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화
120화
수정에는 정확히 다섯 개의 홈이 있었다.
그곳에 무엇을 꽂아야 할지는, 나도 유중혁도 잘 알고 있었다.
곁에 선 나를 보며, 유중혁이 말했다.
“왔군.”
“그래. 아쉽게도 말이야.”
“이번엔 빠져도 상관없다.”
뜻밖의 말에 나는 유중혁을 돌아보았다.
녀석은 여전히 나를 보지 않은 채 말을 이었다.
“사랑하는 여자가 있는 것 같던데.”
“······뭐?”
“힘들어질 거다.”
순간 풀리지 않던 뭔가가 이해될 것 같은 기분이었다.
설마, 날 일부러 뺀 게 날 따돌린 게 아니라 배려해준 거였나?
말도 안 된다. 그 유중혁이?
“마지막이 될 수도 있다.”
나는 고개를 흔들며 생각했다.
생각해 보면, 꼭 불가능한 것도 아니다.
2회차의 유중혁은, 자신의 눈앞에서 이설화를 잃었으니까.
아마 사랑하는 사람을 잃는 일에 관한 한, 유중혁은 이 세계 최고의 권위자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런 사이 아냐. 내 얼굴에 사랑이 가당키나 하겠냐?”
의도는 아니었는데, 말하고 보니 뭔가 자기비하처럼 들린다.
하지만 먼저 이렇게 말했으니, 예의상이라도 괜찮은 얼굴이라 해주겠지.
유중혁이 가만히 내 얼굴을 노려보다가 말했다.
“확실히, 죽어도 상관없겠군.”
제기랄.
“말 좀 곱게 해 인마. 상처받으니까.”
“아직 한 방 남은 거 잊지 마라.”
“······아, 그래. 거의 잊고 있었는데 상기시켜줘서 더럽게 고맙다.”
가만 보면 이 자식은 내가 살 길 바라는 건지 죽길 바라는 건지 모르겠다.
나는 그룹 채팅을 통해 일행들에게 곧바로 할 말을 전했다.
―지금부터 주의사항을 알려드리겠습니다.
그룹 채팅을 사용한다는 것은 비밀을 유지해야 한다는 것.
일행들은 적당히 딴청을 피우는 척하면서 내 이야기에 집중했다.
―워프 크리스탈은 두 명씩 입장하게 되어있습니다. 그 때문에, 미리 말씀드렸던 것처럼 2인 1조로 움직일 겁니다.
―저랑 유승이가 1조, 희원 씨와 현성 씨가 2조, 유상아 씨와 406번 할머니가 3조입니다. 길영이는 짝이 없어서, 유중혁 그룹의 지혜가 같이 다녀주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유중혁이 저놈은······ 뭐 지가 알아서 하겠죠.
―크리스탈을 통해 움직이면 잠깐 현기증이 날 수도 있는데, 너무 당황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아마 도착하자마자 곧바로 시나리오가 뜰 겁니다. 명심하실 것은, 시나리오 내용이 떴을 때······.
그렇게 속사포처럼 말을 쏟아내고 있는데, 훼방을 놓은 것은 워프 크리스탈 위로 갑자기 나타난 도깨비였다.
[잠깐만요. 정말 죄송하지만, 긴급 공지가 있겠습니다.]
긴급 공지?
[깜빡 잊고 있었는데, 서울 돔에서 참가 가능한 초기 할당 인원은 10명이 아니라 8명입니다.]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야?”
참가자가 모두 정해진 마당에 그런 얘기가 나오다니······.
자세히 보니 이 녀석, 얼마 전 명계에서 나한테 시나리오 갱신에 관해 묻던 그놈이다.
도깨비 영기라고 했던가?
[그게······ 다섯 번째 시나리오가 진행되던 중 차원의 일부가 뒤틀리면서 여섯 번째 시나리오로 넘어 가버린 분들이 계십니다.]
“······이미 들어가 있는 사람이 있다고?”
[예, 서울 돔에서는 현재 두 분이 이미 시나리오에 돌입한 상태입니다.]
그러고 보니, 공필두와 한수영이 이미 시나리오에 들어가 있었지.
명계에서 그 화면을 봤었는데, 잠깐 잊고 있었다.
그나저나 차원의 일부가 뒤틀릴 정도였다니.
중급 도깨비가 날 죽이려고 어지간히 시나리오에 간섭했던 모양이다.
[시나리오 오류로 돌입한 인원이긴 하지만, 공정성을 위해 기존의 할당 인원 중 두 명을 제하겠습니다.]
“뭐야! 그런 게 어딨어! 그럼 대체 누가 빠지라는 건데!”
정작 가지도 않는 사람들이 더 난리를 쳤다.
일행들이 곤란한 얼굴로 나를 보았다.
심지어는 유중혁도 나를 보고 있었다.
네가 알아서 결정하라는 표정이다.
젠장······.
뜻밖에도 먼저 손을 든 것은 유상아였다.
“제가 빠질게요.”
내 곤란함을 눈치채고, 먼저 배려해준 그 마음이 기꺼웠다.
하지만 유상아는 빠지더라도, 저 할머니는 데려가야 하는데.
뒤이어 손을 든 것은 정희원이었다.
“저도 빠지죠 뭐. 어차피 곧 2차 할당도 있다면서요?”
“괜찮겠습니까?”
“오늘 독자 씨가 좀 맹해 보여서 걱정되긴 하는데······ 알아서 잘 하겠죠 뭐. 이번엔 저 무서운 남자도 같은 편인 거 같고.”
확실히, 정희원과 유상아라면 두고 가도 안심이었다.
설령 2차 할당에서 또 경합이 벌어지더라도, 저 둘이면 충분히 경쟁을 뚫고 올라올 수 있을 것이다.
결국 두 사람이 빠지고, 할머니는 이현성이 데리고 가기로 했다.
할머니는 어쩐지 기분이 좋아 보였다.
떠나기 직전, 나는 유상아에게 귓속말을 했다.
“아까 말하는 걸 잊었는데, 방랑자들의 왕한테 전일도를 조심하라고 전해주세요. 이미 알고 있을 것 같긴 하지만.”
고개를 끄덕인 유상아가, 머뭇거리더니 내게 속삭였다.
“죽지 말아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정희원이 또 태클을 걸었다.
“······이제 출발 좀 하지 그래요? 성좌들이 아니라 내가 복장터져 죽겠네.”
유상아가 얼굴을 붉히며 물러섰고, 나와 일행들은 워프 크리스탈을 향해 다가갔다. 나는 품속에서 재앙을 잡고 획득한 호부들을 꺼냈다.
[이뮨타르 종족의 호부]
[패러사이트 종족의 호부]
[제노벨 종족의 호부]
뒤이어 유중혁과 406번 할머니도 각각 한 개의 호부를 꺼냈다.
각각 [얼음의 재앙]과 [물의 재앙]을 처치하고 얻은 호부였다.
[다섯 개의 호부를 꽂으십시오.]
워프 크리스탈에서 메시지가 흘러나오자, 우리는 크리스탈의 홈에 각각 호부를 맞춰 끼웠다.
다섯 개의 호부.
그것은 이 세계가 ‘재앙’으로부터 지켜졌다는 증명이었다.
오직 재앙을 이겨낸 자들만이, ‘다른 세계’로 가는 자격을 얻을 수 있다.
[자격 증명이 완료되었습니다.]
[워프 크리스탈이 발동합니다.]
크리스탈이 네 개로 쪼개지더니, 쪼개진 장소에서 쥐불놀이를 연상시키는 푸른빛 차원문이 만들어졌다. 우리는 두 명씩 차례로 입장했다. 나와 신유승도 서로를 꼭 붙든 채, 문을 향해 뛰어들었다.
[메인 시나리오가 갱신되었습니다.]
*
다시 눈을 떴을 때, 나와 신유승은 녹빛이 감도는 숲속에 너부러져 있었다. 휘청거리며 바닥을 짚었을 때 까슬한 흙의 감촉이 그대로 전해졌다.
토할 것처럼 사위가 어지러웠다.
현기증이 나도 당황하지 말라고 한 건 나였는데, 정작 내가 현기증에 정신을 못 차리고 있다니 우스운 일이었다.
곁을 보니 신유승은 이미 헛구역질을 반복하는 중이었다.
“괜찮니?”
“우우욱······.”
나는 신유승의 등을 두드려 주며 주변을 살폈다. 머릿속은 혼란했지만, 계속 혼란한 상태로 있을 수는 없었다.
앞을 봐도, 옆을 봐도, 뒤를 봐도. 보이는 것은 오직 숲뿐.
아무래도 우리는 숲 지대의 한복판에 떨어진 모양이었다.
이계의 정경이라기에는, 지나치게 ‘지구’와 흡사한 광경이었다.
[메인 시나리오 ― ‘버려진 세계’가 시작되었습니다.]
곧바로 떠오르는 시나리오 메시지.
하지만 자세한 메인 시나리오의 내용을 확인할 여유가 없었다.
근처의 수풀에서, 벌써부터 기척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유승아.”
정신을 차린 신유승이 고개를 들고 숨을 골랐다.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수풀 곳곳에서 들려왔다.
이곳은 신규 시나리오 진입자가 워프되는 장소 중 하나.
최악의 상황을 가정하자면, 저 수풀 속에 숨어 있는 것은 미리 도착해 있던 타국의 화신들일 것이다.
나는 긴장하며 [책갈피]를 발동할 준비를 마쳤다.
아마 이 세계로 워프한 녀석들은 정예 중에서도 정예.
처음부터 최선을 다하지 않으면 눈 깜빡할 사이에 목이 날아가는 수가 있었다.
그런데 수풀 속에서 나타난 것은, 우리의 예상과는 다른 것이었다.
[7급 괴수종, ‘스틸 울프’가 나타났습니다!]
7급 괴수종이라는 말에 나와 신유승의 얼굴에 똑같은 표정이 스쳤다.
우스운 노릇이다.
그 메시지에 안도하는 건 아마 우리뿐이겠지.
“얘들 몸이 좀 작은 것 같아요, 아저씨.”
보통 윗등급 괴수종들의 크기가 집채만한 것을 감안하면, 지금 나타난 스틸 울프들은 평범한 늑대 크기의 괴수들이었다.
숫자는 대충 열댓 마리.
상대하기에 어려운 숫자도 아니었다.
[등장인물 ‘신유승’이 ‘상급 다종 교감 Lv.3’을 발동합니다!]
신유승은 [상급 다종 교감]을 이용해 괴수들을 하나하나 상잔시켜 나갔다.
신유승이 길들이지 못한 녀석들은 내가 손수 ‘신념의 칼날’을 발동해서 해치웠다.
7급 괴수종이라기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허약한 녀석들이었다.
덩치가 작아진 만큼 힘도 줄어든 것 같았다.
“······어? 코인을 안 주는데요?”
“그 이벤트 끝났으니까.”
“아이템도 안 줘요. 핵도 없고.”
“능력치 차이가 많이 나서 그래.”
“얘들 정말 7급 맞아요? 아무리 봐도 9급 정도인 것 같은데······.”
잔뜩 긴장하고 있다가 처음으로 만난 괴수들이 약해서인지, 신유승은 살짝 김이 빠진 표정이었다.
그러고 보니 숲의 상태가 조금 이상했다.
분명 이 정도 숲을 이룰 정도의 나무라면 머리 위로 한참 솟아 있어야 할 텐데, 여기서는 키가 큰 나무도 내 머리보다 조금 더 높은 위치에 있는 정도였다.
시나리오 내용도 아직 그대로다.
‘버려진 세계’라는 시나리오 타이틀만 생겼을 뿐, 여전히 대부분의 항목은 물음표로 채워져 있었다.
[시나리오 활성화 조건을 충족하지 못했습니다.]
나는 살짝 점프해서 주변의 광경을 살폈다.
다행히 나무의 키가 낮았기 때문에, 가볍게 뛰는 것만으로도 주변 지대의 풍광을 모두 확인할 수 있었다.
“전부 숲 지대는 아니네. 저쪽으로 나가 보자.”
사실, 나는 이 지대를 나가면 뭐가 기다리고 있을지 알고 있었다.
우리는 숲의 샛길을 따라 달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숲 지대가 끝나고 탁 트인 평원 지대가 나타났다.
그리고 그 평원 지대에서.
“······아저씨?”
우리는, 한 무리의 병력들과 마주했다.
“나타났다! 정말 시나리오 대로야!”
누군가가 우리를 향해 그렇게 외쳤다.
분명 외계어일 텐데도, 마치 한국어처럼 들렸다.
당황한 신유승이 주춤거리며 내 쪽으로 물러섰다.
적어도 수백은 될 법한 병력들이 드넓은 평원의 일부를 메우고 있었다.
수십의 기병대와 수백의 궁병.
그리고 수백의 보병까지.
전쟁을 치르기에 충분한 인원이 그곳에 모여 우리가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다들 스킬을 준비하라!”
“진격을 준비하라!”
무수한 인파들이 살기를 내뿜으며 우리를 향해 창과 랜스를 겨누었다.
아무것도 잘못한 게 없는데, 어느새 우리는 적이 되어있었다.
“쳐라―!”
분명, 평소라면 압도되고도 남을 법한 광경이었다.
단, 그들의 크기만 아니었더라면 말이다.
“와아아아아!”
평원을 가로지르며 이쪽으로 달려오는 병력들은, 하나 같이 내 주먹만한 키의 소인(小人)들이었다.
“사람들이 엄청 쬐그만 해요!”
“이곳의 주민들일 거야.”
“설마 저 사람들이랑 싸워야 해요? 아니죠?”
신유승이 달려드는 소인들에게서 조금씩 물러나며 말했다.
“······너무 작아서 불쌍한데.”
[이계인과 조우하였습니다. 시나리오 내용을 확인하십시오.]
떨어진 곳에서 비명이 들려온 것은 그때였다.
“저, 저쪽에도 재앙이 나타났다!”
“끄아아아악!”
“모두, 모두 도망쳐라! 전군 후퇴다!”
우리에게 달려들던 소인들이 갑자기 전열을 물리며 달아나기 시작했다.
멀리서 마구잡이로 소인들을 밟아 죽이는 화신들이 보였다.
“하하하핫!”
“이게 뭐야? 정말 쉬운 시나리오로군!”
잘 들리지는 않지만, 아마 통역된 외국어 같았다.
장도를 휘두르는 두 명의 사무라이.
일본인들이었다.
그들은 장난이라도 치듯, 바닥에 칼을 내리꽂으며 소인들을 벌레처럼 자르고 있었다.
그 무자비한 살생의 현장을 보며, 신유승이 질린 목소리를 냈다.
“······아저씨? 이 시나리오 대체 뭐예요? 우린 뭘 해야 해요?”
나는 유중혁이 신유승을 데려오지 않으려 했던 이유를 알고 있었다.
생각해 보면, 나보다 더 인간적인 것은 그 녀석일지도 모른다.
“<스타 스트림>에서 시나리오를 진행하는 건 지구만이 아니야.”
나는 평원을 넘어 달아나는 소인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리고 이 시나리오는, 저들과 우리가 함께 하는 시나리오야.”
[상당수의 성좌들이 피와 폭력에 굶주려 있습니다.]
[상당수의 성좌들이 당신의 과감한 선택을 종용합니다.]
[메인 시나리오가 활성화됩니다.]
+
<메인 시나리오 # 6 ― 버려진 세계>
분류 : 메인
난이도 : S
클리어 조건 : 제 9781 행성계, 행성 ‘피스랜드’의 모든 지배종을 멸절시키시오.
제한시간 : 40일
보상 : 200,000코인, ???
실패시 : ―
+
여섯 번째 시나리오에서, 우리는 더이상 ‘재앙을 막는’ 역할이 아니다.
[당신은 행성 ‘피스랜드’의 ‘재앙’이 되었습니다.]
이곳에서, 우리는 이 세계를 파괴하는 재앙이 되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