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화
14화
돌아가는 상황을 보아하니, 이번에도 대충 감이 왔다.
“왜, 뭐가 잘 안 돼?”
[이럴 리가 없어. 시스템 간섭을 막을 수 있는 방호벽이 있을 리가······?]
아무래도 ‘제 4의 벽’은 같은 화신뿐만 아니라 도깨비의 간섭까지 막는 모양이었다.
이게 사실이라면, 나를 포함해 내 특성창을 볼 수 있는 존재는 ‘멸살법’ 내에 아무도 없다는 말이 된다.
재밌네.
사기꾼이 되기에 완벽한 조건이다.
“못 하면 됐어.”
[기, 기다려 봐! 내가 할 수 있다고. 으, 으으. 이걸, 그러니까 이렇게 하면?]
“못 하면 됐다니까.”
[끄와아아아아악!]
뭘 잘못 건드렸는지 비형은 감전이라도 된 듯 마구 비명을 질러댔다. 비형의 피부에 올라 있던 보송보송한 흰털이 새카맣게 타들어가고 있었다.
[이, 이게! 이게!]
“됐어. 안 되면 그만두고, 다른 부탁이나 들어 줘.”
[그럴 순 없어! 나는 도깨비 비형이다. 도깨비의 명예를 걸고 이 사태를 해결하지 않으면―]
나는 시계를 보았다. 어룡에게 먹히고 벌써 한 시간. 이런 식으로 지체할 시간은 없었다.
“도깨비 보따리.”
허공에 삽질을 하던 비형이 멈칫했다.
[뭐라고?]
“도깨비 보따리를 열어.”
[······그건 또 어떻게 아는 거야?]
“열거야 말 거야?”
[배후성이 없는 화신은 도깨비 보따리를 사용할 수가······.]
“도깨비 보따리를 이용하는 화신들은 모두 배후성이 있지. 하지만 배후성이 없는 화신이 도깨비 보따리를 이용할 수 없다는 규정은 없어.”
[···잠깐만 기다려 봐.]
품속에서 꺼낸 매뉴얼을 확인한 비형은 한참이나 말이 없었다.
[이쯤 되면 네가 도깨비인지 내가 도깨비인지 모르겠다. 너 사실 도깨비 아냐?]
어이없다는 듯 피식 웃은 비형이 두 손을 들었다.
[···좋아, 사용에는 문제가 없어. 다만, 도깨비 보따리는 스트림 규정상 채널이 개방된 상황에서만 열 수 있어. 괜찮지?]
“괜찮아.”
[#BI-7623 채널이 열렸습니다.]
[성좌들이 입장합니다.]
뒤이어 허공에서 눈부신 전류가 몰아쳤다. 곧 투명한 스크린이 눈앞에 떠올랐다.
[코인 상점, ‘도깨비 보따리’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도깨비 보따리.
이 빌어먹을 세계의 ‘캐시 상점’이 열리는 순간이었다.
*
‘멸살법’의 세계에서 코인의 쓰임새는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체력이나 근력을 비롯한 종합 능력치의 레벨을 올리는 것.
그리고 다른 하나는 ‘도깨비 보따리’를 비롯한 각종 샵에서 쓸 수 있는 공용 화폐의 역할을 하는 것.
[지금 당장 구매하세요! 당신의 초보 화신을 위한 스타터 패키지가 2500 코인!]
[오늘만 특가! 300% 성장 패키지로 남들보다 빠르게!]
[실수로 특성이 구린 화신을 고르셨다구요? 걱정 마세요! 특성을 무작위로 바꿔주는 ‘랜덤 특성 박스’가 출시되었습니다!]
각종 패키지를 위시한 수많은 코인 아이템들.
[도깨비 보따리]의 광고는 모두 화신을 키우는 성좌들을 겨냥한 것이었다.
당연하다. 원래 도깨비 보따리의 이용객은 성좌들이니까.
나는 팝업처럼 떠오르는 광고창들을 하나 둘씩 꺼 나갔다.
다섯 번째 메인 시나리오 이후에 등장하는 ‘재해’들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지만, ‘씨 커맨더’급의 어룡이면 시나리오 초반의 화신들에게는 재앙이나 다를 바가 없다.
어룡을 해치우기 위해서는 보따리에서 판매하는 일부 아이템들이 반드시 필요했다.
어디보자······.
한참이나 카탈로그를 넘기던 나는 비형 쪽을 흘끗 보았다.
“이봐, 지금 구매 가능한 상품들은 이것뿐이야? 검색 기능이 있을 텐데?”
[아, 그건······ 제길. 잠깐만. 성좌님들. 부탁입니다. 진정들 좀 해주세요.]
채널이 다시 개방된 순간부터 비형은 만화 같은 땀을 뻘뻘 흘리며 하소연을 반복하고 있었다.
[그냥 서버 오류로 잠깐 방송이 꺼졌던 거예요! 제가 일부러 끈 거 아니라니까요?]
현재 비형의 머리 위에서 반짝이고 있는 별의 숫자는 총 20여 개.
이탈좌가 거의 없는 것을 보면 지금 내 모습을 보고 싶어 하는 성좌들이 제법 있는 모양이었다.
물론, 모든 성좌들이 그저 호의적이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소수의 성좌들이 방송의 공정성을 의심합니다!]
[소수의 성좌들이 특혜 제공의 의혹을 갖습니다!]
짐작하지 못한 일은 아니었다.
잠깐 방송이 꺼진 사이에 무려 히든 시나리오가 시작된 데다, [도깨비 보따리]까지 열려 있으니 성좌들이 놀라지 않은 게 더 이상하다.
[아니, 특혜라뇨? 이보세요, 성좌님들. 저 도깨빕니다. 그런 짓하면 바로 소멸되는 거 모르세요? 이야기꾼 서약이 결코 가볍지 않다는 건 잘 알고 계실 텐데요?]
“나부터 좀 도와주지?”
[······상품 검색 버튼 저기 오른쪽 아래에 있어.]
“고맙다.”
쩔쩔매는 비형을 제쳐두고, 패키지창의 아래쪽에 숨어 있는 돋보기 모양의 아이콘을 눌렀다.
[상품 검색 기능이 활성화 되었습니다.]
[상품 검색은 하루에 5회로 제한되며, 추가 검색 이용 시 건당 100코인을 소모합니다.]
하여간 인간이나 도깨비나 상술은 매한가지다.
주어진 검색 횟수는 총 다섯 번.
내게 필요한 재료를 구매하는 데는 두 번의 검색이면 충분하니, 세 번의 검색 횟수가 남는다.
[성좌, ‘은밀한 모략가’가 당신의 계책을 궁금해 합니다.]
그래, 궁금하겠지.
궁금하면 잘 보고 있으라고.
[성좌, ‘심연의 흑염룡’이 당신의 모든 행동을 고깝게 쳐다봅니다.]
넌 꼬우면 보지 말고.
나는 검색창을 향해 입을 열었다.
“상품 ‘고대룡’ 검색.”
[검색 결과가 3건 있습니다.]
곧이어 작은 팝업창이 떠올랐다.
* 고대룡의 심장 - 재고 ?
* 고대룡의 뼈 - 재고 1
* 고대룡의 뿔 - 재고 1
나는 ‘고대룡의 심장’을 선택했다.
<아이템 정보>
이름 : 고대룡의 심장
등급 : SS
설명 : 고대룡 ‘이그니투스’의 마력을 품은 심장. 무한에 가까운 마력을 품고 있으며, 심장 이식에 성공할 시 속성 ‘지옥불’을 획득한다.
가격 : 1500000 C
재고 : 방금 품절되었습니다.
역시 이건 품절인가.
카탈로그 너머에서 성좌들을 상대하던 비형이 턱을 쭉 뺀 채 나를 보고 있었다.
[미쳤어. 어떻게 ‘고대룡’의 정보를 알고 있는 거지?]
“그냥 멋있는 이름 아무거나 불러본 거야.”
[······거짓말 같은데.]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본래의 ‘멸살법’에서도 ‘고대룡의 심장’은 주인이 정해져 있었다. 내 기억이 맞다면, 저 심장의 주인은 지금 이탈리아에 있다.
운도 좋은 놈이지. 그런 다이아 수저 배후성을 얻다니.
나는 그 외에도 몇 가지 상품명을 더 불러 보았다.
[관련 상품 검색이 완료되었습니다.]
* 대악마의 눈동자 - 재고 0
* 백청강기(白淸罡氣) - 재고 1
‘대악마의 눈동자’까지 품절이라니······ 역시 성좌들 손이 보통 빠른 게 아니다. 어차피 판매 가격이 100만 코인이라 있어도 못 사는 상품이었지만.
하여간 스폰서가 좋기는 좋다.
이제 ‘대악마의 눈동자’를 얻은 화신은 초반 시나리오를 죄다 박살내며 성장하게 될 것이다.
[너 진짜 뭐야? 무슨 치트 같은 거 쓰는 거 아니지? 검색으로만 찾을 수 있는 아이템들을 어떻게 알고 있는 거야?]
“그럴듯한 이름 말해 본 거라니까.”
결국 처음 검색한 세 가지 아이템들 중 재고가 남은 것은 ‘백청강기’ 하나 뿐. 그나마도 가격이 1만 코인이라 지금은 살 수 없다. 일단 장바구니에 넣어 두고.
[뭐야, 안 살 거야?]
“어차피 지금은 못 사. 그냥 구경만 한 거야.”
[쳇, 그러면 괜히 열었잖아.]
“대신 다른 걸 살 거니까, 지금부터 내가 부르는 아이템들을 띄워줘.”
나는 몇 개의 아이템 명을 불렀다. 잠시 후, 내 눈앞에 아이템 목록이 떠올랐다.
* 망치 해마의 점액 - 재고 124
* 스톤호그의 뾰족한 가시 - 재고 17
기억 속의 목록과 대조를 마쳤다. 어룡의 피식(被食) 해수종인 망치 해마와, 해수종의 천적인 스톤호그... 틀림없다. 어룡 공략에 있어서는 최고의 가성비를 자랑하는 조합이다.
“점액 넷, 가시 넷. 800코인이면 되지?”
[그렇긴 한데······ 이거 잡템들인데 어디다 쓰려고?]
“네가 알 것 없어.”
[······참견하는 건 아니지만 다른 걸 사는 게 어때? 가령 <월영검법>이라든가. 원래 8천 코인짜리지만 지금 사면 4천 코인에 팔아줄게. 차라리 이걸 사는 편이 시나리오 클리어 하는 데 더 도움이 될 걸?]
“고맙지만 그냥 이걸로 살게.”
비형은 못마땅한 눈치였지만 곧 결제를 해주었다.
[800코인을 소모했습니다.]
어둠 속에서 반짝이는 가루 같은 것이 뭉쳐지더니, 길쭉한 가시 네 개와 검은 점액을 담은 주머니 네 개가 나타났다.
[이제 와서 후회해도 환불은 안 돼. 알지?]
“알아.”
나는 짧게 고개를 끄덕인 후 작업을 시작했다. 가시들은 상의를 벗어 묶은 틈새에 꽂아 넣고, 주머니들은 허리춤에 매달았다.
스톤 호그의 가시는 발생점은 뭉툭하지만 끝으로 갈수록 날카로워지는 특징을 가지고 있었다. 길이는 대략 1미터 정도. 뭔가를 꿰뚫기엔 적당한 크기였다.
[흐음······ 그럼 난 가볼게. 너한테만 붙어 있을 수는 없거든. 저쪽에서도 꽤나 재미있는 일이 벌어지고 있고 말야.]
“그렇게 해.”
[후후, 그럼 어디 힘내 보라고. 이야기의 가호가 있길 바라지.]
빛을 내뿜던 비형이 사라지자 주변은 다시 어둑해졌다. 스마트폰 불빛을 쓸 수도 있겠지만 가능하면 배터리를 아껴 두어야 했다.
어둠 속에서 스톤 호그의 가시들이 푸르스름한 빛을 내뿜고 있었다. 미약한 빛이지만, 당분간은 이 빛에 의존해 살아가야 한다.
나는 허리춤에서 가시 하나를 뽑아 이리 저리 휘둘러보았다.
아무래도 [무기 연마]나 [만병의 화신] 같은 숙련계 스킬이 하나도 없기 때문일까. 가시는 좀처럼 손에 익지 않았다.
[소수의 성좌들이 지루해합니다.]
성급한 성좌들은 슬슬 채널 밖으로 벗어날 시기였다. 여기선 보이지 않지만, 비형도 초조해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한 시간이 더 지났다.
우로, 좌로, 위로, 아래로.
썩 마음에 들진 않지만 가시를 다루는 것에는 이제 문제가 없었다. 표면의 마감이 거칠어서 손에서 쉽게 미끄러질 것 같지도 않았다.
슬슬 시작해 볼까.
나는 적당한 힘을 실어 어룡의 위장벽을 찔러 보았다.
티잉!
탄성이 강한 고무벽을 찌른 것처럼 가시는 그대로 튕겨져 나왔다. 역시 어룡의 위장은 내 근력 레벨로 찢을 만큼 만만하지 않다. 아마 스킬을 써도 마찬가지겠지.
쿠구구구.
위장벽 상단에 위치한 조그마한 구멍들이 일제히 벌어진 것은 그때였다.
울컥거리는 소리와 함께 토해져 나오는 메스꺼운 액체.
“꾸에엑!”
위장의 부유물에 둘러싸여 있던 마인 하나가 괴성을 지르기 시작했다.
츠츠츠, 하는 소음과 함께 타들어가기 시작하는 마인의 피부.
어룡의 소화 작용이 시작된 것이다.
빠르게 강물 속에 용해된 어룡의 소화액은 콘크리트와 부산물들을 녹이고 내가 디딘 곳을 침식하기 시작했다.
츠츠츠츠!
이제 시간이 없다.
바로 계획대로 간다.
나는 부유물 위에서 크게 도약해 위장 벽의 돌기를 붙잡았다. 그리고 암벽타기를 하듯 한 칸 씩 위장벽을 타고 올라갔다.
콸콸콸.
소화액 사출구가 바로 위쪽에 있었다. 나는 입으로 가시를 깨문 채, 손으로 점액 주머니를 풀었다.
망치 해마의 점액.
미심쩍은 냄새가 나는 검푸른 액체를 손으로 찍어, 가시의 끝부분부터 망치 해마의 점액을 정성껏 도포했다.
면도할 부위에 셰이빙 크림을 바르듯 꼼꼼하고 세심하게. 셰이빙 크림이 면도날로부터 피부를 보호한다면, 이 점액은 소화액으로부터 가시를 보호해 줄 것이다.
간다.
나는 소화액 사출구를 향해 가시를 휘둘렀다. 각도는 정확했고, 지금의 내가 낼 수 있는 근력의 최대치였다.
콰아악!
가시에 부딪친 소화액이 튀어 올라 팔뚝 피부를 녹였다. 끔찍한 고통이 찾아왔지만 멈추지 않았다. 여기서 실수하면 모든 게 끝장이었다.
[전용 스킬, ‘제 4의 벽’의 영향으로 고통이 일부 완화 됩니다.]
콸콸, 콸, 주륵. 조르륵······.
이윽고, 가시가 사출구를 단단히 틀어막았다.
“일단 하나.”
가까스로 한숨을 돌린 후, 허리춤에 있던 다른 가시를 뽑아 들었다. 역시나 망치 해마의 점액을 바른 후, 다른 사출구를 찾아 막았다.
[소수의 성좌들이 당신의 침착함에 감탄합니다.]
[성좌들이 200코인을 후원하였습니다.]
그런 식으로 차근차근 세 개의 사출구를 틀어막았다. 남은 사출구 몇 개가 남아 있었지만, 입구가 작아 소화액 방출이 크지 않았다.
나는 숨을 고르며 입고 있던 윗도리를 박힌 가시에 단단히 감아 묶었다. 이제 남은 것은 가시 하나와 점액 두 주머니.
나는 남은 점액들을 피부와 옷 곳곳에 뿌리고, 그래도 남은 것은 목구멍 속에 모두 털어 넣었다.
“큽.”
짭짤하고 비린 맛이 혀끝에 감돌았지만, 죽는 것보단 나았다. 지금부터 있을 재앙에 비하면 이 정도 쓴맛은 아무것도 아니다.
위장 전체가 엄청난 진도로 떨리기 시작한 것은 그로부터 5분 정도가 경과한 후의 일이었다.
······시작됐나.
끼에에에에에에―!
고통스러운 어룡의 비명. 꿈틀거리는 위장벽의 사이사이로 혈관이 불거지고 있었다. 그 혈관 사이를 파고들며 세를 넓혀가는 가시들.
사출구에 틀어박힌 가시가 공격적인 생장 활동을 시작한 것이다.
스톤 호그의 가시는 해수종의 체액에 반응하여 성장한다.
꾸득, 꾸드득.
도포한 점액으로 인해 소화액에 면역이 된 가시들은 주변의 체액을 흡수하며 어룡의 몸에 본격적으로 뿌리를 내리기 시작했다.
어룡이 완전히 죽을 때까지, 스톤 호그의 가시는 확장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끼에에에에―!
발밑에서 소용돌이치는 용해액을 보며 나는 가시를 꽉 움켜쥐었다.
할 수 있는 것은 다 했다. 그러니 지금부터는 정신력 싸움이었다.
내가 죽든, 이 녀석이 죽든.
살아남는 것은 하나뿐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