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화

105화 재앙의 몸을 조종한다? 처음부터 이럴 생각은 아니었다. 본래 내 계획은 다른 것이었으니까. 하지만 신유승의 내부에 들어온 순간, 나는 계획을 전면 수정하기로 했다. [전용 스킬, ‘전지적 독자 시점’ 3단계를 발동합니다.] [‘1인칭 조연 시점’이 발동하였습니다.] 정확히는, 수정할 수밖에 없었다. 「······인정할 수 없어.」 「그럼 나는 뭔데? 내가 살아온 시간들은?」 「내 회차는, 무엇으로 보상받을 수 있는 건데?」 몰아치는 신유승의 상념들 속에서, 나는 신유승의 눈으로 세계를 보았다. 신유승의 코로 숨을 쉬었고, 신유승의 손으로 사람들을 죽였다. 신유승의 목소리로 신유승의 생각을 말했다. 나는 신유승이었다. [‘제4의 벽’이 격심하게 흔들립니다.] 그리고 이지혜와 마주쳤다. 마주친 순간 알았다. 이지혜는 여기서 죽을 것이라는 걸. 그래서 나는, 처음으로 지금껏 하지 않았던 일을 해보았다. [‘1인칭 조연 시점’으로 등장인물의 행동에 간섭합니다.] [‘제4의 벽’이 불길하게 흔들립니다.] 머릿속에 전류가 치며, 엄청난 격통이 뒤따랐다. 그럼에도 신유승이 결정적 타격을 먹이는 순간, 나는 그녀의 오른손에 힘을 뺄 수 있었다. 미세한 조정이었기에 신유승은 눈치채지 못했지만, 나는 분명히 해냈다. 이지혜는 죽지 않았다. [등장인물 ‘신유승’에 대한 당신의 이해도가 상승합니다.] 같은 일은 이현성 때도 반복되었다. 정신은 조금씩 넝마가 되어 갔지만, 어쩌면 이걸로 뭔가를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조금씩 심력을 더 쏟아부었고, 신유승의 육체에 대한 내 점거 반경을 늘려갔다. 그리고 마침내, 신유승의 오른손이 이길영의 목덜미를 쥔 순간. “다, 당신 누구야?” 나는 신유승의 오른손을 내 의지대로 조종하는 데 성공했다. [등장인물 ‘신유승’에 대한 당신의 이해도가 매우 높습니다.] 내 것이 아닌 누군가의 팔이, 온전히 나의 의지로 움직인다는 것. 그것은 놀라운 경험이었다. “······아저씨?” 어린 신유승이 물었다. “내 안에서 꺼져!” 내 통제에 놓였던 신유승의 오른팔이, 발작을 일으키고 있었다. 기형적으로 꺾인 팔이 새카맣게 변했고, 도드라진 혈관이 터질 것처럼 부풀어 올랐다. 어린 신유승이 새카맣게 변한 팔에 달려들었다. “아저씨, 거기 있는 거 아저씨 맞죠? 아저씨!” 어린 신유승이 내가 깃든 오른팔을 붙잡았다. 그 순간, 오른팔을 중심으로 강력한 스파크가 일었다. 개연성 폭풍이 일어날 때와 비슷한 스파크. 놀란 사람들이 달려왔지만, 휘몰아치는 스파크가 그들을 날려버렸다. ‘재앙 신유승’과, ‘어린 신유승’이 동시에 서로를 보았다. 기억의 파도가 몰려오고 있었다. 「“아저씨.”」 「“대장.”」 하지만 그럴 리가 없었다. ‘끊어진 필름 이론’이 맞다면, 본래 두 사람은 존재가 이어져도 역사는 이어질 수 없었다. 「“저······ 죽이셔도 돼요. 괜찮아요.”」 「“나도 살아남고 싶었어.”」 그런데, 생각해 보면 ‘끊어진 필름 이론’이 적용되는 것은 ‘등장인물’ 뿐이다. 그리고 나는 소설 바깥에서 왔다. 만약 내 ‘존재’가······ 이 둘의 기억을 이어주는 역할을 했다면? 그래서 이어져서는 안 되는 두 개의 필름이, 잠시나마 이어졌다면? 눈을 감자, 두 명의 신유승이 내 손을 붙잡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3회차와 41회차. 서로 다른 두 시간이 서로를 마주보고 있었다. 「“저한테도 살아갈 가치가 있는 걸까요?”」 「“하지만 이런 삶에 무슨 가치가 있다는 거야?”」 “안돼! 이건······ 이 기억은······.” 당황한 재앙 신유승이 말을 더듬더니, 파랗게 질린 입술을 짓씹었다. 강력한 기운이 재앙 신유승의 내부에서 일어났다. 뭔가가 찢어지는 소리와 함께, 어린 신유승이 오른팔에서 튕겨나갔다. 나를 바깥으로 내보내겠다는 일념 하나로, 신유승은 자신의 육신을 쥐어 짜내고 있었다. 푸슛, 푸슈슛! 칠공에서 피가 흘러내렸고, 전투력이 급격하게 떨어지기 시작했다. 무리한 마력 운용으로 인해 영육의 밸런스가 무너지고 있었다. 「신유승! 잠깐, 그만둬라!」 “아아아아악!” 신유승은 자신의 머리를 붙잡은 채 나를 빼내려 안간힘을 썼다. 신유승의 감각을 공유하는 나 또한 밀려오는 구토감과 통증으로 미칠 것 같았다. 신유승의 머리가 하얗게 세고 있었다. 나는 잠시 고민했다. 만약 이대로 내가 조금 더 버틴다면, 재앙 신유승은······. ······빌어먹을! . . 신유승의 몸에서 의식이 빠져나오는 순간, 주변의 오감이 모조리 사라졌다. [스킬 충돌 오류가 정상화 되었습니다.] [지연되었던 ‘불살의 왕’의 특전이 재발동합니다.] [당신의 육신이 죽음 속에서 부활합니다.] ······. 어울리지 않는 선택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한번 해보고 싶은 게 생겼다. [성별 바꾸기를 좋아하는 한 성좌가 아쉬워합니다.] 하지 않으면, 후회할 것 같은 일이었다. [육체의 재생이 시작됩니다.] [전용 스킬, ‘제4의 벽’이 죽음으로 인한 정신 충격을 상쇄합니다.] [전지적 독자 시점 3단계의 사용 보상이 준비 중입니다.] 화룡종에게 죽은 이후 두 번째 부활. 말초신경부터 세세하게 재구성되는 그 감각에, 나는 다시 한번 몸부림쳤다. 입자 단위로 재생된 폐에 공기가 들어찼고, 시신경이 뭉쳐지며 주변의 시야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추상적으로 진행되던 정신 활동은 말랑한 대뇌피질 위에 고스란히 이식되었다. [‘불살의 왕’의 특전이 완료되었습니다.] [카르마 포인트 100을 소진하였습니다.] [육체의 노폐물이 완전히 빠져나가며 육체의 성능이 상승합니다.] [체력과 마력 레벨이 각각 2씩 상승합니다.] [해당 시나리오의 종합 능력치 제한 기준을 초과하였습니다.] 하아아······. 다행히 두 번째 부활이라 그런지, 꼴사나운 면모는 보이지 않았다. 주변을 둘러보니 내가 사용했던 옷과 아이템들이 너부러져 있는 게 보였다. 다행히 아직 아무도 안 가져갔군. 누가 볼세라 주섬주섬 옷들을 챙겨 입는데, 뒤쪽에서 섬뜩한 목소리가 들렸다. “······김독자?” ······아, 그러고 보니 이 자식, 바로 곁에 있었지. 머쓱한 얼굴로 뒤를 돌아보자, 불신 가득한 눈으로 나를 보는 유중혁이 보였다. [유황 미라]에 의해 포박된 놈의 어깨가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대체 어떻게······?” 나는 한숨을 쉬며 대답했다. 여기서 ‘불살의 왕’에 대해 설명할 수는 없었다. “······또 죽인다고 하진 마라. 이번에 죽으면 진짜 뒈지거든.” “김독자, 네놈······!” “설명은 나중에 하고, 일단 같이 가자. 시간 없으니까.” 나는 ‘신념의 칼날’을 휘둘러 유황 미라의 붕대로부터 유중혁을 꺼냈다. 비명을 지른 유황 미라가 나를 바라보는 순간, 나는 [책갈피]를 통해 [바람의 길]을 활성화했다. 슈우우우우! 다친 유중혁을 어깨에 들쳐멘 채, 그대로 한강 빙판길을 달려갔다. 멀리서, 괴수들과 싸우는 화신들의 모습이 보였다. 용산구에서 피어오르는 검은 아우라. 확실하다. 저곳에, 재앙 신유승이 있다. “아저씨?” “독자 씨!” 나를 발견한 일행들이 이쪽으로 달려왔다. 나는 유중혁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잠깐 쉬고 있어라.” 그리고 곧장 재앙 신유승을 향해 다가갔다. “독자 씨, 위험합니다.” “괜찮아요.” 이현성의 만류를 제지하며, 나는 발걸음을 옮겼다. “신유승.” 그토록 강력했던 범람의 재앙은, 머리가 하얗게 센 채 주저앉아 있었다. 칠공에서 흐른 피가 바닥에 고여 있었다. 아직 무시무시한 아우라를 발산하고 있었기 때문에 화신들은 감히 접근하지 못했지만, 나는 확신이 들었다. 지금의 ‘범람의 재앙’이라면, 모두가 힘을 합친다면 죽일 수 있다. “당신은······ 대체······ 누구야······?” 떨리는 눈으로, 재앙 신유승이 나를 보았다. “모두 망쳤어······ 당신 때문에······ 내가 아는 회차에서 없었던.” 천년의 세월을 버틴 영혼이,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없었던, 일인데.” 유중혁의 변화를 시작으로, 그녀의 아집은 과거의 신유승과 맞닿은 순간 부스러졌다. 유중혁에 대한 증오. 천 년에 달하는 세월이 쌓아온 분노. 그 견고한 감정들이, 흘러들어온 기억의 파랑에 무너지는 것을 나는 똑똑히 보았다. 어쩌면, 이 세계가 바뀔 수도 있다는 희망. 재앙 신유승은 그 작은 희망을 보고 만 것이다. 아주 작은 빛으로도, 절망을 압도하고 마는 희망을. 나는 신유승에게 다가가, 함께 무릎을 꿇었다. 신유승이 이글거리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잘 왔다.” 나는 그녀가 가장 듣고 싶은 말이 무엇일지 계속 생각했다. 그런 건 멸살법에도 나오지 않는다. 스스로 생각하는 수밖엔 없다. 내가 만약 신유승이었다면······. “오랫동안 너를 기다렸어.” 신유승의 동공이 불안하게 흔들렸다. “······날 기다렸다고? 넌 대체 누군데?” “너와 같은 세계를 원하는 사람.” 그 말에, 신유승의 눈빛이 멍하게 변했다. 「나는······.」 어느새 다가온 유상아가, 내 어깨를 짚었다. “독자 씨.”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동료들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그들 하나하나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여러분.” 나는 ‘범람의 재앙’ 에피소드를 좋아했다. 에피소드에 나오는 모든 인물들을 사랑했고, 소중하게 여겼다. 하지만 그랬기에. 나는 이 에피소드가 없기를 바랐다. “저는 ‘재앙’을 죽이지 않겠습니다.” 나는 생각했다. 본래의 3회차에서, ‘범람의 재앙’은 존재가 연결되어 있던 어린 신유승이 사망하며 함께 소멸한다. 하지만, 이 에피소드에는 내가 모르는 다른 결말이 있지 않을까. 한 번도 시도되지 않았던, 그런 결말이. “반론은 받지 않을 겁니다. 그러니 이번만큼은, 여러분들이 제 억지를 들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아저씨, 그게 뭔 헛소리야?” 다섯 번째 메인 시나리오에는 ‘제한 시간’이 없다. 만약 ‘범람의 재앙’이 ‘재앙’으로서의 역할을 포기하고, 우리가 ‘재앙’을 사냥하지 않는다면. 누구도 죽지 않은 채로, 이 시나리오는 그저 ‘계속될 수’ 있는 것은 아닐까. 어떤 사람들은 이해한 눈빛이었고, 또 어떤 사람은 당황한 모습이었다. 가장 먼저 고개를 끄덕인 것은 유상아였고, 가장 먼저 입을 연 것은 이현성이었다. “생각이 있으신 거겠지요. 저는 독자 씨의 뜻에 따르겠습니다.” “형이 원한다면 좋아요. 근데 내 티타노 때린 만큼, 나도 저 사람 때려도 되죠?” “젠장, 맘대로 해. 언제는 아저씨 맘대로 안 했나? 근데 괜찮은 거야?” 일행들의 목소리를 들으며, 나는 어린 신유승을 바라보았다. “저는······.” 소녀의 눈가에 눈물이 맺히고 있었다. 아마 신유승은 보았을 것이다. 미래의 자신이 겪은 시간들을. 그러니 어린 신유승에게는 의중을 묻는 것 자체가 가혹한 일이다. 나는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어 준 후, 마지막으로 재앙 신유승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상처받은 야수처럼 일그러진 얼굴로 입을 열었다. “날 살려준다고? 웃기지 마. 니들이 뭔데?” 모든 것을 잃은 그녀에게 남은 것은, 이제 앙상한 자존심뿐이었다. “내가 살았던 41회차는 이제 없어. 이 우주 어디에도, 그 어떤 세계선에도, 내가 기억하는 사람들은 없어. 네가, 당신들이 뭘 알아? 어떻게 그 세월을, 그 시간들을! 그걸 모두 잊고, 내가 어떻게······!” 이어지던 신유승의 말이 멎었다. 유중혁이 그녀를 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 그리고 그 순간, 신유승은 자신이 했던 말의 진짜 의미를 깨달았다. 세계를 잃고. 사랑하는 사람들을 잃는 것. 그럼에도, 그 세계에서 다시 한번 살아가야만 하는 일. 이 세상에 단 하나, 그녀의 슬픔을 이해하는 사람이 있었다. “모든 회귀자는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을 증오하며 살아가지.” 회귀자 유중혁이 말하고 있었다. “저 녀석은 ‘앞으로 나쁜 놈이 될 테니까’ 죽이고. 저 녀석은 ‘앞으로 내 동료를 죽일 테니까’ 죽이고. 그리고 어떤 녀석은, ‘앞으로 동료가 될 테니까’ 목숨을 구해주고.” 그 순간 유중혁의 눈에 떠오른 감정을, 나는 읽을 수 있었다. 읽을 수 있었기에, 처음으로 유중혁이 낯설게 느껴졌다. 그토록 솔직한 유중혁을 나는 한번도 본적이 없었다.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인 걸 안다. 그들이 나를 기억하지 못하는 것도 알고, 그들이 아무 짓도 저지르지 않았다는 것도 안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믿고 행동한다. 그들이 그렇게 살아갈 것이라고. 왜냐하면 내 안에서 그 모든 건 ‘분명히 일어날 일’이고, 나는 그걸 부정하면 살아갈 수 없으니까.” 신유승의 동공에 다시 분노가 차올랐다. “그래! 네가 그렇게 살았기 때문에, 내가, 내 동료들이······!” “그러니 너도 그렇게 살아라 신유승.” “······뭐?” “네가 원한다면, 나는 얼마든지 너의 ‘증오’가 되겠다.” 유중혁의 그 말에 너무나 슬펐기 때문에, 나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이 회차에서, 나를 죽이기 위해서 살아가라.” 유중혁은 그 말을 마지막으로 등을 돌렸다. 아마도, 그것이 저 유중혁이 할 수 있는 가장 따뜻한 말이었으리라. 나는, 유중혁의 그 등이 저렇게 크고 넓은 것을 처음 알았다. 가슴이 먹먹하도록 그 등은 넓고 고독했다. 신유승은 한참이나 입을 벌린 채, 그런 유중혁을 바라보았다. 천년의 세월 동안 그녀가 증오했던 사람을, 아이러니하게도 그녀는 천 년을 살아온 대가로 이해하게 되었다. “대장······ 기다려. 대장!” 그런 신유승의 마음속에 번져가는 파문을, 나는 고스란히 느낄 수 있었다. 「······정말, 그래도 된단 말인가?」 「그런 이유로, 내가 계속.」 「이 세계를, 포기하지 않아도······.」 어떤 분노는 사라지지 않고, 어떤 슬픔은 지워지지 않는다. 하지만 살아 있는 한, 언젠가 구원받는 날은 온다. 나는 신유승을 향해 입을 열었다. “신유승, 이제 이곳이 너의 새로운 ‘회차’야.” 독자였기에 아무것도 바꿀 수 없었고. 독자이기에, 이제 바꿀 수 있었다. 바꿀 수 있다고, 생각했다. 중급 도깨비의 목소리가 들려오기 전까지는.
🏠 인덱스 ← 이전 화 다음 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