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6화
136화
나는 잠시 내 귀를 의심했다.
유중혁 이 자식이······ 지금 뭐라고 했지?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뒤늦게 나타나 주변을 두리번거립니다.]
[성좌, ‘은밀한 모략가’가 낄낄 웃으며 종전의 상황을 들려줍니다.]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경악합니다.]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한 번만 더 같은 대사를 읊어주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니르바나가 믿을 수 없다는 듯 다시 한번 물었다.
“지금 뭐라고······.”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이 삼각관계를 좋아합니다.]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2000코인을 후원하였습니다.]
삼각관계는 빌어처먹을.
하얗게 질려가는 니르바나의 얼굴을 보며, 나는 뭔가가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한창 작전 잘 짜고 있었는데, 제기랄.
“야, 뭔 개소리야. 우리 동료 아니잖아?”
뒤늦게 잡아뗐더니, 유중혁이 무표정한 얼굴로 대답했다.
“딱히 네놈을 두고 한 말은 아니······.”
그러나 유중혁 의도가 무엇이었든 간에, 사태는 이미 악화되는 중이었다.
입술을 바들바들 떨던 니르바나가 떨리는 목소리로 격정을 토했다.
“어째서 내가 아니라······.”
고오오오오!
무시무시한 살기가 니르바나의 전신에서 방출되더니, 그의 뒤에 거대한 만다라가 떠올랐다.
나는 반사적으로 몇 걸음을 물러섰다.
유중혁 근처에 있는 인물들은 왜 죄다 ‘동료’로 인정받지 못해서 안달인 건지······.
나라면 이깟 놈 한 트럭을 줘도 사양인데.
“어째서, 내가 아니라 다른 이와 하나가 된 것이냐!”
니르바나의 만다라에서 눈부신 빛이 터져 나옸다.
나는 황급히 유중혁을 향해 속삭였다.
“야, 그냥 너도 쟤 좋다고 해. 빨리.”
“싫다.”
“아 왜. 야, 그냥 눈 딱 감고 한 번만······.”
내 귓속말에 니르바나가 분노를 토했다.
“내 앞에서 속삭이지 마라!”
그러자 유중혁도 큰 목소리로 말했다.
“난 남자한테는 관심 없다!”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피를 토하며 울부짖습니다.]
[2000코인을 후원받았습니다.]
니르바나 또한 피를 토할 것 같은 표정이었다.
“나는 남자가 아니다!”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당황합니다.]
“물론 여자도 아니지만!”
쿠구구구구!
이건 뭐 완전히 개판이군.
니르바나의 격정에 맞춰서 점차 강해지는 마력의 파형을 보며 내가 짜증을 냈다.
“뭔 뻘짓이야? 너 좋다잖아! 나중에 어떻게든 써먹을 수······.”
“저놈은 위험하다.”
제기랄, 망할 자존심은.
예상컨대 지금 니르바나의 전투력은 최소 유중혁과 호각.
거기에 구원교도들까지 모조리 덤빈다면 승산은 장담할 수가 없다.
“잠깐만요!”
결국 내가 앞으로 나서며 입을 열었다.
환생자는 앞으로 벌어질 상황에서 유용하게 쓸 수 있는 카드. 괜히 여기서부터 대적할 필요는 없다.
“뭔가 오해가 있으신 모양인데, 저랑 말씀하시죠.”
[등장인물 ‘니르바나 뫼비우스’가 이성을 잃은 상태입니다.]
“저희는 구원교와 적대할 생각이 없습니다. 얘가 표현에 서툰 녀석이라······.”
나는 일부러 유중혁의 어깨까지 두들겨 가며 쇼를 했다.
“사실 저희도 교주님 밑으로 들어갈까 생각하던 참이었습니다. 미래는 버리고 현재부터 살아라! 얼마나 좋은 말입니까? 중혁아, 너도 그렇게 생각하지?”
물론 저딴 교리엔 쥐뿔도 동감하지 않는다.
<스타 스트림>의 세계에서 미래를 버리고 현재를 즐기면, 그냥 현재에서 뒈지게 된다. 그리고 나는 조금 덜 행복하더라도 더 오래 살고 싶다. 그래서 내가 자본주의의 노예였는지도 모르겠군.
“······정말인가? 대답해라, 유중혁!”
내 연기가 먹혔는지, 니르바나의 기세가 조금씩 줄어들기 시작했다.
하지만 유중혁이 도와주지 않았다.
“헛소리다.”
“아니, 잠깐만요!”
내가 외쳤지만, 때는 이미 늦었다.
니르바나가 까드득 이를 갈았다.
“역시 그랬군. 사이좋게 지옥으로 떨어져라!”
니르바나가 출수함과 동시에, 나는 [책갈피]를 발동했다.
[현재 책갈피 스킬이 업데이트 중입니다.]
[낡은 책갈피를 새로운 책갈피로 교체합니다.]
[책갈피 교체 완료까지 5분 남았습니다.]
뭐? 하필 지금?
그사이 니르바나는 이미 내 코앞까지 가속해 와 있었다.
마치 [바람의 길]이라도 사용한 것처럼 쾌속한 움직임이었다.
슈우우우우!
······아니, 진짜 [바람의 길]이잖아?
뒤늦게 녀석의 전생 중에 클로노스의 이뮨타르 종족이 있었다는 게 떠올랐다.
유중혁이 내 앞으로 끼어들었다.
콰르르릉!
니르바나의 주먹에 맺힌 만다라와 유중혁의 [진천패도]가 부딪치며 건물이 무너지는 듯한 폭음이 터졌다. 니르바나가 말했다.
“아주 애틋한 우정이군. 동료를 먼저 생각하신다 이거지?”
“김독자, 물러서라! 이 녀석은······!”
“안 됐지만.”
그런데 니르바나의 말이 더 빨랐다.
아니, 말뿐만 아니라 행동도 더 빨랐다.
“네 동료는 죽을 것이다.”
니르바나가 뭐라 주문을 외우는 순간, 칼날을 맞댄 유중혁의 몸이 석상처럼 굳어버렸다.
[등장인물 ‘니르바나 뫼비우스’가 성흔 ‘영겁의 악몽 Lv.8’을 사용하였습니다.]
나도 그 기술을 알고 있었다.
그것은 유중혁에게 가장 치명적인 기술이었다.
파츳, 파츠츠츳.
굳어진 유중혁의 몸에서 스파크가 튀었다. 고장난 깡통 로봇처럼, 유중혁의 목이 삐그덕대며 내 쪽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나를 보고 있었지만, 나를 보는 눈빛이 아니었다.
도······망······쳐라.
지금 유중혁은 앞으로 자기 자신이 만든 가장 끔찍한 트라우마의 감옥에 갇혀 있을 것이다.
오직 하나의 악몽만이 반복해서 재생되는, 끔찍한 기억의 감옥.
언젠가 만났던 ‘극장 던전’의 보스 시뮬라시옹이 썼던 기술보다도 상위의 정신계 스킬이었다.
“이리 오려무나, 건방진 중생아.”
유중혁의 허점을 파고들 정도의 실력에 최고 수준의 정신계 스킬까지.
믿어지지 않는 솜씨였다.
아무리 환생자라도 개연성의 영향은 받는다.
이 시점에 이만한 전투력을 가지는 것은 불가능할 텐데.
나는 니르바나의 호리호리한 근육을 노려보았다.
“내 친히 너를 성불시켜 줄 터이니.”
설마, 근접계를 버리고 정신계와 가속계에 모든 걸 투자한 건가?
만약 그렇다면 이해가 간다.
지금의 니르바나는 정신력이 개복치인 유중혁에 대한 카운터 스킬만 올린 셈.
그러니 다른 존재는 몰라도 유중혁에게는 질 수가 없었다.
하지만 어떻게 그렇게 맞춰서 딱 스킬을 올릴 수 있었을까?
다른 누군가가 정보라도 주지 않은 한······.
“달아나요!”
다가오는 니르바나를 막아선 것은 민지원과 화랑들이었다.
유중혁을 제압할 정도의 실력자 앞에서도 그녀는 물러서지 않았다.
“빨리요! 당신마저 당하면 서울에 희망이 없어요!”
“미희왕.”
그런 민지원을 보며, 니르바나가 흡족하게 웃었다.
“지난번에는 잘도 달아나더니, 이제 드디어 내 사상에 감화된 모양이구나!”
이미 둘은 마주친 적이 있는 모양이었다.
“죽을 걸 알면서도 덤벼들 수 있다는 건 드디어 뭔갈 깨달았다는 얘기겠지? 역시 인간은 현재를 살아야 해. 현재만이 인간의 전부거든.”
“빨리 가요! 당신 혼자로는 무리에요! 유상아 씨도, 정희원 씨도, 전부······!”
미희왕의 말이 이어지기도 전에 니르바나가 움직였다. 십여 명의 화랑들이 니르바나를 향해 덤벼들었지만, 애초에 상대가 안 되는 싸움이었다.
니르바나는 가볍게 손을 움직여 달려드는 화랑들의 이마에 가져다 대었고, 닿는 족족 화랑들은 그 자리에 쓰러져버렸다. 놈의 [사상 감염]이 발동한 것이다.
“으, 으어, 으아아아!”
쓰러진 화랑들이 자신의 몸을 쥐어뜯으며 고통스러워하기 시작했다.
“인세는 지옥이다!”
통렬한 외침과 함께, 뒤쪽에서 구원교도들이 몰려왔다.
“현재를 위해 죽어라!”
“우리가 살아갈 곳은 오늘뿐!”
격언을 협박처럼 읊는 교도들이 나와 화랑들을 향해 덤벼들었다.
내가 구원교도들을 향해 살수를 전개하는 사이, 니르바나는 어느새 미희왕의 이마를 짚고 있었다.
“걱정마라 미희왕. 난 예쁜 생물을 좋아해.”
“으, 으으으······.”
“그러니 너를 죽이지는 않겠다.”
[등장인물 ‘니르바나 뫼비우스’가 ‘사상 감염 Lv.9’을 발동합니다!]
백색의 아우라가 니르바나로부터 뻗어 나와 미희왕을 옭아매기 시작했다. 마치 촉수라도 되는 듯, 그녀의 몸을 꿰뚫는 아우라의 줄기들.
“너의 ‘현재’를 받아들여라.”
“싫어! 싫어······!”
그 줄기를 통해, 미희왕의 숨겨진 욕망들이 뭉게뭉게 흘러 나오고 있었다.
니르바나가 그런 그녀의 욕망을 비웃었다.
“동료들이 죽어 나가는 이 와중에 고급 스파에 가고 싶다고? 얼빠진 여자로군.”
“아, 아냐. 나는······.”
“네년은 그냥 화려한 인생을 즐기고 싶은 거야. 넌 아직 배우였던 시절을 못 잊었어. 그래서 왕이 된 거지.”
니르바나는 뭐가 그리 즐거운지 대소하고 있었다.
“네 욕망을 받아들여라. 동료들이 죽어가는 이 와중에도 그런 한심한 생각이나 하고 있는 너를 인정해! 그게 너라는 인간이다. 그 욕망을 부정하면, 너는 아무것도 아니게 되는 거야!”
미희왕의 눈빛이 점차 탁하게 물들어 갔다. 폭력적으로 자신의 욕망을 납득시켜, 오로지 사람의 시간을 ‘현재’에만 안착시키는 스킬.
저것이 바로 ‘구원교도’가 되는 과정인 것이다.
빌어먹을, 책갈피는 아직······.
[‘책갈피’의 업데이트가 완료되었습니다!]
됐다!
[업데이트로 인해 책갈피의 사용 효율이 20% 상승합니다.]
나는 [책갈피]를 가동했다.
[전용 스킬, ‘바람의 길 Lv.9’이 활성화됩니다!]
쏜살같이 바람을 밟아 허공을 날았다. 책갈피 효율이 올라가서 그런지, [바람의 길]의 레벨까지 상승했다.
좋아, 이거라면 승산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당황한 니르바나를 향해, 나는 그대로 ‘신념의 칼날’을 전개했다.
스가가각!
니르바나는 아슬아슬하게 내 칼날을 피했지만, 앞섶이 크게 베인 채 나가 떨어졌다. 나는 민지원을 부축했다.
“괜찮아요?”
“아, 아······.”
저만치 물러났던 니르바나가 다시 방향을 선회하며 내쪽으로 날아왔다.
그의 손아귀에 만다라의 형형한 빛살이 차오르는 게 보였다.
나는 ‘신념의 칼날’을 휘둘렀다.
까가가가가각!
불꽃이 튀며 손아귀가 아파왔지만, 생각보다 버틸만 했다.
환생자 니르바나는 유중혁의 [전승]과 비슷한 [계승] 스킬을 가지고 있다.
자신의 살았던 과거의 삶으로부터 스킬을 계승하는 것.
보아하니 내 예상대로 이번 생의 놈은 근접전보다는 정신계와 가속계 스킬을 집중하여 숙련한 모양이었다.
“어떻게 ‘바람의 길’을 쓸 수 있지? 설마······.”
위로 쳐 올리는 내 칼날을 받아낸 니르바나가 인상을 찌푸리며 물었다.
“설마 네가 ‘중립’이 말했던 그놈인가?”
“내가 좀 유명하지?”
“건방진 놈!”
니르바나의 수장과 ‘신념의 칼날’이 다시 한 번 격돌했다.
그러자 놈의 만다라가 기이한 형상을 그리며 백색의 아우라를 발출했다.
[등장인물 ‘니르바나 뫼비우스’가 ‘사상 감염 Lv.9’을 발동합니다!]
그렇게 나올 줄 알았지.
“현재를 살아라! 네 욕망을 받아들여라!”
니르바나의 몸에서 솟구친 백색의 아우라는 곧장 나를 향해 파고들었다.
하지만 나는 아우라를 피하지 않았다.
“인간은 욕망의 노예가 아냐. 욕망과 싸우는 동물이지.”
[전용 스킬, ‘제4의 벽’이 활성화 중입니다.]
츠츠츠츠츳!
나를 파고들던 백색의 아우라가 순식간에 녹아 없어졌다.
미안하지만 네 사상은 절대로 나한테 먹히지 않는다.
왜냐하면 내 ‘현재’는 이곳에 있지 않으니까.
[‘제4의 벽’의 효과가 ‘사상 감염’의 효과를 완전히 무효화하였습니다.]
나는 기동 자세를 갖추고 경악한 니르바나를 향해 돌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