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4화

144화 [저런, 생각보다 승부가 빨리 나겠는데요?] 유중혁과 니르바나의 피 튀기는 혈전을 보며, 허공의 도깨비들이 킥킥댔다. [절반 까지는 아니더라도 삼분의 일은 죽을 줄 알았는데······.] [이야기가 재미없게 흘러가는군.] 허공에는 무려 중급 도깨비 셋이 방망이를 탁탁 두들기며 스타디움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도깨비들의 등장에, 스타디움 바깥의 화신들이 얼어붙었다. 나타날 때마다 매번 어처구니없는 짓만 저지르니, 그럴 만도 했다. [이러면 모처럼 ‘힌트’를 주는 보람이 없잖아요?] [별 수 없지. 조금 더 빨리 공개하자고.] 도깨비들의 말과 동시에, 허공의 전광판에 화신들의 랭킹이 우후죽순 떠오르기 시작했다. + 현재 서울 돔에서 여덟 번째로 강한 화신은 ‘월하신녀(月下神女) 유상아’입니다. 현재 서울 돔에서 일곱 번째로 강한 화신은 ‘무장성주 공필두’입니다. 현재 서울 돔에서 여섯 번째로 강한 화신은 ‘멸악의 심판자 정희원’입니다. + 순식간에 세 명의 랭킹이 공개되자, 사람들의 반응은 거의 폭발적이었다. “유상아가 누구야? 월하신녀?” “공필두 어르신이 일곱 번째였군!” 정희원도 하늘에 떠오른 전광판을 보고 있었다. “어머, 내가 여섯 번째였네?” “난 열 번째인데······ 칫. 언니, 이 새끼 족치고 나랑 한 판 붙어 볼래요?” 이지혜가 바닥에 포박당한 중립의 왕 전일도를 콱 짓밟으며 물었다. 그러자 정희원도 그 위에 함께 발을 올려 놓으며 말했다. “흐흠, 미안하지만 그건 곤란해. 내 배후성이 널 좋아하거든.” “절요? 왜요?” 정희원은 대답하지 않고 전일도를 향해 검을 겨누었다. “거기, 10위 안에도 못 들어간 전일도 씨?” 서슬퍼런 칼날의 감각에 전일도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정희원, 어떻게 [사상 감염]에서 풀려났지?” “나한테 질문 하지마. 빨리 성흔 해제 안하면 죽여버린다?” “날 죽여도······ 내 성흔은······ 풀리지 않아.” 전일도는 그 말을 마지막으로 까무러쳤다. 어쩐지 일이 피곤해질 분위기라, 정희원은 전일도의 뒤통수를 한 대 더 갈겨준 뒤 김독자를 찾았다. “독자 씨?” 하지만 주변에 김독자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 현재 서울 돔에서 다섯 번째로 강한 화신은 ‘순정강철(純情强鐵) 이현성’입니다. + 돔의 바깥 쪽에서 한창 괴수들과 격전을 치루던 이현성과 공필두도 그 메시지를 들었다. 공필두가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순정강철’은 또 뭐야?” “저,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이현성은 모른 체 달려드는 5급 괴수종들을 향해 [태산 부수기]를 사용했다. [강철화]가 가능해진 그에게, 이제 소재앙 급의 괴수들도 적수는 아니었다. 갸오오오오! 두두두두두! 하지만 괴수들의 숫자는 생각보다 많았고, 전선은 조금씩 밀려나고 있었다. 이현성은 이를 악문 채 무장성채를 보호하며 전열을 지켜 나갔다. ‘독자 씨. 잘되고 있는 거 맞습니까?’ 혹시나 김독자가 또 대답해주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해보았지만, 물론 김독자는 응답이 없었다. + 현재 서울 돔에서 네 번째로 강한 화신은 ‘흑염여제(黑炎女帝) 한수영’입니다. + 같은 시각, 한수영도 허공의 전광판을 보며 실실 웃고 있었다. “······진짜 내가 4위네?” 한수영은 피를 흘리며 바닥에 늘어져 있는 김독자를 내려다보며 물었다. 부탁한 대로 한 번에 죽지 않을 정도로만 찔렀지만, 출혈이 심해 곧 죽을 것은 확실해 보였다. 한수영은 쪼그리고 앉아, 피를 흘리는 김독자의 뺨에 손을 가져다 댔다. “김독자. 진짜 이대로 죽을 거야? 나 3위 만들어 주려고?” 한수영은 찝찝한 얼굴로 김독자의 얼굴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이렇게 보니 그럭저럭 봐줄만하게 생겼네.” 그러나 물론 김독자는 대답이 없었다. 찌르라기에 찌르긴 했지만, 막상 찔러 놓고 보니 김독자가 진짜로 죽을까봐 걱정이 되었다. 아바타도 없는 놈인데······ 설마, 아니겠지? “내가 왜 이놈 걱정을······.” 불평을 늘어 놓던 한수영의 말이 잦아들었다. 잠든 김독자의 입술이 고통스럽게 일그러지고 있었다. 무슨 일일까 싶지만, 사실 물어보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김독자도 힘들 것이다. 멸망이 시작되기 전에는 그녀와 마찬가지로 평범한 일반인이었던 존재. 그런 존재가, 이제 세계를 결정하는 무대에 뛰어들어 주인공들을 움직이고 있었다. 그러나 한 번도 내색한 적이 없어서 김독자 또한 평범한 인간이라는 것을 한수영은 잠깐 잊고 있었다. 그녀는 손가락을 뻗어 김독자의 입꼬리를 위로 끌어당겼다. 그러자 눈은 찡그린 채 입은 웃고 있는 기묘한 얼굴이 되었다. 한수영이 킥킥 웃었다. “······진짜 이상하다.” 그때, 돔의 안쪽에서 거대한 충격파가 터졌다. 마침내 유중혁과 니르바나의 싸움이 종국으로 치닫고 있었다. [하하, 대망의 최종 3인만 남았군요. 누구인지 다들 궁금하시죠? 기다리세요! 곧 그 순위가 공개됩니다!] [성좌, ‘은밀한 모략가’가 두근두근한 마음을 감춥니다.] [성좌, ‘긴고아의 죄수’가 손에 땀을, 아니 털을 쥡니다.] [성좌, ‘대머리 의병장’이 궁금함에 머리를 닦습니다.] 쏟아지는 성좌들의 메시지를 들으며, 유중혁은 칼을 내리찍고 또 내리찍었다. 까가가가각! 천수관음을 꿰뚫은 검극이 소름끼치는 소리를 냈고, 근육 깊숙한 곳에서 고장 난 기계음 같은 것이 들려왔다. 유중혁은 자신의 존재가 조금씩 붕괴하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거신화]의 부작용. 감당할 수 없는 힘을 품은 대가였다. 언젠가 태고의 거신에게 이 힘을 받았을 때, 거신은 분명 경고했었다. 「모든 능력치가 세 자리에 도달하기 전까지, 절대로 스킬을 사용하지 마라.」 하지만 거신은 스킬을 전승하며 이미 예상했을 것이다. 유중혁은 그의 경고를 듣지 않을 것이란 것을. 그가 걸어야 할 길은 수라의 길이었고, 불가능한 길이었으며, 모든 수단을 동원해도 헤쳐나갈 수 있을까 말까 한 길이었다. 하지만 더 절망스러운 것은, 그 길의 끝이 아직도 보이지도 않는다는 것이었다. 고오오오! 유중혁은 전신의 마력을 짜내 검격을 퍼부었다. 거대한 검신을 타고 지상을 향해 폭발한 마력이 파랑을 이루며 니르바나를 향해 덮쳐들었다. 쿠구구구구! 「파천의 검도는 폭발에 있다. 자신을 감추지 마라. 확장하고, 만개하고, 범람해라. 하늘이 네 위에 있는 것을 허락지 마라.」 그것은 그에게 [파천검도]를 가르쳤던 스승, 파천검성(破天劍聖)의 말이었다. 2회차의 중후반, 파천검성은 홀로 귀환자 연맹과 맞서 싸우다 혈마와 천마의 합공을 받고 죽었다. 그때, 유중혁은 파천이 부술 수 없는 두꺼운 하늘을 보았다. 세상에는 분명 그런 하늘도 있었다. “유중혀어억―!” 하지만, 적어도 니르바나가 그 하늘은 아니었다. 환생자 니르바나는 강하다. 앞으로는 더 강해질 것이다. 하지만 아직 천마나 혈마처럼, 혹은 파천검성이나 역설의 백청처럼 강하지는 않았다. ‘그러니, 죽일 수 있다.’ 유중혁은 온 힘을 다해 마력을 방출하며, 니르바나의 전신을 으깨어 나갔다. 거신의 검을 감당한 니르바나의 천수관음은 넝마가 되어 부서졌다. 마력에 불타오른 살점들이 조각조각 찢어져 나갔다. 급하게 계승한 스킬에 한계가 다가온 것이다. “크아아아앗!” 거격을 맞은 니르바나의 몸이 땅으로 푹 꺼지며, 막대한 충격파가 안쪽에서 솟아 올랐다. 유중혁은 승리를 확신했다. 타격은 충분했다. 니르바나에게 숨겨둔 한 수가 있는 것 같기는 했지만, 이 정도 타격이면 놈이 무슨 짓을 해도 역전할 수 없었다. ‘놈은 김독자를 의식해서 근접 계열 스킬을 계승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유중혁은 남은 마력을 끌어 올리며 최후의 한 방을 준비했다. 놈이 구덩이에서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 최후의 일격을 먹이기 위함이었다. 그런데 그 순간 그의 머릿속에서 경고음이 울렸다. [전용 스킬, ‘상급 정신 방벽 Lv.3’이 한계에 달했습니다.] [전용 스킬, ‘사상 백신 Lv.1’이 침식당합니다.] ······뭐? 그럴 리가 없었다. [사상 백신]은 니르바나의 [사상 감염]과 [영겁의 감옥]에 대한 카운터 스킬이었다. 그런데 어째서? ‘설마.’ 최악의 가정이 머릿속을 스쳤다. 그러고 보면, 현생의 니르바나는 여전히 지난 생의 니르바나보다 약했다. 만약, 니르바나가 근접 계열 스킬을 계승한 것이 아니었다면? 김독자라는 변수에도 불구하고, 처음부터 놈의 목적이 하나뿐이었다면? ‘제길, [백팔번뇌(百八煩惱)]인가.’ [전용 스킬, ‘상급 정신 방벽 Lv.3’이 무너집니다.] [108개의 번뇌가 당신의 정신을 갉아먹기 시작합니다.] 아차, 하는 순간 시야가 검게 물들며 오감이 미쳐 날뛰기 시작했다. 평소답지 않게 상념이 폭주했을 때 뭔가가 이상하다는 걸 눈치챘어야 했다. 구덩이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니르바나가 웃고 있었다. “유중혁! 너를 이해할 수 있는 것은 나뿐이다!” 니르바나가 이 순간만을 인내해 왔다는 것을 잘 알 수 있었다. 니르바나의 뒤쪽에서 빛나는 108개의 거대한 염주. “이제 그만 나와 하나가 되어라.” 화아앗― 떠오르는 빛과 함께 유중혁은 자신의 정신으로 파고드는 번뇌의 파편들을 느꼈다. 이 스킬에 정면으로 맞서다 무너지게 되면, 그는 다음 회귀를 장담할 수 없게 된다. ‘겨우 여기서.’ 지금 회귀해야만 한다. 유중혁은 육체에 대한 마지막 통제력을 행사해 [진천패도]의 칼날을 자신의 목으로 가져다 댔다. ―이 회차를 버린다고 다음 회차가 좋아질거라고 착각하지마. 그런데 왜 이 순간, 그 녀석의 말이 떠오르는 것일까. ―네가 버리려고 하는 이 회차가, '인간'으로서 이 세계의 끝을 볼 수 있는 ‘단 하나의 회차’일지도 모르니까. 참담한 심경 속에서, 유중혁은 처음으로 어떤 생각을 떠올렸다. ‘김독자······.’ 그리고 시야가 차츰 어두워졌다. ―자식이, 빨리도 생각한다. 착각일까.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잠깐 쉬고 있어. 그 목소리에 안심하고 만다는 사실에 거부감을 느끼면서도, 유중혁은 편안히 눈을 감았다. * 천천히 눈을 뜨자 넘치는 힘이 느껴졌다. 시야의 높낮이가 미세하게 달라졌고, 전신을 알맞게 감싼 전투 근육의 감각이 나를 기분 좋게 만들었다. 적당하게 분비된 아드레날린. 뭐든 해낼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이 충만하게 차오르고 있었다. [‘1인칭 주인공 시점’을 발동합니다!] 미친······ 이게 ‘진짜’ 1인칭 주인공 시점이었구나. 이게 평소의 유중혁이 느끼던, 바로 그 감각이었다. 이러니 강하지 않을 수가 있나. “······어떻게 [백팔번뇌]를?” 멀리서 당황한 니르바나의 모습이 보인다. 나는 스타디움 바깥을 흘끗 보았다. 내가 유중혁에게 빙의했다는 것은 한수영이 일을 제대로 처리했다는 뜻이겠지. 예정대로라면, 내 숨이 완전히 끊어지기까지 남은 시간은 5분 정도. 사납게 눈을 치뜬 니르바나가 다시 나를 향해 스킬을 시전했다. [등장인물 ‘니르바나 뫼비우스’가 스킬 ‘백팔번뇌 Lv.2’를 발동합니다!] 백팔번뇌. 본래는 깨달음의 경지를 상승시키기 위해 스스로의 정신을 겁박하는 스킬이지만, 타인에게 사용할 경우 끔찍한 정신착란을 불러오는 스킬. 특히 유중혁같은 ‘회귀자’에게 사용한다면 그 효과는 [사상 감염]이나 [영겁의 감옥]보다도 무시무시했다. 물론, 내가 ‘유중혁’이었다면 그랬을 거라는 얘기다. [‘제4의 벽’이 ‘백팔번뇌’의 효과를 완전히 무효화시킵니다!] 미안하지만, 나는 지금 평범한 ‘유중혁’이 아니다. “이 느낌은······ 너는 누구냐?” 역시, 환생자라 눈치는 빠르군. 나는 재빨리 달려가 놈의 주둥이에 주먹을 꽂았다. 뻐어억! “크아아악!” 굉음을 일으키며 날아가는 니르바나의 모습. 역시, 회귀자의 몸이 좋긴 좋다. [전인화]도 안 썼는데 이런 스피드와 파괴력이라니. 육체의 힘이 다한 니르바나는 저항조차 하지 못하고 허공을 날았다. 퍼어억! 아주 통쾌한 감각이었다. 하지만 니르바나는 아직 버틸만한 얼굴이었다. 그럴 법도 하다. 놈에게는 통증도, 죽음도 익숙할 테니까. 나는 다시 한 번 놈의 얼굴을 갈기며 말했다. “수십 번이나 ‘죽음’을 겪었기에 오히려 ‘죽음’을 알 수 없다니. 우스운 일이지.” 단 한 번만 일어나는 일이기에, 죽음은 비로소 죽음이 된다. 죽음 이후가 없기에, 역설적으로 인간의 ‘현재’는 소중해진다. 그렇기에 니르바나는 ‘죽음’도 ‘현재’도 모른다. “누구보다 ‘현재’를 살지 못하는 녀석이, ‘현재’를 설파하고 다니다니. 모순이 따로 없지.” “어떻게 나에 대해······ 커헉!” “잘 알지. 네가 유중혁과 하나가 되려는 이유도, 구원교를 전파하는 이유도, 이런 짓을 통해 최종적으로 무엇에 도달하려하는지도.” 뻐어억! 잘 알고 있기에, 나는 지금 놈을 막아야 했다. 니르바나가 주춤주춤 물러났다. 그래도 환생자라고 녀석은 빠르게 평정을 회복하는 듯했다. 까드득, 이를 간 니르바나가 외쳤다. “어리석은 중생아! 이런 짓을 해도 소용없다. 나를 죽여도, 유중혁은 죽는다. 시나리오가 파멸로 가는 것은 누구도 막을 수 없다. 설령 이번 생을 망친다 해도, 세계는 반복 될 것이다. 나는 환생할 것이고, 유중혁은 회귀할 것이다! 그리고 우린 끝내 하나가 될 것이다!” 그래, 그것이 환생자의 사고방식이겠지. 하지만. “정말 그렇게 생각해?” 그 순간 전광판에 메시지가 떠올랐다. 그참, 타이밍 하고는. + 현재 서울 돔에서 세 번째로 강한 화신은 ‘패왕 유중혁’입니다. + 니르바나의 표정이 이상해졌다. “세 번째라고? 유중혁이?”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유중혁은 절대 ‘다음 회차’로 가지 않아.” “뭐?” “무슨 일이 있어도 유중혁은 살아. 죽는 건 너, 아니면 나지.” “웃기지 마라! 나는 최강의 화신, 니르바나 뫼비우스다. 하찮은 중생에게······!” + 현재 서울 돔에서 두 번째로 강한 화신은 ‘구원교주 니르바나’입니다. + ······젠장. 벌써 2위까지 발표를 할 줄은 몰랐네. 허공을 올려다보니, 도깨비들이 재미난 듯 낄낄대고 있었다. 아마 승부가 정해졌다고 판단한 것이겠지. 니르바나의 몸이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했다. “······말도 안 되는······ 그런 일이 있을 리가······?” “니르바나, ‘현재’를 살고 싶다고 했지?” “설마······ 네가······?” 결코 해석할 수 없는 화두(話頭)라도 만난 것처럼, 니르바나의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그런 니르바나를 향해, 나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아주 작은 목소리로, 마치 사신의 속삭임처럼. “내가 너에게 ‘죽음’을 알려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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