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화

102화 사태는 확실해졌다. 여기서 유중혁을 믿고 있다간 죽도 밥도 안 된다. 나는 이설화를 향해 외쳤다. “이설화 씨! 저 새끼 데리고 당장 이 섬에서 탈출해요. 범람의 재앙은 지금까지와는 다릅니다. 전열을 갖추고 함께 싸워야 합니다. 모두와 같이 싸우지 않으면―” “방해하지 마라, 김독자. 죽고 싶지 않으면.” 푯― 하는 소리가 들린다 싶더니 내 뒤로 다가온 유중혁이 내 목을 짚었다. 갑자기 몸에 힘이 쭉 빠지더니, 어느새 무릎이 바닥에 닿았다. 나는 입술을 짓씹으며 말했다. “유중혁, 내 말 들어! 지금 깨어날 신유승은 네가 알던 신유승이 아니야. 그 앨 만나면······.” 더 외치고 싶었지만, 목소리는 어느새 끅끅거리는 소리로 변해 있었다. 빌어먹을. 나는 [점혈]을 사용해 조금씩 혈도에 맺힌 기운을 풀어갔다. 이젠 힘으로 제압하는 수밖에 없는데······. 당연한 얘기지만, 서울에 유중혁을 힘으로 제압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쿠구구구. 아니지, 딱 하나 있긴 하네. 바로 지금 나올 저 녀석. [‘범람의 재앙’이 깨어납니다.] 메시지와 함께, 운석에서 눈부신 빛살이 뻗어 나갔다. 마침내 운석의 부화가 시작된 것이다. 중급 도깨비의 목소리가 들렸다. [서울의 화신 분들은 정말 성질이 급하시군요. 다른 행성들은 피하려고 안간힘을 쓰는 재앙을, 이토록 빨리 깨우려고 안달할 줄이야······.] 아마 비형도 더 이상 시간을 끌기 어려워진 모양이다. [먼저 간 동료들이 그리워진 모양이죠? 자, 그럼 재앙을 맞이할 준비를 하십시오. 동료들이 저승에서 여러분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새로운 메인 시나리오가 도착했습니다.] + <메인 시나리오 # 5 ― 범람의 재앙 > 분류 : 메인 난이도 : SS 클리어 조건 : 범람의 재앙 ‘신유승’을 처치하시오. 제한시간 : ― 보상 : 100000코인, ??? 실패시 : 서울 멸망 + 커다란 운석이 통째로 갈라지며, 태내(胎內)를 연상시키는 내부가 드러났다. 그 안에, 웅크린 나신의 여자가 화석처럼 박혀 있었다. 새하얀 피부에 신비한 광택이 도는 여인. 포니테일로 묶은 아름다운 머리카락이 그녀의 전신을 감싸고 있었다. 저것이, 어른이 된 신유승의 모습이었다. “여자?” “뭐야 저거? 저게 재앙이라고?” 이현성과 이지혜가 모두 막지는 못한 모양인지, 몰래 다가온 몇몇 화신들이 그녀를 보고 있었다. 아무래도, 전투력의 격차가 너무 심한 그들은 느끼지 못하는 듯했다. [전용 스킬, ‘제4의 벽’이 당신의 정신 충격을 상쇄합니다.] ‘범람의 재앙’은 다른 재앙들과는 다르다. 일찍 부화하면 약화되는 패널티라도 있는 다른 재앙들과는 달리, ‘범람의 재앙’은 그런 것도 없다. 범람의 재앙은, 일찍 깨어날수록 더 강해진다. 신유승이 눈을 뜨는 순간, 그녀의 전신에서 새하얀 털 같은 것이 자라났다. 마치 동물의 가죽을 연상시키는 순백의 하얀 털은, 이내 그녀의 전신을 뒤덮고 옷처럼 바뀌었다. 삐그덕. 신유승은 천천히 운석에서 빠져나와 지표면에 발을 딛었다. 처음으로 걸음마를 시작하는 어린아이 같은 발걸음이었다, 그저 발만 내딛었을 뿐인데, 주변의 모두가 얼어붙었다. 종(種)이 다른 강자. 나름 화신 중에서는 강자에 속하는 저 이설화조차, 움직임이 굳어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기세에 전혀 주눅 들지 않는 이도 있었다. “기다렸다, 신유승.” 신유승의 고개가 천천히 남자를 향해 돌아갔다. “······대장?” 단지 한 번의 조우만으로, 신유승은 뭔가를 눈치챈 듯했다. “그런가······ 대장이 날 기다리고 있었다는 건······, 이번이 날 처음 보는 게 아니라는 거네? 그렇지?” 유중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도움이 필요하다.” “그전에······ 대장, 지금 몇 회차야?” “그게 왜 궁금하지?” “알아야 할 필요가 있거든.” 잠시 망설이던 유중혁이 대답했다. “3회차다.” “역시 그랬구나······. 그럼 2회차에서도 나를 만났겠네. 그치?” “그래.” 2회차의 유중혁이 무려 46번 시나리오까지 갈 수 있었던 이유. 그것은 바로 눈앞의 ‘범람의 재앙’ 덕분이었다. 범람의 재앙 신유승은, 41회차의 세계선에서 온 인물이었다. 41회차의 유중혁이, 과거의 자신에게 보낸 안배. 신유승은 자신의 세계선에서 버려진 후 오랜 세월 차원을 여행해, 마침내 과거 지구의 시나리오로 강림했던 것이다. “지금이 3회차라는 건, 내가 지난 회차에서 정보를 줬는데도 실패했다는 거네?” “그래서 정보가 더 필요하다.” 2회차의 신유승은 자신이 알고 있던 정보들을 유중혁에게 내주고 자결하는 길을 택한다. 자신이 알고 있었던 유중혁에 대한 마지막 배려로. 어디까지나, 2회차 때는 그랬다는 얘기다. 신유승이 입을 열었다. “······수천 년이 걸렸어.” 무표정한 신유승의 얼굴에서 세월을 헤아릴 수 없는 피로감이 느껴졌다. 41회차의 유중혁이 행한 일은 살인보다 끔찍했다. 수천 년. 하나의 인격이 모조리 붕괴하고 자아가 마모될 시간. 신유승은 그 시간을 버텨, 마침내 ‘재앙’이 되었다. “대장, 알아? 내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당신 부탁을 들어주려고, 내가 얼마나 지난한 세월을 견뎠는지.” “······무슨 소리지?” “대장이 많이 보고 싶었다고.” 생긋 웃는 신유승의 미소에 담긴 절망을, 유중혁은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그는 무심한 투로 입을 열었다. “41회차의 모든 정보를 내게 넘겨라. 그 회차의 내가 다른 말은 없었나?” 그렇게 말해서는 안 된다고 외치고 싶었다. 하지만, 목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신유승의 눈빛은 폭풍의 눈처럼 고요했다. 오직 나만이, 그 눈의 저변에서 몰아치는 감정을 읽을 수 있었다. 「역시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구나.」 유중혁의 계획에 의해, 신유승은 천 년이 넘는 시간을 세계선의 미궁 속에서 홀로 떠돌았다. 이백 년을 인류를 위해 버텼고. 다시 이백 년을 세상을 지키겠다는 약속으로 버텼다. 그리고 또 이백 년을, 함께 했던 동료들과 유중혁을 떠올리며 버텼다. 세월 속에서, 신유승은 자신을 지키기 위해 한줌의 기억들을 되새기고, 또 되새겼다. 그런데 되새김질을 반복할수록, 어떤 의문이 치솟았다. 「이 모든 게 무슨 의미가 있지?」 시간은 그녀에게서 대의를 지웠고, 정의를 앗아갔다. 대의가 사라진 곳에 남은 것은 초라한 인간의 진실뿐이었다. 자신과 동료들을 그저 ‘회귀’의 도구로 전락시킨, 유중혁에 대한 원망. 뼛속까지 스며든 고독감과 세계를 잃은 황망함 속에서, 신유승은 천 년의 시간 동안 자신을 이렇게 만든 유중혁을 증오하며 버텼다. “대장은 언제 봐도 변하는 게 없네.” “쓸데없는 말 하지 말고 정보부터 넘겨. 시간이 없으니까.” “대장에게 ‘우리’는 대체 뭐였어?” “······뭐?” “나는 도리를 다했어. 기회도 한 번 줬고. 그런데 대장은 여전해.” 그녀는 마지막 자비로, 2회차의 유중혁을 도왔다. “그리고 앞으로도 여전하겠지. 또 사람들을 도구처럼 부릴 거고, 나를 끔찍한 세계선의 미궁에 빠뜨리겠지. 그 알량한 정의감, 빌어먹을 대의. 나는 세상을 혼자 살아가는 당신을 증오해.” 그리고, 이제 3회차의 유중혁과 마주하게 되었다. “그러니 내가 알려줄 건 하나뿐이야. 대장은 누구도 구원할 수 없어.” 신유승이 섬뜩하게 웃었다. “당신의 3회차는 여기까지야.” 신유승의 손에서 눈부신 빛이 일렁인 것과, 내가 점혈을 풀어낸 것은 거의 동시였다. 나는 온 힘을 다해 내달려, 눈앞에서 터지는 에테르의 폭풍을 받아냈다. “비켜, 유중혁!” 아랫배가 통째로 뜯겨 나가는 듯한 통증이 일었고, 일순 정신이 아득해졌다. 섬의 중앙에 거대한 크레이터가 발생했다. 나와 유중혁은 허공으로 튀어 올라 한참이나 바닥을 굴렀다. 아프다. 제길. 정말로 아프다. “······김독자?” 놀란 유중혁이 쓰러진 나를 바라보았다. 호흡이 가빠왔고, 하늘이 노랗게 변했다. 새삼 지금까지 운이 좋았다는 게 실감이 난다. 원래 이 세계는 이런 세계였지. 한끝만 잘못 디뎌도, 바로 뒈지는 세계. “김독자!” 자식이, 엄살은. 나는 씩 웃으며 유중혁을 향해 말했다. “야, 나 좀 죽여주라. 평소에 엄청 죽이고 싶어했잖아.” “······무슨 소리냐.” “딱 1분간만 죽이게 해줄 테니까, 죽여 달라고.” 그제야 유중혁이 내 아랫배를 바라보았다. 배를 만지고 싶은데 배가 없다는 기분, 이런 거구나. 입에서 끊임없이 피거품이 흘러나왔고 토할 것처럼 온 세상이 어지러웠다. 히끅, 하고 계속해서 숨이 넘어온다. [전용 스킬, ‘제4의 벽’이 당신의 통증을 일부 상쇄합니다.] [제4의 벽]이 없었다면 진즉에 눈물을 질질 짰을지도 모르겠다. 지난번에는 한 방에 골로 가버려서 못 느꼈는데······. “기다려라 김독자! 아직 늦지 않았다.” “늦었어 인마.” “늦지 않았다!” “지금 죽이면, 코인도 받아 새끼야. 난 이미 틀렸으니까, 그냥 죽이라고.” 유중혁의 저런 표정은 정말 오랜만에 보았다. 지하철에서 날 처음 봤을 때도 저 표정이었지, 이 자식. “그럴 순 없다.” 그대로 시야가 흐려졌다. 혈도를 짚는 유중혁의 모습이 보였지만, 나는 이미 피를 너무 많이 흘렸다. 그리고 무엇보다······ 내장 아래쪽이 모두 없어졌는데 살 수 있을리가 없지. 이설화가 나서도 이건 무리다. 의식은 모래성이 무너지듯, 서서히 허공으로 흩어졌다. [당신은 사망했습니다.] . . 그리고 잠시 후, 시스템 메시지가 들려왔다. [현재 카르마 포인트 : 100/100] [특전 사용에 충분한 카르마 포인트를 보유하고 있습니다.] [‘불살의 왕’의 특전이 발동합니다.] *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예상했던 대로 어둠 속이었다. ······또 이런 상태인가. 정말, 몇 번을 겪어도 더러운 기분이다. [전용 스킬 충돌 오류로 ‘불살의 왕’의 특전 활성이 지연됩니다.] [사망으로 인해 의식이 육체의 구속에서 완전히 해방됩니다.] [전용 스킬, ‘전지적 독자 시점’ 3단계가 강제로 활성화됩니다.] 어둠 속에서, 언젠가 들었던 메시지가 또 들려왔다. 다음 순간, 눈앞에 화면이 떠올랐다. 3인칭 관찰자 시점. 「“범람하라.”」 다른 모든 재앙을 모두 합쳐도 범람의 재앙 하나보다 못하다는 중급 도깨비의 말은 옳았다. 신유승의 그 한 마디에, 허공이 일그러지며 괴물들이 튀어나오고 있었다. 전설급 특성인 [비스트 로드]의 주특기, [몬스터 게이트]. 차원을 여행하며 그녀에게 길들여진 무수한 괴수들이, 악몽이 되어 지구에 풀려나고 있었다. 「“찢고, 부수고, 파괴하라.”」 7급 괴수종들은 물론이고, 6급 이상의 괴수종도 상당수 보였다. 심지어는 소재앙이라 불리는 5급 화룡종에 비견되는 놈들도 있었다. 「“바야흐로, 재앙의 시간이다.”」 노들섬이 그대로 폭발하며, 한강 전체가 하나의 파도가 되었다. 당황한 화신들이 비명과 함께 괴수들의 먹이가 되었다. 뒤늦게 전세를 갖춘 ‘왕’들이 명령을 내리는 모습이 보였다. 그런데 그때, 신유승의 뒤에서 무시무시한 아우라를 일으키는 한 녀석이 보였다. 「“너를 죽이겠다, 신유승.”」 ······저 자식이 미쳤나? 가공할 파찰음과 함께, 유중혁의 에테르 블레이드가 허공을 그었다. 신유승은 가볍게 허리를 숙여 그 공격을 피한 후 미소를 지었다. 「“벌써 ‘파천검도’ 레벨이 꽤 높네? 그래도 그 정도로는 아무리 날뛰어도 날 못 이겨. 기껏해야 ‘레벨’ 수준이잖아?” “이번 회차에서 너는 반드시 죽는다.” “글쎄. 안 된다니까. 10년 뒤라면 모를까.” “내가 반드시 죽인다.” “······대장답지 않게 흥분했네? 이유가 뭐야?”」 나는 조용히 [1인칭 주인공 시점]을 준비했다. 지금 상황에서는 역시 유중혁에게 이입하는 게 베스트일 것이다. 영 기분은 별로겠지만, 녀석에게 이입해 스킬을 뽑아올 수 있다면 [범람의 재앙]을 상대하는 것이 조금 더 쉬워질 테니까. 「“뭔가 이상한데······ 내가 알던 대장 맞아?”」 고개를 갸웃하던 신유승의 눈빛이 죽은 내 시체를 향한 것은 그때였다. 「“저 사람은 누구야? 내가 알던 회차에서 저런 사람은 없었는데?”」 유중혁은 여전히 말이 없었다. 그는 대신 검을 휘두르고, 휘두르고, 또 휘둘렀다. 그저 그것만이 녀석이 할 수 있는 유일한 대답인 것처럼. 그리고 얼마나 휘둘렀을까. 유중혁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 녀석은.”」 신유승의 얼굴이 점차 불신과 의심으로 물들어갔다. 한참을 침묵하던 유중혁이 짓씹듯 말을 이었다. 「“나의 동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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