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8화
138화
누구나 자신에게 영향을 끼친 몇 가지 말들이 있다.
이현성에게도 그런 것이 있었다.
가령 막 대학생이 되었던 시절, 이현성이 학부 수업에서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은 이런 것들이었다.
‘여러분, 창의적인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남들이 하지 않는 생각을 하세요!’
‘지금 이 자리에서 박차고 일어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때 이현성은 생각했다.
‘그러니까······ 그걸 어떻게 하라는 거지?’
어려서부터 정해진 시간에 학교를 가고, 밥을 먹고, 잠에 들며 살아온 이현성에게 사회의 요구는 너무나 갑작스러웠다.
지금까지는 정해진 대로 잘 움직이라고 하더니, 왜 이제와서 한 번도 해본 적 없던 일을 강요하는 거지?
창의력은 뭐고.
남들이 안 하는 생각이란 뭐란 말인가.
왜 갑자기 그런 걸 해야만 살아갈 수 있는 세계가 된 거지?
그럼 내가 지금까지 해왔던 건 뭔데?
대학 생활 내내 이현성은 방황했고, 자연히 군대에 가게 되었다.
‘내가 보니까 넌 천생 군대 체질이야. 간부사관 한번 지원해봐.’
만약 그때 행정관에게 그 말을 듣지 않았더라면, 지금 그의 삶은 어떻게 되었을까.
알 수 없는 일이다.
선택하지 않은 미래에 관해 그가 알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으니까.
어쨌든 그는 필연처럼 군인이 되었고, 그 선택에 지금껏 후회하지 않고 살아왔다.
사회가 어려웠고 사람이 어려웠던 그에게, 상대적으로 군대는 편했다.
간부사관에 합격해 돌아온 이현성을 축하하며, 행정관은 이렇게 말했다.
‘이 소위님. 잘 모르겠을 때는 무조건 매뉴얼 대로 하십시오. 그러면 최소한 사람들은 이 소위님께 책임을 묻지 않을 겁니다.’
건배사 대신 들었던 말이던가. 기억들은 마치 일주일 전 먹은 점심 메뉴처럼 희뿌옇다. 다만, 만약 지금 행정관을 다시 만날 수만 있다면 꼭 묻고 싶은 말이 하나 있다.
‘행정관, 그럼 이럴 땐 어떻게 해야 합니까?’
다가오는 지옥염화의 불길을 보며, 이현성은 입술을 깨물었다.
‘난 이런 경우의 매뉴얼은 가지고 있지 않단 말입니다.’
차라리 복무신조를 외칠 때가 편했다고 생각하며, 이현성은 목이 터져라 외쳤다.
“정희원 씨! 정신 차리십시오! 제발!”
그러나 복무신조가 병사들의 마음을 움직이지 못하듯, 그의 목소리도 정희원에겐 닿지 못했다.
화르르르륵!
간발의 차이로 건물 뒤로 숨자 지옥의 화염이 바닥을 뒤덮었고, 주변에 있던 화신들이 고통스럽게 불타올랐다.
“끄아아아악!”
“살려줘!”
하지만 이현성은 그들 중 누구도 살릴 수 없었다.
눈앞에서 일어나는 죽음들을 보며 이현성은 자기 안에 잠들어 있던 모든 ‘정의’가 그저 ‘매뉴얼’일 뿐임을 다시 한 번 깨달았다.
정희원의 모습이 열기에 아지랑이처럼 일렁이며 다가오고 있었다.
[성좌, ‘강철의 주인’이 당신을 가만히 바라봅니다.]
그 묵묵한 시선을 받으며, 이현성은 입술을 깨물었다.
‘독자 씨. 이럴 땐 대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싸워야 하나?
멈출 수 있을까?
다가오는 정희원을 보며 이현성은 꾹 쥔 주먹을 떨었다. 이 떨림의 의미가 무엇인지, 자꾸만 망설이고 있는 이 마음이 대체 어디에서 오는 것인지, 왜 자신은 이 장소를 벗어날 수 없는 것인지, 이현성은 아무것도 알 수가 없었다.
어쩌면 어려운 것은 세계가 아니다.
어려운 것은, 이현성 그 자신이었다.
‘독자 씨, 제발 해답을 알려주십시오!’
그럴 리 없다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이현성은 기적적인 기상악화로 훈련이 취소되길 바라는 예비군처럼 기도했다. 그런데 그때, 놀랍게도 애타게 기다리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현성 씨.
환청이라고 생각했다.
―제 말 들리십니까?
하지만 환청이 아니었다.
주변을 둘러 보았으나, 목소리가 들려오는 곳은 없었다.
즉, 목소리는 그의 머릿속에서 들려오는 것이었다.
“독자 씨!”
이것도 혹시 적의 함정인가?
하지만 적의 술수라 해도 믿고 싶은 심정이었다.
―일단 달아나면서 고민해보죠. 두 가지 방법이 있어요.
이현성은 본능적으로 벌떡 일어나서 달렸다.
함정이 아니다.
이런 식으로 서두를 여는 사람은, 오직 그 사람 뿐이니까.
뒤쪽에서 정희원이 쫓아오고 있었지만 이젠 두렵지 않았다.
호흡은 빠르게 안정되었고, 머릿속은 새로운 명령을 받아들일 준비를 마쳤다. 긴장한 근육이 거칠게 호흡하며 불끈거리기 시작했다.
―하나는 정희원 씨를 죽이는 겁니다.
“······익숙한 선택지군요.”
김독자는 늘 이런 식이었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그랬다.
언제나 가장 안전하고 잔인한 해결책을 먼저 내놓는다.
그리고 일행들 스스로, 그것을 거부하게 만든다.
“두 번째는, 역시 이대로 도망치는 겁니까?”
―······맞습니다.
“그럼 늘 그랬듯 세 번째 방법으로 하겠습니다.”
김독자의 해결책은 언제나 세 번째가 정답이다.
어떤 상황이든 세 번째를 생각해 내는 사람. 그게 김독자였으니까.
그래서 이현성은 이번에도 믿었다.
하지만.
―이현성 씨. 이번엔 세 번째가 없습니다.
*
물론 세 번째는 있었다.
다만, 때를 기다려야 한다.
[‘전지적 독자 시점 3단계’가 활성화 중입니다.]
[‘1인칭 조연 시점’이 현재 불완전한 상태입니다.]
하필이면 상대가 [지옥염화]를 쓰는 정희원이라니.
상대가 안 좋아도 너무 안 좋았다.
하긴, 누구라고 달랐겠냐만은.
“······왜 항상 그런 식인 겁니까!”
헉헉대는 숨소리와 함께, 이현성이 외치고 있었다.
화르르륵!
1인칭 시점으로 지옥염화의 열기가 고스란히 느껴졌다.
마치 서울 전체를 불바다로 만들 기세로, 정희원은 검을 휘둘러대고 있었다. 사실 엄밀히 따지면 내가 제시한 첫 번째와 두 번째 방법은 본질적으로 같은 결과를 가져올 것이다.
이현성이 정희원을 죽이든, 아니면 달아나든.
저대로 두면 정희원은 마력이 폭주해 사망할 것이다.
결국, 둘 중 하나는 죽게 되는 것이다.
그것이 빌어먹을 ‘니르바나’의 시나리오였다.
“정희원 씨를 죽이라고요? 지금 그런 조언이나 하려고 저한테 오신 겁니까?”
정희원이 다가오고 있었다.
아군일 때는 살짝 긴가민가 했는데, 적이 되니 확실히 알겠다.
멸악의 심판자, 정희원은 강하다.
[심판의 시간]을 사용하지 않더라도, 그녀는 [귀살]의 소유자다.
거기다 우리엘의 성흔인 [지옥염화]를 무자비하게 뿌려대는 실력.
그녀는 내가 가진 파티 멤버 중 명실공히 최강의 전력이었다.
저렇듯 폭주해버린 정희원을 죽이지 않고 제압하는 것은, 지금의 유중혁이라도 불가능에 가깝다.
“그런 방법, 저는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대체 무슨 용기였을까.
이현성이 정희원을 향해 다가가기 시작했다.
―잠깐만요, 이현성 씨!
“정희원 씨! 정신 차리십시오!”
이현성은 정희원을 향해 달려갔다. 마치 내게 분노하듯이, 나라는 ‘매뉴얼’을 믿었던 자기 자신에게 분노하듯이, 그렇게 달려갔다.
꽈아아아앙!
이현성의 [태산 밀기]와 정희원의 [지옥염화]가 충돌했다.
하지만 태산조차 밀어내는 그의 손바닥도, 대천사의 불길을 뚫기엔 무리였다. 곧, 그의 오른팔이 새하얀 빛을 뿌리며 뚝뚝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정희원 씨!”
이현성의 외침은 고통스러웠고, 처절했다. 이현성은 잃어버린 오른팔을 내버려두고, 다시 왼팔을 뻗었다. 나는 다급히 외쳤다.
―이현성 씨, 도망치면 둘 중 하나는 살 수 있습니다.
“싫습니다.”
―도망친다고 해서, 누구도 당신에게 책임을 묻지 않을 겁니다.
“싫습니다!”
―저를 매뉴얼처럼 생각하신 거 아닙니까? 그럼 제 말을 들으십시오!
“그런 매뉴얼을 기대한 게 아닙니다!”
이현성의 대답은 뜻밖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더없이 이현성 다운 대답이기도 했다.
사람은 누구나 모순되어 있다.
매뉴얼을 잘 따르는 사람은 사실 누구보다도 매뉴얼을 증오한다. 창의적인 사람이 사실 누구보다도 체제에 종속되고 싶어 하듯.
그리고 그 모순을 돌파할 때, 「설화」는 시작된다.
콰아아아아!
“그렇게 포기할 수는 없습니다! 결과가 안 좋다고 해도. 설령, 여기서 제가 죽는다고 해도!”
아무리 튼튼한 이현성이라고 해도, 신유승조차 녹여버린 [지옥염화]에 저항하는 것은 무리였다. 곧 왼팔이 녹아내렸고, 오른 다리마저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이현성은 저항했다.
마치 불빛 속으로 뛰어드는 부나방처럼, 어떻게든 정희원에게 닿고자 했다.
오른쪽 무릎 아래가 사라지며 비틀거리는 그를 향해, 내가 말했다.
―그렇군요. 잘 하셨습니다.
이현성은 대답이 없었다.
나는 씁쓸하게 웃으며 말했다.
―왜냐하면, 그게 바로 ‘세 번째 방법’이니까요.
세 번째 방법은, 내가 알려준다고 사용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그것은, 이현성 스스로가 결심해야 했다.
될지 안 될지, 사실 나조차도 확신이 없었다.
그럼에도 이 길을 선택한 것은, 정희원을 보는 순간 이현성의 마음 속에서 일어나는 희미하고 안타까운 감정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매뉴얼 없이, 당신 스스로 찾아낸 방법입니다.
불길 속에서 무너지며, 이현성이 웃었다.
“독자 씨,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그 순간 이현성의 몸 속에서 일어나는 환희를, 나는 이현성과 함께 느낄 수 있었다.
스스로 모순을 뚫고, 죽음에 맞선 대답을 내놓은 인간만이 도달할 수 있는 감정.
아마도 이 감각이, 니르바나가 그토록 도달하고 싶은 실존(實存)일 것이다. 니르바나가 보았다면 기가 막힐 일이었다. 그가 감염시킨 것은 정희원이었지만, 누구보다 현재를 살고 있는 것은 바로 이현성이었으니까.
―감사는 됐습니다. 지금부터가 시작이니까요.
이것으로 설화의 시작은 충족되었다.
하지만 이 이야기의 지속을 결정하는 것은 관람객의 몫이다.
누구보다 섬세한 시선으로 이현성을 읽고 있었던, 단 하나의 존재.
―강철의 주인. 지고한 <스타 스트림>에서 가장 굳건한 존재여.
나는 천천히 말을 이었다.
―이제 응답할 때도 되지 않았습니까?
[성좌, ‘강철의 주인’이 당신의 말을 듣습니다.]
성좌 ‘강철의 주인’.
우주에서 가장 단단한 혹성인 오리하르콘의 지배자이자, 강철검제 이현성의 배후성.
나는 곧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당신의 화신에게 기회를 주시죠.
[성좌, ‘강철의 주인’이 침음합니다.]
―당신의 두려움은 알고 있습니다. 섣불리 개연성을 감당하는 게 두렵겠죠.
[성좌, ‘강철의 주인’이 눈을 감습니다.]
―하지만 언제까지 주변 성운들의 눈치만 볼 겁니까? 이대로 시나리오의 종말이 올 때까지 넋 놓고 있을 겁니까?
이현성은 할 만큼 했다.
그러니, 이제 선택은 그의 배후성에게 있었다.
[성좌, ‘강철의 주인’이 화신 ‘이현성’의 용기를 인정합니다.]
[성좌, ‘강철의 주인’이 그럼에도 아직 때가 아님을 말합니다.]
예상은 했다.
실제로, 아직 이현성은 각성의 때를 맞이하기엔 약하니까.
[성좌, ‘강철의 주인’은 화신 ‘이현성’이 자신의 설화를 감당할 수 없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강철의 설화는 단단하고 무겁다.
그 말대로 이현성은 견디지 못할 것이다.
혼자였다면 말이다.
―제가 함께 감당하겠습니다.
[성좌, ‘강철의 주인’이 당신을 바라봅니다.]
강철의 주인은 뭔가를 생각하는 듯 말이 없었다.
그리고 잠시 후, 메시지가 들려왔다.
[성좌, ‘강철의 주인’이 고개를 끄덕입니다.]
그리고 주변에서 짜릿한 스파크가 튀기 시작했다.
[등장인물 ‘이현성’이 특성 진화를 준비합니다.]
[해당 특성으로 진화하기 위해서는 ‘설화’가 필요합니다.]
[성좌 ‘강철의 주인’이 설화의 시련을 내립니다.]
[설화, ‘강철의 증명’이 시작됩니다!]
이현성의 몸에서 은빛의 격류가 솟아나고 있었다. 그 휘황한 광채를 보며, 나는 언젠가 내가 보았던 ‘멸살법’의 한 장면을 떠올렸다.
누구였더라.
등장인물 중 하나가 유중혁에게 그런 질문을 한 적이 있다.
「“이현성 아저씨는 왜 강철검제라고 불리는 거예요? 그 아저씨는 검을 안 쓰잖아요?”」
‘멸살법’의 원작에서도 이현성은 단 한 번도 검을 사용한 적이 없다.
그럼에도 이현성의 별명은 강철검제였다.
「“이현성은 검이 필요 없어.”」
까드드드득!
이현성의 녹아내린 팔과 다리에서 새하얀 강철이 자라나기 시작했다.
이어서 비늘이 덮이듯, 자라난 강철은 그의 몸 전체를 덮어갔다.
이현성의 몸은 하나의 거검(巨劍)처럼 변해가고 있었다.
[등장인물 ‘이현성’이 성흔 ‘강철화(鋼鐵化)’를 발동합니다!]
그 어떤 시련과 부딪쳐도 꺾이지 않을 단 하나의 검.
유중혁이 이곳에 있었다면, 분명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그 녀석이, 곧 검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