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화

101화 물살을 가르며 다가온 어룡의 여왕. 유선형의 몸체가 만드는 웅장함에 한강물이 넘실거렸다. 당황한 화신들이 일제히 한강에서 멀어졌다. 쿠오오오오! “으아아아, 씨발!” “저거 뭐야!” 단지 시선을 마주하는 것만으로 지엄함이 느껴지는 눈빛. 나는 한 종의 지배자와 마주하고 있었다. 신유승이나 이길영이 새삼 얼마나 대단한 녀석들인지 실감이 난다. “엎드려.” 퀸은 내 말에도 수염에 묻은 물을 털며 딴청을 피웠다. 역시, 같은 스킬이 있어도 똑같은 효과를 보는 것은 무리인 모양이다. 생각해 보면 리카온의 「바람의 길」을 빌렸을 때도 비슷했다. 나는 별 수 없이 녀석에게 가까이 다가가 비늘을 기어올랐다. 쿠르르르. 내 손길을 거부하는 듯, 거칠게 요동치는 퀸의 몸체. 지금의 내겐 이 정도가 한계였다. 솔직히 퀸과 싱크로가 맺어진 것만으로 전두엽이 조금씩 타들어가는 느낌이었다. 나는 넋이 나간 화신들을 내버려 두고 입을 열었다. “가자.” 그리고 퀸의 몸부림이 시작되었다. 나를 데리고 장난이라도 치는 듯, 퀸은 내 호흡 따윈 아랑곳 않고 수심과 수면을 오가며 헤엄을 치기 시작했다. “푸하합!” 나는 물에 젖은 생쥐처럼 대롱대롱 매달린 채 연거푸 숨을 뱉어냈다. “이런······!” 그오오오오. 즐겁다는 듯, 주변의 어룡들이 나를 향해 울음을 터뜨렸다. [성좌, ‘긴고아의 죄수’가 당신을 보며 낄낄댑니다.] 통제는 엉망이었지만, 그래도 퀸은 내가 원하는 방향을 향해 조금씩 나아가고 있었다. 용산구의 남서쪽. 그곳에는 한강 지구의 몇 안 되는 섬 중 하나인 ‘노들섬’이 있다. 그리고 내 기억이 맞다면, [범람의 재앙]의 부화 가능성이 가장 높은 곳도 바로 저 섬이었다. 「다섯 번째 재앙은 한강의 인공섬에서 부화했다.」 ‘멸살법’은 작중의 연도를 정확히 밝히지 않은 소설이었다. 때문에 나는 ‘멸살법’이 정확히 몇 년도를 배경으로 하는 것인지 알지 못했다. 내가 사는 연도와 가까울 거라는 생각은 어렴풋이 했지만, 아무래도 10년이나 연재된 소설이다 보니 기술발달사 같은 게 맞지 않을 수가 있었다. 그래서 ‘멸살법’에서는 현대 기기에 관한 언급이 거의 없고, 어떨 때는 확정 지명을 사용하지도 않는다. 지금과 같은 경우가 바로 그랬다. ‘한강의 인공섬’이라니······ 그게 대체 어디란 말인가? 그럼에도 내가 ‘노들섬’을 특정할 수 있었던 것은, 작중에 등장한 묘사와 운석의 크기 때문이었다. 촤아아앗! 퀸의 급정거와 함께 생각은 끊어졌다. 나는 한 바퀴를 구르며 그대로 노들섬에 내던져졌다. 퀸 미르바드는 나를 흘끗 보고는 한강 속으로 사라졌다. 정 없는 자식 같으니. [전용 스킬, ‘책갈피’가 해제됩니다.] “웨에에엑.” 한강을 헤쳐오는 내내 먹은 강물을 한바탕 토했더니, 세상이 한 바퀴 돌았다. 고개를 들었을 때는 노들섬의 경관이 눈앞에 펼쳐졌다. 재앙이 오기 전에도 노들섬에는 와본 적이 없는데, 기분이 이상했다. 한산하게 펼쳐진 노들섬의 나무들은 아직 멸망을 맞기 전의 세계 같았다. 어룡들이 사라진 틈을 타, 강 건너편의 화신들이 도강을 준비하고 있었다. 쐐액, 하는 느낌이 든다 싶더니, 그새 하늘을 날아온 몇몇 화신들의 모습도 보였다. 나는 숨을 죽인 채 나무 뒤에 숨어 그들을 보았다. “어디지? 분명 이리로 갔는데?” 설마, 그새 [비행 기동]을 배운 녀석들이 이렇게 많을 줄이야. 이 자식들은 회귀자도 아닌데 적응이 왜 이렇게 빨라? 너덧 명의 사내들이 가뿐하게 노들섬 위로 착지하며 주변을 살폈다. “거기 형씨들, 같이 찾아서 좀 나눠 먹읍시다. 그놈 세 보이던데 솔직히 혼자선 자신 없잖아?” “내 생각도 그래. 아까 그놈 머리에 별 떠오르는 거 봤지? 괴물 같더라.” “괴수 다루는 거 보니까 최소 영웅급 특성이야 그놈.” “······그래봤자 서쪽의 패왕만큼 세겠어?” 누굴 죽이러 온 것 치곤 제법 수더분한 대화다. 아무리 그래도 나랑 유중혁을 비교해주다니, 황송한 노릇이군. 좀 더 숨어다니다가 제한시간이 끝날 즈음에 모습을 드러내야겠다 싶었는데, 섬의 숲에서 나온 선객이 있었다. “거기 아저씨들. 좋게 말할 때 섬 밖으로 꺼져.” 패기 가득한 목소리. 교복 치마 위에 검은색 후드 짚업을 걸친 소녀는, 긴 장도를 쥔 채 사내들을 향해 걸어갔다. “뭐야 넌?” “어린 년이 겁도 없이······.” 스각. “씨바아아아 내 팔!” 서걱. “으아아아악!” 검이 허공에 선을 긋자, 팔이 달아난 사내들이 비명을 질렀다. 비교적 젊은 축에 속하던 화신 하나가 외쳤다. “쟤 걔에요, 충무공!” “뭐? 그년이 왜 여깄어!” “도망가요! 다들 도망가!” [비행 기동]으로 황급히 꽁무니를 빼는 화신들을 보며, 역시 재능이 괜히 재능은 아니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조금 안 본 사이에 저렇게 강해질 수가 있다니. 아무리 친우의 후손이라 해도, 충무공이 아무나를 자신의 화신으로 삼는 것은 아닌 모양이다. 소녀의 날카로운 장도가 나를 가리켰다. “아저씨도 이만 밖으로 나오지 그래? ‘표적’ 표시 빤히 떠 있는데 숨으면 뭐해?” 그러고 보니 머리 위에 아직도 화살표가 떠 있었다. 나는 한숨을 쉬며 양손을 든 채 숲 밖으로 나왔다. “너도 나 죽일 거냐?” “그러고 싶은데, 우리 사부가 슬퍼할까봐 차마 못 하겠네.” 긴 장도의 소녀, 이지혜가 생긋 웃으며 칼을 집어넣었다. 열흘 만에 다시 만났더니, 그새 능청이 늘었다. 이지혜는 내 다친 팔을 슬쩍 살피더니 말을 이었다. “그간 잘 지냈어? 잘 못 지낸 거 같긴 한데.” “알면 묻지 마. 넌 태풍 여고로 돌아간 것 같더니 왜 여기 있냐?” “며칠 전에 사부가 나 데리러 왔어. 어떻게 찾았는진 몰라도.” 유중혁이? 하긴, 이지혜는 유중혁 파티의 핵심 멤버니까 찾을 거라고 생각은 했지만······. 나는 [냉철한 관찰력]으로 그녀의 체근민을 어림해보았다. 대충, 160이 넘는 값이다. 체력과 근력이 조금 떨어지는 것 같기는 하지만, 이 녀석도 벌써 다섯 번째 시나리오의 능력치 제한 기준에 거의 도달한 것이다. 게다가 [귀살]과 [검술 연마]도 한층 발전한 것 같고. 어째 ‘멸살법’의 모든 인물들은 내 눈에 안 보여야 더 빨리 성장하는 것 같다. 다들 나 몰래 정신과 시간의 방이라도 갖고 있는 건가? “아저씨 일행들은? 희원 언니는 만났어?” “용산구에서 기다리고 있어. 희원 씨는 아직이고.” “아쉽네, 한번 보고 싶었는데.” 그러고 보니 정희원과 이지혜는 포지션이 비슷했었지. 나는 조심스레 주변을 살피며 물었다. “혹시 유중혁도 함께 온 거냐?” “음? 아저씨 다 알고 온 거 아냐?” 그때, 노들섬의 가장자리에서 복작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어룡들과 사투를 벌이는 화신들이 어느새 섬의 근처까지 다가와 있었다. 어떤 녀석들은 오리배를 타고 왔고, 어떤 녀석들은 헤엄을 쳐서 왔다. 유람선을 타고 오거나 특수한 스킬로 상륙한 녀석들도 있었다. 누가 보면 단체 관광객이라고 생각할 법한 진풍경이었다. “찾아라! 놈이 여기 있다!” 그리고, 아마 이번 관광 상품은 나인 것 같았다. 화신들의 모습을 본 이지혜가 인상을 굳혔다. “······저 떨거지들은 왜 끌고 온 거야?” “왜긴, 재앙 잡으러 데려 온 거지.” 뜻이 있는 녀석들은 알아서 세력을 꾸려 재앙에 대비하겠지만,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다. 소속이 없는 화신들은 또 서울 곳곳에 숨어서 누군가가 메인 시나리오를 대신 깨주기를 기다릴 것이고, 그로 인한 전력 손실은 어마어마할 것이다. 마지막 재앙은, 그런 어설픈 각오로는 깰 수 없다. 모두가 함께 맞서지 않으면······. “뭐하러 그런 짓을 해? 안 잡아도 되는데.” “응?” “재앙 안 잡아도 된다고. 우리 사부가 그랬어.” 뭔 소리냐는 내 눈빛에, 이지혜가 말을 이었다. “마지막 재앙은 자기가 있으면 전혀 위험하지 않다던데? 대신 쓸데없는 녀석들 섬에 못 들어오게 막으라고······ 아씨, 저것들 훅 들어오네.” 이지혜가 다시 칼을 뽑으며 달려나갔다. 얘가 왜 섬을 통제하고 있나 했더니, 그런 이유가 있었군. 잘 보니, 섬의 가장자리에서 인파를 통제하는 사람은 이지혜 하나가 아니었다. 뭍으로 다가오는 배를 향해, 거한 하나가 손을 흔들고 있었다. “여러분, 이곳에 들어오시면 안 됩니다. 여긴 위험 지역입니다!” “뭐? 네가 뭔데?” “전 6502부대 중위······.” “어디서 중위 나부랭이가 깝치고 지랄이야!” 날아드는 사내의 칼날은 중위의 손아귀에 허무하게 붙잡혔다. “······공권력에 함부로 저항하면 위험하지 말입니다.” “이, 이거 놔!” 중위는 거대한 곰을 연상시키는 수트 같은 것을 입고 있었고, 얼굴 곳곳엔 잡스런 수염이 나 있었다. “제가 안전한 곳으로 모셔다드리겠습니다.” 중위는 한 손으로 가뿐히 사내를 들어, 한강 반대편으로 던져 버렸다. 콰아아아아! 사내는 엄청난 속도로 한강을 가로질러, 반대쪽 뭍에 굉음을 내며 파묻혔다. 중위가 물었다. “또 안내가 필요하신 분 계십니까?” “미친! 괴물이다!” 물러서는 화신들을 보며, 중위는 산처럼 쌓인 짬이라도 보듯 피곤한 표정이었다. 지독하게 지친 눈빛, 오랜만에 보는 얼굴이었다. 「힘들어······.」 「죽을 것 같아······.」 「독자 씨, 어디 계십니까······.」 “이현성 씨.” 그 말에, 이현성이 내 쪽을 돌아보았다. 마치 메마른 사막에서 오아시스라도 발견한 듯한 표정. “독자······ 독자 씨?” 나를 향해 다가오는 이현성. 나는 본능적으로 한 걸음을 물러났다. “도, 독자 씨! 접니다! 이현성입니다!” 내가 입을 떼려는 찰나, 또 한 무리의 화신들이 소란스럽게 들이닥쳤다. “표적이 저기 있다! 쫓아라!” 이현성의 얼굴이 종잇장처럼 구겨졌다. “제가······ 위험 지역이라고 했잖습니까!” 그리곤 반사적으로 등을 돌려 바닥을 향해 주먹을 내리꽂았다. [등장인물 ‘이현성’이 성흔 ‘태산 부수기 Lv.5’를 사용합니다!] 노들섬 전체가 들썩이는가 싶더니, 섬의 가장자리가 굉음을 일으키며 폭발했다. 나는 날아가는 화신들을 보며 잠깐 넋을 잃었다. 유중혁 이 자식, 대체 사람을 어떻게 굴리면 이렇게······. 나는 반색하며 다가오는 이현성을 향해 물었다. “유중혁은 어디 있습니까?” 이현성의 표정이 살짝 서운함으로 물들었다. “아, 섬 중앙입니다. 저······.” “금방 다시 오겠습니다. 그때 얘기하죠.” 나는 이현성의 간절한 눈빛을 외면하고, 일단 섬의 중앙으로 내달렸다. 이현성에게 묻고 싶은 것은 많았지만, 지금은 해후를 만끽할 때가 아니었다. 빨리 확인해야 할 게 있었기 때문이다. 숲을 얼마간 헤쳐갔을까. 공원의 중심에 박힌 거대한 운석이 보였다. 지금까지 본 어떤 운석보다도 압도적인 크기. 표면에 감도는 붉은 색 기운은, 확실한 멸망을 함축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운석 앞에 서 있는 한 여인. “아, 당신은······?” 이설화의 표정이 변하는 순간, 운석의 뒤쪽에서 내가 찾던 녀석이 걸어 나왔다. “유중혁.” 무표정한 모습의 유중혁이 본연의 존재감을 발출하며 그곳에 서 있었다. “지금 뭘 하고 있는 거냐?” “미래시를 갖고 있으니 알고 있을 텐데.” 태연하게 대답하는 녀석을 보며, 나는 할 말을 잃었다. 거대한 [재앙 운석]의 중턱에 꽂힌 [노란색 운석]. 나는 놈이 왜 이곳에 빨리 오고자 했는지 바로 눈치챘다. “설마 길잡이 운석을 재앙한테 먹인 거냐?” “어차피 길잡이들은 나중에 방해만 돼. 처리할 수 있을 때 죽이는 편이 낫다.” 역시나, 불길한 예감은 언제나 맞아 떨어진다더니. 이 새끼, 지금 재앙을 조기 부화시키려 하고 있다. 누가 이설화랑 연인 아니랄까봐. “아니, 대체 왜? 길잡이는 그렇다 쳐도, 재앙을 일찍 깨워서 어쩌려고? 드디어 미쳐버린 거냐?” 유중혁의 눈빛에 미미한 실망이 깃들었다. “네놈도 이번만큼은 잘 모르는 모양이군.” “뭐?” “이번 재앙은, 전생에 내 동료였다.” 아니, 그걸 누가 모르냐? 유중혁은 특유의 오만한 얼굴로 선언했다. “그러니 이번 재앙은 안전하다.” ······안전? 갑자기 여러 가지 생각들이 머릿속을 스쳐 갔다. 아······ 중혁아. 그래. 어쩐지 네가 이번 회차에 너무 잘한다 싶더라. [‘범람의 재앙’이 부화를 준비합니다.] 몇 번인가 도움을 받는 바람에 잠시 잊고 있었다. 눈앞의 이 개복치 녀석은, 앞으로 골백번을 더 죽고 난 후에야 간신히 결말에 한 발짝 걸치는 녀석이라는 사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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