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7화

537화 “달려! 조금만 더 가면 돼!” 한수영은 일행들과 함께 성좌들의 파도를 뚫었다. 부서지는 방주의 파편들과 멀찍이 드러난 [최후의 벽]. 거대 설화의 가호가 일행들을 보호하듯 감싸고 있었다. [거대 설화, ‘운명대적자’가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이번 회차에 들어서며 얻은 새로운 거대 설화. 이 설화가 없었더라면, 그들은 몇 번이고 죽었을 것이다. 멀리 그들을 향해 진격하는 성좌들의 모습이 보였다. <베다>와 <파피루스>의 신화급 성좌들이 성난 짐승처럼 달려오고 있었다. 「지난 회차와는 달리, 이번엔 그들을 지원할 ‘이계의 신격’들이 없다.」 압도적으로 불리한 군세. 그럼에도 밀리지 않는 것은, 그들을 지원하는 역대 최강의 회귀자 집단이 있었기 때문이다. 전방을 맡은 것은 중국과 인도의 화신들이었다. 중국의 페이후가 신호하자, 그의 세력인 [아큐]의 화신들이 일제히 병장기를 꺼내 들었다. 인도의 란비르 칸도 질 수 없다는 듯 합세했다. 그를 따르는 [트라무르티]의 화신들이 창을 꺼내들자, 일대에 모래 폭풍이 불기 시작했다. 거기에 셀레나 킴이 이끄는 [저스티스]와, 함께 따라온 이리스가 지휘하는 [솔제니친]이 양 날개를 맡았다. 하지만 여전히 전황은 불리했다. [가거라, 여긴 내가 맡아주마.] [내 제자를 구해오지 못한다면 네놈들의 목숨은 없다.] 키리오스와 파천검성. 그들 역시 100인의 회귀자들 중 하나였다. 두 사람의 병기가 전장을 휩쓸자, 무림 출신의 초월자들이 그 뒤를 보조하며 달려왔다. 콰아아아아아아! 회귀를 통해 더욱 강해진 키리오스의 권격과 파천검성의 검격이 경쟁하듯 전장을 뒤흔들었다. 은빛 폭풍 속에서 찢겨 나간 성좌들의 비명이 울려 퍼졌다. 그들이 조금이라도 시간을 벌어주는 동안 [벽]을 열어야 했다. 「이미 한 번 열었던 벽이다.」 마침내 도달한 장벽을 올려다보며, 한수영이 입을 열었다. “장하영.” “예압.” 기다렸다는 듯 장하영이 손을 뻗었다. 다시 한번 시나리오로 돌아온 그녀는, 이제 어엿한 ‘초월좌들의 왕’이었다. [‘불가능한 소통의 벽’이 자신의 자리를 되찾았습니다.] 그들의 거대 설화에 반응하듯, [최후의 벽]이 진동을 시작했다. “유상아.” 고개를 끄덕인 유상아가 앞으로 나섰다. [‘윤회를 결정하는 벽’이 자신의 자리를 되찾았습니다.] 「[당신은······ 그런가······ 그 오랜 세월을 돌고 돌아 다시 여기까지 왔군요, 나의 아라한이여.]」 나지막이 들려오는 석존의 설화. 이 세계선의 석존은 유상아의 존재를 어렵지 않게 납득했다. 기나긴 윤회를 반복해온 그는, 이 우주의 법칙을 이해하고 있었던 것이다. “정희원, 이길영.” ‘메타트론’과 ‘아가레스’로부터 건네받은 [선악을 가르는 벽]. 정희원이 먼저 자신의 손을 [최후의 벽] 위에 가져다 대었다. 「[······ 정말 당신들은 벽의 너머를 보고 온 것입니까?]」 이 세계선의 메타트론은 일행들의 존재에 경악했다. 그는 <에덴>의 멸망을 받아들였고, 그것이 바뀔 수 없는 결과라는 것을 인정했다. 그리고, 이전 회차와는 조금 다른 결단을 내렸다. 화신들을 돕고 있는 <에덴>의 대천사들이 바로 그 증거였다. 그런데 기이한 선택을 내린 것은 메타트론만이 아니었다. 「[재미있군. 마왕인 내게 감히 [벽]을 달라고 말하다니.]」 성마대전에서 서로를 찢어 죽일듯 싸웠던 마왕과 천사들이 이번에는 그들의 편에 섰다. 그저 각자의 생존을 위한 선택이었지만, 어쨌거나 <김독자 컴퍼니>에겐 커다란 도움이었다. [‘선악을 가르는 벽’이 자신의 자리를 되찾았습니다.] [다수의 성좌들이 <김독자 컴퍼니>를 향해 자신의 격을 개방합니다!] 모든 성좌가 동료가 된 것은 아니었다. 여전히 <스타 스트림>의 절대다수는 그들의 적이었고, 그들을 돕는 성좌들은 소수였다. 그럼에도 일행들은 무사히 여기까지 왔다. 몸 곳곳에 깊은 흉터가 남기도 했지만 누구도 잃지는 않았다. 누구도 욕심을 부리지 않았기에, 그리고 모두의 목표가 같았기에 할 수 있는 일이었다. 한수영은 마지막으로 이현성을 돌아보았다. 이현성의 등에는 창백한 얼굴의 김독자가 업혀 있었다. 정확히는, 김독자가 남긴 아바타였다. 한수영은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도와줘, 김독자.” 그 역시 분명한 김독자였다. 1863회차의 한수영 또한 분명한 ‘한수영’이었던 것처럼. “또 다른 나는 이걸 원하지 않을 수도 있어. 그 이야기는······ 거기서 끝난 거야······.” 더듬거리며 말하는 김독자. 그는 이제 자신이 ‘김독자’의 아바타라는 것을 납득하고 있었다. 한수영은 그런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말했다. “그건 또 다른 너를 만나서 물어보자.” 그러자 김독자가 슬프게 웃었다. 그는 한수영을 보고, 일행들의 얼굴을 한 번씩 바라보았다. “이것이, 너희가 원하는 이야기라면······.” 창백한 손이 [최후의 벽]에 닿았다. 최후의 벽의 마지막 파편은 [제4의 벽]. 그리고 김독자의 아바타인 그 또한, 그 열쇠의 일부를 공유하고 있었다. 츠츠츠츠츠······! 이 세계가 그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 것인지, 김독자의 몸이 불안하게 떨렸다. 이어서 쩌저저적, 하는 소리와 함께 벽의 일부가 열렸다. 감전이라도 된 듯 몸을 떨던 김독자가 그대로 기절했다. 그런 그를 이현성이 업었다. 흑천마도의 날을 털어낸 유중혁이 말했다. “전속력으로.” 신호와 함께 일행들이 달리기 시작했다. “다들 기운 내요! 이제 조금 남았어요!” “아직 생사환 남았으니까 조금이라도 다친 사람 빨리 말해요!” 서로를 독려하는 일행들의 목소리. 그 목소리를 들으며 한수영도 달렸다. 눈앞에 새하얀 설원이 펼쳐졌다. 설원의 곳곳엔 눈처럼 쌓인 활자들이 보였다. 한수영은 활자들을 딛고 뛰어올랐다. 1863회차의 자신은 수정본에 이 이야기를 썼을까. 김독자의 이야기를, 그 이후의 에필로그를 생각했을까. ······모르겠다. 그것만큼은, 도무지 기억이 나질 않았다. 그때, 뭔가가 한수영의 속눈썹에 내려앉았다. 무심코 눈을 문지르자, 손에 눈발 같은 것이 묻어 나왔다. 「······이 자식, 나한텐 가난한 문학 소녀였다며.」 허공에서 새하얀 활자의 눈발이 흩날리고 있었다. 분명 그곳에 존재하고 있으나, 순백에 가까운 색깔이어서 보이지 않는 문장들. 「한수영.」 한수영은 자신의 손에 떨어진 그 문장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네 이야기를······.」 이것은 김독자의 문장이었다. 다른 누구도 아닌, 김독자가 스스로 써낸 감상들이었다. 한수영은 그 문장을 힘주어 쥐었다. 새벽에 밀려난 별빛처럼, 문장들은 그녀의 손 위에서 부스러졌다. 「걱정 마. 읽을게. 3천 편이 넘어도.」 그것은 그녀가 그토록 갖고 싶었던 문장들이었으나, 그녀의 것은 아니었다. 밀려오는 기억들이 있었다. 또 다른 자신이 겪었던 감정들. 한수영은 지금도 그것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었다. 어디로 향해야 할지 모르는 원망이 그녀의 마음속에서 번졌다. 「이 설원 너머에, 김독자가 있다.」 김독자를 김독자이게끔 만든 김독자. ‘멸살법’을 기억하는 김독자. 행복했던 기억들 대신, 자신이 쓴 책의 기억을 택한 김독자······. “빌어먹을······ 빌어먹을!” 그녀였지만 그녀가 아닌 존재가 쓴 책. 그 책이 김독자를 구했고, 김독자를 파멸시켰다. 그리고 그녀는, 이제 또 다른 자신이 만든 이 비극의 끝을 책임져야 했다. 멀리서 희미한 불빛이 드러난 것은 그때였다. 쿠구구구구구······. 아득한 설원 너머로 뭔가가 달려가는 것이 보였다. 일행들은 동시에 서로를 바라보았다. 저게 무엇인지 모르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지하철이었다.」 “키메라 드래곤!” 포효하며 소환된 키메라 드래곤이 일행들을 태우고 날았다. 순식간에 가속한 키메라 드래곤이 창공을 가르며 지하철의 후미를 향해 접근했다. 이제 조금이었다. 조금만 더 가면― [갸아아아아아아!] 갑자기 키메라 드래곤이 비명을 지르며 균형을 잃었다. 깜짝 놀란 신유승이 뒤를 돌아보자, 무언가가 키메라 드래곤의 꼬리를 물고 있었다. 【그르르르르르······!】 새카만 그림자를 닮은, 거대한 들개들이 드래곤의 꼬리와 날개를 물어뜯고 있었다. 창공에 열린 포탈을 통해 넘어온 들개들. 뜯겨 나간 키메라 드래곤의 살점이 새하얀 설원 속에 흩어지고 있었다. “심연을 좇는 사냥개?” 언젠가 본 적이 있었다. ‘은밀한 모략가’와 999회차의 인물들을 공격하던 타차원의 사냥개들. 개연성에 위배되는 세계선의 방랑자들을 공격한다는 무시무시한 괴물들이었다. 하지만 저 사냥개들이 왜 그들을 공격한단 말인가? 유중혁이 침음하며 말했다. “······아무래도 ‘집단 회귀’가 세계선에 위협이 된다 판단한 모양이군.” “이런 제기랄······.” 포탈을 통해 넘어오는 사냥개의 숫자는 점차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고 있었다. 덩치가 큰 사냥개들도 보였다. 이제껏 본 적 없는 강력한 기세. 설원을 울리는 포효와 함께, 사냥개들이 허공을 격하고 일제히 날아들었다. 새카맣게 밀려든 사냥개들이 일행들을 덮치는 바로 그 순간. 쿠르르릉, 하며 천공이 무너지는 소리가 들렸다. 황금빛 전격이 몰아치며, 사냥개들이 나가떨어졌다. 그가 누구인지 제일 먼저 알아본 것은 유상아였다. “제천대성!” 고고히 빛나는 금테. 여의봉의 주인이 씩 웃고 있었다. [여긴 내게 맡겨라.] [성좌, ‘긴고아의 죄수’가 자신의 격을 개방합니다!] 제천대성뿐만이 아니었다. 일행들이 열어 놓은 [최후의 벽]의 통로로 뒤따라 들어온 이들이 있었다. [이 몸이 양손을 쓰면 어떻게 되는지 보여줄 기회군!] [성좌, ‘심연의 흑염룡’이 자신의 모든 봉인을 해제합니다!] 거기에, 숭고한 대천사의 불꽃이 사냥개들을 불태웠다. [999회차의 나만큼은 아니지만······ 시간을 끄는 거라면 문제없지.]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지옥의 불꽃을 일으킵니다!] 순백의 날개 사이로 화려하게 피어오르는 [지옥염화]의 불꽃. 옅은 미소와 함께 우리엘이 말했다. [김독자를 부탁해, 희원아.] 성좌들이 벌어준 막간을 틈타, 마침내 키메라 드래곤이 지하철의 후미를 물었다. 하지만 단단한 지하철의 외부는 드래곤의 송곳니에도 부서지지 않았다. “사부! 합공!” 양손에 검을 쥔 이지혜가 드래곤의 등을 타고 날아올랐다. 해상전신의 [쌍룡검]과, 고려제일검의 [무쌍검]. 두 자루의 검이 그녀의 양손에 쥐어졌다. [성좌, ‘고려제일검’이 자신의 가호를 내립니다!] [성좌, ‘해상전신’이 자신의 화신을 응원합니다!] 제 사식(四式). 사검참허(四劍斬虛). 언젠가 척준경이 ‘형용할 수 없는 아득함’을 상대하며 발동했던 바로 그 기술. 아직 미숙했지만, 이제 이지혜도 그 검격을 사용할 수 있었다. ‘환생자들의 섬’에서 쌓은 지독한 수련과 그녀의 놀라운 재능이 허락한 기적이었다. 콰콰콰콰콰콰! 드래곤의 송곳니에도 끄떡없었던 지하철의 외부가, 연속된 그녀의 검격에 조금씩 찌그러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 틈을 놓치지 않은 유중혁의 [흑천마도]가 움직였다. 파천검도(破天劍道). 비전오의(秘傳奧義). 유성참(流星斬). [흑천마도]가 그려낸 파멸의 궤적이 지하철의 후미를 강타했다. 자욱한 먼지와 함께 시야가 걷혔을 때, 지하철의 후미에는 작은 구멍이 나 있었다. “됐어! 모두 들어가!” 일행들은 신속하게 지하철 내부로 침투했다. 정확히는, 단 두 사람만을 제외하고. “유중혁! 뒤!” 【크르르르르!】 성좌들이 미처 막아내지 못한 사냥개들이 후미를 향해 밀려오고 있었다. 그들을 정면에서 막아낸 것은 초월형의 모든 힘을 개방한 유중혁이었다. 폭풍처럼 휘몰아친 검격으로 사냥개들을 쳐내며, 유중혁이 외쳤다. “먼저 가라! 금방 따라 가겠다!” 한수영은 입술을 깨물었다. 다른 이도 아니고 일행 중 최강인 유중혁이다. 신화급 성좌와도 겨룰 수 있을 정도가 된 그이니, 심연의 사냥개들에게 쉽게 당하지는 않을 것이다. “······죽지 말라고.” 한수영은 그 말을 남기고 곧장 지하철 내부로 들어갔다. 내부는 그들이 기억하는 3호선의 모습 그대로였다. 「김독자를 두고 갔던, 바로 그 지하철.」 한수영은 재빨리 열차 칸의 정보를 살폈다. 츠츠츳, 하는 소리와 함께 열차 칸의 번호가 떠올랐다. 한수영이 반사적으로 외쳤다. “김독자는 3807칸에 있어! 모두 앞칸으로 가!” 언젠가 거대 설화 ‘마계의 봄’을 얻었을 때와 비슷한 상황이었다. 일행들도 상황을 눈치챈 것 같았다. “수르야와 맞서 싸웠을 때와 비슷하군요. 앞문은 제가 열겠습니다!” 냅다 달려간 이현성이 전신의 모든 근육을 팽창시키며 기합을 냈다. “하아아아아압!” 숙련도의 한계치를 초월한 [태산 밀기]가 발동하자, 두터운 지하철의 문이 삐거덕거리며 열렸다. [거대 설화, ‘마계의 봄’이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무대화’가 발동합니다!] 모두의 역할이 있었기에 이룰 수 있었던 거대 설화. 그 거대 설화의 가호가 일행들을 돕고 있었다. 이현성이 열 수 없는 문은 유상아가 버튼을 찾아냈고, 유상아도 열지 못한 문은 이길영이 벌레들을 동원해 부품을 마모시켜 열었다. 그렇게 열고, 열고, 또 열고. 열리는 문의 개수가 늘어나는 만큼 일행들의 표정도 상기되고 있었다. 「저 너머에, 분명 김독자가 있다.」 일행들 모두가 느끼고 있었다. 새카만 문. 이 문이, 분명 [최후의 문]이다. “······끄응, 제 성흔으로도 무리입니다.” 그러나 문은 좀처럼 열리지 않았다. “저도 버튼을 찾을 수가 없어요.” “벌레들도 구조를 알 수가 없대요.” “내가 스킬로 부숴 볼까요?” 이지혜의 검격에 이현성의 [태산 부수기]까지 사용했음에도 지하철의 문은 끄떡도 하지 않았다. 일행들이 서로를 돌아보았다. 어째서, 이 문만은 열리지 않는 것일까. 유상아가 입을 연 것은 그때였다. “잠깐만요. 이 문, 그때 유중혁 씨가 부순 문이랑 똑같아요.” “유중혁이?” “네, 3회차에서 중혁 씨가 이 문을 부수고 넘어온 적이―” 한수영은 반사적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유중혁은 함께 오지 않았다. 그는 열차의 후미에서 ‘심연을 좇는 사냥개’를 상대하고 있을 것이었다. 신유승이 소리친 것은 그때였다. “사냥개들이 와요!” 어느새 그들이 부순 틈으로 슬글슬금 사냥개들이 기어 들어오고 있었다. 마음이 다급해졌다. 유중혁은 어떻게 된 것일까. 설마 저 녀석들에게― “뒤를 막아!” “언니! 빨리!” 생각할 시간이 없었다. 탱커처럼 달려간 이현성이 [강철화]로 사냥개들의 송곳니를 견뎌내자, 이지혜와 정희원이 검을 뽑아 들고 사냥개들을 쳐냈다. 장하영이 외쳤다. “한수영! 어떻게든 해봐!” 한수영은 문을 향해 다가갔다. 그녀가 문에 손을 가져다 대자, 희미한 스파크가 튀기 시작했다. 한수영은 천천히 눈을 감았다. 결국 그 모든 문장은 그녀가 이 손으로 썼다. 설령 다른 ‘한수영’이라고 해도, 그 또한 분명 한수영이었다. 그러니 이 문 또한 이 손으로 열 수 있어야 했다. 츠츠츠츠츠츠―! 문장을 고쳐 쓰듯이, 한수영은 벽의 설화를 건드리기 시작했다. 「“나는 유중혁이다.”」 회귀자 유중혁은 그녀가 만들어 낸 인물이었다. 그러니 그녀도, 이 문을 열 수 있어야 했다. 「하지만 한수영은 알지 못했다.」 츠츠츠츠츳! 「작가의 손을 떠난 이야기는, 이제 작가의 지배를 받지 않는다는 것을.」 한수영의 머릿속으로 ‘멸살법’의 우주가 흘러들어오고 있었다. 그녀가 쓴 것, 그녀가 쓰지 않은 것. 그녀가 상상한 것과 상상조차 하지 못한 이야기들이 한꺼번에 그녀의 머릿속으로 역류해오고 있었다. “큭······!” 눈에서, 입에서, 피가 흘러내렸다. 기혈이 역류하며 새빨간 피가 지하철 바닥으로 쏟아졌다. 한수영은 붉게 물든 시야 속에서 일행들을 돌아보았다. 점점이 흩어져 싸우는 일행들. 지하철의 통로 너머로, 그들이 달려온 발자국이 설화처럼 남아 있었다. [당신에겐 ‘덮어 쓰기’의 권한이 없습니다!] 「이미 완성된 세계가 그녀의 눈앞에 있었다.」 자신을 부르는 일행들의 목소리가 멀게 느껴졌다. 「결과가 원인을 삼키고 다시 원인이 결과를 삼키는 세계. 모든 가능성이 동시에 존재하며, 서로가 서로를 지탱하는 세계. 이야기 스스로가 이야기를 생산하는, 영원불멸의 완전한 서사.」 돌아보자, 스파크와 함께 눈앞의 공간이 이지러지고 있었다. 지하철의 네모난 문이 천천히 회전하며 원을 그리기 시작했다. 사납게 회전하는 문은 곧 새카만 원이 되었다. 그 어떤 외부의 틈입도 허락하지 않는 완벽한 원. 비틀거리며 원을 향해 손을 뻗었지만, 한수영은 원을 건드릴 수조차 수 없었다. 그 원은 하나의 마침표처럼 보였다. 이 이야기가 이로써 완전하다 선언하는 마침표. 「t l s 1 2 3」 그 마침표가 그녀를 향해 말하고 있었다. 「너 는 이 이 야 기를 바 꿀 수 없 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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