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5화

505화 [<스타 스트림>이 당신의 마지막 설화에 이름을 짓고 싶어 합니다.] [당신에게 최종 설화의 선택지가 주어집니다.] [성운 <김독자 컴퍼니>의 서사시가 ‘단 하나의 설화’ 최종 후보에 올랐습니다!] [<스타 스트림>에 태어날 모든 별들이 당신의 설화를 칭송할 것입니다!] 연이어 떠오르는 메시지를 하나씩 읽으며, 나와 일행들은 상황을 점검했다. 다들 여전히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 얼굴들이었지만, 여기서 멈출 때가 아니었다. 불현듯 공필두가 입을 열었다. “······이걸로 메인 시나리오는 끝난 건가?” 평소와는 달리, 메인 시나리오가 끝났음에도 연계 시나리오는 발동하지 않았다. 대신 들려온 것은 시스템 메시지였다. [<스타 스트림>의 메인 시나리오 시스템이 종료 시퀀스에 돌입합니다.] 생전 처음 들어보는 메시지. 장대한 시나리오의 세계가 드디어 막을 내리고 있는 것이었다. 모두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표정들이었다. “이게 끝나면······ 세계는 어떻게 되는 거지?” 공필두가 허탈한 얼굴로 벽을 바라보고 있었다. 벽에 피어난 무수한 문장들이 그의 시선을 느낀 듯 흩어졌다 뭉치기를 반복했다. 그 문장들중에는 공필두에 관한 것도 있었다. 「시나리오의 시작과 함께 가족을 잃은 남자.」 그는 어딘가 지쳐 보였다. 착각인지 모르겠지만, 눈에 뭔가가 고여 있는 것 같기도 했다. 망설이던 내가 입을 열었다. “아직 이 모든 시나리오를 총괄한 존재가 남아 있습니다.” “그 녀석도······ 해치워야 하나?” “힘들다면 여기 계셔도 괜찮습니다.” “이제와서?” 공필두의 표정에 분노가 떠올랐다. “나는 그놈을 용서할 수 없어. 산산이 찢어 죽여도 모자라.” 그 눈을 보는 순간 나는 마치 내가 공격당하는 것 같았다. 그의 등 뒤로, 시나리오에서 죽어간 평범한 사람들의 설화가 비치는 것 같았다. 「그 모든 설화가, 김독자를 원망하고 있는 것 같았다.」 “가족을 빼앗고, 내 땅을 모두 빼앗은 놈이야. 나는, 나는 반드시······!” 거기까지 말하던 공필두가 피거품을 물고 쓰러졌다. 잽싸게 그를 부축한 이설화가 공필두의 맥을 짚었다. “······화신체 손상이 심해요.” 선실의 싸움에서 공필두는 이현성과 함께 일행들을 보호했다. 그가 자랑하던 [무장요새]는 엉망으로 망가졌다. 배후성인 디펜스 마스터의 격도 거의 느껴지지 않는다. 아마 그가 함께 싸우는 것은 여기까지일 것이다. “제가 데리고 갈게요. 이 아저씨도 어쨌든 마지막을 볼 자격이 있으니까.” “부탁합니다.” 자신의 특수 스킬인 [침대차]를 발동한 이설화가 마력 그물로 이루어진 침대 위에 공필두를 눕혔다. 그사이 기운을 되찾은 이지혜와 정희원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요, 독자 씨. 뭐가 나오든 끝은 봐야지.” 그 말을 정희원이 했다는 사실에 면목이 없었다. 아마도 이 자리에서 나를 가장 원망하는 것은 그녀일 텐데. 툭, 하고 내 어깨를 치고 가는 손길. “쓸데없는 생각 하지 마요. 내 배후성이 말했잖아요. 우리가 본 이야기는 거기까지예요.” “······.” “이다음 이야기가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몰라요.” 서늘한 결의가 담긴 목소리에, 이길영을 업은 이현성도 고개를 끄덕였다. “희원 씨 말씀이 맞습니다.” 신유승도, 이지혜도 마찬가지였다. 「그 모든 일들이 있었음에도, 일행들은 여전히 김독자를 믿었다.」 일행들에게는 지금 저 문장이 보일까. 겨우 내가, 저런 문장을 읽어도 좋은 것일까. 츠츠츠츠츠······! [‘최후의 벽’ 내부로 입장하시겠습니까?] 이윽고 메시지가 떠올랐다. 벽 위로 몰아치는 개연성의 스파크. 그 스파크를 중심으로 벽이 함몰되고 있었다. 새하얀 벽 위의 활자들이 일제히 물러가며, 벽 위에 우리가 들어갈 작은 출입구가 생성되었다. 한수영이 의심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이 너머에도 네 계획이 있는 거야?” 출입구의 안쪽은 희뿌연 안개로 가득 차 있었다. 내가 잘 알고 있는 안개였다. 몇 번이나 다시 읽어서, 이제는 외워버린 문장. 「마침내, 모든 것을 잃은 유중혁이 안개 너머를 바라보았다.」 저 통로는, 1863회차의 유중혁이 지나갔던 바로 그 통로였다. “······이다음은 ‘멸살법’에도 안 나온다고 했잖아.”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정말 들어가는 일만 남았다. 마지막으로 걸리는 것은······. “······가세요. ‘차라투스트라’는 여기까지예요. 우리는 입장 권한이 없다고 하네요.” 안나 크로프트와 달리, 그녀의 권속인 ‘차라투스트라’들은 <김독자 컴퍼니>와 연계된 거대 설화를 그리 많이 가지고 있지 않았다. 잠시 침울한 눈으로 나를 보던 그들이, 묵묵히 몸을 비켜 우리가 걸어갈 길을 내주었다. [화신, ‘셀레나 킴’이 자신의 ■■를 받아들입니다.] [화신, ‘셀레나 킴’의 ■■는 ‘이룰 수 없는 꿈’입니다.] ―안나를 부탁해요. 전음을 통해 전해지는 셀레나 킴의 목소리. 나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이며 등을 돌렸다. 내 뒤로 일행들의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이제 하나의 별자리가 된 일행들. 하지만 모두 같은 방향을 향해 빛을 내지는 않는 이들. “가죠.” 「그럼에도 이곳의 모두는, 반드시 확인하고 싶은 결말이 있었다.」 그 순간, 안개를 표류하듯 떠다니는 그림자가 우리 앞에 있었다. 허공에 퍼지는 안나 크로프트의 백금발. 하지만 그녀의 몸을 움직이고 있는 것은 안나 크로프트가 아니었다. 유중혁은 [흑천마도]의 칼자루를 굳게 쥔 채 혹부리 왕의 동태에 이목을 집중했다. “혹부리 왕을 믿는 건 아니겠지.” 아까부터 경계심을 늦추지 않은 녀석은, 시도 때도 없이 혹부리 왕 쪽을 향해 살기를 방출하고 있었다. 나 역시 혹부리들을 좋아하지 않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비유를 납치하려 한 적도 있었고, 마계에서 나를 상대로 사기를 치려 한 적도 있었다. “안 믿어. 임시로 동맹을 체결한 것뿐이야. 전에 계약을 하나 했거든.” “계약?” 나는 자세히 설명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대신 설명해 줄 이가 나타났기 때문이었다. [나를 어지간히 믿지 못하는 모양이군, 회귀자.] 안나 크로프트의 입으로 말하는 혹부리 왕을 보고 있자니, 정말 최악의 조합이 따로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유중혁이 싫어하는 둘을 합쳐 놓다니. 유중혁은 말없이 [흑천마도]를 향해 자신의 마력을 흘려보냈다. 여차하면 칼부림이라도 망설이지 않겠다는 투였다. [다른 혹부리들에게 이야기는 들었다. 그대가 내 아이들의 혹을 잘라냈다더군.] “네놈도 잘리길 원하는 건가?” 혹부리 왕은 즐겁다는 듯 킬킬 웃었다. “뭐가 즐겁지?” [그대의 불필요한 고고함이 좋다. 마계와 무림에서도 그랬지. 거기서 오랫동안 따분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는데, 덕분에 아주 즐거웠어.] “한 마디만 더하면 정말로 혹을 자르겠다.” “어이, 유중혁.” 아무래도 평소보다 유중혁이 격앙된 것 같아서, 나는 유중혁을 제지했다. 여기서 혹부리와 드잡이질을 벌여서 좋을 것이 없었다. 왜일까. 흐트러진 기도가 평소의 유중혁과는 달랐다. 어쩌면 녀석도 마지막을 앞두고 생각이 복잡해진 것일지도 모른다. 그런 나와 유중혁을 번갈아 보던 혹부리 왕이 말했다. [그대들은 좋은 친구로 보이는군.] 유중혁이 다시 한번 눈을 부라리는 사이, 혹부리 왕이 말을 이었다. [내게도 그런 이가 있었다. 저기 있는 ‘구원의 마왕’처럼 이야기를 무척 사랑하는 녀석이었지.] “네놈의 이야기 따위 궁금하지 않다.” [우리는 함께 시나리오를 수행했지. 몇 번이나 죽을 고비를 넘겼고, 우리를 조롱하는 절대자들과 맞서 싸웠다. 설화를 쌓아 거대 설화를 만들고, 거대 설화를 쌓아 대서사시를 만들었다. 그렇게 만든 대서사시로, 마침내 ‘최후의 벽’에 도달했다.] ······‘혹부리 왕’이 ‘최후의 벽’에 도달한 적이 있다고? 이것은 ‘멸살법’에도 나오지 않는 정보였다. [들은 적 없는 이야기겠지. 이젠 설화로도 남지 않은 이야기니까. 반복된 세월 속에 미쳐버린 ‘묵시룡’ 정도나 간신히 기억하고 있을 거다.] “······네놈 때도 <스타 스트림>이 있었나?” [그땐 조금 다른 이름이었지. <스타 스트림>은 우리가 이 세계의 끝을 보고 난 후에 정해진 이름일 뿐이야.] 우리보다 앞서 ‘세계의 끝’을 본 존재. 그들의 ■■는 어땠을까.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그는 ‘혹부리 왕’으로 남아 시나리오를 표류하게 된 것일까. [지금 그 빌어먹을 녀석은 ‘이야기의 왕’이라 불리고 있지.] 안개 너머에서 우지끈, 하고 뭔가가 무너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래서, 나는 너희의 최종장을 기대하고 있다. 궁금하구나. 너희들 중 누가 이 시나리오의 마지막 승자가 될지―] 츠츠츠츠츠······. 눈앞의 안개가 일제히 진동을 일으켰다. [슬슬 내 오랜 친구를 만나러 갈 시간이군.] 그 말과 함께 혹부리 왕의 잔영이 사라졌다. 그러나 그의 메시지는 계속해서 들려왔다. [어서 움직이는 게 좋을 거다. 모두 먹혀버리기 전에 말이지.] ······먹혀? “아저씨!” 뒤쪽에서 우리를 따라오던 이지혜가 단말마와 함께 바닥 아래로 쑥 꺼졌다. 근처의 바닥과 벽면에서 손바닥 같은 게 나타나 우리의 팔과 다리를 잡아채고 있었다. “지혜야!” [등장인물 ‘이지혜’가 위대한 이야기의 일부가 되었습니다.] 바닥으로 빨려 들어가는 이지혜를 향해 정희원이 손을 뻗었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정희원의 몸 또한, 바닥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깊은 유사처럼 변한 벽이 정희원을 집어삼키고 있었다. [등장인물 ‘정희원’이 위대한 이야기의 일부가 되었습니다.] “희원 씨!” 정희원을 향해 달려가는 이현성을 보며, 나는 순간적으로 방향을 잃고 말았다. ‘멸살법’에서 이런 적이 있었던가? 대체, 이게 무슨― 「‘멸살법’에서 이 통로를 건넌 것은 유중혁 혼자였다.」 그 사실을 간과하고 있었다. 한 번도, 유중혁은 이 통로를 여럿이서 건넌 적이 없었다. “모두 이쪽으로 모이세요!” 하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이현성도, 이설화도, 공필두도, 이어서 유상아와 아이들까지 벽의 손아귀에 붙잡혀 빨려 들어가고 말았다. [등장인물 ‘신유승’이 위대한 이야기의 일부가 되었습니다.] [등장인물 ‘유상아’가 위대한 이야기의 일부가 되었습니다.] 심장이 거칠게 뛰었다. 그 와중에 들려온 ‘등장인물’이라는 말이 더욱 내 신경을 거슬렀다. “한수영! 유중혁!” 유중혁도 이미 바닥으로 반쯤 빨려 들어간 상태였다. 저항할 틈도 없었다. “물러서라!” 유중혁이 쏘아 보낸 검풍이 나를 떠밀었다. 나는 가까스로 발목을 붙잡는 활자들을 피해냈다. [등장인물 ‘유중혁’이 위대한 이야기의 일부가 되었습니다.] 결국, 유중혁마저 당했다. 남은 것은 한수영뿐이었다. 그 한수영조차도, 한쪽 팔이 벽에 삼켜지는 중이었다. “빨리 이쪽으로······!” 나는 온 힘을 다해 그녀를 잡아당겼다. [바람의 길]의 공능이 발끝에 깃들며, 폭발적인 추진력이 나를 휘감았다. [‘최후의 벽’이 당신의 대서사시를 향해 탐욕을 드러냅니다!] [‘최후의 벽’이 자신의 이야기에 포함되지 않은 인물을 바라봅니다!] 츠츠츠츠츳······! 한수영의 몸이 발작하듯 떨리고 있었다. 「한수영은, 이제 그를 제외하고는 유일하게 ‘등장인물’이 아닌 자였다.」 나는 온 힘을 다해 발을 놀렸다. 하지만 벽의 추적은 집요했다. 그보다 더 심각한 것은 내가 어디로 달아나야 할지 알 수 없다는 것이었다. 앞, 뒤, 옆, 위. 둘러보아도 달아날 곳은 보이지 않는다. 쑥. 허공을 헛디디는 느낌과 함께, 바닥이 꺼졌다. 이지혜와 정희원이 당했던 방식. 벽이 나를 빨아들이고 있었다. 나는 끝없는 공허로 추락하듯 한수영과 함께 떨어지기 시작했다. 거친 숨으로 밀려드는 희뿌연 안개가 숨통을 조이고 있었다. 「김독자는 자신이 모르는 이야기가 두려웠다.」 엄청난 밀도의 텍스트가 호흡을 방해했다. 너무 많은 글자들이었기에 차마 알아볼 수도 없는 설화들. 말 그대로의 ‘거대 설화’가 나를 짓누르고 있었다. 나는 어떻게든 그 설화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 쳤다. 하지만 발버둥 칠수록, 막연한 공포감이 나를 파고들었다. 내 안의 모든 것이 텅 비어가는 느낌이었다. 내 손끝으로 문장들이 빠져나가고 있었다. 나를 구성하는 설화들이 사라지고 있었다. 그때. 「너를 구성하는 설화들은, 네가 보고 겪고 느낌으로써 존재한다.」 그 하나의 문장이, 내 손끝에 걸렸다. 언젠가 ‘환생자들의 섬’에서 유호성이 알려준 ‘설화 통제법’이었다. 「그 녀석에게 네가 보고 있다는 것을 알려라.」 나는 그 문장을 꾹 붙잡았다. 그러자 그 문장과 함께 설화를 구성하던 것들이 하나둘 머릿속에 떠올랐다. 「김독자는 침착하게 숨을 가다듬었다.」 막막한 문장의 우주에서, 나는 도망치는 것을 그만두었다. 설화들이 나를 집어삼킬 듯 아가리를 벌리고 있었다. 「네가 들여다보지 않으면, 존재조차 하지 못할 녀석들이다.」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 일이었다. 저것들은 그저 설화다. 츠츠츠츠츠······! 나는 밀려드는 단어들을 바라보았다. 내가 이곳에서 너희들을 읽어왔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 눈도 깜빡하지 않은 채 문장들을 노려보았다. 그러자 다음 순간, 안개처럼 흩어져 있던 단어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설화에 먹히지 않기 위해서는 반드시 ‘독자’가 되어야 한다.」 자신들을 발견해 준 이에게 감사를 표하듯, 문장들이 내 발치를 떠돌았다. 그것들은 곧 내가 걸어갈 디딤돌이 되었다. 「설화를 사랑하되, 그것에 취하지 않고 그것을 읽을 수 있는 자.」 「그때, 설화는 비로소 실체 없는 공허에 맞설 수단이 되어줄 것이다.」 추락이 멈추었다. 나는 발치에 쌓여가는 문장들을 사뿐히 밟아 보았다. 그것은 ‘멸살법’의 문장들이 아니었다. 「“저는 독자입니다.”」 「실제로 나는 사람들에게 스스로를 이렇게 소개하곤 하는데, 그러면 다음과 같은 오해를 받곤 한다.」 그럼에도 그것은 어딘가 익숙한 문장들이었다. 나는 그 문장들을 읽으며 한 걸음씩 나아갔다. 개중에는 내가 이미 알고 있는 이야기도 있었고, 잘 모르는 이야기도 있었으며, 이제는 기억이 희미해진 이야기도 있었다. 「어렸을 적, 김독자는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 어린 내가 노트에 뭔가를 끼적이고 있었다. 가지런히 정리된 ‘멸살법’의 파워 밸런스 도표와 히든 피스들. 그리고, 「뭐야, 나라면 이렇게 안 했을 텐데.」 내 나름대로 작성한 ‘멸살법’의 공략. 「바보, 씨 커맨더는 이렇게 공략했어야지. 이때 필요한 아이템은―」 「극장 던전은 연구소에서 앰플을 얻는 게 공략의 핵심이고.」 「여기서 반드시 간평의를 얻어야 돼. 사인참사검보다 더 중요해.」 걸음을 옮길 때마다 기시감이 더해졌다. 「성좌들을 모두 죽이는 수밖에 없어. 여기서는 그래야 해.」 「회귀하지 않고도 강해지려면······.」 「역시 최선의 루트는 이거지. 첫 번째 ‘거대 설화’는 마계에서 얻어야 해.」 어린 내가 써 내려가는 문장들이 나의 길을 밝히고 있었다. 그 문장들을 걸어 나가며, 나는 생각했다. 「모두를 살리기 위해서는―」 어쩌면 이 길은, 내가 기억하기도 전부터 시작된 것은 아니었을까. 뚝. 이윽고 문장이 끊겼다. 문장이 끊어진 곳에, 아주 작고 하얀 문이 있었다. 1863회차의 유중혁 또한 열었던, 바로 그 문이었다. 「그가 읽지 못한 모든 이야기의 [에필로그]가 이 너머에 있었다.」 나는 문의 손잡이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고작, 이 손잡이의 문을 돌리기 위해.」 유중혁으로부터 시작되었던 그 모든 이야기가 내 머릿속을 스쳐갔다. 그리고 그 순간, 아주 오랫동안 품어왔으나 한 번도 입 밖으로 꺼내지 못했던 의문이 떠올랐다. 「tls123은, ‘멸살법’의 에필로그를 어떻게 그리고 싶었을까.」 문의 손잡이를 향해 손을 뻗으며, 나는 저도 모르게 뒤를 돌아보았다. 아득한 설화들로 이루어진 길. 멀리서 바라보자 그 길의 풍경은 기이하게 낯설었다. 「나는 오래도록 그 길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문이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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