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9화

139화 까드드득! 새로 돋아난 강철의 표피. 마치 다른 종으로 거듭나듯, 이현성의 몸피는 새롭게 만들어지고 있었다. 강철화(鋼鐵化). 겨우 1단계인 ‘갑주(甲冑)’가 활성화되었을 뿐이지만, 그것만으로도 보통의 권능은 아니었다. 1단계를 완전히 습득한 이현성은 공필두의 무장성채보다도 단단하고, 유중혁의 진천패도를 맞고도 죽지 않는다. “사······ 살았다······.” 문제는, 아직 1단계가 완전히 활성화되지 않았다는 것이지만. ―그게 이현성 씨가 익혀야 할 진짜 ‘성흔’입니다. 금세 상황을 깨달은 이현성이 재빨리 자세를 잡으며 물러섰다. [아직 ‘강철화’가 완전하지 않습니다.] [해당 성흔은 설화를 이룩한 존재만이 사용할 수 있습니다.] 모든 배후성은 자신의 화신에게 성흔을 제공한다. 증여의 형태로 전해지는 성흔이 있는가 하면, 까다로운 조건을 거쳐야 사용할 수 있는 성흔도 있다. ‘강철의 주인’이 가진 ‘강철화’ 또한 그런 까다로운 성흔 중 하나였다. [‘강철의 첫 번째 증명’이 시작됩니다.] 왜냐하면 이 성흔은, 성좌가 겪었던 ‘증명’의 간접 체험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 <강철의 증명> 1. 「진정한 강철은 수만 번의 담금질 속에서 태어나리니」 + 시나리오와는 다르게 불친절하게 툭 내던져진 문장. 이현성이 혼란스럽다는 듯 물었다. “이게 무슨 뜻입니까?” ―담금질의 기본은 고열 처리 후 냉각이죠. “설마······.” ―그 설마가 맞을 겁니다. 정신 똑바로 차리세요. 어떤 의미에서, 정희원이 이현성의 상대가 된 것은 다행일지도 모른다. 이현성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성좌, ‘긴고아의 죄수’가 이계의 설화에 관심을 가집니다.] [성좌, ‘디펜스 마스터’가 과연 자신보다 단단한지 궁금해합니다.]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초조한 기색으로 양손을 모읍니다.] 성좌들의 메시지와 함께, 이글거리는 지옥불이 파랑처럼 밀려들었다. 콰르르르! 그새 정희원의 [지옥염화] 수치가 올라간 것인지, 화염이 만드는 해일은 더욱 깊고 사나워져 있었다. 새하얀 불꽃에 아스팔트가 녹아 붙으며 불순물들이 섞였고, 고열에 뒤섞인 덩어리들은 파랑에 휘말리며 위협적인 흉기로 변했다. 슈슈슈슛! 은빛의 갑주가 순식간에 그을리며 녹아내리기 시작했고, 군데군데 튄 이물질들은 총탄처럼 갑주를 뚫고 이현성의 내부를 녹였다. 갑주가 녹는 족족 새로운 강철이 자라나 녹은 자리를 메웠지만, 그렇다고 피해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큿······!” 이현성의 입에서 피가 흘러나왔다. 그의 강철화가 완전했다면 [지옥염화]에도 끄떡 없었겠지만, 아직은 아니었다. 어쨌든 [지옥염화]는 불꽃 속성에서도 최상위에 속하는 성흔. 사실 무너지지 않는 것만으로도 놀라운 일이었다. 이현성이 한 걸음씩 물러서며 비명을 질렀다. 그 광경을 보는 나 역시 고통스러웠지만, 아직 때가 아니었다. 이현성의 강철이 붉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좀 더, 조금만 더······. [온도가 기준치를 초과하였습니다!] 됐다. [담금질이 시작됩니다.] 강철의 기본은 담금질. 완전한 강철의 육체를 이룰 때까지, 기준치 이상의 고열에서 버티는 것이 바로 이 설화의 핵심이었다. ―참아요! 할 수 있습니다! 다행히 이현성이 ‘악인’이 아니라는 것만이 유일한 위안이었다. [지옥염화]는 ‘불꽃’과 ‘신성’의 속성을 가진 성흔. 악인 표식이 찍혀 [지옥염화]의 열기에 그대로 노출되었더라면, 이현성은 이미 한 줌의 잿물이 되었을 것이다. 이현성이 악을 쓰는 동안, 나는 빠르게 정희원의 정보를 살폈다. [등장인물 ‘정희원’은 현재 ‘사상 감염’에 당해있습니다.] [등장인물 ‘정희원’은 이지를 상실한 상태입니다.] [등장인물 ‘정희원’의 트라우마가 완전히 개방되어 있습니다.] ······. ······개자식, 사람의 정신을 완전히 넝마로 만들어 놨군. 「용서할 수 없어······.」 니르바나의 [사상 감염]은 그 사람의 시간을 ‘현재’에 안착시키기 위해 해당 인물이 가진 정신의 모든 어두운 부분을 표면으로 끌어올린다. 「죽여야 해.」 미래가 사라진 채 낭떠러지 같은 현실과 마주한 인간은 대개 희망을 잃는다. 현실이 끔찍한 경우에는 더욱 그렇다. 그 과정에서 누군가는 절망해 무너지고, 누군가는 무분별한 욕망을 풀어 짐승처럼 변한다. 또 어떤 이는 분노 속에서 저항하다가 이성을 잃게 되는데, 이러한 체념이 반복되면 마지막에는 결국 위안을 찾기 위해 스스로 ‘구원교도’가 된다. 그렇게 구원교도가 된 이는, 위대한 ‘현재’ 앞에 자신의 보잘것 없는 목숨을 바치는 것으로 순교하게 되는 것이다. 「남자는 모두 죽여야 해.」 그녀의 트라우마가 뭔지 알 것 같았다. 정희원의 초기 특성인 ‘웅크린 자’는 강한 정신적 쇼크를 바탕으로 만들어지는 것. 그녀를 처음 구했던 순간을 돌이켜 보면, 그녀가 ‘남자’에 대해 강렬한 적의를 품는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이거······ 혹시 희원 씨의 마음입니까?” 타오르는 화염 속에서 버티던 이현성이 물었다. ―들리시는 겁니까? “그게, 조금······.” 이현성도 ‘전지적 독자 시점’의 메시지를 들을 수 있을 거란 생각은 미처 못했다. 1인칭 상태로 몰입했기 때문일까? 내가 이현성을 이해하는 만큼, 이현성도 내 감정을 느끼는 건가? 이현성은 열기조차 잊은 듯한 얼굴로 더듬거렸다. “이것도 독자 씨의 능력입니까?” ―예. 제가 가진 스킬입니다. 여기서 거짓말을 해 봐야 좋을 게 없었기에 나는 솔직히 고백했다. ―지금까지 숨겨서 죄송했습니다. 하지만 이현성은 딱히 기분 나쁜 모습은 아니었다. “조금 부끄럽군요. 혹시 제 마음도······.” 화르르르륵! 말을 잇기도 전에 2차 파동이 덮쳐왔다. 더욱 강렬해진 고열은 주변의 화신들을 통째로 녹여버리며 용암으로 들이닥쳤다. 쩌저저저적! 강력한 열기에 아예 지반 전체가 통째로 익으며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건물들이 땅속으로 가라앉고 있었다. 이젠 어쩔 수 없이 결단을 내려야 했다. ―일단 제압하는 방향으로 가야겠군요. “희원 씨가 다치지 않겠습니까?” 불리한 것은 이쪽인데 저쪽부터 걱정하고 있다니, 과연 이현성이다. 하지만 이현성의 말이 틀린 것도 아니었다. ―다치겠죠, 마음이. 가장 확실한 해결책은 니르바나를 죽이거나, 정희원의 트라우마를 해결하는 것이었다. 전자는 지금은 불가능하고, 그나마 생각해 볼 만한 것은 후자인데······. 정희원이 원작에서도 비중을 가졌던 인물이었다면 이렇게 고민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정희원은 내가 새로 발견한 인물이었고, 나는 그녀를 잘 모른다. 그러니 지금 할 수 있는 것은 원인이 아닌 증상을 해결하는 것뿐. “독자 씨.” ―해 봅시다. 우리는 하나의 몸으로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간 조금씩 물러난 탓에 정희원과의 거리는 제법 되었다. 뭐라도 해보기 위해서는, 일단 그녀의 코앞까지 가야만 했다. 까드드드득! 순식간에 자라난 강철의 표피가 이현성의 얼굴까지 모두 덮었다. 이현성의 전신에서 가공할 근육이 꿈틀거렸다. 체구에 알맞게 덮인 강철의 형상은, 마치 은빛의 기사 같았다. 은빛의 기사는 그대로 불길을 뚫고 달리기 시작했다. 콰아아아아아! 그에 맞춰 불꽃의 벽도 거세게 타올랐다. 더는 다가오지 말라는 듯. 너희는, 이곳에 허락받지 못했다는 듯이. “우어어어어억!” 무슨 훈련이라도 받는다고 생각했는지, 이현성은 악을 쓰며 불길을 헤쳐 나갔다. 헤치고, 또 헤치고. 강철 조각들이 땜납처럼 녹아 바닥에 떨어졌다. 안구가 열기로 익어서 시야가 흐릿해지고 있었다. “희원 씨! 저희가 구해 드리겠습니다!” 그렇게 한 걸음. “저희가······, 제가······!” 다시, 한 걸음. “희원 씨······!” 말재간도 없이 마구 주워섬기는 이현성을 보며, 나는 생각했다. 함부로 들려온 타인의 마음 때문에 한동안 잊고 있었다. 원래, 한 사람의 마음에 다가가는 것은 이렇게 어렵고 고통스러운 것이라는 걸. 이현성과 나는 분명 같은 몸속에서 같은 눈으로 세계를 보고 있었지만, 같은 광경을 보고 있지는 않았다. 이현성의 터질 듯한 심장이 그것을 증거 하고 있었다. 묘한 기분이 된다. 본래 이어질 수 없던 사람들이 이어지는 것. 나로 인해, 이야기가 바뀌어 나간다는 것. “으으으······ 끄으으으!” 열 걸음을 남겨 놓고, 이현성의 무릎이 무너졌다. [등장인물 ‘이현성’의 정신력이 한계에 이르렀습니다.] 흔들리는 시야를 보며 나는 새삼 깨닫고 있었다. 이야기가 바뀌어도, 이것은 결국 ‘멸살법’이라는 걸. [성좌, ‘강철의 주인’이 안타까운 눈으로 자신의 화신을 바라봅니다.] 모든 등장인물들이 아득한 절망 속에 몸부림쳐야만 하는, 바로 그 ‘멸살법’이라는 걸. ―현성 씨. 하지만 그런 ‘멸살법’을 줄곧 읽어온 나였기에 나는 가끔 궁금했다. ‘멸살법’의 작가는, 자신이 만든 ‘결말’에 정말 한 번도 후회한 적이 없었을까? ―잠시, 저한테 맡기십시오. [전용 스킬, ‘제4의 벽’이 흔들립니다.] [‘1인칭 조연 시점’이 극도로 활성화됩니다.] 이현성의 의식이 느슨해진 빈자리에, 내 의식이 들어선다. 육체의 통제권이 이양되며, 전신의 감각이 강하게 활성화되었다. 이현성은 이런 고통을 견디고 있었던 건가. 미쳐버릴 열기다. 온몸이 화염 속에 타 들어갔고, 뼈마디와 신경절이 녹아내린 자리는 실시간으로 팔다리를 끊었다 붙이는 것처럼 아파왔다. 나는 이현성의 목소리로, 정희원을 향해 외쳤다. “정희원 씨! 이대로면 모두 죽습니다!” 정희원은 반응이 없었다. 계속해서 지옥같은 열기를 뿜어댈 뿐이었다. “이현성 씨가 죽는단 말입니다! 이대로 이현성 씨를 죽일 겁니까!” 나는 죽을 힘을 다해 이현성의 다리를 움직여 앞으로 조금씩 나아갔다. 이제 세 걸음, 두 걸음, 그리고... 제길, 너무 뜨겁다. 고통에 무릎이 꺾이는 찰나, 목소리가 들려왔다. ‘독자 씨. 제가 하겠습니다.’ 이현성의 목소리였다. ‘제가 해야 합니다.’ [강철의 의지가 당신에게 반응합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결국 나는 ‘독자’다. 그 본분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의식이 빠져 나가며, 이현성이 다시 자신의 육체를 되찾았다. 눈부시게 빛나는 이현성의 몸이, 온전한 강철의 형상을 되찾고 있었다. “희원 씨.” 타오르는 [지옥염화]가 그녀의 창백한 얼굴을 새파랗게 만들고 있었다. 이 불은, 결국 그녀 자신을 갉아먹을 것이다. 흘러내리자마자 말라버리는 눈물. 그런 그녀를 향해, 이현성은 예상치 못한 행동을 했다.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이현성은 마지막 한걸음을 다가가, 정희원을 힘껏 끌어안았다.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뜻밖의 전우애에 당황합니다.] 정희원의 작은 몸이 이현성의 넓은 품속에 들어왔다. 얼마나 넓은 품인지, 손끝 하나 닿지 않고도 그녀를 안을 수 있을 정도였다. 정희원은 피하는 대신 더욱 강한 불길을 피워 올렸다. 마치 그 불꽃만이, 그녀가 발할 수 있는 감정의 전부인 것처럼. 까드드득 하는 소리와 함께, 이현성의 품을 중심으로 강철의 벽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한 사람과 세상을 유리(遊離)시킬 벽. 불꽃을 꺼트리기 위해선, 발화점을 산소와 차단해야만 한다. 그것을 아는 이현성은, 자신을 희생해 그녀를 위한 벽이 되고 있었다. 언제까지라도, 세상을 대신해 그녀의 분노를 감당하겠다는 것처럼.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그 둘을 지켜보는 것뿐. 언어로는 닿지 못하는 정희원의 마음에, 이현성이 닿기를 바라는 것뿐이었다. 그리고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설화, ‘강철의 첫 번째 증명’이 완료되었습니다.] 마침내, 정희원의 불길이 사그라졌다. * 이현성의 의식을 깨운 것은 익숙한 여자의 목소리였다. “숨 막혀······.” 화들짝 아래를 바라보자, 정희원의 얼굴이 보였다. 주변을 살펴보니 상상도 못한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자신의 팔에서 자라난 강철이 정희원의 몸을 덮은 채 주변을 봉쇄하고 있었던 것이다. “어, 어어! 죄, 죄송합니다! 지금 풀어 드리겠습니다!” 하지만 녹은 채 굳어버린 강철 때문인지, 아니면 진력이 다 빠져버렸기 때문인지, 강철의 벽은 쉽사리 해제되지 않았다.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인가 이현성이 당황하고 있는 사이, 정희원의 이마가 이현성의 가슴 부분에 닿았다. “고마워요.” 강철에 닿은 그 슬픈 감촉에 이현성이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아주 작은 제스처였지만, 그것으로도 충분했다. 분명, 마음은 전달된 것이다.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이 전우애를 싫어합니다.] “근데 현성 씨, 혹시 여기 누가 또 있었어요?” “예? 그게······.” 횡설수설하는 이현성을 보며 정희원이 투덜거렸다. “됐어요. 뭐 중요한 것도 아니고. 그보다 이것 좀 빨리 풀어봐요. 이럴 시간 없으니까!” “······예? 무슨 일이 있습니까?” 입술을 깨문 정희원이 이현성을 한 번 바라보더니, 하늘을 향해 커다란 목소리로 외쳤다. “김독자 씨, 지금 듣고 있죠? 유상아 씨가 위험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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