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7화

507화 [tls123?] 중얼거리는 도깨비 왕의 표정이 이상했다. 마치 렉이라도 걸린 것처럼 떨리는 녀석의 입술 위로, 파란 스파크가 튀었다. 나는 질문을 바꿨다. “녀석이 이 세계를 만든 작가냐고 묻는 거다.” 도깨비 왕은 고개를 갸웃하다가 말했다. [‘가장 오래된 꿈’은 작가라기보다는 차라리 독자에 가깝지. 그는 누구를 위해 이야기를 쓰는 존재가 아니야. 게으르고 탐욕스러우니까.] ‘가장 오래된 꿈’이 ‘tls123’이 아니라고? 그렇다면 내게 파일을 보낸 이는 누구란 말인가. 내가 1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읽을 소설을 집필했던 작가는, 대체― [너는 이 모든 것의 시작이 궁금한 모양이군. 하지만 그런 것을 추측하는 건 아무 의미 없어. 이 세계가 어떻게 시작되었든, 이 세계는 그것을 보는 이가 없다면 존재하지 않는 것과 다름없으니까.] 도깨비 왕은 <스타 스트림>의 우주를 바라보았다. 눈부신 설화 조각들이 은하의 흐름을 타며 흘러가고 있었다. 그의 시선이 닿는 곳마다 부스러기들은 의미를 만들었다 잃기를 반복했다. 나는 여전히 사슬에 구속되어 있는 유중혁을 올려다보았다. 유중혁의 등 뒤로, 아무것도 없는 <스타 스트림>의 우주가 있었다. “보이지 않아도 존재하는 것도 있어.” 우주의 어둠은 너무나 넓고 광활하여, 빛의 속도로도 건널 수 없을 만큼 아득했다. 하지만 그 빛은 언젠가는 닿는다. 볼 수 없다고 해서 그곳에 없는 것이 아니다. 누구도 없는 곳에서 빛을 내는 것도 있다. 「우주의 암흑 사이로 희미한 별빛이 보이기 시작했다.」 어둠 속에서 떠오르는 별들. 아직까지 자신을 잃지 않은 별들이었다. 그 별들의 빛은 설화가 되었고, 문장이 되었다. 그 문장들이 최후의 벽 위로 드리워지며, 이미 닫혀버린 이야기의 문을 열었다. 「전신에서 검은 피를 흘리며, 심연의 흑염룡이 몸을 일으켰다.」 그 문장을 보는 순간, 탄식이 흘러나왔다. 문장들은 곧 영상을 그려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폐허가 된 전장에서 몸을 일으키는 심연의 흑염룡이 보였다. 한수영의 말이 옳았다. 「무대화」가 사라지며 ‘묵시룡’의 힘은 잃었지만, 그는 여전히 흑염룡이었다. 「타천의 하늘에서 제천대성이 지친 눈을 떴고.」 번뜩이는 뇌운 사이로 살아남은 성좌들과 격전을 벌이는 제천대성. 「최후의 ‘대선’이, 선악의 종지부를 향해 나아갔다.」 그리고 우리엘. [업화의 불꽃]을 휘두르며 <스타 스트림>의 꺼진 밤하늘을 밝히는······. [아니, 보는 이가 없다면 그들은 존재하지 않는다.] 단언과 함께, 설화의 영상이 흩어졌다. 나는 허망하게 흩어지는 설화를 향해 저도 모르게 손을 뻗었다. 내 행동을 비웃듯 도깨비 왕이 말을 이었다. [아무도 읽지 않는 이야기가 계속된다는 것만큼 허망한 일은 없지. 모든 것은 관측된 순간에 만들어지는 거다. 이 우주는 그렇게 구성되어 있어. 관측하는 이가 없을 때, 설화는 존재를 증명하지 않아.] “······그들은 분명히 존재해.” [아직도 그다음이 보고 싶은가?] [<스타 스트림>이 당신의 선택을 기다립니다.] [‘최후의 벽’이 당신의 선택을 기다립니다.] 모든 세상이 내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나는 말을 망설였다. 투명한 벽 너머로 아우성치는 한수영의 모습이 보였다. 「이 설화가 계속되면, 내가 원하는 것을 볼 수 있을까.」 내 망설임을 안다는 듯 도깨비 왕이 웃었다. ‘최후의 벽’이 거칠게 준동했다. 벽 위로 문장들이 흐르고 있었다. 서비스라는 듯, 느릿하게 다시 재생되는 설화. 제천대성이, 심연의 흑염룡이, 우리엘이 다시 전투를 벌이기 시작했다. 「[······염룡아. 누나 없다고 울지 마라!]」 「[큭큭, 포기가 빠르군 대천사! 내겐 아직 사용하지 않은 한쪽 팔이······!]」 「[그 팔은 벌써 잘려나간 것 같은데, 흑염룡.]」 「[이 몸은 팔 한 짝쯤 없어도 끄떡없다, 멍청한 원숭아!]」 선과 악, 그리고 선도 악도 아닌 성좌들이 한데 모여 최후의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그 정경을 보며, 도깨비 왕이 말했다. [너의 설화는 대단했다. 최고의 거대 설화인 <스타 스트림>이 네 편을 들 정도였으니까. 아직 서사시의 많은 부분이 비어 있지만, 새로운 세계의 ‘태초’가 될 토대로서는 충분해.] “그딴 게 되려고 이야기를 계속해온 게 아냐.” 성좌들의 등 뒤로 설화들이 빛나고 있었다. [거대 설화, ‘신화를 삼킨 성화’가 이야기를 계속합니다!] [거대 설화, ‘빛과 어둠의 계절’이 이야기를 계속합니다!] [거대 설화, ‘잊혀진 것들의 해방자’가 이야기를 계속합니다!] 우리의 거대 설화. 설화들은 <김독자 컴퍼니>의 것만이 아니었다. 어떤 이야기를 아주 오랫동안 보아온 이들은, 결국 그 이야기와 같은 빛을 띠게 된다. 우리의 이야기를 지켜 보아온 성좌들이, 같은 빛을 내고 있었다. [저것이 네가 만든 이야기의 끝이다.] 「꼬리가 잘려나간 흑염룡이 거친 울음을 터트렸다.」 「우리엘의 부서진 업화가 잿가루처럼 흩날리고 있었다.」 「황제의 성좌들을 향해, 제천대성이 부러진 여의봉을 휘둘렀다.」 [최후의 벽] 위에 쓰인 문장들이 빛을 잃어가고 있었다. 나는 그 빛을 향해 손을 뻗었다. 츠츠츠츠츠츳! [당신은 ‘최후의 벽’에 간섭할 자격이 없습니다.] 손가락 끝에서 통증이 밀려왔다. 스파크에 새카맣게 타오른 손가락. 나는 이를 갈며 외쳤다. “나는 이 이야기를 통제할 자격이 있어. 메인 시나리오를 전부 클리어했다고.” 마지막 시나리오의 보상은 [최후의 벽]이었다. 도깨비 왕이 웃었다. [그래, 너에겐 자격이 있지. 하지만 저 이야기를 바꿀 권한은 없어. 그것은 ‘개연성’에 위배 돼.] 실시간으로 최후의 벽 위로 떠오르는 문장을 보며, 나는 진언을 개방했다. [······저 이야기를 멈춰.] 내가 쌓아온 모든 설화들이 울부짖고 있었다. 아직 늦지 않았다. 우리엘도, 흑염룡도, 제천대성도. 모두 살아있다. 「[하데스. 우리의 ■■가 다가왔어요.]」 지금이라면 바꿀 수 있다. 흘러가는 문장들을 고칠 수 있다. 끝나지 않은 문장의 끝을 잡아, 다른 문장을 쓸 수 있다. [그들을 살리고 싶나?] 도깨비 왕이 물었다. [나 역시, 한때 너와 같았지.] 도깨비 왕이 살아온 세계가 그의 등 뒤로 펼쳐졌다. 나는 잘 모르는 행성의 모습. 그 행성에서 시나리오가 흘러가고 있었다. [나 또한 끔찍한 불행들을 겪었지. 하나의 존재가 감당할 수 없는 비극들을······. 그 비극이 더 이상 비극처럼 느껴지지 않는 순간이 되었을 때, 비로소 이곳에 도달했다.] 둑이 터지듯 벽의 일부가 나를 향해 쏟아졌다. ‘최후의 벽’이 품고 있던 막대한 이야기가 나를 향해 흘러들어오고 있었다. 츠츠츠츠츠츠츠······! 정신이 망가지는 것 같았다. 내가 알고 있던 이야기, 모르고 있던 이야기. 우주의 모든 설화가 내 영혼 속으로 축적되고 있었다. [‘제4의 벽’이 강력하게 반발합니다!] [‘제4의 벽’이 무너지는 당신의 정신을 보호합니다!] 내가 겪어왔던 죽음들과 내가 보아왔던 죽음들이 겹쳐지고 있었다. [왜 네게, 그토록 많은 불행이 일어났을까?] 불행이라는 범주로 쉽게 변별되고 말 그 이야기들이, 내 머릿속을 짓눌렀다. [설화에 취하지 마. 저것은 앞으로 네가 만들어나갈 무수한 세계선들 중 하나에 지나지 않으니까.] 조금씩, 슬픔의 감정이 무뎌지기 시작했다. 비탄도, 절망도. 그 모든 비감들이 하나의 찰흙 덩어리처럼 뭉쳐지더니, 이내는 구별할 수 없는 것이 되어갔다. 「세상에 저렇게나 많은 불행들이 존재하는데, 그 모든 불행에 슬퍼해야 할 이유가 있는가.」 지나치게 많은 것은 결국 진부해진다. [이 세계를 만든 작가가 누구냐고 물었지. 네가 그 존재가 될 수도 있어.] 도깨비 왕이 말하고 있었다. [그들을 살리고 싶다면 네가 사랑하는 모든 것에 의미가 없다는 것을 인정해. 이미 쓰여진 설화들이 쉽게 고쳐질 수 있는 허상이라는 것을, 그들이 위대한 백일몽의 그림자일 뿐이라는 사실을.] 도깨비 왕의 속삭임과 함께, 거대 설화의 개연성이 준동했다. [다음 세대의 <스타 스트림>을 이끌 수 있도록, 새로운 세계의 설계자가 되어라.] 그야말로 가공할 유혹이었다. 만약, 도깨비 왕의 제안을 받아들여 <스타 스트림>의 새로운 설계자가 된다면 나는 모두를 구할 수 있다. 이 모든 설화를 고쳐 써서, 이 세계선을 구할 수 있다. 그 구원의 조건은, 하나뿐이었다. 「저 이야기를 사랑하는 것을 포기하기만 한다면.」 그 순간, 누군가가 내 손을 붙잡았다. 뭔가를 한참이나 내리쳤는지 피에 젖은 손. 아주 오랫동안 글을 쓴 사람의 손이었다. “······정신차려. 넌 작가가 아니야.” 대체 언제 막에서 탈출한 것일까. 입술로 북 찢은 붕대를 다시 묶으며 한수영이 말했다. “내 소설을 가장 먼저 읽어주기로 한 독자라고.” 그 말과 함께, 한수영의 전신에서 설화가 폭발했다. [설화, ‘예상표절’이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츠츠츠츠츠츳! [최후의 벽]에 쓰인 문장들이 동요하기 시작했다. [화신 ‘한수영’의 특성이 발동합니다!] “세상에 아무리 많은 비극이 있어도 슬픈 건 슬픈 거야, 멍청아!” 한수영이 바닥을 찧는 순간, [최후의 벽]에 들러붙어 있던 설화 일부가 후두둑 떨어졌다. 도깨비 왕의 눈이 커졌다. [······감히 벽을······!] 도깨비 왕의 말은 계속되지 못했다. 설화들이 떨어진 벽의 틈새로, 누군가의 손이 비집고 나왔다. 길고 새하얀 손. 내가 아는 그 어떤 손보다도 더 올곧고 강인한 사람의 손이었다. “그 말이 맞아요. 슬픈 건 슬픈 거죠. 기쁜 건 기쁜 것처럼.” [‘윤회를 결정하는 벽’이 ‘최후의 벽’의 틈새를 일그러뜨립니다.] 빙긋 웃는 유상아가 벽에서 빠져나오고 있었다. 그녀의 곁에 붙어 있는 신유승과 이길영도 보였다. “아저씨!” “형!” 유상아가 만든 균열은 점차 번지더니, 이윽고 반대쪽 벽면까지 타고 흘렀다. 그 벽 너머로, 내가 잘 아는 이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불가능한 소통의 벽’이 들리지 않는 목소리를 키웁니다.] “구―원―의―마―와―앙!” 장하영의 목소리였다. 우지끈, 하는 소리와 함께 벽의 다른 쪽 틈새로 자그마한 것이 나타났다. 키리오스였다. “한심한 놈. 고작 설화 따위에 먹힌 것이냐?” 곧이어 불도저가 바닥을 밀어내는 소리와 함께, 틈새에 사람만한 구멍이 생겼다. [‘선악을 결정하는 벽’이 선악의 경계를 재설정합니다!] “독자 씨! 찾으러 왔습니다!” 이현성과 정희원이었다. 일행들이 빠져나온 틈새는 순식간에 수복되었다. [최후의 벽]에 기록된 이야기들이 틈을 메꾸어버린 것이었다. 그 벽 위로, 다시 별들의 이야기가 흘러가고 있었다. “독자 씨? 이게 무슨······.” “현성 씨, 저기!” 정희원의 목소리와 함께, 모든 일행들이 [최후의 벽]을 바라보았다. 닫힌 선실에서 여전히 싸우고 있는 성좌들의 이야기가 그곳에서 전시되고 있었다. 산 자 보다 죽은 자가 더 많은 지옥도. 우리엘이 무릎을 꿇었고, 심연의 흑염룡이 쓰러졌다. 제천대성이 최후의 최후까지 분전하며 그들을 지키고 있었다. 「[일어나라, 아직 막내의 이야기가 끝나지 않았다.]」 문장들은 속절없이 흘러갔다. 이대로 두면, 저들은 모두 죽는다. 우리엘도, 심연의 흑염룡도, 제천대성도. 모두 죽을 것이다. 나는 고통 속에서 그들을 향해 손을 뻗었다. 영혼을 잠식하는 통증 때문에 목소리도 진언도 나오지 않았다. 「막 아」 [‘제4의 벽’이 당신을 대신해 이야기합니다.] 「저 이야 기 가 흘러 가 는 것을 막 아」 일행들이 [최후의 벽]을 향해 달려갔다. 말을 전하지 않아도, 이미 모두가 무엇을 해야 할 지 알고 있었다. 아직 저 이야기는 끝나지 않았다. 다음 문장이 쓰여지는 것을 막을 수만 있다면― 츠츠츠츠츠츠! 거센 후폭풍과 함께 일행들의 몸이 타올랐다. 도깨비 왕의 힘이 그들을 억제하고 있었다. 하지만 일행들은 멈추지 않았다. 눈부시게 튀어오르는 스파크를 견뎌내며, 한 걸음 한 걸음 자신의 속도에 맞춰 걸어갔다. [<김독자 컴퍼니>의 모든 거대 설화들이 ‘최후의 벽’에 기록되기를 거부합니다!] 우리가 만든 설화들이 말하고 있었다. 도깨비 왕이 그에 응하듯 말했다. [······그렇군, 아직 시나리오를 수행하고 싶나?] 도깨비 왕은 즐겁다는 듯 나를 바라보았다. 그 시선과 마주하는 순간 소름이 돋았다. 도깨비 왕은 이 세계선 최강의 존재. 그 어떤 신화급 성좌도, 이 도깨비 왕을 상대할 수는 없다. <스타 스트림>의 모든 것은, 그의 장난감에 지나지 않으니까. 도깨비 왕의 손짓과 함께, [최후의 벽] 위에 새로운 시나리오의 내용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스타 스트림> 최후의 시나리오가 재설정됩니다!] [<스타 스트림> 최후의 시나리오는······.] 콰가각! 흘러가던 문장이 멈추었다. 문장이 끊긴 곳엔 한 자루의 칼이 틀어박혀 있었다. 불온한 혼돈의 힘을 담은 아우라가, 문장의 질서를 어지럽혔다. 그리고 새로운 문장이 구성되었다. 「아주 오랜 시간을 돌아, 유일하게 이 세계의 끝을 본 존재.」 허공에 끊어진 사슬이 흩날렸다. 수천 개의 잔상이 하나로 겹쳐지듯, 검은 코트 위로 무수한 회차의 그림자들이 덧씌워지고 있었다. 그 순간, 나는 내 판단이 틀렸음을 깨달았다. 「있다, 한 사람.」 이미 도깨비 왕을 죽여 본 적이 있는 존재. [설화, ‘영원불멸의 지옥도’가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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