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8화
508화
Episode 98. 지켜야 할 것은 모두 지켰나
「유중혁이라는 한 사람이 그곳에 있었다.」
0회차부터 1863회차까지.
유중혁이 쌓아온 세월이 코트 끝자락에 겹쳐져 일렁였다.
그의 설화를 대변하듯, [최후의 벽] 위에 유중혁의 대사가 떠올랐다.
「“나는 단 하나도 잊지 않는다.”」
[설화, ‘생과 사의 동료’의 특수 효과가 발동 중입니다!]
3회차 유중혁, 그리고 ‘은밀한 모략가’의 설화가 함께 공명하고 있었다.
굳게 쥔 [흑천마도]의 검극에서 무섭도록 찬연한 혼돈의 힘이 뻗어 나왔다. 무질서한 혼돈의 아우라에 벽 전체가 동요했다.
당연한 일이었다.
그의 이야기는 이 벽의 가장 중요한 부분을 담당하고 있을 테니까.
『멸망한 세계에서 살아남는 세 가지 방법』의 주인공, 유중혁.
이 모든 세계는 애초에 유중혁이 아니었다면 시작될 수조차 없었다.
도깨비 왕이 비웃듯 입을 열었다.
[가장 오래된 꿈의 꼭두각시. 너의 필름은 참으로 길고도 아득하다.]
마치, 그가 올 줄 알고 있었다는 듯한 말투였다.
[그 누구도 너의 지루하고 비대한 이야기를 끝까지 함께할 수 없을 것이다. 설령 ‘가장 오래된 꿈’일지라도.]
츠츠츠츠츳!
유중혁이 천천히 눈을 깜빡이자, [현자의 눈]이 황금색으로 빛나며 개방되었다. 이 세계의 모든 별빛을 빨아들인 것처럼 형형하게 빛나는 눈동자.
그 눈동자의 주인이 말했다.
【이번에도 내가 너무 일찍 왔나?】
‘은밀한 모략가’의 말을 듣는 순간, [끊어진 필름 이론]을 통해 보았던 기억이 떠올랐다.
1863회차의 세계선에서 그가 만났던 ‘도깨비 왕’의 기억.
「[불행한 꼭두각시여. 그대는 너무 빨리 왔습니다. 당신은 이 우주를 완성할 수 없습니다.]」
그 기억을 실시간으로 전송받기라도 한 듯, 고개를 갸웃하던 도깨비 왕이 말했다.
[그렇군, 다른 세계선의 나는 그렇게 말했던 모양이지?]
【내가 본 녀석과는 말투가 다르군.】
[너의 모든 회차가 같지 않듯, 나 또한 마찬가지지.]
재미있다는 듯 어깨를 으쓱한 도깨비 왕이 유중혁의 [흑천마도]를 뽑아 던졌다. 날아온 칼을, 유중혁이 맨손으로 받아 쥐었다.
칼이 뽑힌 [최후의 벽] 위에 커서처럼 칼자국이 남아 있었다.
이윽고 칼자국이 한 뼘씩 뒤로 밀려나며, 벽 위에 문장들이 나타났다.
「하지만 그 모든 세계선은 결국 같은 길로 향하기 위해 존재한다.」
그 이야기가 몹시 자랑스럽다는 듯 도깨비 왕이 유중혁을 향해 말했다.
[위대한 세계의 완성이 눈앞에 있다. 너도 이제 자신의 숙원을 이룰 수 있을 거다.]
유중혁의 숙원이 무엇인지 나도 잘 알고 있었다.
[거대 설화, ‘고독한 멸망의 순례자’가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이 끔찍한 저주의 굴레에서 벗어나 자유가 되는 것.
1863회차의 유중혁은 그 목표만을 위해 살아왔다.
「하지만 유중혁의 목표는 그것만이 아니었다.」
고개를 돌린 ‘은밀한 모략가’가 나를 보고 있었다.
시선의 의미는 명백했다.
자신과 한 약속을 잊지 말라는 것이었다.
「“이 모든 세계의 원흉을 없앨 것이다.”」
[최후의 벽]에 떠오른 문장을 읽은 도깨비 왕이 말했다.
[없앤다······ 재미있네. 아직도 그런 게 가능할 거라고 믿어?]
【가능하다. 그리고 그것이 가능해지려면.】
그의 쌍수에 두 자루의 검이 쥐어졌다.
새카만 [흑천마도]의 칼날 위에 서슬 퍼런 [진천패도]의 칼날이 겹쳐졌다.
【먼저, 네놈이 없어져야겠지.】
콰앙, 하는 소리와 함께 스파크가 벽 전체를 부술듯 두들겼다. 연달아 폭발한 섬광 끝에 두 개의 신형이 허공에 겹쳐 있었다.
‘도깨비 왕’의 주변을 감싸는 단단한 설화의 장벽이 보였다.
이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이야기를 무기로 쓰는 존재.
[거대 설화, ‘최초의 메시아’가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성운 <에덴>의 주인이 가지고 있던 바로 그 설화가, 그의 손끝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단단하게 엉겨든 문장들이 신성한 광휘를 흩뿌렸다. 위대한 성좌의 빛이, 지상의 피조물들을 향해 쏟아지고 있었다.
그저 닿는 것만으로도 존재가 녹아서 사라질 게 분명한 격이었다.
“독자 씨!”
기겁한 이현성이 나를 향해 허겁지겁 달려왔다.
그의 전신에서 뻗어 나온 강철이 나와 일행들을 보호하기 위해 펼쳐지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럴 필요 없습니다, 현성 씨.”
“예?”
나는 대답하는 대신 앞을 가리켰다.
지끈거리는 두통 속에서도, 나는 눈앞에서 펼쳐지는 정경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다른 별들의 말이 맞다. 나 역시, 그저 성좌에 불과한지도 모른다. 아마도 나는 저 광경을 보기 위해 십수 년을 견뎌왔던 것이다.
[전용 특성, ‘별들의 공포’가 발동합니다!]
눈앞에서 도깨비 왕의 광휘가 흩어지고 있었다.
세상 모든 악을 멸하는 메시아의 빛을, 검은 코트의 사내가 두 개의 칼로 받아내고 있었다.
츠즈즈즈즈즈······!
빛에 닿은 벽의 설화들이 녹아내렸다.
‘은밀한 모략가’― 아니, 유중혁은 그 빛을 거스르며 한 걸음씩 앞으로 나아갔다. 턱 아래로 송골송골 맺힌 땀이 떨어졌고, [흑천마도]와 [진천패도]의 칼날이 빛에 의해 무디어지고 있었지만, 그는 조금도 물러서지 않았다.
그쯤 되자 도깨비 왕도 조금씩 표정이 변하기 시작했다.
[과연, 그럼 이건 어떨까?]
[거대 설화, ‘최초의 악’이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최초의 악. 그것은 승천한 마계의 대마왕, ‘바알’의 설화였다.
이 세계의 어떤 선도 감히 상대할 수 없는 패도적인 힘.
마계 전체를 등에 업은 도깨비 왕이, 유중혁의 위로 새카만 낙뢰를 떨어트렸다. 그 어떤 대천사도 견뎌낼 수 없는 타천의 전격.
멀리서 이설화가 외쳤다.
“중혁 씨!”
유중혁은 날아드는 전격을 피하지 않았다. 오히려 피뢰침처럼 검을 곧추세운 채 번개를 정면으로 받아냈다. 하지만 끝이 아니었다.
[「무대화」가 발동합니다!]
무대화를 통해 마왕의 영혼들이 되살아나고 있었다. 우리가 죽인 녀석들도 있었고, 묵시룡에 의해 사망한 놈들도 있었다. 그 모든 마왕들이 ‘최초의 악’에 의해 다시금 전장에 불려 나와 유중혁을 향해 울부짖고 있었다.
그아아아아아아―!
마왕들이 던진 병장기들이 사악한 마력에 휩싸여 보랏빛 낙뢰 폭풍을 만들어 냈다. 설령 신화급 성좌라고 해도 버텨낼 수 없을 정도로 강대한 폭풍이었다.
범람하는 낙뢰 속에 유중혁의 하얀 얼굴이 악귀처럼 빛났다. 불온한 격의 폭풍 속에서도 유중혁은 침착했다.
마치, 오랫동안 이 순간만을 기다려온 한 사람처럼.
【모두 죽여본 놈들이군.】
[전용 특성, ‘마왕살해자’가 발동합니다!]
허공으로 도약한 유중혁이, 병장기들을 튕겨내며 전진했다. 그의 검이 궤적을 만드는 곳마다 악의 설화가 부서졌다.
파괴만을 위해 태어난 괴물처럼, 유중혁은 검을 휘두르고 또 휘둘렀다. 그의 모든 검격에 그가 살았던 세계의 원한이 담겨 있었다.
츠츠츠츠츳!
타락한 마계의 하늘에 커다란 균열이 발생하고 있었다.
단신으로 「무대화」를 해체시키는 무력.
<스타 스트림>이 만든 괴물이, 이제 <스타 스트림>을 부수기 위해 움직이고 있었다.
그아아아아악!
[흑천마도]의 검이 되살아난 ‘검은 갈기의 사자’ 마르바스의 목을 베었고, [진천패도]의 궤적이 달려드는 ‘무자비한 역천의 사냥꾼’ 바르바토스의 심장을 꿰뚫었다.
어떤 마왕도, 그의 앞에서 자신이 왕임을 제창할 수 없었다.
위협감을 느꼈는지, 도깨비 왕이 으르렁거리며 외쳤다.
[오만한 꼭두각시······, 이 세계선의 주인공은 네가 아니다.]
그와 동시에, 주변의 지형이 다시 한번 변하기 시작했다.
[거대 설화, ‘스타 스트림 게임 시스템’이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무대화」가 발동합니다!]
벽의 정경이 픽셀처럼 변하고 있었다.
유중혁의 몸이 작아지기 시작했다. 마치 ‘다이달로스의 미궁’ 속에 갇힌 것처럼 유중혁이 나아가는 길이 미로로 변했다. 그의 뒤를 쫓아오는 거대한 입을 가진 괴물도 보였다. 곳곳에서 불쑥 튀어 오른 [자동 포탑]들이 사격을 개시했고, 그의 발이 닿는 지형은 깊은 수렁으로 뒤바뀌었다.
마치, 게임 속에 들어오기라도 한 것처럼.
「유중혁은 웃고 있었다.」
[전용 특성, ‘유희의 지배자’가 발동합니다!]
아주 간단히 함정을 돌파한 유중혁의 몸이 화살처럼 쏘아져 나갔다. 다가오는 괴물의 정수리를 찢어버리고, 미로의 벽면을 박살내고 있었다.
이 세계의 공략법 따위 진즉에 알고 있다는 것처럼, 단 한 번의 일격도 허용하지 않았다.
[해당 ‘무대’가 대상의 격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미로가 무너지고, 어느새 유중혁은 도깨비 왕의 코앞에 섰다.
도깨비 왕의 눈동자가 당혹감으로 물들어 있었다.
【이게 끝인가?】
‘은밀한 모략가’가 도깨비 왕에게 이길 수밖에 없는 것은 당연했다.
그의 모든 삶은 <스타 스트림>과 싸워 이기기 위해 존재했기 때문이다.
아마 내가 읽지 못했던 원작에서도, 유중혁은 저런 식으로 도깨비 왕을 죽였을 것이다.
뒷걸음질치는 도깨비 왕의 눈동자가 나를 일별했다.
「유중혁의 약점은 무엇인가.」
[최후의 벽]에 떠오르는 문장을 읽은 순간, 뒷덜미가 서늘해졌다.
도깨비 왕의 눈동자에 다른 세계선의 정경이 떠오르고 있었다. 이곳이 아닌 다른 세계선의 기억이 그를 향해 흘러들어가고 있었다.
마치 해답을 찾았다는 듯, 나를 보던 도깨비 왕이 섬뜩한 미소로 유중혁을 돌아보았다.
[꼭두각시여. 너의 정신력도 너의 검처럼 날카로울까?]
[‘이야기의 왕’이 당신의 설화를 강제로 재현합니다!]
[「무대화」가 임시 발동합니다!]
[인근의 지형의 유사함이 무대의 재현 수준을 격상시킵니다!]
죽은 마왕의 시체들이 곳곳에 늘어져 있었다. 죽은 성좌와 마왕들의 폐허 위로, 황폐한 얼굴의 유중혁이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가 살았던 최후의 세계가, 그곳에 펼쳐지고 있었다.」
그가 그 세계를 모를 수는 없었다.
그곳으로 나를 보낸 것이 바로 ‘은밀한 모략가’였으니까.
「1863회차. ‘멸살법’의 마지막 세계.」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보는 유중혁을 향해, 도깨비 왕이 그림자처럼 다가왔다. 아니, 그는 더 이상 도깨비 왕이 아니었다. 그의 걸음이 움직일 때마다 그의 얼굴이, 체형이 변하고 있었다.
「창백한 뺨. 별처럼 빛나는 두 눈이 그를 보고 있었다.」
내 것과 똑같은 백색의 코트가 바람에 흩날렸다.
[기억나냐? 33회차. 40번 시나리오를 클리어하고 이지혜가 했던 말.]
나와 똑같은 목소리가, 이야기하고 있었다.
허공에 튀어오르는 스파크와 함께, 유중혁의 몸이 빳빳이 굳고 있었다.
가볍게 손을 뻗은 도깨비 왕이 유중혁의 멱살을 쥐며 말을 이었다.
[생각해봐. 늘 불행했던 것만은 아니야. 그렇지? 그 모든 회차에는, 잠깐이지만 행복했던 시절이 있었어.]
[진천패도]와 [흑천마도]가 거칠게 떨렸다.
떨림 속에서, 두 자루의 검이 무력하게 늘어지고 있었다.
「회귀 우울증.」
오랜 세월 동안 회귀를 반복해 온 유중혁의 유일한 약점.
[173회차. 너는 꽤 오랫동안 지구를 지켜냈어. 이지혜가 고등학교 졸업장을 받는 모습도 보았고, 이설화가 다른 사람의 아이를 안고 웃는 모습도 보았지.]
유중혁의 눈빛이 흔들리고 있었다.
「유중혁을 무너트리는 것은 절망이 아니다.」
「녀석의 머릿속에 작은 깃털 같은 기억이 하나둘 내려앉고 있었다.」
내가 사용했던 바로 그 방법을, 도깨비 왕이 사용하고 있는 것이었다.
「숨이 막히고, 폐가 조여온다.」
「물에 빠진 인간은, 단지 깃털의 하나의 무게 때문에 더 깊은 수면 아래로 가라앉는다.」
더 이상 두고 볼 수 없었다.
나는 유중혁을 향해 외쳤다. 정신 차리라고, 그런 허상에 넘어가지 말라고.
하지만 차폐막이라도 생긴 듯, 내 목소리는 그쪽으로 전달되지 않았다.
그 모든 이야기를 조롱하듯 도깨비 왕만이 웃고 있었다.
[유중혁. 지키고 싶었던 것은 모두 지켰나?]
천천히 유중혁의 무릎이 낮아지고 있었다.
나는 설화의 격을 끌어 올렸다.
당장이라도 저 「무대화」를 해체해야 했다. 하지만, 어떻게 해야―
꽉.
여전히 내 손을 굳게 쥔 손이 있었다. 한수영이었다.
“네가 낄 전장이 아니야.”
“하지만 저대로 내버려 두면―”
“······볼 수 없는 별도 빛나고 있다며.”
······볼 수 없는 별?
한수영의 말에, 나는 다시 유중혁을 돌아보았다.
낮아지던 유중혁의 시야가 멎어 있었다. 눈부신 스파크가 그의 전신을 잠식하고 있었다.
츠츠츠츠츠······.
무언가가, 꺼져가던 그의 정신을 깨우고 있었다.
[거대 설화, ‘멸망을 기억하는 자들’이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내가 잘 알지 못하는 설화였다.
서서히 잦아드는 스파크 속에서, 어렴풋한 인형들이 보였다.
자세히 보니, 유중혁은 혼자가 아니었다. 그의 곁에, 네 인물이 서 있었다.
키가 큰 사내, 백발의 청년, 포니테일의 여성, 그리고―
【그는 단 하나도 지키지 못했다. 그렇기에 지금 이곳에 있는 것이다.】
눈부신 날개의 대천사.
도깨비 왕의 표정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멸망한 999회차의 설화가, 대천사의 검극에서 겁화처럼 불타오르고 있었다.
【아직도, 지켜야 할 것이 있다고 믿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