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7화
137화
[제4의 벽]의 반탄력에 정신 공격이 튕겨 나가고, 뒤이어 날아든 백청강기에 크고 작은 상흔을 입은 니르바나는 몹시 놀란 표정이었다.
“······대체 무슨 수를 쓴 거지?”
“딱히 무슨 수를 쓴 건 아냐. 이야기의 힘인 거지.”
“뭐?”
딱히 구원교의 교리를 믿는 것은 아니지만, 나 역시 동의하는 게 하나 있긴 하다.
“당신이 말했잖아. ‘강함과 약함은 이야기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라고.”
아무리 체력이 높은 전사라 해도 마법 방어 스킬이 없다면 마법사의 밥일 뿐이듯, 결국 강함과 약함이란 그 인물들이 살아온 역사에 의해 결정된다.
“이번 생에 근접 스킬 안 올린 네 잘못이야. 유중혁의 약점만 노리니까 이렇게 되지.”
일이 이런 식으로 풀릴 거라곤 나도 생각 못했다.
뭔가가 니르바나의 성장 경로에 영향을 주었고, 덕분에 니르바나는 유중혁의 카운터가 되었다. 하지만 니르바나가 유중혁의 카운터가 된 까닭에, 녀석은 절대로 나에게 이기지 못하는 상황이 된 것이다.
내 말투에서 뭔가를 읽어낸 니르바나의 눈빛이 흔들렸다.
그는 나를 가만히 노려보더니 말했다.
“네 이름을 알고 있다. 김독자.”
“일단 통성명인가? 좋아, 니르바나 뫼비우스. 이야기할 마음이 생긴 모양이지?”
허공의 만다라에서 빛이 꺼졌다.
환생자가 괜히 환생자가 아니다.
마치 다른 자아의 스위치가 켜지듯, 흥분했던 니르바나는 사라지고 어느새 평정심을 되찾은 니르바나가 눈앞에 있었다.
“몇몇 성운들이 내게 경고했었지. 너를 조심하라고. 물론 정말로 나타날 줄은 몰랐지만.”
몇몇 ‘성운’이라······.
확실히 내가 주목을 끌기는 한 모양이다.
“어떻게 그렇게 강력한 정신 방벽을 얻었지? 지금껏 내 사상에 감염되지 않은 것은 여태껏 안나 크로프트 뿐이었는데.”
익숙한 이름에 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 여자가 벌써 환생자까지 건드렸군.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확실히 안나 크로프트라면 벌써 통신체로 세계의 강자들에게 예정된 접선을 시작했을 테니까.
세계를 구하기 위해서 라면 그 여자는 악마에게 영혼이라도 팔 것이다.
내 표정에서 뭔가를 읽었는지, 니르바나가 말했다.
“너······ 예언자를 알고 있군. 대체 뭐 하는 놈이냐? 설마 회귀자인가? 아니면······.”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이야기에 흥미를 갖습니다.]
[성좌, ‘은밀한 모략가’가 조용히 상황을 관조합니다.]
슬슬 정보 필터링도 조금씩 해금이 시작되었을 것이다.
회귀자라든가, 환생자에 관한 정보들도 성좌들의 귀에 들어가기 시작할 거고. 대성운에 소속된 눈치 빠른 윗놈들이야 벌써 알고 있겠지만.
나를 바라보던 니르바나가 말을 이었다.
“재미있는 중생이구나. 수백년이 넘는 삶을 살아온 나를 궁금하게 만들다니······.”
“넌 말이 너무 많아. 그러니 앞으로도 유중혁을 얻긴 힘들거야.”
“크하핫! 너를 구원교도로 받아주마.”
[고행 속에 불경을 읊는 한 성좌가 당신에게 궁금증을 표합니다.]
아까라면 흔쾌히 받아들였을 제안이다. 하지만.
“사양하지. 날 후원하는 녀석들 중에 네 배후성을 끔찍이 싫어하는 존재가 있거든.”
[성좌, ‘긴고아의 죄수’가 ‘니르바나 뫼비우스’의 배후성에게 적의를 드러냅니다.]
니르바나의 입이 살짝 벌어졌다.
“원숭이 왕? 왜 그가 너를 쫓아다니는 거지?”
“거야 나도 모르지.”
“······네가 더욱 궁금해졌다. 내 밑으로 들어와라. 유중혁과 함께.”
“싫다니까.”
“이 세계의 비밀이 궁금하지 않으냐? 나는 이 세계의 종말 이후에도 네가 살아남을 수 있도록 도와줄 수 있다. 시나리오의 실패와는 아무 상관도 없이 말이다.”
솔깃한 말이었다.
내가 ‘독자’가 아니었다면 진즉에 승낙했을지도 모르겠다.
“너도 나와 ‘하나’가 되는 것을 허락하마!”
니르바나의 등 뒤에서, 다시 만다라가 환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천천히 회전하는 거대한 만다라 위에, 수백 명의 얼굴들이 돋아 있었다. 고통스러운 원혼의 얼굴들이 비명을 질러댄다. 모두 니르바나와 ‘하나’가 된 인간들이었다.
“닥치고 덤벼 변태 새끼야.”
“응하지 않는다면, 강제로 가질 수밖에 없겠군.”
불리한 상황에도 니르바나의 표정에는 여전히 여유가 넘쳤다.
어쨌든 상대는 ‘환생자’. 무수한 삶을 살아온 만큼 그는 나보다 훨씬 뛰어난 전투 센스를 가지고 있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내 움직임은 녀석에게 읽히기 시작할 것이고, 내겐 불리한 싸움이 시작되겠지.
그렇다면, 그 전에 싸움을 끝내는 것이 답이다.
슈우우우!
백색의 강기가 휘감긴 만다라가 내 품을 파고들었다.
나는 망설이지 않고, 그 만다라의 일격을 향해 몸을 날렸다.
[전용 스킬, ‘소형화 Lv.1’을 발동합니다!]
[소형화의 효과로 당신의 육체가 줄어듭니다.]
내 몸이 급속도로 작아지며, 일격은 무위로 돌아갔다.
니르바나가 웃었다.
“······이런 잔재주까지?”
과연 잔재주일까?
[소형화의 효과로 당신의 모든 장비가 크기에 알맞게 변형됩니다.]
[스킬 레벨이 낮아 지속 시간이 짧아집니다.]
[소형화의 지속 가능 시간은 2분입니다.]
내가 그 좋은 스킬들을 내버려두고 굳이 [소형화]를 택한 이유.
그것은, 오직 [소형화]만이 나를 내가 아는 가장 강력한 존재로 만들어 줄 수 있기 때문이었다.
“5번 책갈피, ‘키리오스 로드그라임’을 선택하겠다.”
[당신의 육체 구성이 해당 등장인물과 흡사함을 확인하였습니다.]
[해당 등장인물의 수준이 너무 높아 스킬 수준을 온전히 재현할 수 없습니다.]
[활성화되는 스킬의 레벨이 강제로 조정됩니다.]
용솟음치는 백청의 기운이 심장에 깃들었다. 하늘을 부수고 천둥을 내리치는 힘. 막강한 뇌전의 기운에 창백해져가는 니르바나의 얼굴이 보인다.
“아직도 잔재주로 보이냐?”
니르바나가 아무리 강하다고 해도, 지금 시점에서 키리오스의 힘을 넘는 것은 불가능하다.
[전용 스킬, ‘전인화(電人化) Lv.10’가 활성화되었습니다.]
츠츠츠츠츳!
전신에 튀는 강렬한 뇌전과 함께, 주먹으로 번개의 구름이 모이기 시작했다.
환생자를 이용할 수 없다면, 차라리 여기서 없애는 편이 낫다.
나는 니르바나를 향해 주먹을 힘껏 내뻗었다.
“또 인간으로 태어나길 기도하라고.”
츠츠츠츠츳― 콰아아아앙!
걸음마다 일대를 기화시켜버리는 뇌운이 니르바나의 옆구리에 작렬했다.
니르바나가 끔찍한 비명을 질렀고, 화신들의 고함소리가 들렸다. 소형화의 레벨이 낮아 오로치를 상대할 때만큼의 위력은 나오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스킬이 스킬인 만큼 엄청난 공격력이었다.
폭음 속에서 먼지구름이 걷혔을 때, 니르바나는 옆구리에 커다란 구멍이 뚫린 채 저만치 나가 떨어져 있었다.
····살아있다고? 그걸 맞고?
“쿠에에에에엑!”
녀석의 입에서 핏덩이가 왈칵 쏟아졌다. 심각한 타격을 입은 것 같기는 했지만, 만족스럽지는 않았다. 이상한 일이었다. 아무리 환생자라도 그 공격을 맞고 살아날 수는 없을 텐데.
녀석의 신체 위로 잘근잘근 자라나는 연꽃잎이 보였다. 순간 어떻게 된 일인지 알 것 같았다. 저 성흔은 개연성 때문에 못 쓸텐데?
이 자식, 설마?
“고작 이런 곳에서 내 기억을······.”
까드득, 갈리는 목소리.
연꽃잎 위로 희미하게 튀는 스파크를 보자, 놈이 어떻게 살아났는지 알 것 같았다.
[설화 지불].
그 짧은 찰나, 녀석은 자신이 쌓은 설화를 대가로 배후성에게 힘을 빌린 것이다.
“······나중에 다시 만나자.”
녀석의 몸은 커다란 연꽃잎 속에 덮여가고 있었다. 나는 녀석을 향해 몸을 날렸다.
츠츠츠츳― 꽈드득!
내지른 주먹이 놈의 심장을 꿰뚫었지만, 니르바나는 웃고 있었다.
마치 불가의 호세사왕(護世四王)처럼 일그러진 얼굴로.
“너는 ‘현재’를 거스른 대가를 받게 될 것이다. 가장 끔찍한 방식으로.”
내가 터뜨린 놈의 심장을 중심으로, 신체가 무화(無化)되더니 이내 연꽃잎으로 화하기 시작했다.
나는 전인화에 감싸인 손을 뻗어 사라지려는 녀석의 왼팔을 붙들었다.
“기다려!”
꽈지지지지직!
다음 순간, 니르바나는 찢어진 왼팔과 흩날리는 연꽃잎만을 남긴 채 사라졌다.
[등장인물, ‘니르바나 뫼비우스’가 성흔 ‘무소유 Lv.7’를 사용하였습니다.]
무소유.
자신의 기억 일부를 버리고 위험에서 탈출하는 성흔.
놈은 자신의 환생 기억을 대가로 지불하여 내게서 벗어난 것이었다.
“교, 교주님!”
“교주님! 어디 가셨습니까!”
당황한 구원교도들이 무너지고 있었다. 이미 달아나고 있는 자들도 있었다. 자신이 믿던 존재가 눈앞에서 패퇴하는 걸 봤으니, 정신 충격이 이만저만이 아니겠지.
구원교도들이 물러가는 것을 보며 나는 가까스로 한숨을 놓았다.
몸에서 연기가 나며 [소형화]와 [책갈피]가 동시에 해제되었다.
혹사당한 근육이 너덜거리며 통증을 호소해왔다.
니르바나를 죽이지는 못했지만, 몇 가지 수확은 있었다.
[성좌, ‘긴고아의 죄수’가 당신의 승리에 기쁨을 감추지 못합니다.]
[10000코인을 후원받았습니다.]
내 승리를 본 신규 화신들도 믿을 수 없다는 듯 서로를 돌아보고 있었다.
“구원교주가 졌어!”
“저 화신 대체 누구야?”
“잠깐만, 저 얼굴, 저거······!”
누군가가 나를 가리키며 외쳤다.
“가장 못생긴 왕!”
나는 그들을 무시하고 유중혁을 찾았다.
멀리서 마비에서 풀려난 유중혁이 비틀대는 것이 보였다.
개복치 자식, 하여간 중요할 땐 도움이 안 된다니까.
“야, 괜찮냐?”
유중혁은 머리가 아픈 듯 이마를 짚은 채 물었다.
“환생자는?”
“달아났다.”
“······한심하군. 놓친 건가?”
“도와는 주고 그딴 소리 하든가.”
유중혁의 표정은 심각했다.
“빨리 놈을 쫓아야 한다. 놈의 목적은 시나리오를 클리어하는 게 아냐.”
“나도 알아 인마.”
“아는 놈이 그걸 내버려 둔 거냐? 열 번째 시나리오가 끝나기 전에 환생자를 잡지 못하면 서울은······.”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뒤늦게 정신을 차립니다.]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자신이 이곳에 온 이유를 설명하고 싶어합니다.]
우리엘의 말에, 유중혁과 나는 동시에 허공을 올려다보았다.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당신들의 도움을 필요로 합니다!]
간접 메시지의 한계 때문에 정확한 정황 파악은 무리였지만,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를 추측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우리엘은 정희원의 배후성이었다. 그런데 정희원에게 있어야 할 우리엘이 이곳에 왔고, 정희원과의 연락은 끊어진 상황.
그렇다는 건······.
“민지원 씨. 정희원 씨 혹시 어디에 있는지 아십니까?”
하지만 민지원은 아직 정신을 못 차리는 상태였다.
이쪽은 안 되겠군.
“유중혁, 날 지켜라.”
“뭐?”
나는 곧바로 눈을 감은 채 의식을 집중했다.
이제 잠드는 연습도 반복하다 보니 꽤 익숙해진다.
서서히 몸이 바닥으로 가라앉는 느낌과 함께 사방으로 어둠이 몰려왔다.
얕은 잠에 빠져든 느낌이 드는 순간, 나는 곧바로 [전지적 독자 시점]을 사용했다.
목소리를 찾아야 한다.
나를 찾는 목소리를.
그러나 들려오는 목소리는 없었다.
점점 불안해진다.
떨어지면 제일 먼저 나부터 생각하라고 말해뒀는데······ 역시 문제가 생긴 건가?
‘독자 씨.’
처음으로 누군가가 나를 불렀다.
시야가 일그러지며 [3인칭 관찰자 시점]이 발동했다. 나는 다음 순간 보이는 화면에 기겁하며 신음을 흘렸다.
「화르르르르륵!」
화면 전체를 넘실거리는 새하얀 불길.
모든 것을 녹여버리는 심판의 성흔이 세계를 불태우고 있었다.
물어 볼 필요도 없었다.
이건 틀림없이 정희원의 [지옥염화]다.
다행이다. 정희원은 아직 살아 있구나.
그런데······ 이상하다.
이건 정희원의 시야가 아닌데?
잠시 후, 불꽃 속에서 나타난 정희원의 이마에서 연꽃 문양이 빛나는 것이 보였다.
······망할, 벌써 니르바나에게 당했군.
하긴, 저 유중혁도 당했는데 정희원이 멀쩡하다면 그것도 이상한 일이겠지. 하지만 의문은 남아 있었다.
그럼 나를 부른 건 대체 누구지?
「“정희원 씨?”」
순박한 군인의 목소리. 이현성이었다.
「쿠구구구구!」
폭음과 함께 화면이 터져 나갈 듯한 진동이 울렸다. 주변의 화신들이 육편으로 터져 나갔고, 지옥의 불길이 닿은 주변이 모조리 타올랐다.
위치를 보니 내가 당장 도울 수 없는 지역이었다.
이대로라면 어떤 결과가 닥쳐올지 뻔했다.
[사상 감염]에 맛이 간 정희원은 망설이지 않을 것이고, 순진한 이현성은 그녀의 칼날 앞에 속수무책으로 노출되어 있었다.
젠장, 어떻게 해야 하지?
“커헉!”
갑자기 어둠이 개며, 화면이 모조리 깨져 나갔다.
강한 구토감과 함께 눈을 뜨자 험악하게 인상을 찌푸린 유중혁의 모습이 보였다.
“갑자기 그렇게 잠들면 어쩌자는 거냐?”
입에서 침이 질질 흐르며 명치가 엄청나게 아파왔다.
이 자식, 지금 나를 때려서 깨운 건가?
······잠깐만, 때려?
어떤 깨달음이 머릿속을 스쳤다.
그래, 그렇구나.
정말 싫지만, 둘을 구하려면 역시 그 수 밖에 없다.
나는 유중혁을 향해 채근했다.
“야, 한 대 더 쳐봐. 엄청 세게.”
“······뭐?”
오해의 소지가 있는 발언이었나.
그러면 역시 확실하게 말해줘야겠지.
“아니, 당장 나를 죽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