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0화
140화
[강력한 충격에서 육신이 깨어납니다.]
[‘전지적 독자 시점 3단계’가 해제되었습니다.]
서서히 감각이 돌아오며, 의식이 육신에 안착하는 느낌이 들었다.
그런데 뭔가가 이상했다.
······왜 부활 메시지가 안 뜨지?
[‘1인칭 조연 시점’의 연결이 불안정하여 당신은 ‘전지적 독자 시점 3단계’의 보상을 받을 수 없습니다.]
예상 못한 메시지에 놀란 순간, 서서히 명치의 고통이 느껴지며 육신의 무게가 실감나기 시작했다.
이건 뭔가 잘못됐다.
힘겹게 실눈을 뜨자, 나를 노려보는 유중혁의 모습이 보였다.
시발, 깜짝이야.
“김독자, 죽었나?”
상황이 어떻게 된 건지 조금씩 알 것 같았다.
왜 부활 메시지가 안 떴고, 전지적 독자 시점 3단계의 보상도 안 들어왔는지도 알겠다.
난 처음부터 죽은 적이 없었던 것이다.
“김독자.”
단지, 아주 세게 명치를 얻어맞았을 뿐.
저 빌어먹을 놈, 왜 안 죽인 거지?
이 자식, 죽여달랄 땐 늘 안 죽이고······.
「······그냥 처음부터 죽였어야 했나?」
뜻밖의 메시지에, 나는 열려던 입을 다물었다.
자동으로 발동한 전지적 독자 시점.
유중혁의 상념은 폭포수처럼 쏟아졌다.
「이 녀석 때문에 모든 게 뒤틀렸다.」
「이미 내가 아는 이전 회차들과는 너무 달라졌어. 이용할 수 있는 정보의 수가 너무 제한적이야. 이대로라면 세계를 구할 수 없다.」
얼씨구.
「구원교주에게 당한 것은 지난 회차에서 ‘시간 단층’을 지나치게 오래 이용한 까닭이다. 거기서 100년을 수련한 것은 실수였다. 정신력이 영구적으로 손상되는 바람에 놈에게 당한 거야.」
「아니면 ‘절대 왕좌’를 손에 넣지 못한 것이 실수였는지도 모른다.」
「이럴 바에는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게······.」
젠장, 겨우 한 번 졌다고 회귀자 우울증이 도지시는군.
정신 공격에 당해서 그런가?
나는 혹여나 놈이 딴 맘을 품을까봐 아픔을 무릅쓰고 외쳤다.
“아파서 뒈지겠다 자식아!”
내 도발에 유중혁은 나를 힐끗 보더니 가라앉은 음성으로 물었다.
“······죽도록 때리라고 한 건 네놈이다. 일은 해결됐나?”
“대충은. 급한 불은 껐어.”
유중혁의 표정이 그다지 밝아 보이지 않았기에, 나는 쓰린 명치를 만지며 내가 알게 된 것들을 일부 말해주었다.
이현성과 연락하고, 정희원을 구한 이야기.
물론 ‘전지적 독자 시점’의 성능에 관한 이야기는 쏙 뺐다.
평소였다면 허술한 얘기에 태클을 걸었을 법도 한데, 반쯤 정신이 나가 있는 유중혁은 음울한 얼굴로 고개만 끄덕였다.
“그런 일이 있었군. 그래서 이제 어떡할 거지?”
“아직 생각 안 해봤어. 하지만 상황은 무척 낙관적이야.”
“그 유상아인가 하는 여자는 네놈에게 소중할 테니, 그 여자를 먼저 찾는 게 급선무겠군. 구원교주에게 잡혀 있는 건가?”
“아마 그렇겠지. 어쨌든 희망적인 상황인 건 확실해.”
“······뭐가 희망적이라는 거지?”
“중혁아, 우린 세계를 구할 수 있다. 알지?”
그러자 유중혁이 나를 노려보았다.
“대체 뭔 소릴 하는 거냐?”
너무 티가 났나 싶어서 나는 변명하듯 덧붙였다.
“뭐, 그러니까 이런 얘기야. 내 예상이 맞다면 니르바나는 유상아를 건드리지 않았을 거야. 내가 아는 그 ‘니르바나’라면 말이지.”
“······설마 환생자에 관해서도 알고 있는 건가?”
유중혁의 눈이 점차 가늘어졌다.
괜히 대거리했나 싶어서 눈치를 보는데, 마침 곁에 있던 민지원이 끼어들었다. 그녀는 깜짝 놀란 표정이었다.
“두 사람, 꽤 친해지셨네요.”
“친해지긴요. 그보다 괜찮으십니까?”
“······덕분에요. 하마터면 구원교도가 될 뻔 했지만.”
니르바나와의 조우가 깊은 트라우마를 남긴 듯, 민지원이 고운 입술을 부르르 떨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녀의 상황을 배려해 줄 시간이 없었다.
“미희왕, 아무래도 도움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
나는 미희왕의 화랑들을 이용해 흩어진 일행들을 모으기 시작했다.
급선무인 것은 니르바나의 [사상 감염]으로 인한 추가 피해를 막는 것이었다. 특히 정신력이 개복치 뺨치는 이지혜 같은 녀석이 이상한 사상에 감염된다면, 한강에 나타난 [유령함대]가 서울을 쑥대밭으로 만드는 대참사가 발생할 수 있었다.
다행히 이길영과 신유승은 가까운 곳에서 투닥거리고 있었고, 건물 한 채를 점령하고 괴이한 농성을 벌이고 있는 공필두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다.
“난 그 땅에 계속 있고 싶었다.”
“피스 랜드?”
“빌어먹을······.”
공필두는 시나리오가 끝난 게 못내 아쉬운 듯했다.
하긴, 공필두야 거기서 왕 노릇을 하고 있었으니까.
한수영 녀석은 무려 ‘여신’이었는데, 지금쯤 어떤 심정일지 궁금하다.
“존경하는 패왕님! 저흴 받아주십시오!”
“존경합니다!”
이 귀가 곤란해지는 레벨의 아부는 또 뭔가 싶었더니, 모두 이번 시나리오에 새로 유입된 신규 화신들이었다.
우리가 [피스 랜드]에서 돌아왔다는 소문이 그새 퍼진 모양이었다.
옆을 보니 유중혁도 인상을 찌푸리고 있었다.
「저런 놈들은 백 트럭이 있어도 세계를 구할 수 없다.」
「역시 답은 회귀인가······.」
“자자, 우리 패왕님께서는 지금 기분이 안 좋으니까, 다들 꺼지라고. 뒈지고 싶어?”
나는 친히 나서서 우울증의 원인들을 제거했다.
신규 화신들은 매니저에게 쫓겨난 사생팬들처럼 나를 노려보았다.
“저 새낀 뭐야?”
“못생긴 왕인가 그거라는데.”
이 새끼들이 진짜.
참다못한 내가 한 소리를 해주려는데, 뜻밖에도 유중혁이 직접 입을 열었다.
“함께하고 싶다면, 내게 도움이 될만한 인간이 되어서 와라.”
평소와는 다르게 냉기 어린 목소리에 묘한 우울감이 배어 있었다.
그렇다곤 하지만 모욕적인 언사인 건 마찬가지였기 때문에 이제 팬들이 죄다 떨어져 나가겠구나 싶었는데, 이게 웬걸.
“시발, 존나 멋있네······ 저 우수 어리고 다크한 목소리······.”
화신들은 남자고 여자고 할 것 없이 모두 뿅 간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존나 개 시크해! 저 강해질게요! 꼭 도움이 되겠습니다!”
세상은 왜 이렇게 불공평한 것인가?
그건 그렇고 왜 유중혁만 찾는 건데?
다들 내가 구원교주를 제압했던 건 잊은 건가?
그때, 누군가가 입을 열었다.
“야야, 근데 아까 보니까 저 ‘못생긴 왕’인가 하는 사람이 더 센 거 같던데.”
“어? 그거 진짜야?”
진짜인진 모르겠지만, 나도 꽤 세다고 말해주고 싶다.
“거기 인마. 눈깔은 뒤통수에 달렸냐? 당연히 패왕님이 다 패놓은 거 쟤가 막타 친 거잖아.”
“역시 그런가?”
부들부들 떨리는 두 주먹이 조금씩 무거워진다 싶더니, 어느새 신유승과 이길영이 내 양손에 매달려 있었다.
“난 아저씨 잘생겼다고 생각해요.”
“형, 남잔 얼굴이 다가 아니잖아요.”
역시 내 편은 애들 뿐······ 아니, 신유승뿐이다.
그나저나 못생긴 왕이라니.
내 별명은 어느새 그딴 걸로 자리매김한 모양이다.
솔직히 이해가 가지 않았다.
멸망이 시작되기 전까지만 해도, 나는 ‘못생겼다’란 말을 면전에서 들어본 적은 없었으니까.
우울증은 유중혁이 아니라 내가 앓아야 할 판이다.
“못생긴 왕? 푸하하. 진짜 잘 어울린다.”
깐죽거리는 목소리에 고개를 드니, 이지혜의 모습이 보였다.
이걸로 비교적 먼 거리에 있는 정희원과 이현성, 그리고 현재로써는 데려올 수 없는 유상아를 제외하면 거의 모든 전력이 모인 셈이었다.
그럼 이제부터 뭘 해야 하나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왔다.
그오오오오!
어디선가 들려오는 울음 소리에, 유중혁이 제일 먼저 반응했다.
“······대형 괴수종이군. 6급이다.”
“그러고 보니 여기도 시나리오 진행 중이랬나?”
이지혜의 말은 맞았다.
일곱 번째 시나리오 ‘괴수 사냥’은 [피스 랜드]에 참가하지 못한 화신들, 그리고 신규 화신들을 위해 진행되는 이벤트성 시나리오였다.
······그런데 일곱 번째 시나리오에 6급 괴수종이 나오던가?
내 의문에 답한 것은 민지원이었다.
“죄송하지만, 일곱 번째 시나리오는 벌써 끝났어요.”
“······아까 진행 중이라고 뜨던데요?”
“아마 보상 정산 중일 때 들어오셨을 거예요. 진행은 마무리된 상황이었어요. 구원교주가 최고 보상을 받았고요.”
역시 구원교주인가.
그러고 보니 종전에 니르바나를 만났을 때, 구원교도들이 괴수종들을 사냥하고 온 듯한 낌새가 있긴 했다.
“그럼 저건 어디서 나타난 거지?”
“다들 준비해. 한두 마리가 아니다.”
유중혁이 진천패도를 뽑자, 다른 일행들도 동시에 병장기를 뽑았다.
쿠구구궁!
6급 괴수종, [헤비 하운드]가 거대한 앞발로 건물들을 부수며 나타났다.
얼핏 숫자를 세어보니 열 마리가 훌쩍 넘는 숫자였다.
“6급부터는 이렇게 안 몰려다니는데. 얘들 대체 뭐야?”
우리는 괴수들을 향해 제각기 병기를 휘둘렀다. 이지혜가 [귀살]을 발동했고, 공필두가 [무장성채]를 전개했다. 거기에 유중혁의 [파천검도], 신유승과 이길영의 [다종 교감]까지 더해지니, 사실상 내가 할 일은 거의 없었다. 확실히 우리 일행이 강해지긴 한 모양이었다.
그아아아아!
순식간에 열 마리의 6급 괴수종을 정리했지만, 사태는 해결되지 않았다.
공필두가 외쳤다.
“또 몰려 온다!”
“모두 이쪽으로 오세요!”
어쨌든 피해를 줄여야 했기에, 나는 신규 화신들을 대피시키며 ‘신념의 칼날’로 [헤비 하운드]의 목을 땄다. 물론, 틈틈이 떨어지는 괴수종의 핵을 회수하는 것도 잊지는 않았다.
[성좌, ‘은밀한 모략가’가 당신의 추리력을 궁금해합니다.]
하지만, 뭔가가 찜찜했다.
이런 전개는 본래의 3회차에 나오지 않는다.
4회차에도, 5회차에도······ 심지어는 10회차에도 없다.
중요한 뭔가를 놓치고 있는 기분이었다.
생각해라. 김독자.
이런 시나리오는 언제 나왔던 거지?
[전용 특성의 효과로 기억력이 상승합니다.]
······설마?
[서울 돔의 화신 여러분들께 알립니다.]
기다렸다는 듯, 도깨비의 전체 메시지가 들려왔다.
비형은 아니고, 처음 듣는 목소리였다.
[갑자기 괴수들이 나타나서 깜짝 놀라셨죠? 우후······ 예상하셨겠지만 다음 시나리오가 시작됐습니다. 저희도 휴식 시간을 좀 드리고 싶었는데······ 아쉽게 됐네요. 이번 시나리오는 저희 도깨비들의 주관이 아니라, 자동으로 진행되는 시나리오거든요.]
[새로운 메인 시나리오가 도착하였습니다.]
[메인 시나리오 # 8 ― ‘최강의 희생양’이 시작됩니다.]
내가 아는 여덟 번째 시나리오와는 다른 이름이었다.
나는 바로 시나리오 내용을 열어 보았다.
+
<메인 시나리오 # 8 ― 최강의 희생양>
분류 : 메인
난이도 : S
클리어 조건 : 밀려드는 괴수들로부터 살아남으시오(해당 시나리오는 4시간 간격으로 괴수들의 등급이 상승하니 주의를 요합니다).
제한시간 : ―
보상 : ???
실패시 : 사망
* 추가 클리어 조건이 있습니다.
* 네 시간에 한 번씩 힌트가 제공됩니다.
+
[아, 참고로. 6급은 시작입니다. 4시간 후에는 5급이 몰려올 거고, 다시 4시간 후에는 4급이 몰려올 겁니다. 그리고 다시 4시간 후에는······ 후후, 뭐. 말 안해도 아시겠죠?]
그러자 화신들 중 누군가가 외쳤다.
“뭐야! 뭐 그딴 시나리오가 다 있어?”
“어? 제한 시간이 안 나와 있는데?”
[제한 시간? 하하. 그딴 건 없어요.]
나는 그 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뜬금없이 나타난 구원교주 니르바나에, 본래의 3회차보다 강해진 유중혁과 일행들······.
어렴풋이 짐작 가는 것이 있었다.
한 번인가, 멸살법에도 이런 전개가 분명 나온 적이 있었다.
[이게 다 여러분들이 너무 강해졌기 때문이에요. 세상에, 한국 화신들만 이렇게 밸런스가 안 맞게 강해지다니. 욕심도 좀 적당히 부리시지 그러셨어요? 이 시나리오는 특정 돔의 화신들이 지나치게 강해졌을 때 자동으로 부여되는 시나리오거든요.]
당황한 서울 돔의 화신들이 웅성거렸다.
[미리 말씀 드리지만, 이 시나리오의 해법은 둘뿐입니다.]
뒤이어 허공에 추가 조건이 떠올랐다.
+
추가 클리어 조건(택1) :
1. 서울 돔의 화신 절반이 사망할 것.
* 현재 화신 숫자 [107,624]명.
+
도깨비가 감탄한 듯 말했다.
[흠, 아직도 이렇게나 많이들 계셨어요? 마침 짝수니 잘 됐네요.]
“시발! 개소리 하지마!”
“그냥 다 뒈지라는 거냐? 애미 없는 도깨비 새끼들아!”
도깨비가 웃으며 덧붙였다.
[진정들 하세요. 두 번째 조건도 있으니까요.]
+
추가 클리어 조건(택1) :
2. 서울 돔에서 가장 강한 화신 ‘한 명’이 사망할 것.
+
이해했다.
······그래서 이 시나리오 이름이 ‘최강의 희생양’인 거겠지.
즉, 서울의 절반이 죽지 않아도 가장 강한 화신 한 명만 죽으면 이 시나리오는 끝난다.
화신들이 흥분했다.
“가장 강한 화신? 뭐야? 누구 말하는 거야?”
“그게 누군지 알려줘야 할 거 아냐!”
[하하, 그건 알려 드릴 수 없습니다. 그것까지 알려 드리면 재미가 없잖아요? 뭐, 가장 강하신 분이야 본인이 가장 잘 아시겠지만 말입니다.]
도깨비가 놀리듯이 말했다.
[그럼, 열심히들 찾아 보세요. 아니면 혹시 압니까? 그 최강의 화신이 정의의 사도라서, 여러분을 위해 목숨을 내놓으려 할지. 아, 이렇게만 해두면 좀 심심하니까, 힌트를 좀 드리긴 하겠습니다. 그럼, 여러분께 이야기의 가호가 있기를.]
+
<힌트 1>
현재 서울 돔에서 열 번째로 강한 화신은 ‘해상제독 이지혜’입니다.
+
“와, 뭐야. 말도 안 돼. 내가 겨우 10위라고?”
이지혜가 투덜거렸다.
하지만 일행들 중, 그 능청에 웃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왜냐하면 모두가 단 한 사람을 유심히 보느라 바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내가 지금 열심히 생각을 도청 중인 저 인간을 말이다.
「모든 게 너무 뒤틀렸다.」
「마침내, 내가 모르는 시나리오가 나오고 말았군.」
아, 제발. 유중혁······.
「도저히 바로잡을 방법이 생각나지 않는다. 아무래도 이번 생은, 회귀해야······.」
젠장, 네가 회귀하면 난 어떻게 되는데!
아무 것도 모르고 그냥 쓸려 죽는 존재가 되는 건, 절대 사절이다.
나는 이를 악물고 유중혁을 노려보았다.
불끈, 주먹을 움켜쥐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