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화
121화
Episode 24. 바꿀 수 있는 것
얼마 지나지 않아, 평원은 전투의 혈흔으로 난자해졌다.
아니, 그것은 이미 전투라고 부를 수 없었다.
양갈래로 찢어진 소인들의 허리에서 내장이 흘러내렸다. 일본인들이 발걸음을 내딛을 때마다, 불어 터진 면발처럼 소인들의 육신이 짓밟혀 터졌다.
“으아아아아······.”
“사, 살려줘! 살려주세요!”
작은 비명에도, 삶의 무게는 똑같이 매달려 있었다.
크기만 작을 뿐, 그들 역시 시나리오가 내려오기 전까지는 지구인들처럼 평범한 삶을 이어나갔을 인간들이었으니까.
밥을 먹고, 일을 하고, 가족들과 함께 평범한 삶을 영위했을 사람들······.
쓰러진 소인들의 시체들 위로 익숙한 지구의 정경이 겹쳐졌다.
일본인들이 소리쳤다.
“하하하! 이런 기분이었구만 그래!”
아마도, 순자는 지금 시대에 태어났어야 했다.
이 시대에는 성악설의 증거가 도처에 널려 있으니까.
방금 전까지 누군가에게 학살당했던 피해자도, 힘과 보상 기제만 마련해 주면 당장 가해자로 돌변할 수 있는 세상이다.
어쩌면, 자신이 한 번 당했기에 더욱 더.
신유승이 이를 갈며 물었다.
“······어떻게 저럴 수가 있어요?”
아마도, 정말로 궁금해서 묻는 질문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그 질문의 답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었으니까.
나는 말없이 신유승의 어깨에 손을 짚었다.
무거운 짐을 들쳐 멘 사람처럼 신유승의 어깨가 파르르 떨렸다.
“저건 너무하잖아요······!”
코인을 얻고, 새로운 아이템을 얻고, 스킬을 얻어서 강해지는 것.
그것만이 이 세계에서 조금이라도 더 오래 살아남는 방법이라는 걸 모르는 사람은 없다.
그렇기에 모든 생존자는 다른 생존자들을 이해했고.
그렇기에, 어떤 생존자들은 자신이 그것을 이해한다는 사실을 수치스러워하며 살아가야 한다.
“재, 재앙······이시여······.”
엉금엉금. 하반신이 뜯긴 소인 하나가 우리의 발치를 향해 기어왔다.
“부, 부디, 자비를······.”
상식을 초월하는 힘은 공포와 동시에 경외를 불러일으킨다.
아마도 피스랜드의 주민들에게 있어, 지구인이란 재앙인 동시에 신일 것이다.
나는 허리를 숙여 다가온 소인을 향해 손가락을 내밀었다.
그 손가락을 향해, 소인이 손을 뻗었다. 가쁜 숨이 교차하는 소리와 함께, 손가락 끝에 소인의 조그만 감촉이 닿았다.
마지막 숨을 내쉬는 순간, 소인의 표정은 묘한 환희로 물들어 있었다. 마치 신에게 닿기라도 한 것처럼, 그것으로 구원이라도 받은 것처럼.
[재앙의 임무를 수행하십시오.]
그리고 우리는, 그런 작은 소인들을 죽여야 할 처지였다.
바로 곁에서 이글이글 마력을 방출하는 신유승의 기척이 느껴졌다.
혹여나 일본인들에게 바로 달려가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뜻밖에도 그녀의 살기는 굉장히 합리적인 방향을 가리키고 있었다.
“이것도······ 다 저놈들이 만든 시나리오죠?”
중급 도깨비.
다른 하급 도깨비들과는 달리 여유롭게 팔짱을 낀, 수려한 용모의 도깨비 하나가 허공에 떠 있었다.
관리국에 끌려간 바울 녀석은 아니었다. 그놈이야 지금쯤 초열지옥에서 몸이 녹아내리고 있겠지.
나는 미리 읽고 온 ‘멸살법’의 텍스트를 떠올렸다.
「‘버려진 세계’ 시나리오를 진행하는 중급 도깨비. 녀석의 이름은 ‘가눌’이다.」
중급 도깨비 가눌이 말했다.
[과연, ‘일본 돔’의 3차 투입자 분들은 초장부터 화끈하시군요. 부디 이 ‘피스랜드’에서 많은 코인을 벌어 돌아가시길 기원합니다.]
벌써 3차라······.
예상대로 ‘일본 돔’ 녀석들의 시나리오 페이스가 아주 가파른 모양이었다.
“하하, 최고야 정말! 1차랑 2차 놈들이 질질 싸면서 달려갔던 이유가 있구만?”
“지금 코인 들어온 거 봤냐? 이거 완전 공짜 시나리오잖아?”
[다수의 성좌들이 흥분합니다.]
[일부 성좌들이 한 번에 열 마리의 소인을 밟아 죽이는 광경을 보고 싶어합니다.]
순간 멍해졌던 신유승의 표정이 이내 분노로 차올랐다.
“저 자식들 때문에······!”
그러나 갈 곳이 없는 분노였다.
성좌들은 <스타 스트림>의 꼭대기에 있는 존재들.
고작해야 시나리오의 ‘화신’일 뿐인 신유승이 감히 범접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그렇기에,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이 분노를 쏟아낼 눈앞의 희생양을 찾는 것뿐이었다.
“하하하, 한 번에 열 마리! 내가 먼저 죽인다!”
희열에 젖어 일본도를 휘두르는 일본인들의 눈에는 이미 이성의 흔적 따윈 찾아볼 수 없었다.
그들의 눈에, 소인족은 아마 살아있는 코인처럼 보일 것이다.
“아저씨, 저기······!”
소인들 사이에서 중장갑으로 무장한 작은 소인이 걸어 나온 것은 그때였다.
무리의 지휘관 격으로 보이는 소인이었다.
“칼―세이비어에 영광 있으라!”
소인 지휘관은 있는 힘껏 롱 소드를 치켜들더니, 용감하게 재앙을 향해 달려들었다. 일본인이 귀찮다는 듯 일본도를 휘둘렀다.
휘이익!
그런데 놀랍게도, 소인은 날쌘 움직임으로 그 공격을 피했다.
당황한 일본인이 소리를 질렀다.
“뭐, 뭐야!”
심지어 소인은 그대로 일본도의 검면을 타고 달려, 일본인의 손등에 처음으로 칼을 꽂는데 성공했다. 가히 대단한 전투력이 아닐 수 없었다. 깜짝 놀란 일본인이 팔을 휘둘러 소인을 떨쳐냈다.
“빌어먹을! 따갑잖아!”
내던져진 소인이 비명을 지르며 평원을 나뒹굴었다.
다른 일본인이 흥미롭다는 듯 웃었다.
“······꽤 용감한 놈도 있었네?”
타격은 거의 없는 거나 마찬가지였지만, 나름 회심의 일격에 성공한 소인의 얼굴에는 희미한 미소가 어리고 있었다.
마치 바늘에 찔린 듯, 일본인의 손등에 작은 생채기가 생겼다.
“저, 저걸 봐! 재앙이 피를 흘리고 있다!”
“와아아아!”
한 방울의 피.
그 피가, 소인들에게는 기적의 한 방울이었다.
재앙도 죽일 수 있다.
신은, 피를 흘리는 존재다.
단 한 방울이, 그들에게 그것을 가르쳐 준 것이다.
“할 수 있다! 쳐라! 조금만 더 하면 된다!”
사기가 올라간 소인들이 달아나는 것을 멈추고 역으로 재앙을 향해 달려오기 시작했다.
“이것들 뭐야 갑자기!”
“저리 가! 날벌레 새끼들아!”
바싹 붙은 소인들이 일본인들의 몸에 이쑤시개보다 작은 검을 휘둘렀다.
아무 소용 없는 화살들이 허공을 수놓았고, 기병들은 포기하지 않고 진형을 유지하며 일본인들의 발을 향해 랜스를 꽂았다.
여전히 아무 데미지도 없었지만, 소인들은 포기하지 않았다.
신유승도 손을 꾹 그러쥔 채 그 광경을 보고 있었다.
어디선가 간접 메시지도 들려왔다.
[작은 행성의 성좌가 화신 ‘길레미엄’을 응원합니다.]
이 작은 행성에도, 역시나 성좌는 있다.
작은 행성에서 태어나 작은 인간들의 믿음을 먹고 자라난 성좌.
[작은 행성의 성좌가 화신 ‘길레미엄’에게 10코인을 후원하였습니다.]
아마 ‘길레미엄’이라는 화신은, 처음으로 일본인에게 상처를 낸 그 소인의 이름인 듯했다.
“칼―세이비어어어!”
마치 조금만 더 공격하면 함락시킬 수 있을 것처럼, 소인족 모두가 흥분해 있었다.
정확히, 도깨비의 목소리가 들리기 전까지는 그랬다.
[재밌게 흘러가는군요. 역시 저항이 있어야 이야기도 더 흥미진진해지는 법이겠죠?]
소인들의 저항을 비웃기라도 하듯, 도깨비 가눌이 웃었다.
어딘가 기시감이 드는 웃음이었다.
[절망의 크기가 클수록, 이야기의 농도도 짙어지는 법이니까요.]
공격을 받던 일본인들의 몸에서 새카만 아우라가 흘러나왔다.
뭔가 사태가 이상하다는 것을 깨달은 소인족들이, 갑자기 공격을 멈추고 전열을 가다듬었다.
[지금부터 ‘재앙’의 패널티를 일부 해제합니다. ‘재앙의 길’을 선택하신 분들은 추가 버프 사용이 가능하니, 꼭 특성창을 확인해 주시기 바랍니다.]
자신의 몸을 내려다본 일본인들이 피식거렸다.
“뭐야, 이렇게까지 해줄 필요는 없는데?”
“게임이 너무 쉬운 것도 정도가 있지······. 이러면 재미가 더 없어진다고.”
[이번엔 쉬워도 됩니다. 스트레스 해소 게임이라고 생각하시죠.]
“그렇게까지 말한다면야······.”
킬킬 웃은 일본인은, 망설이지 않고 일본도를 고쳐 잡았다.
고오오오오!
그들의 일본도에 강력한 마력이 깃들고 있었다.
성흔의 형태를 보아하니, 저 두 일본인 모두 사무라이 계열의 배후성을 가지고 있는 듯했다.
유명한 녀석들은 아닌 것 같은데······.
[재앙의 개연성 제약이 일부 해제되었습니다.]
[재앙들은 일정 시간 동안 배후성과의 동조율 한계치가 상승합니다.]
[부족한 개연성은 <스타 스트림>의 관리국이 대신 지불할 것입니다.]
콰아아앙!
평원 바닥이 으깨지며, 백 명에 달하는 소인이 한꺼번에 피분수를 일으키며 갈라졌다. 가공하다고까지 말할 수는 없어도, 분명 상당한 수준의 파괴력이었다. 내가 보기에도 그 정도인데, 저 소인들이 보기에는······.
······아니, 놀랄 소인도 거의 남아있지 않군.
압도적인 재해 앞에 몇몇 소인들이 대소변을 지렸고, 어떤 소인은 그대로 혼절해버렸다. 미친 듯이 비명을 지르던 소인들은 비명조차도 잊은 듯 망연히 그 재해를 마주했다.
“아, 아으. 아으아······.”
무기를 놓은 소인들이, 하나둘씩 무릎을 꿇고 있었다.
처음으로 일본인에게 상처를 입혔던 소인마저 롱소드를 바닥에 떨어트렸다. 조금 전까지 용기로 가득 차 있었던 그들의 눈빛은 이제 완전히 꺾여 있었다.
「이길 수 없다.」
「우리 행성은, 이제······.」
그 절망의 형태가 너무나 익숙했기에, 읽는 것만으로 고통스러워질 지경이었다.
[작은 행성의 성좌가 당신을 발견하였습니다.]
그리고 메시지가 들려왔다.
[작은 행성의 성좌가 애처로운 눈빛으로 당신을 바라봅니다.]
[작은 행성의 성좌가 작은 행성에 대한 당신의 동정심을 기대합니다.]
[작은 행성의 성좌가 당신을 보며 희망을 품습니다.]
[작은 행성의 성좌가 당신에게 10코인을 후원하였습니다.]
나는 인상을 찌푸리며 허공을 올려다보았다.
[당신은 후원받은 10코인을 반환하였습니다.]
그러자 메시지가 이어졌다.
[작은 행성의 성좌가 당황합니다.]
[작은 행성의 성좌가 수치심에 얼굴을 붉힙니다.]
아무래도 오해를 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10코인이 너무 푼돈이어서, 내가 움직이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거겠지.
하지만 그 생각은 틀렸다.
나는 아주 작은 목소리로, 허공을 향해 말했다.
‘정말로 네 행성을 생각한다면 그딴 짓은 하지 마.’
[작은 행성의 성좌가 당황합니다.]
‘네 행성을 돈에 팔려 다니는 이야깃거리로 만들기 싫다면.’
[작은 행성의 성좌가 비통하게 침묵합니다.]
멀리서, 일본인의 두 번째 일격이 피어나고 있었다.
저 공격을 맞으면, 남은 소인들은 반드시 전멸할 것이다.
신유승이 외쳤다.
“아저씨, 더이상은 못 참겠어요.”
일본인들의 몸에 깃든 검은 아우라가 차츰 연해지고 있었다.
[개연성 버프]가 서서히 풀리고 있는 것이다.
슬슬 때가 되었군.
나는 신유승을 향해 말했다.
“재앙이 되지 않아도, 시나리오를 클리어할 방법은 있어.”
“······아저씨?”
“하지만, 정말로 힘들고 끔찍할 거야.”
신유승의 눈빛이 흔들렸다.
“포기하고 싶어질지도 모르는데. 그래도 할 수 있겠어?”
사실, 처음부터 이렇게 할 생각이었다.
그럼에도 기다린 것은, 이쪽의 승산을 높이기 위함이었다.
이 행성의 주민들이 아무리 불쌍하다 해도, 결국은 ‘다른 종’일 뿐이다.
그리고 지금 가장 중요한 것은 나와 신유승의 목숨이었다.
[재앙의 개연성 제약이 원래대로 돌아갑니다.]
검은 아우라에 휩싸여 있던 두 사무라이의 힘이 원래대로 돌아가고 있었다. 신유승이 고개를 끄덕였다.
“할 수 있어요.”
그 말을 신호로 나는 달려나갔다.
[<스타 스트림>이 당신에게서 이상 징후를 감지했습니다.]
[경고합니다. 같은 재앙을 적대하지 않도록 조심하십시오.]
아마 신유승은 그 결심을 후회하게 될 것이다. 편한 시나리오에서 ‘편함’을 포기한 존재가 어떻게 되는지, 이 시나리오는 똑똑히 알려줄 테니까.
하지만, 때로는 편함을 포기하고 자신의 신념을 지켜야 할 때도 있다.
[‘신념의 칼날’을 발동합니다!]
빛이 폭발하며, 굉음이 평원을 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