겨진 인물의 모습이 드러났다. [지난 번에 준 성흔은 잘 쓰고 있는 것 같더군.] “그때는 감사했습니다.” 충무공 이순신. 내게 [칼의 노래]를 전승해 주었던 그 역시, 이 연회에 초대된 것이었다. “그런데 왜 그런 모습을 하고 계십니까?” [······내가 이 모습인 것은 내 의지가 아닐세.] 어쩐지 그게 무슨 뜻인지 알 것 같았다. 그러고 보면, 화폐의 모양을 하고 있는 것은 충무공 하나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나는 1층의 한쪽 벽면을 덮은 채 흐느적거리고 있는 초록색 종이를 바라보며 물었다. “그럼 혹시 저 분도······?” 이순신이 고개를 끄덕였다. [‘한글의 창시자’일세. 나와 같이 광화문에 동상도 있는 분인데, 모르는가?] 알고는 있다. 몰라서 물어본 건 아니니까. 이순신이 계속해서 말했다. [상징체는 가장 많이 알려진 심볼을 따라 만들어지지. 아마 저 분도 나와 비슷한 경우일 걸세.] 나는 슬픈 눈으로 이쪽을 보는 ‘한글의 창시자’를 향해 작게 읍을 했다. 세종대왕은 그렇다 쳐도, 당연히 거북선이 상징이어야 할 이순신이 백원 짜리라니. 위인을 백원 짜리나 만원 짜리 화폐에 가둬 놓으니, 결국 상징체도 이 모양이 된 것이다. 2층에서 킥킥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고 보니 2층의 설화급 성좌들은, 모두가 ‘인간형’ 또는 적어도 생명체의 외양을 하고 있었다. 한반도에서 가장 유명한 위인조차 인간형을 유지할 수 없는데, 대체 설화급의 진체는 얼마나 강한 것인지 짐작도 되지 않는다. 이렇게 보면 야마타노 오로치의 그림자를 사냥했던 것은, 정말 운이 좋았다. 그때, 한 성좌가 눈에 들어왔다. “저 성좌는 누굽니까?” [누구? 아, 저 자 말인가?] 내가 발견한 것은 1층과 2층의 계단참에 앉아 술을 들이켜는 한 사내였다. 긴 장도에 단단한 무장을 한 그는 인간형 상징체를 유지하고 있었는데, 아무리 봐도 설화급인 것 같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지나가는 설화급 성좌들이, 모두 그를 경멸 어린 눈으로 쳐다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명대사가 참견했다. [한반도의 위인급 중에는 저 자를 넘을 존재가 없지.] “위인급이라고요?” [최강의 ‘위인급’이라 말해도 좋을 걸세. 후대의 유명세가 아니라, 오롯이 본인이 쌓은 이야기로 저 위치에 오른 자야.] 확실히, 이런 자리에서 인간형 상징체를 유지할 정도의 여유라면 설화급에 전혀 꿀리지 않는 존재라는 이야기였다. 내가 알기로 위인급 중에 저 정도의 격을 갖춘 존재는 중국의 초패왕 정도인데······. [‘고려제일검’이라고 들어봤나? 최근 전승이 다시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다고 들었네만.] 고려제일검. “설마······.” 나는 그가 누구인지 깨달았다. 왜 한 번에 못 알아보았는지 오히려 의아할 지경이다. 한반도 제일의 위인급이라면, 애초에 그를 먼저 떠올렸어야 하는데. [모두 비켜라!] 계단참 아래에서 소란이 일어난 것은 그때였다. 2층에서 내려온 몇몇 성좌들이 실랑이를 벌이며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그러나 누구도 그들에 대적하지는 못했다. 이순신이 탄식했다. [······자네의 인기가 대단하긴 한 모양이군. 설마 2층에서 자네를 데려가려 할 줄이야.] 이미 유중혁도 누군가의 인도를 받아 2층으로 올라가는 중이었다. 반면 아직도 1층에 남아 있는 이리스는 부러운 눈으로 이쪽을 쳐다볼 뿐이었다. 아마 저 녀석은 위인급 성좌의 설화를 계승하러 온 모양이다. [부디 몸조심 하시게.] 고개를 끄덕이자 마자, 심볼들을 헤치고 설화급 성좌들이 나타났다. 사신의 형태를 한 상징체 셋. 누구인지는 바로 알아볼 수 있었다. [여왕님께서 찾으신다.] 그들은 명계의 심판관들이었다. 그러고 보니 이 자들도 설화급이었지. 비록 페르세포네의 설화를 빌려와 격을 유지하는 자들이긴 하지만······. 그들과 함께 2층으로 올라가려는데, 계단참 어귀에서 누군가가 툭 말을 내뱉었다. [······너도 한심한 놈이었군. 2층 녀석들에게 굽신거리다니.] 고려제일검의 말에, 심판관들이 동시에 성난 기세를 발출했다. [고려제일검, 그게 무슨 뜻이지?] [죽고 싶은 것인가?] 심판관들의 말에 피식 웃은 고려제일검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죽을 준비라면 언제든 되어 있지. 싸워 볼 텐가?] 고려제일검의 상징체는 내가 생각한 것보다 거대했다. 아니, 어쩌면 이 느낌은 상징체의 크기에서 비롯되는 게 아닐 것이다. 이것은, 성좌가 가진 ‘격’의 크기다. [설화급이라고 기고만장하지 마라. 설화의 꼬리에 간신히 붙어 기생하는 버러지들 주제에.] 무시무시하게 일어나는 그 기운에, 일순 1층과 2층 성좌들의 주목이 이쪽으로 쏠렸다. 심판관들은 당황하는 듯했지만, 그래도 설화급의 자존심이 있어 쉽게 물러서지 않았다. 고려제일검의 눈동자에 형형한 빛이 떠올랐다. 당장에라도 세 명의 심판관을 저승길로 보낼 듯한 살기. 심지어 그는 심판관들 너머, 2층에 귀족들처럼 자리 잡고 있는 설화급 성좌들을 노려보았다. [올림포스. 에덴. 베다······. 네놈들이 무슨 연유로 이런 촌구석까지 모여든 건지는 모르겠지만, 이곳의 창세신들이 자리를 비웠다고해서 너무 까불지 않는 편이 좋을 거다.] 그 말에 2층의 설화급들 사이에서도 강렬한 기파가 일었다. 아무리 고려제일검이 강하다곤 해도, 고작 위인급 성좌 하나의 도발을 참고 넘어갈 이들이 아니었다. 졸지에 연회 홀이 성좌들의 한바탕 각축전이 되려는 순간. [그만―!] 연회 홀 전체를 지배하는 강력한 진언에, 달아오르던 분위기는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심판관들은 불필요한 일을 벌이지 말라. 그리고 고려제일검, 당신도 너무 무례하게 굴지 않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 냉정한 말투에 심판관들은 다시 나를 데리고 걸음을 옮겼고, 고려제일검도 못마땅한 듯한 표정으로 다시 계단참에 앉아 술을 퍼마셨다. 나는 목소리의 주인을 바라보았다. 역시 명계의 여왕. 페르세포네의 강함은 아직 충분히 알려져 있지 않지만, 올림포스 3주신의 와이프는 아무나 되는 게 아니다. 아마 이곳에 온 설화급 중에서도, 페르세포네는 수위권의 성좌일 것이다. [오랜만이군요. 김독자.] 간만에 만난 페르세포네는 또 유상아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하여간 짓궂은 아줌마다. “잘 계셨습니까?” [타르타로스에서 쓸데 없는 짓을 벌이고 갔더군요.] “하하······.” 나는 머쓱한 얼굴로 주변의 성좌들을 둘러 보았다. 오히려 상징체가 인간형으로 바뀌자 누가 누군지 알아보는 게 더 힘들어졌다. 심볼일 때는 해당되는 성좌의 상징을 떠올리는 것으로 충분했는데······ 2층의 꼭대기 권좌에서 좌석에 몸을 묻은 채 이쪽을 내려다보는 제천대성도 보인다. 제천대성은 나를 잠시 보더니 흥, 하고 고개를 돌렸다. ······원래 저런 성격이었나? 조금 더 시간이 지나자 2층의 배열이 눈에 익으며 대충 진영 구성을 알 것 같았다. 중앙의 페르세포네를 기준으로 동쪽이 <올림포스>, 서쪽이 <베다>, 그리고 북쪽이 제천대성을 비롯한 비성운 또는 소성운의 성좌들······. 마지막, 남쪽의 <에덴>은 알아보는 게 쉬웠다. 죄다 날개가 달려 있었으니까. 나를 향해 가볍게 윙크를 하는 엄청나게 아름다운 천사도 있었다. 검정색 레이스 원피스를 입은, 꼭 악마 같은 복장의 천사였는데······. 잠깐만. ‘악마 같다’고? 그렇군. 저 천사가 바로? 문득 궁금증이 일었다. 저 성좌도 왔다는 것은, 어쩌면······. “명계의 여왕이시여. 하나 여쭤볼 게 있습니다.” [뭔가요?] “혹시, ‘은밀한 모략가’라는 성좌도 이곳에 왔습니까?” [······은밀한 모략가?] 순간 페르세포네의 표정에 묘한 기색이 엿보였다. 하지만 그녀는 이내 고개를 저었다. [잘 모르겠군요. 그보다 곧 ‘설화 계승식’이 시작될 텐데, 결정은 했나요? 당신의 ‘부활’을 이용하려는 성좌들이 꽤 있어요.] “아직 고민 중입니다.” 물론 몇 가지 생각해 둔 방책은 있었다. 하지만······. 내 생각을 읽은 듯, 페르세포네가 말했다. [아마 당신이라면 모두를 거절하겠죠. 지금까지도 줄곧 그래왔으니까.] 과연, 내 채널의 애청자 다운 발언이었다. 실제로 나도 그러려고 했으니까. [하지만 그 선택은 옳지 않아요. 모두가 당신에게 저작권 시비를 걸 테니까.] “설화에 저작권이 어딨습니까?” [자기 것이라 주장하는 이들에게 있겠죠. 아마 꽤 괴로워질 거예요.] 젠장, 완전 깡패나 다름없군. “지금 <올림포스>를 택하라는 말을 하고 싶으신 겁니까?” 페르세포네는 웃었다. [그런 뜻은 아니에요. 사실, 나는 저 치들을 싫어하거든.] 그 말대로, ‘멸살법’에서 페르세포네는 <올림포스>와 오히려 적대적인 관계에 놓여 있다. 실제로 연회에 참석한 <올림포스>의 3세대 신들은 쭈뼛거리며 주변을 맴돌 뿐이었다. 심지어 다른 성운의 성좌들도 이쪽을 예의주시하며 쉽게 다가오는 것을 꺼리고 있었다. 아마 페르세포네를······ 정확히는 ‘하데스’를 경계해서겠지. 그러니 나는 본의 아니게 명계의 보호를 받고 있는 셈이었다. 어쩌면, 내가 처음으로 만난 ‘설화급’이 페르세포네였다는 것은 행운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럼 여왕님께서는 제가 어떤 선택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베다>? 아니면 <에덴>? 혹은 그 외의 성운들?” 페르세포네는 고개를 저었다. [누구를 선택하든, 그대는 적이 생길 거예요. 그리고 그 적은, 지금까지 상대해왔던 어떤 적보다도 강력하겠죠. 그대도 알겠지만 ‘부활 설화’는 많은 성운에서 신화의 토대를 이루는 설화니까요. 그리고 하나의 설화를 받아 들이는 것은, 때론 다른 하나의 설화를 부정하는 결과를 낳죠.] 그 말을 하는 페르세포네가 맛있는 스테이크라도 눈앞에 둔 것처럼 입술을 핥았다. 아무래도 이 여왕님은 지금 이 상황을 즐기고 있는 것 같다. 나는 조금 짜증이 나서 말했다. “······그럼 어떻게 하란 말씀이십니까?” [그건 그대가 생각해야 할 몫이죠. 하지만 잘 생각해 보세요. 이게 꼭 누구를 적으로 돌려야만 하는 문제인지.] 적으로 돌려야만 하는 문제가 아니라고? 그리고 마침내, 단상 위에서 도깨비가 입을 열었다. ―지금부터 ‘설화 계승식’을 거행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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