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화

104화 신유승의 오른손이 조용히 하늘로 치솟았다. “울어라, 킹 매스우드.” 그러자 그녀의 뒤에 똬리를 틀고 있던 어룡의 왕이, 조용히 몸을 일으켰다. 바다를 유린하는 어룡들의 왕, 킹 매스우드의 [냉기 숨결]. 콰콰콰콰콰! 한강의 저변이 순식간에 얼어붙었고, 함포를 발사하던 유령 함대는 그 숨결에 휩싸여 조금씩 기능을 잃어갔다. “충고 하나 해줄 게 언니. 유령함대는 강하지만, 결국 물이 없으면 아무 의미도 없어.” 모든 것은 찰나였다. 신유승의 주먹이 움직인 것도. 뭔가가 터지는 소리가 난 것도. 검을 놓친 이지혜의 신형이 맥없이 하늘로 솟았다. “물론, 이번 회차에선 그 충고 아무 쓸모도 없겠지만.” 피를 흘리며 날아가는 이지혜의 눈빛에는 이미 한 줌의 의식도 느껴지지 않았다. 킹 매스우드의 [냉기 숨결]이 마침내 한강 전체로 퍼져 나가고 있었다. “으아아악! 뭐야!” 강을 건너오던 화신들이 난데없는 한기에 비명을 질렀다. 밀려든 냉기의 파랑에, 수백의 인파가 얼어붙은 한강 위에서 꼼짝없이 동사할 운명에 놓였다. 무기력하게 굳어가던 화신들을 구해준 것은 근처에서 상황을 지켜보던 괴력의 소유자였다. [등장인물 ‘이현성’이 성흔 ‘태산 부수기 Lv.5’를 사용합니다!] 비정상적으로 부풀어 오른 이현성의 오른팔이 얼어붙은 강을 내리쳤다. 꽈아아앙! 터질 듯한 그의 오른팔이, 과도하게 운용된 태산 부수기에 망가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의 노력은 보답을 받았다. 쩌저저저적! 금이 간 한강의 표면이 그대로 무너지며, [냉기 숨결]의 영향력이 주춤했던 것이다. 그 틈을 타 지상으로 올라온 화신들이 노들섬으로 진군했다. “우와아아아!” “쳐라!” 그 군세의 중심에 있는 이현성을 보며, 신유승이 슬피 웃었다. “그래, 현성 오빠. 당신도 있을 줄 알았어.” “······저를 아십니까?” “우리의 가장 든든했던 방패. 당신은 내 목숨을 많이 구해줬었지.” 신유승의 손짓에, 이번에는 그녀의 뒤에 있던 거대 침팬지가 가슴을 두드리며 앞으로 나왔다. 5급 괴수종, 헤비메탈콩. 쿠웅―! 뒷발을 찧는 스텀핑에, 근처의 화신들이 통째로 나뒹굴었다. 이현성은 헤비메탈콩을 향해 달려들었다. 크라라라라―! 부풀어 오른 이현성의 팔과, 헤비메탈콩의 강철 근육이 정면에서 맞부딪쳤다. 꽈지지직. 이현성의 힘은 놀라웠다. 실핏줄이 터지고, 입술에서 피가 흐르는 상황에서도 그는 5급 괴수종에게 조금도 밀리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압도하고 있었다. 쿠르르······? 신유승은 그런 이현성을 보며 무감각하게 말을 이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똑같네. 현성 오빠는. 유중혁의 가장 충직한 개······.” “······당신은 누굽니까?” “무수한 사람들의 목숨을 구해준 당신은, 마지막까지 유중혁을 지키다가 철혈룡의 브레스를 맞고 한 줌의 재로 흩어졌어.” “무슨······.” “그때 유중혁이 뭐라고 했는지 알아?” 자신이 받은 상처를 타인에게 이식하듯, 신유승의 혀끝이 날카로운 메스처럼 움직였다. “아까운 방패를 잃었군.” 묘하게 변하는 이현성의 표정을 보며, 신유승은 고독한 쾌감에 몸부림쳤다. 그래, 당신들도 느껴야 해. 내가 받았던 고통을, 내가 보았던 광경을. 모두 가져가진 못하겠지만, 당신들도 이것을 이해해야 해. 하지만 그녀는 몰랐다. 이번 회차는, 그녀가 아는 회차와는 뭔가 다르다는 것을. 헤비메탈콩의 공격을 쳐낸 이현성이 입을 열었다. “무슨 말씀이신진 모르겠지만, 나는 유중혁 씨를 따르지 않습니다.” “뭐?” “나는 김독자 씨의 일행입니다.” “김······ 뭐?” 꽈아앙, 하는 소리와 함께 헤비메탈콩이 넘어졌다. 표정이 굳어진 신유승이, 이현성에게 다가갔다. “······무슨 소릴 하는 거야?” 북이 터지는 소리와 함께, 이현성의 신형이 허공을 날았다. 신유승은 그대로 이현성의 배에 맹공을 가했다. 한차례 몰아친 에테르의 폭풍은, 단단한 이현성의 피부를 꿰뚫고 한강의 한가운데로 날려버렸다. 장기가 모조리 파열되기에 충분한 일격이었다. 이현성은, 이제 3회차를 계속 살아가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신유승의 머릿속에는 의문이 남았다. 이제까지의 그녀가, 한 번도 들어보지 못했던 이름. 김독자······. 그게 대체 누구지? 자신을 향해 달려드는 화신들의 목을 찢으며, 신유승은 얼어붙은 강을 천천히 걸어 나갔다. 겁먹은 화신들이 달아나다 괴수의 발톱에 뜯겨 죽었다. 사람들의 눈가에 조금씩 절망이 내려앉고 있었다. 저항할 수 없는 재해와 마주한 화신들 사이로 체념이 번져갔다. “쏴라!” 물론, 그에 저항하는 이들도 있었다. 전열을 가다듬은 왕들은 원거리 타격 스킬을 이용해 화살 비와 에테르 탄환을 퍼부었다. 신유승도 그들을 알고 있었다. 미희왕 민지원. 미륵왕 차상경. 중립의 왕 전일도. 이상한 일이었다. 본래 살아 있지 않거나, 이미 유중혁의 부하가 되었어야 할 이들이었다. 왜냐하면 유중혁을 제외한 다른 ‘왕’은, 네 번째 시나리오가 끝나는 순간 ‘단 하나의 왕좌’에 통합되었어야 하니까. 그런데 저건 대체 뭔가. “쳐라! 적은 단 하나 뿐이다!” 저 오합지졸의 군대는, 대체 누구의 명을 받고 있는 것인가. [절대 왕좌]는 대체 어디 간 거지? 이 세계는 누가 다스리는 거야? 살의가 느껴진 것은 그때였다. 차르르르, 하는 소리와 함께 신유승이 서 있던 바닥이 얼어붙고 있었다. ······냉기 숨결? 반사적으로 뒤를 돌아보자, 그녀를 향해 숨결을 퍼붓는 거대한 어룡이 있었다. 킹 매스우드가 아니었다. 반사적으로 들어 올린 그녀의 오른손에, 킹 매스우드가 움직였다. 그오오오오! 그아아아아! 두 마리의 어룡이 동시에 서로를 향해 포효를 내지른다 싶더니, 서로 뒤엉켜 부딪치기 시작했다. 왕과 여왕이 서로를 물어뜯으며 한강 전체를 거대한 옥타곤으로 만들고 있었다. 킹 매스우드와 싸울 수 있을 만한 크기의 어룡. 그런 어룡은, 신유승이 알기로 하나뿐이었다. “······퀸 미르바드?” 지구에 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퀸이 그녀를 공격할 이유는 없었다. 아니, 대체 왜? “네가 미래의 ‘나’지?” 그쪽을 돌아보는 순간, 신유승의 머릿속이 하얗게 변했다. 너무나 그리운 어떤 시절이 그녀의 영혼을 흔들고 지나갔다. “아저씨를 살려내!” 울부짖는 소녀의 모습, 그리고 그런 소녀를 막아서는 여인. “유승아, 안 돼!” 찌잉― 하는 충격과 함께 재앙 신유승은 모든 사태를 알아챘다. “하하······ 그래. 그럴 줄 알았어.” 신유승은 신형을 띄워 소녀를 향해 다가갔다. 그가 아는 유중혁은, 당연히 이래야 했다. 목적을 위해서는 수단도 방법도 가리지 않는 그 비열한 인간은, 처음부터 이랬어야 했다. “유중혁, 이 인간말종 새끼······.” “유승아, 달아나!” 단도를 빼든 유상아가 [헤르메스의 산책법]과 [아라크네의 거미줄]을 동시에 발동하며 달려들었다. 신유승의 눈빛에 이채가 스쳤다. ‘······올림포스?’ 하지만 단도는 신유승에게 닿지 못했다. 간단한 손짓에, 허공의 게이트에서 몰려온 비행종들이 한꺼번에 유상아를 향해 쏟아졌던 것이다. 순식간에 포위된 유상아의 신형이, 몬스터의 무리 속에 사라졌다. 그런 유상아를 내버려두고, 신유승은 소녀를 향해 다가갔다. 두려움과 분노로 물든 소녀의 눈동자가 그녀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마치 포박이라도 당한 것처럼, 소녀는 한 발짝도 움직이지 못했다. 신유승은 소녀의 뺨에 손을 가져다 대었다. “역시 유중혁은 이 세계선의 ‘나’를 찾아냈구나.” “으, 아······.” “어린 ‘나’를 죽여서, 지금의 ‘나’를 막으려 했었던 거야. 그렇지?” 맞아 떨어지는 추리에, 신유승의 머릿속에서 가공할 희열이 들끓었다. 일순 희미해졌던 증오와 분노가 빠르게 제자리를 되찾았다. 역시, 몇 번이나 과거로 돌아가도 바꿀 수 없는 것도 있다. ‘재앙 신유승’이 웃었다. “안녕, 과거의 나.” 그녀의 손이 움직이려던 순간. 뒤쪽에서 내리꽂힌 강력한 일격이 굉음을 만들며 그녀의 신형을 집어 삼켰다. 먼지가 걷힌 곳에, 거대 사마귀의 낫이 번뜩이고 있었다. “6급 충왕종?” “티타노! 해치워!” 갸오오오! 마구잡이로 쏟아지는 거대 사마귀의 낫 공격이, 바닥을 두부처럼 헤집었다. 무서운 공격이었다. 하지만 당연하게도, ‘재앙’을 상대할 수 있는 공격은 아니었다. “꺼져라.” 재앙 신유승의 오른팔에 응축된 에테르가, 티타노프테라의 배에 그대로 구멍을 뚫었다. 고통스럽게 초록색 피를 쏟은 거대 사마귀가 그대로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티타노!” 분노한 이길영이 거대 사마귀의 머리에서 뛰어내렸다. 이길영의 몸에서 낙하산처럼 산개한 노란 색 점액질이, 허공으로 퍼지고 있었다. “가라! 앤티누스!” 키이이이잇! 이길영의 몸에서 나온 기생종이 날개를 치며 뻗어 나왔다. 5급 기생종 패러사이트. 신유승은 깜짝 놀랐다. “······앤티누스?” 신유승 역시도 그 존재를 알고 있었다. 왜냐하면 그녀가 지구에 오기 전 멸망시킨 곳이, 바로 행성 클로노스였으니까. 앤티누스는 클로노스의 지배종. 여왕의 격을 갖추고 있던 괴수였다. 믿을 수 없었다. 지배종을 수하로 부리는 아이가 있다고? “제법이구나, 꼬마야.” 터업. 그러나 놀라움도 잠시, 기생을 시도하던 앤티누스는 신유승의 손아귀에 허망하게 붙잡혔다. 그녀의 손끝에 닿은 앤티누스의 점액이 새카맣게 타오르기 시작했다. 갸아아아아······. 당연한 일이었다. 길잡이들은, 재앙에게 대항할 수 없으니까. “길잡이를 길들일 정도의 재능이라니. 너 역시 <로드>의 재능을 가진 아이구나. 그렇지? 너도 대장이 찾은······.” 이길영은 그녀의 질문에도 아랑곳않고 달려왔다. “독자 형을 어쨌어!” “뭐?” “우리 형 어디 있냐고!” 달려든 이길영의 주먹이 그녀의 배를 때렸다. 나름 회심의 일격이었지만, 부러진 쪽은 오히려 이길영의 손목이었다. 대단한 재능이지만, 상대가 나빴다. 신유승의 하얀 손이 이길영의 목을 잡고 들어 올렸다. “······‘독자’가 대체 누구니?” 발버둥치는 이길영의 얼굴에 피가 몰리고 있었다. “말하렴. 그렇지 않으면 죽을 거야.” 그때, 멀리서 포격 소리가 들리더니 그녀가 서 있던 대지를 폭발시켰다. 신유승은 가볍게 뛰어 그 포격을 피했다. [유령 함대]의 함포 사격? 어떻게? “길영아!” 멀리서, 이지혜와 이현성이 달려오는 모습이 보였다. 재앙 신유승의 머릿속에 의문이 떠올랐다. 이상하다. 분명 즉사할 정도의 충격이었을 텐데, 어떻게 살아 있는 거지? 설마 위력 조절에 실패했나? 이 내가? 일이 귀찮아졌음을 깨달은 신유승이 이길영의 목을 붙든 손에 힘을 주었다. 어차피 이렇게 된 거, 저들에게 물어보는 편이 낫겠지. “잘 가라, 꼬마야.” 그런데 손아귀를 꽉 움켜쥐는 순간, 머릿속에 찌릿한 통증이 퍼지며 갑자기 신경절이 말을 안 들었다. 깜짝 놀란 그녀는 이길영을 바닥에 떨어트렸다. 벌벌 떨리는 오른손이, 기형적으로 꿈틀거리고 있었다. 설마 패러사이트에 감염됐나? 아니, 그럴 리가 없다. 고작 5급 기생종이, 세계선의 귀환자인 자신에게 간섭할 수 있을 리가 없다. 그렇다면······ 이건 대체 뭐지? 왜, 갑자기 몸이 말을 안 듣는 거야? 그 순간,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만둬라, 신유승.」 아무 말도 아니었는데, 이상하게도 그 목소리를 듣는 순간 신유승은 마음 깊은 곳의 어딘가가 허물어지는 것만 같았다. 심장 한쪽이 미칠 듯이 아파오기 시작했다. 모르는 목소리다. 분명 모르는 목소리인데. “······다, 당신 대체 누구야? 내 안에서 꺼져!” 어째서, 이렇게 그리운 느낌이 드는 것일까. 신유승은 그런 자신의 감각에 저항하듯, 자신의 머리를 감쌌다. “나가! 내 안에서 나가라고!” 구토감이 밀려왔고, 자신이 모르는 기억들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이어져선 안 될 세계가, 이어질 수 없던 필름들이 서로 뒤엉키고 있었다. 「유승아.」 그 목소리에 불현듯 정신을 차렸을 때, 재앙 신유승의 눈앞엔 어린 신유승이 있었다. 어린 신유승의 조그만 입술이 움직였다. “······아저씨, 혹시 거기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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