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2화
122화
막말로 따지면 피스랜드의 ‘소인종’은 인간이긴 해도 나와 같은 ‘지구인’은 아니다.
아무리 범박한 인류애를 발휘한다고 해도, 타행성의 종족을 위해 같은 인류를 대적한다는 것에는 명백한 모순이 있었다.
그러므로 지금 내 행동은, 딱히 ‘인간’을 위해서라든가 ‘정의’를 위해서라든가 하는 거창한 윤리관 때문이 아니었다.
여기서 ‘소인종’을 적대하면, 나는 결말을 위해 필요한 업적을 놓치게 된다.
그것이, 지금 내가 ‘신념의 칼날’을 바닥에 꽂아 넣는 이유의 전부였다.
꽈아아아앙!
[<스타 스트림>이 당신에게서 이상 징후를 감지했습니다.]
[경고합니다. 같은 재앙을 적대하지 않도록 조심하십시오.]
[만약 적대 행위가 반복해서 누적될 시······.]
흙먼지가 자욱하게 피어오르자, 시야를 잃어버린 일본인들이 먼지 속에서 비명을 질렀다.
“와아악! 뭐야 갑자기?”
“쿨럭쿨럭!”
상당한 마력을 쏟아 넣은 일격이었기 때문에, 먼지는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작은 행성의 성좌가 작은 가슴을 콩닥댑니다.]
나는 잠시 고민했다.
지금 내 손으로 저들을 살해한다면, 나는 곧바로 새로운 시나리오를 받을 수 있게 된다.
하지만 그로 인해 얻을 페널티는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끔찍할 것이다.
나는 가능하면 그 순간을 최대한 늦추고 싶었다.
그러니까, 적어도······.
“아저씨, 이번엔 제가 할게요.”
신유승이 유상아에게 받은 단도를 뽑아 들며 앞으로 나섰다.
“제가 둘 다 상대할 수 있어요.”
“할 수 있겠어?”
“아무 문제 없어요.”
이길영도 그렇고, 요즘 애들은 왜 이렇게 당찬지 모르겠다.
유상아가 있었다면 당연히 말렸겠지만, 나는 유상아가 아니다.
나는 신유승을 독려하듯 말했다.
“오래 싸우면 안 된다. 페널티 메시지 들었지? 최대한 빠르게 처리해야 해.”
만약 신유승이 이 둘 모두를 상대할 수 있다면 이번 시나리오에서 내 선택지는 한결 넓어진다.
‘피스랜드’에서 내가 해야 할 일은 많았다.
그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목표 중 하나는 페르세포네가 말한 ‘뱀’을 잡는 것.
여기서 미리 페널티를 받지 않을 수만 있다면, 뱀을 잡는 시기는 내 생각보다 훨씬 앞당겨질지도 모른다.
“어떤 새끼야!”
흙먼지를 뚫고, 신유승은 목소리가 들려온 쪽을 향해 달렸다.
거의 동시에, 나는 [은둔자의 망토]를 사용해 몸을 감췄다.
고도의 색적 스킬이 있다면 무효한 아이템이었지만, 사무라이 녀석들이 그걸 갖고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쐐애액!
신유승의 단도에서 날카로운 마력이 일렁이며 위협적인 반월을 그렸다.
“으아앗!”
먼지 속에서 날아든 일격에 일본인들이 물러섰다.
일부러 맞추지 않은 일격.
절호의 기회를 놓치긴 했지만, 싸우지 않고 물리칠 수 있다면 그것도 하나의 방법이긴 했다.
기습에 놀란 일본인들은, 흙먼지 속에서 아이가 등장하자 의아한 표정이었다.
“뭐야, 꼬맹이잖아?”
수군대던 녀석들이 신유승을 향해 물었다.
“꼬맹아, 왜 우릴 막는 거냐?”
“그런 짓 하면 어떻게 되는지 몰라?”
하지만 안타깝게도, 나와 달리 [통역] 스킬이 없는 신유승에게 그 목소리는 그저 외국어일 뿐이었다.
“······뭐라는 거야?”
그제야 일본인들도 상황을 눈치챘다.
“설마, 한국 투입자인가?”
“아, 맞아! 이번에 한국도 1차 투입에 들어갔다고······.”
“빌어먹을, 1차 투입자면 엄청 셀 텐데······?”
녀석들의 안색이 급격하게 어두워졌다.
“꼬맹아, 비켜. 우리끼린 싸울 필요가 없다고.”
“돈 파이트! 돈 파이트! 오케이?”
“우린 그냥 쟤들만 죽이면 돼. 스몰 피플. 킬! 오케이?”
일본인들이 어설픈 영어를 써 가며 싸울 의사가 없음을 밝혔지만, 신유승은 그저 고개를 저을 따름이었다. 날카로운 단도가 자신들을 가리키자, 일본인들이 흠칫 어깨를 떨었다.
“죽든가, 꺼지든가. 둘 중 하나뿐이야.”
다가오는 신유승의 모습에, 일본인들이 슬금슬금 뒷걸음질을 치기 시작했다.
“제길······ 안 되는데. 나 지금 현상금 시나리오 중이란 말이야.”
“······내 배후성이 그냥 저 꼬마 새끼 죽이라는데?”
“우린 둘이니까 해볼 만하지 않을까?”
“우리 쪽 1차 애들 전투력 잊었어?”
“읏······.”
제법 영리한 녀석들이다.
세계 어디서든, 여섯 번째 시나리오의 1차 투입자들은 각국의 최정예들이 선발된다. 아마 일본도 1차 투입자와 그 이후 투입자의 격차는 상당하겠지. 두 일본인의 표정에 비슷한 감정이 떠오르고 있었다.
「······도망가야 하나?」
반면, 신유승과 일본인들의 대치를 바라보던 소인들의 사이에서는 기이한 환희가 번져가고 있었다.
“아, 아아······.”
“대체······?”
놀랄 법도 하다.
갑자기 나타난 작은 재앙이, 더 커다란 재앙을 상대로 싸우고 있으니.
“설마, ‘작은 구원자’께서······!”
“예, 예언이 맞았어!”
[작은 행성의 성좌가 화신 ‘신유승’에게 감동합니다.]
[작은 행성의 성좌가 화신 ‘신유승’에게 10코인을 후원하였습니다.]
[화신 ‘신유승’이 새로운 시나리오의 가능성을 입수하였습니다.]
나는 그 광경을 지켜보며 칼자루를 쥐었다 풀었다 했다.
조금 찝찝하긴 하지만, 여기서 녀석들을 쫓아 보낸 후 놈들의 행적을 추적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긴 했다.
하지만 내 생각대로라면, 일이 그렇게 무난하게 풀릴 리 없다.
허공을 떠돌던 중급 도깨비 가눌이 흥미로운 눈빛으로 상황을 지켜보더니 킥킥 웃었다.
[일본분들, 본인들이 불리하다고 생각하시는 모양인데, 정말 그럴까요?]
하여간, 빌어먹을 도깨비 새끼.
뭔가를 깨달은 일본인들이 중얼거렸다.
“아, 맞아! 그러고 보니 1차 투입자들 중에······.”
“아스카도 저러다가 변이되었다고 했지? 하긴, 한국에도 저런 별종들이 있긴 하겠지. 지금이라도 말해주면······.”
“알려줄 필요 없어. 어차피 조센징 꼬마잖아.”
결정을 끝낸 일본인들의 눈빛이 변했다.
살기 어린 두 눈이 동시에 신유승을 향했다.
“그래, 한번 싸워보자고.”
“어린애 취향은 아니지만······.”
그 불쾌한 웃음에, 말을 알아듣지 못하는 신유승도 금방 사태를 파악했다. 칼날이 스르르 움직였고, 두 사내가 천천히 신유승의 전후를 포위했다.
첨예한 살기가 세 사람의 몸에서 피어오르는가 싶더니, 합을 맞춘 두 사내의 검형이 동시에 움직였다.
쐐애액!
민첩을 최대치까지 찍은 신유승은 어렵지 않게 칼날을 피했지만, 생각보다 근소한 차이였다.
1차에 투입된 정예들에는 못 미친다고 해도, 싸움 실력을 보아하니 일본 내에서는 제법 상위권의 화신들인 듯했다.
나는 사내들의 검술을 보며 ‘멸살법’의 묘사를 떠올렸다.
검을 한 자루만 사용하고 있으니 이천일류(二天一流)는 아니고, 그 길이를 보아하니 간류(岩流)도 아니다.
즉, 일본 최고의 검호인 미야모토 무사시나 사사키 코지로와 관계되어 있을 걱정은 없다.
신유승의 데뷔전 상대로는 나쁘지 않군.
“계속 도망다니긴 어려울 거다 꼬마야!”
사내들의 배후성이 검법에 예기를 실어 주자, 검의 기세가 더욱 날카로워졌다. 다리를 벤다 싶던 칼날이 허리를 노렸고, 팔을 노린다 싶던 칼날이 목을 노렸다. 자연스러운 허초가 공격의 면면에 깃들어 있었다.
결국, 얼마 지나지 않아 신유승의 움직임이 그들의 검영에 걸려들었다.
아무리 신유승의 종합 능력치가 높다 해도, 검법의 노련함은 저쪽이 압도적으로 우위였다.
피잇!
신유승의 옷깃이 베이며, 팔에 작은 실선이 생겨났다.
나는 언제라도 움직일 수 있게 칼자루를 굳게 쥐었다.
딴엔 내가 배후성인데 마땅한 성흔 하나 주지 못해 안타깝다.
“죽어어!”
일본인 특유의 과장된 목소리와 함께, 두 일본도가 교차하며 신유승의 다른 신체 부위를 노렸다. 이번에 신유승은 피하지 않았다.
까아앙!
근력이 떨어지는 신유승이 단도를 놓쳤고, 기회를 포착한 일본도가 틈을 파고들었다. 하지만 신유승은 당황하지 않았다.
[등장인물 ‘신유승’이 ‘상급 다종 교감 Lv.3’을 발동하였습니다.]
오히려 훌쩍 물러나, 허공에서 제비를 돌더니 기다리고 있던 괴수의 등 뒤에 안착했다. 아까 길들였던 스틸 울프였다.
“······뭐야?”
올바른 판단이다.
모름지기 전투의 기본은 상대의 장점은 최소화하고 내 장점은 최대화하는 것이니까.
아우우우!
늑대의 울음과 더불어, 숲지대에서 수십 마리의 스틸 울프들이 동시에 뛰쳐나왔다.
그 짧은 사이 저렇게 많은 늑대들을 길들이다니.
과연, 미래의 ‘비스트 로드’다운 저력이다.
“제기랄?”
놀란 사내들이 검을 휘두르며 늑대들에 맞섰지만, 이미 달려든 늑대들이 사내의 팔과 다리를 물고 늘어졌다.
“씨발! 이 개새끼들이!”
아무리 약해진 7급 괴수종이라 해도, 마력을 꽤 소모한 이들이 상대하기엔 버거울 것이다.
과연, 가르친 보람이 있는 광경이다.
하지만 아직 신유승은 모르고 있었다.
내가 왜 ‘시간을 끌지 말라’고 했는지.
[<스타 스트림>이 화신 ‘신유승’의 이상 행동을 감지하였습니다.]
[같은 재앙에 대한 적대 행위가 감지되었습니다.]
[화신 ‘신유승’에게 1차 시나리오 페널티가 주어집니다.]
페널티가, 드디어 시작되었다.
“어······?”
갑자기 줄어드는 마력을 느끼며, 신유승이 신음을 흘렸다.
일부 늑대들이 갑자기 신유승의 통제를 떠나 숲지대로 돌아갔다.
[등장인물 ‘신유승’의 신체 부피가 감소하였습니다.]
[등장인물 ‘신유승’의 종합 능력치가 감소하였습니다.]
이상을 눈치챈 일본인들이 외쳤다.
“돼, 됐어! 역시 이렇게 될 줄 알았다니까!”
“조금만 버티면 돼!”
······결국 이렇게 되나.
신유승이 불안한 눈으로 나를 찾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은둔자의 망토]를 쓴 채 신유승의 뒤로 다가가 어깨를 짚어 주었다.
떨리던 신유승의 어깨가 다시 차분히 가라앉았다.
“······고마워요, 아저씨.”
혼자서 뭔가를 납득한 신유승이 입술을 깨물었다.
[화신 ‘신유승’에게 2차 시나리오 페널티가 주어집니다.]
신유승의 몸이 점점 작아지고 있었다.
저것이 바로, ‘재앙’이 스스로 자신의 권위를 포기한 결과.
하지만 아직 그녀의 힘은 일본인들의 목숨을 빼앗기엔 충분할 만큼 남아있었다.
신유승은 민첩을 최대치로 발휘해, 야수처럼 사내들의 등 뒤로 접근했다.
“으, 으와아앗!”
언제 유상아가 하는 것을 보고 배우기라도 한 것일까.
마음을 독하게 먹은 신유승의 단도술은 가히 발군이었다.
단도가 움직였고, 사내의 경동맥이 맥없이 피를 토했다.
푸슈슈슛.
“끄, 끄어어, 마, 말도 안······.”
쏟아진 핏줄기가 평원에 후두둑 떨어지며 창백해진 사내의 얼굴이 바닥과 가까워졌다.
[등장인물 ‘신유승’이 ‘아직 이름이 없는 재앙’을 처치하였습니다.]
[주요 공헌자 : 신유승]
신유승은 뺨에 튄 피를 닦아내며, 다음 타깃을 향해 움직였다.
공포에 질린 사내가 엉금엉금 기며 뒷걸음질 쳤다. 달려든 스틸 울프들이 사내의 팔과 다리를 마구 물어뜯었다.
“끄, 끄아아아악!”
신유승은 그런 사내의 숨통을 끊기 위해 다가갔다.
이변이 일어난 것은 그 순간이었다.
[화신 ‘신유승’이 ‘재앙’의 권리를 완전히 박탈당했습니다.]
[<스타 스트림>의 도깨비들이 ‘신유승’의 행동을 시나리오 대적 행위로 간주하였습니다.]
[화신 ‘신유승’에게 3차 시나리오 페널티가 주어집니다.]
[소인화(小人化)가 시작됩니다.]
이 시나리오에서 포식종의 자격을 포기한 자는, 자신이 사냥하던 피식종을 닮게 된다.
꽈드드드득.
이제까지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속도로, 신유승의 육체가 작아지기 시작했다.
“아······?”
작은 신음과 함께 신유승이 입고 있던 옷이 급격하게 커졌고, 손에 쥐고 있던 단도가 바닥에 떨어졌다.
내 허리까지 오던 신유승의 키가 무릎까지, 다시 무릎까지 오던 키가 정강이까지 줄어들더니, 이내 신유승의 몸은 옷 속에 파묻혀 보이지 않게 되었다.
능력치의 감소와 함께 통제력이 약해지자, 스틸 울프들이 일제히 숲 지대로 되돌아갔다.
옷 속에서 기어 나온 조그만 신유승이 사내를 향해 절뚝거리며 다가갔다.
“유승아, 그만해도 돼.”
숨을 헐떡이는 신유승이 나를 돌아보았다.
붉어진 아이의 눈에, 독기와 설움이 섞여 있었다.
그간 괴수들과 싸운 경험은 많이 있었지만, 이토록 본격적인 살인 행위를 저지른 것은 아마 이번이 처음일 것이었다.
“이미 기절했어.”
내 말에, 신유승의 눈이 쓰러진 일본인 사내를 향했다.
놈은 거품을 문 채 바닥에 너부러져 있었다.
나는 떨어진 옷을 조금 찢어 신유승의 몸을 덮어 주었다.
내 주먹만큼 작아진 신유승은 자신의 몸을 몇 번인가 관찰하더니 주먹을 쥐었다 폈다 했다.
아마도,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깨닫는 중일 것이다.
“이런 상태로 저런 놈들과 싸워야 하는 건가요?”
“그래.”
“······몇 명이나 남은 거예요?”
“꽤 많이.”
신유승이 착잡한 눈으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아저씨는 알고 있었군요? 재앙에 적대하면 소인이 된다는 거.”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쓰러진 일본인에게 다가갔다.
확인해 보니, 사내는 기껏해야 이십 대 초반의 청년이었다.
아직 숨은 붙어 있었다.
“그 사람을 이용할 건가요?”
“변하기 전에 꼭 죽여야 할 녀석이 있어.”
그 말을 뱉자마자, 새로운 메시지들이 들려왔다.
[같은 재앙을 적대하지 않도록 조심하십시오.]
[재앙을 적대한 재앙은, ‘재앙’의 권리를 모두 잃게 됩니다.]
하늘에는 여전히 재미있어 죽겠다는 얼굴의 도깨비가 떠 있었다.
그래······.
언제까지 그렇게 웃을 수 있나 보자고.
[<스타 스트림>은 당신의 ‘재앙 활동’이 충분하지 못하다고 여깁니다.]
[앞으로 한 시간 안에 피스랜드의 지배종을 죽이지 않으면, 당신은 재앙으로서 활동할 의사가 없는 것으로 간주되어 ‘재앙’의 지위를 박탈당할 것입니다.]
나는 거품을 문 일본인을 내려다보며, 천천히 망토를 벗었다.
이제 내게 남은 시간은 한 시간.
그 한 시간 안에, 나는 놈들의 ‘왕’을 잡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