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화
53화
붉은 운석에서 적색 아우라가 일렁이더니, 이내 플랫폼 전역으로 눈부신 빛이 쏘아졌다.
“오오! 드디어!”
몇몇 <선지자들>이 좋다고 비명을 질렀다.
정희원과 이현성이 급히 다가왔다.
“도망치라뇨? 무슨······.”
이미 늦었다.
적색 아우라가 플랫폼 전역으로 퍼지며, 희미한 결계가 역을 둘러싸는 것이 보였다.
이제 <선지자들>중 누구도, 안국역에서 나갈 수 없을 것이다.
[과도한 필터링에 항의하던 성좌들이 피켓을 내립니다.]
[상당수의 성좌들이 ‘징조’에 눈을 반짝입니다.]
[성좌, ‘긴고아의 죄수’가 호기심 어린 눈으로 상황을 지켜봅니다.]
[성좌, ‘은밀한 모략가’가 당신의 기발한 전략을 기대합니다.]
심지어 성좌들마저 신나서 간접 메시지를 쏘고 있다.
‘멸살법’의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상황은, 지금처럼 성좌들이 단체로 파티를 벌일 때다.
나는 긴장한 정민섭을 향해 물었다.
“혹시, 오늘 여기 모이자고 한 것도 그 1124번인가 하는 놈이냐?”
“예? 거기까진 잘 모르겠습니다. 다 같이 합의한 줄로만······.”
누군가가 고구마를 열 개쯤 먹인 기분이다.
설마 일이 이렇게 꼬일 줄이야.
―다들 제 뒤로 오세요.
나는 운석의 동향에 주의하며 일행들을 보호했다.
―도망 안 가요?
―못 갑니다. 뒤쪽을 보시면 알겠지만, 결계가 생겼어요.
―예? 무슨 결계죠?
나는 대답하지 않고 플랫폼 중앙의 운석을 노려보았다.
[운석]은 ‘다섯 번째 시나리오’의 메인 이벤트다.
색깔과 밝기, 크기와 종류에 따라 보상 또는 위험이 잠들어 있는 운석.
그런데 지금 보이는 운석은, 내가 알기로 절대 부화시키면 안 되는 운석이다.
3회차에서 <성유물>이 나온 운석이 ‘밝은 적색’이었기 때문에 다들 착각하고 있는 모양인데······.
“성유물이 나오면 주인은 어떻게 가리지?”
“그야······.”
아직까지도 정신을 못 차린 몇몇 <선지자>들이 운석에 손을 댄 순간.
[다섯 번째 메인 시나리오의 징조가 나타납니다.]
메시지가 떠올랐다.
“엉? 뭐야, 이거?”
“갑자기 메인 시나리오가 왜······.”
쩌저저적―
운석의 표면에 한 줄기 금이 가더니, 붉은빛이 쏟아져 나왔다. 제일 먼저 빛을 맞은 것은 의아하다는 듯 운석을 들여다보던 선지자였다.
쉬익―
머리를 잃은 선지자의 몸뚱이가, 실이 끊어진 인형처럼 천천히 바닥에 쓰러졌다.
“이거 뭐야!”
놀란 이들이 비명을 지르며 물러섰지만, 이미 사태는 걷잡을 수 없었다.
나는 일행을 데리고 결계의 가장자리까지 물러선 채 상황을 지켜보았다.
‘멸살법’에서 저런 색깔의 운석을 본 기억은 나는데, 뭐가 나왔었는지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제발, ‘대재앙’만 아니기를.
꽈드드드득!
운석이 갈라지며 붉은 용암이 울컥울컥 쏟아져 나왔다. 주변의 플랫폼이 타들어가며 고약한 냄새를 풍겼다. 공기의 온도가 급속도로 올라가며, 숨쉬기가 버거워졌다.
주변의 환경이 바뀌고 있었다.
이건······ 용암지대인가?
그렇다는 것은······.
[5급 화룡종(火龍種), ‘레서 드래곤 이그니르’가 등장했습니다!]
“시발? 뭐야! <성유물>은······?”
당황한 선지자 몇 명이 뒤늦게 신법 스킬을 사용했다. 그러나 운석 속에서 뻗어 나온 긴 꼬리가 달아나는 몇몇 선지자들을 잡아챘다.
파스스스!
“끄아아아악!”
꼬리에 휘감긴 선지자의 몸이 순식간에 불타올라 스러졌다. 몇몇 선지자들이 스킬을 사용해 꼬리를 공격했으나, 역으로 그들의 무기가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이, 이 괴물은······.”
고작해야 가로세로 2미터 정도 크기의 운석이었는데, 그 틈으로 기어 나오는 괴수는 꼬리만 5미터를 훌쩍 넘는 괴물이었다.
정희원이 물었다.
―저게 대체 뭐예요?
―재앙입니다.
―재앙이요?
쩌저적, 하는 소리와 함께 운석의 나머지 부분이 갈라지며, 화룡종의 전체가 차원을 뚫고 등장했다.
그오오오오―!
드래곤으로 따지면 막 태어난 헤츨링 정도.
심지어는 그 헤츨링의 열화판에 불과한 놈이지만, 괜히 드래곤이 모든 괴수종의 정점에 군림하는 것이 아니다.
6급 괴수종만 해도 여기 있는 <선지자들>쯤은 다 쓸어버릴 텐데, 무려 5급 화룡종이라니······.
“유중혁 님!”
몇몇 선지자들이 나를 부르자, 이쪽으로 시선이 집중되었다.
나는 인상을 찌푸렸다.
사고는 니들이 치고, 해결은 내가 하냐?
“모두 가장자리로 물러나라.”
말 잘 듣는 강아지처럼, 전원이 플랫폼의 귀퉁이로 움직였다. 발재간이 있는 녀석들은 벌써 플랫폼 위층으로 달아나는 중이었다. 하지만.
투웅!
“제기랄, 결계가 있어!”
열화판 레서 드래곤은 ‘소재앙’이다.
지금 상황에서야 소재앙이든 대재앙이든 마찬가지지만, 그래도 절망의 크기가 달랐다.
적어도 이것은, 내가 알고 있는 패턴이니까.
유중혁의 무수한 ‘회귀행’ 중에는, 분명 이런 녀석을 상대한 적도 있었다.
나는 일행들을 바라보았다.
―곧 히든 시나리오가 시작될 겁니다.
―히든 시나리오요?
―네 번째 시나리오에서 나오면 안 되는 놈입니다. 지나치게 비정상적인 난이도가 설정되었으니, 곧 개입하는 존재가 있을 겁니다.
기본적으로 재앙에 대응하려면 다섯 번째 시나리오에서 주어지는 각종 혜택들이 필요하다.
가령 푸른 운석이라든가, 녹색 운석에서 나오는 것들······.
그런데 지금 우리에겐 아무것도 없다.
그렇다는 것은, 우리 쪽에 균형을 맞출 뭔가가 주어질 거란 얘기다.
[일부 성좌들이 비정상적인 시나리오 난이도에 항의합니다.]
역시.
다음 순간, 허공에서 스파크가 튀더니 작은 아이 크기의 존재가 나타났다.
비형과 같은 하급 도깨비는 아니었다.
단정한 정장을 갖춰 입고, 머리에는 작은 뿔 두 개를 단 녀석.
볼 옆으로 툭 튀어나온 작은 혹주머니가 인상적인 녀석이었다.
이름은 모르겠지만, 어떤 존재인지는 알겠다.
저놈은 ‘중급 도깨비’다.
[흐음. 이거 곤란한데. 여러분 어쩌다가 이 ‘루트’로 들어오신 거죠? 최근 들어 지나치게 설치는 것 같긴 했는데······, 거참.]
중후한 목소리가 울려 퍼지는 순간, 레서 드래곤의 움직임이 일순 멈추었다.
과연, 중급쯤 되면 저 정도 ‘시나리오 개입’도 가능하다.
[네 번째 시나리오도 못 깬 판국에, ‘재앙’을 깨우면 어쩌자는 겁니까?]
중급 도깨비가 나타났다는 것은, 이제 ‘초반 시나리오’가 거의 막바지에 도달했다는 뜻이었다.
저놈이 이곳을 주목하는 한, 나는 비형과의 계약 혜택을 거의 볼 수 없을 것이다.
[몇몇 성좌님들이 유독 아끼는 분들이 있어서 이대로 둘 수는 없고······, 그렇다고 난이도를 하향해 드릴 수도 없고······.]
녀석의 시선이 스치듯 내게 머물렀다.
“그래도 이건 아니잖아! 아직 우린 네 번째 메인도 못 깼다고!”
사색이 된 선지자 하나가 고함을 질렀다.
극초반 하차자인 모양인지, 주변에 있던 선지자들이 재빨리 놈의 입을 틀어막는 것이 보였다.
지금 도깨비한테 소리를 질러서 좋을 것은 아무것도 없다.
[방금 결정했습니다. 역시 난이도 하향 따위는 없습니다.]
선지자들이 소리친 녀석을 노려보았다.
히끅, 하고 넘어가는 숨 소리.
녀석들도 ‘멸살법’을 읽었으니 알 것이다.
도깨비는 말을 번복하는 법이 없다는 것을.
하지만 이것도 알아야 한다.
[그래도······ 이대로 여러분이 다 죽어버리면 재미가 없으니, 제 재량으로 시나리오 내용을 살짝 바꿔보죠.]
도깨비 녀석들은, 생각보다 말이 많다.
[히든 시나리오가 도착했습니다!]
레서 드래곤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붉은 가죽으로 덮인 녀석의 앞발이 플랫폼 바닥을 강하게 내리쳤다.
꽈과과광!
나는 튀어 오르는 파편을 피하며, 도착한 시나리오를 열었다.
+
<히든 시나리오 ― 뭉쳐도 죽고 흩어져도 죽는다>
분류 : 히든
난이도 : A
클리어 조건 : 제한시간 내에 소재앙 ‘레서 드래곤 이그니르’를 사냥하거나, 녀석의 공격 속에서 살아남으시오.
제한시간 : 20분
보상 : 3000코인
실패시 : 사망
* 해당 미션에는 히든 피스가 숨어 있습니다.
+
20분 동안의 생존 미션.
제목부터 내용까지,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는 내용이다.
이현성이 물었다.
―저놈을 잡아야 합니까?
―아뇨, 꿈도 꾸지 마세요.
재앙이 괜히 재앙인 게 아니다.
5급 화룡종은 진짜 유중혁이 있어도 못 잡는다.
지금 플랫폼의 상황만 봐도 알 수 있다.
거대한 놈의 아가리에서 시뻘건 불길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콰콰콰콰!
“끄아아아악!”
단지 불길에 스쳤을 뿐인데, 선지자들이 잿물이 되어버렸다.
불길에 타들어간 벽면이 흉측하게 녹아 일그러졌다.
놈의 아가리가 서서히 이쪽으로 돌아온다.
“모두 반시계 방향으로 달려요!”
후끈거리는 열기를 참으며, 놈의 입이 회전하는 방향을 앞서 달린다.
다행히 정희원과 이현성은 잘 쫓아오고 있었다. 정민섭과 이성국이 조금 뒤처지긴 했지만, 녀석들도 아직은 괜찮아 보였다.
이번에는 패턴을 알기에 피했다.
문제는, 항상 이런 식의 공격만이 이루어지진 않는다는 것.
[5급 화룡종, ‘레서 드래곤 이그니르’가 ‘파멸의 불꽃’을 준비합니다.]
······시작됐군.
일반 공격은 어떻게든 피했지만, 위기는 지금부터다.
“발판을 찾아요.”
“예?”
“숫자 5······ 아니면 2나 3! 어쨌든 총합 5를 맞춰봐요, 빨리!”
[히든 피스가 발동합니다.]
[숫자 발판들이 활성화됩니다.]
[숫자에 알맞은 인원이 발판 안에 들어가면, 10초간 ‘앱솔루트 실드’를 발동할 수 있습니다.]
[숫자를 초과한 인원이 발판 위에 올라가면, ‘앱솔루트 실드’는 발동하지 않습니다.]
들려온 시스템 메시지에 우왕좌왕하는 선지자들이 보였다.
동시에 역 곳곳에서 등장한 2평 남짓 크기의 ‘발판’들.
“발판? 아, 그렇군!”
“히든 피스가 있다!”
허둥지둥 움직이는 선지자들을 보며,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낄낄거리는 성좌들의 모습이 눈앞에 선연했다.
상당수의 성좌들이 시나리오의 난이도에 반발했던 이유?
간단하다.
‘이야기 없는 죽음’은 재미가 없으니까.
놈들이 원하는 것은 거인의 발에 무력하게 짓밟히는 개미가 아니다.
놈들이 보고 싶은 것은, 살아남기 위해 발악하는 개미다.
살기 위해서라면, 동족도 가족도 물어뜯는 개미.
[상당수의 성좌들이 흥미진진한 눈으로 상황을 지켜봅니다.]
빌어먹을 성좌 새끼들.
“씨발, 꺼져!”
“커허헉!”
서로의 번호를 친근하게 부르던 <선지자들>은, ‘1’이란 숫자가 적힌 발판 위에서 서로를 향해 병장기를 휘둘렀다. 꽉 찬 발판 위로 다가오던 선지자들 몇몇이 피를 뿌리며 바닥에 늘어졌다.
발빠른 선지자들은 벌써 무리를 이루고 발판 안으로 들어가, 경계태세를 강화하고 있었다.
나는 그런 놈들을 눈여겨보았다.
분명, 이 사태는 누군가가 계획한 함정이다.
아마 <사도>란 녀석들이겠지.
그들은 하차자들이 이곳에 모일 것을 알았고, 이 기회에 초반 하차자들을 쓸어버리기로 한 것이다.
현명한 생각이다.
아무리 허접한 정보라 해도 미래를 아는 놈들은 적을 수록 좋다.
평범하게 생각하자면 지금쯤 <사도>들은 멀리 떨어진 곳에서 죽어갈 하차자들을 생각하며 웃고 있을 것이다.
어디까지나, ‘평범한’ 놈들이라면 그럴 거라는 뜻이다.
그 지루한 소설을 50편 이상 읽었다는 것부터가 이미 정상이 아니다.
스스로를 <사도>라 명명하고, 정보를 통제할 정도로 욕심 많은 녀석들.
‘붉은 운석’을 함정카드로 쓸 정도의 정보력을 갖춘 놈들이라면, 그 운석이 불러온 재앙을 극복할 방법도 알고 있지 않을까?
그러니까, 말하자면······.
―대표님! 발판이 없습니다.
―이쪽도 없어요!
정민섭과 정희원이 다급하게 외쳤다.
하필이면 우리 일행이 있던 위치에만 발판이 없었다.
―엇, 여기 하나 있습니다! 그런데······.
간신히 찾아낸 발판에는 불길한 숫자가 적혀 있었다.
4.
즉, 저 발판에 들어가서 살 수 있는 것은 네 명뿐.
하지만 우리 일행은 다섯 명이었다.
[5급 화룡종, ‘레서 드래곤 이그니르’가 ‘파멸의 불꽃’을 사용합니다.]
플랫폼 중심에서 터진 거대한 불꽃이 역 전체에 번져가기 시작했다.
레서 드래곤의 전체 공격기술.
이렇게나 떨어져 있는데도, 피부가 화상을 입을 정도의 열기.
지금 실드를 가동하지 않으면 일행은 전멸한다.
“대, 대표님?”
내 시선을 받은 이성국과 정민섭이 몸을 떨었다.
나는 [부러지지 않는 신념]의 손잡이를 쥐었다.
그때.
“유중혁 님!”
돌아본 곳에, 선지자 하나가 서 있었다.
숫자 2가 적힌 발판.
다급한 상황에도, 얼굴에 묘한 여유가 엿보이는 사내였다.
“이쪽으로 오십시오!”
저놈은······?
몇 가지 기억이 빠르게 스쳐 갔다.
나는 놈을 향해 몸을 날리며, 뒤쪽의 일행들을 향해 외쳤다.
“실드를 발동해요!”
[앱솔루트 실드를 발동합니다!]
고오오오오!
뒤이어 모든 것을 불태우는 화염이 플랫폼을 가득 메웠다.
조금이라도 닿았다면, 나라고 해도 그대로 녹아버렸을 온도였다.
“후우······ 다행입니다.”
아슬아슬한 타이밍에 실드를 발동한 녀석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놈을 향해 물었다.
“넌 누구냐?”
사내가 가볍게 웃었다.
“섭섭합니다. 벌써 잊으셨습니까? 저, 1168번입니다. 아까 아스모데우스에 관한······.”
물론 기억한다.
나한테 ‘마왕 아스모데우스’에 관한 이야기를 했던 녀석.
“그걸 물은 게 아니야.”
나와 눈이 마주친 1168번의 동공이 흔들렸다.
아까는 경황이 없어서 미처 생각지 못했다.
마왕 아스모데우스와 유중혁의 대결 장면.
정확히 말하면, 2회차의 유중혁이 일방적으로 마왕한테 얻어터지는 ‘회상씬’.
나도 무척 좋아하는 장면이기 때문에 기억하고 있었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 보니, 그 회상은 50편 ‘이전’에 등장하지 않는다.
‘멸살법’의 완독자로서, 확실하게 말할 수 있다.
나는 칼을 뽑으며 입을 열었다.
“다시 묻겠다. 네놈은 누구냐?”
[특성 효과로 일부 장면에 대한 기억력이 상승합니다!]
마왕 ‘아스모데우스’의 이야기는, 정확히 멸살법 57편에 등장한다.
여유롭던 녀석의 표정에, 균열이 번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