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7화

527화 한수영은 아주 정확한 언어로 계획을 설명했다. 하나, 김독자를 구하기 위해서는 [최후의 벽]을 넘어야 한다. 둘, [최후의 벽]을 넘기 위해서는 총 다섯 개의 [파편]이 필요하다. 셋, 현재 이 세계선에 남은 파편은 김독자의 아바타가 가진 [제4의 벽] 뿐이다. 넷, 남은 네 개의 파편을 얻기 위해, 그들을 ‘집단 회귀’를 통해 다른 세계선으로 갈 것이다. 그 명료한 계획을 들은 일행들은 약간 얼빠진 얼굴로 서로를 돌아보았다. 제일 먼저 물은 것은 이지혜였다. “······그게 가능해요?” “이 녀석이 가능하다고 했으니까 되겠지.” 한수영의 시선을 받은 유중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가능하다. 아직 성흔 진화가 끝나지 않아서 시간은 좀 걸리겠지만. 어차피 준비할 시간도 필요하니까.” “······잠깐만요. 사부가 말하는 ‘회귀’는 정확히 원리가 뭔데요?” “내가 회귀를 사용하면 나와 너희 모두는 시나리오가 시작하던 시점의 과거로 돌아가게 된다.” “그럼 우리가 있는 세계는요?” “이 세계와는 별개로 새로운 세계선이 만들어질 거다. 회차로 따지면······ 아마 1865번째 세계선이 되겠지.” 1865번째 세계선. 너무나 어안이 벙벙한 숫자였기 때문에, 일행들은 눈만 끔뻑였다. “거기서 모든 걸 다시 해보자는 거군요.” 마치 예상이라도 하고 온 듯, 그렇게 말하는 정희원의 표정은 결의에 차 있었다. 하지만 모두가 그녀와 같은 생각은 아니었다. “제가 알기로 당신의 이번 ‘회귀’는 좀 특별했을 텐데요.” 그 말을 한 것은 유상아였다. “저도 독자 씨의 장서관에서 ‘회귀’에 대해 읽어서 알고 있어요. 지금까지 중혁 씨의 회귀는 ‘멸살법’이라는 세계관을 중심으로 계속됐어요. 그런데 이번 회차는 조금 특별했죠.” 그게 무슨 뜻인지, 다른 일행들도 어렴풋하게 눈치챈 듯했다. 지금 이 ‘세계선’은, 지난 유중혁의 회차들과는 달랐다. 이 세계선은 ‘끝’을 보고 싶다는 유중혁의 의지로 태어난 세계선. [제4의 벽]의 일부가 무너지며 현실과 픽션이 합쳐진 세계였다. 그 증거로, 이번 회차에는 ‘멸살법’의 등장인물이 아닌 이들이 있었다. “우리가 정말 다 같이 돌아갈 수 있는 건가요? 확신할 수 있어요?” 만약 유중혁의 ‘회귀’가 ‘멸살법’을 기준으로 발동한다면, 유상아나 이길영을 비롯한 몇몇 일행들은 그와 함께할 수 없었다. 천천히 눈을 깜빡인 유중혁이 말했다. “회귀는 내가 ‘회귀’를 발동한 세계선을 기준으로 발동한다.” “그 말은, 이 ‘독자 씨’도 데려갈 수 있다는 거군요.” 유상아는 뒤쪽 병상에 누워 있는 김독자를 가리켰다. 이곳의 김독자가 죽어가고 있는 것은 시스템의 힘이 옅어지고 있는 까닭이었다. 하지만 이 김독자를 [집단 회귀]를 통해 데리고 갈 수만 있다면, 그는 다시 <스타 스트림>의 시스템 아래로 들어가게 될 것이다. 유중혁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도.” “그럼 다들 정해진 거지? 반대하는 사람 손 들어봐.” 당연히 그런 사람이 있을 리 없다는 한수영의 말투에, 신유승이 조심스레 손을 들었다. “아 넌 또 왜.” “······이게 옳은 일인지 모르겠어요. 아저씨는 중혁 아저씨가 회귀하지 않길 바랐잖아요.” “그놈도 우리가 원하는 거 별로 고려 안 해주잖아. 피장파장이지.” “중혁 아저씨가 회귀하게 되면, 세상에는 또 시나리오가 시작될 거예요. 많은 사람들이 죽겠죠. 사람들은 다시 비극 속에 던져질 거예요. 성좌들은 인간들을 노리개로 삼을 거예요. ······그리고 대부분은, 첫 번째 시나리오조차 클리어하지 못할 거예요.” 신유승의 말이 맞았다. 어쩌면, 일행 중 누구보다도 ‘김독자’의 생각을 잘 이해하고 있는 화신. 김독자는 그런 불행을 또 만드는 것을 원치 않을 것이다. 하지만 한수영의 생각은 달랐다. “그래서, 우리가 회귀하지 않으면 그 ‘불행’이 일어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해?” “네?” 가볍게 한숨을 내쉰 한수영이 허공을 올려다보았다. “야. 언제까지 구경만 할 거야?” 그 물음과 함께 허공에 뿅 하고 솜털 뭉치가 나타났다. [바앗?] 순진한 눈망울을 굴리는 비유를 향해 한수영이 혀를 찼다. “또 저게.” 그러자 유중혁이 입을 열었다. “비유.” 비유가 큼큼 헛기침을 하며 입을 열었다. [너희가 회귀하든 회귀하지 않든, 또 다른 세계선은 계속해서 멸망할 거야.] 비유의 유창한 한국어에 신유승이 입을 쩍 벌렸다. 비유가 말을 할 수 있다는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대화를 나눈 것은 그때 지하철에서 본 이후 처음이었다. “······그걸 어떻게 알아요?” [이제 내가 ‘도깨비 왕’이 됐으니까.] 엣헴, 소리를 낸 비유가 작은 팔로 자신의 가슴을 팡팡 쳤다. 비유는 관리국 소속이 아닌 유일한 도깨비이자, 도깨비 왕의 <스타 스트림>을 고스란히 계승 받은 도깨비였다. 그나마 <스타 스트림>의 힘이 유지되고 있는 것은 비유가 있기 때문이었고, 동시에 <스타 스트림>이 사라지고 있는 것도 도깨비가 비유밖에 없기 때문이었다. [너희는 모르겠지만, 세계선은 매순간 태어나고 있어.] “······매순간?” [그래, 세계 내의 존재가 어떤 선택을 할 때마다, 계속해서 새로운 세계선들이 태어나고 있다고. 유승이 네가 동전을 던질 때조차 새로운 세계선은 태어나고 또 멸망하고 있어.] 세계선이란 곧 선택의 분기마다 갈라지는 나뭇가지와 같은 것이라고, 비유는 설명했다. [‘회귀’는 보다 특별한 형태로 ‘세계선’을 선택하는 방법일 뿐이야. 이미 지나간 시간 분기로 되돌아가서, 그곳에서부터 새로운 가지를 뻗는 일이라는 얘기지.] 어안이 벙벙해지는 이야기였다. “그럼 지금까지 대체 얼마나 많은 세계가······.” 일행들의 아득한 절망을 읽은 듯, 비유가 입을 열었다. [······그건 아버지만이 아시겠지.] 아버지. 비유가 아버지라고 말할 만한 존재는, 모든 세계선을 통틀어 하나뿐이었다. <김독자 컴퍼니>를 만든 성좌. 그리고, 이 우주의 ‘가장 오래된 꿈’이 된 존재. [너희가 바꿀 수 있는 건 그 수많은 세계선들 중 하나일 뿐이야.] * 다음 날부터 일행들은 계획에 착수했다. 프로젝트 <오징어 포획>. 한수영이 지은 이름이었다. “<스타 스트림>에서 인정하는 생물의 기준이 뭐라고요?” 다시 한번 ‘회귀’를 하기로 결심한 이상, 계획은 그 어느 때보다 완벽해야 했다. 일행들은 철저한 시나리오 공략을 위해 자주 토론을 나눴는데, 주로 의견 충돌이 잦았던 구간은 바로 ‘첫 번째 시나리오’였다. “세균은 어떻게 되는 거예요? 세균도 생물이잖아요. 손에 염산 뿌리면 막 10만 코인씩 얻을 수 있지 않을까요?” “만약 그게 인정이 되면 가만히 있었던 사람도 살았겠지. 우리 몸은 실시간으로 세균을 죽인다고.” “아무것도 안 죽였는데 살았다는 사람도 있어요.” “운에 맡길 수는 없어. 뭔가 죽이긴 해야 돼.” “전 메뚜기 죽이고 살았어요. 독자 형은 메뚜기 알까지 부숴서 코인 받았다고 들었고.” 의견을 곰곰이 듣던 한수영이 메모를 시작했다. “어쨌든 <스타 스트림> 기준으로 알은 생물이라는 거네.” “세균은 왜 안 되는 걸까요?” “아마 인지 가능한 살해를 기준으로 하는 게 아닐까 싶은데. 비유한테 좀 물어볼까?” 여기에 셀레나 킴과 이리스를 포함한 ‘안나 팀’이 합류하면서, 작전 회의는 더욱 심화되어 갔다. “여기서는 이 루트가 제격이에요.” “······아니, 이쪽이 더 나아. 내 [예상 표절]에 따르면―” 그들이 회귀할 다음 회차에는 김독자가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들이 아무것도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유중혁에겐 ‘은밀한 모략가’에게 받은 1863회차의 기억이 있었고. 한수영에겐 [예상 표절]이 있었으며. 유상아에겐 [제4의 벽]의 장서관에서 읽은 기록들이 있었다. 「그리고 그들 모두는, 모든 세계선에서 유일하게 [최후의 벽]을 넘은 존재들이었다.」 첫 번째 토의가 끝난 후 한수영은 한숨을 돌렸다. 이제 겨우 일주일. 유중혁의 말에 따르면 ‘집단 회귀’를 사용할 수 있는 시점은 지금으로부터 한 달 뒤였다. 일행들은 시나리오 공략법을 두고 싸우기도 했다. “「최강의 희생양」. 여기선 무조건······.” “그때 독자 씨 죽었던 거 잊었어요? 이렇게 하면―” 누구보다 시나리오를 증오하는 일행들이었다. 그럼에도, 토론을 이어가는 일행들은 어딘가 들떠 보였다. 왜일까. 시나리오가 끝나고, 간신히 현실을 되찾은 그들은 왜 ‘시나리오’로 돌아가는 계획을 저토록 즐겁게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일까. 「현실은 장소를 뜻하는 말이 아니다.」 아마도 그것은, 그들 모두가 누군가를 잊지 못하기 때문일 것이다. 저 끔찍한 비극을 누군가와 함께 이겨냈던 시간을 그들은 잊지 못하는 것이다. “[극장 던전]은 내가 잘 기억하고 있어요. 여기서 독자 씨가······.” 모든 일행이 합류한 장소는 달랐다. 그들이 기억하는 시간도, 그들이 기억하는 김독자도 달랐다. 그럼에도 유중혁의 수많은 회차가 모여 결국은 ‘한 사람’이 되듯, 김독자 또한 마찬가지였다. “[절대 왕좌]. 이때 독자 형 말로는······.” 모두가 좋아하는 김독자의 부분들이 모여 하나의 김독자가 되었고. “······그립네요.” 그렇게 모인 김독자의 조각은 다시 그들이 모르는 김독자의 나머지 부분마저 사랑하게 만들었다. 천천히 고개를 돌린 한수영의 시야에, 가부좌를 튼 유중혁의 모습이 들어왔다. 여전히 성흔 진화를 위해 수련 중인 유중혁의 전신에 황금빛 고리가 흐르고 있었다. 그런 유중혁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한수영이 물었다. “야, 궁금한 거 있는데.” “집중해야 하니 방해하지 마라.” “너 전에 0회차의 기억이 떠올랐다고 그랬잖아.” 회전하던 고리 하나가 비틀렸다. 희미한 스파크 속에서 유중혁이 실눈을 떴다. 한수영이 빙글거리며 물었다. “무슨 기억이 떠올랐던 거야?” 한참이나 망설이던 유중혁이 말했다. “거기 김독자가 있었다.” “뭐? 진짜?” “그래서 확신한 것이다. 김독자는 ‘가장 오래된 꿈’이 되어 살아 있다고.” “그 자식 거기서 뭐하고 있는데?”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인상을 찌푸린 유중혁이 자신의 [흑천마도]를 내려다보며 이글거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내 뒤통수를 때렸다는 것만은 확실하다.” * 털털거리는 열차의 진동을 느끼며 나는 눈을 떴다. 「더 자도 돼 김독 자」 “충분히 많이 잤어.” 찌뿌드드한 몸으로 기지개를 켜자, 전신에 천천히 활력이 도는 것이 느껴졌다. 0회차를 지켜보는 동안 사용한 힘은 어느 정도 회복이 되었다. 유중혁을 회귀시키기 위해 희생했던 오른쪽 팔도 거의 자라난 채였다. 하지만 왜인지 육체가 전보다 가벼워진 느낌이었다. 몸의 크기가 전체적으로 줄어들었다고 말해야 할까. 「유중혁은 두 번째 삶을 시작했다.」 1회차를 살아가는 유중혁의 모습이 패널에 비치고 있었다. 나는 0회차를 떠나가던 유중혁의 모습을 떠올렸다. 내가 생각하는 가장 이상적인 결말에 도달했음에도, 녀석은 회귀를 선택했다. 자신이 이 세상에 태어난 이유를 알기 위해. 자신이 이 세계에 존재하게 된 근원을 찾기 위해. “제4의 벽.” 「응」 “만약 모든 존재가 누군가의 ‘읽기’로 태어나는 것이라면······ 나를 읽어주는 존재도 어딘가 있는 걸까?” [제4의 벽]은 대답이 없었다. 아마도, [제4의 벽]도 모르는 이야기일 것이다. 나는 어디선가 나를 지켜보고 있을 또 다른 독자를 상상해보았다. 하지만 잘 상상이 되지 않았다. 초대의 ‘가장 오래된 꿈’이 그러했듯, 신이란 어쩌면 한없이 무력한 모습을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심지어는 내가 아는 모습일 수도 있다. 어쩌면 <김독자 컴퍼니>의 동료들은 아닐까. 그들이 나를 상상해주어, 나 역시 이곳에 존재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보 고싶 어?」 나는 유중혁의 1회차 화면으로 고개를 돌렸다. “조금 나중에. 일단 봐야 할 세계선이 많으니까.” 지하철의 속도가 점차 줄어들기 시작한 것은 그때였다. [꿈의 외곽 지역을 경유합니다.] 일부 패널이 꺼지며, 창밖으로 우주의 정경이 보였다. 내가 묻기도 전에, [제4의 벽]이 말했다. 「우 주의 외 곽 다 른차 원 과 의 접 경지 대」 우주의 새카만 밤사이로, 어슴푸레한 빛무리가 보였다. 분명 <스타 스트림>의 우주와는 달랐다. 그 우주는 휘어진 나무의 형상을 하고 있었다. “······저긴 뭔데? 우주가 또 있었어?” 「스 타 스트 림 또 한 대우주 의 세계 관 중 하나 일 뿐」 [현재 ‘환상수(幻想樹)’ 외곽을 경유하고 있습니다.] [현재 암흑 차원의 시간 단층을 통과하는 중입니다.] 환상수. 그것이 저 나무의 이름인 듯했다. ······착각인가? 어디서 들어본 느낌이 드는데. “저기로도 갈 수 있어?” 「위 험 하니 가 지 않는 게 좋 아」 “저기도 ‘가장 오래된 꿈’이 있어?” 「있 어 이 름 은 다르 지 만」 아래쪽으로 뻗어 나간 무수한 뿌리들과, 수많은 영혼들의 군집으로 이루어진 줄기. 그 위로는 밤하늘의 어둠과 동화된 가지가 있었다. 뿌리와 가지는 먼 우주를 돌아 만나고 있었는데, 그 중심에는 거대한 눈 같은 것이 있었다. 이글거리는 불꽃으로 우주를 밝히는 단 하나의 눈동자. 그 눈동자와 시선이 마주친 순간, 나도 모르게 서늘한 기분이 들었다. [시스템에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덜컹거리는 소음과 함께 지하철의 속도가 급격히 줄었다. 지하철 전체의 불빛이 갑작스레 점멸하더니 끼이이이익, 하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마치, 첫 번째 시나리오가 발생했던 그때와 같았다. 귓가에 이명이 퍼지더니, 이내 괴이쩍은 기계음 같은 것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뭔가가, 열차의 창가로 다가오고 있었다. 「김독 자 위 험」 그리고 나는 한줄기 빛살을 보았다. 「다 른 차 원 의 절 대 자」 그 빛살의 끄트머리에 있는 것은 한 자루의 검이었다. 마치 우주 전체가 쪼개지는 듯, 암흑 단층을 가르며 날아드는 빛살. 나는 그 기술이 무엇인지 똑똑히 보았다. 그것은 찌르기였다. 콰아아앙, 하는 굉음과 함께 나는 바닥에 나동그라졌다. 반사적으로 설화를 끌어 올리며 고개를 들었을 때 출입문을 뚫고 들어온 한 자루의 검이 보였다. 묵빛의 검. 그 검을 쥔, 벌거벗은 사내가 우뚝 서서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네놈이 《빅 브라더》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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