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8화

498화 다리를 향해 달려오는 유중혁과, 뒤를 쫓는 <아스가르드> 측의 성좌들. 대머리 의병장이 외쳤다. [힘내게 후손들이여!] 그러자 외눈 미륵이 중얼거렸다. [머리에 땀 찼다, 너.] [자네 머리나 신경 쓰게.] [도우러 안 갈 거냐?] [화신이 없는데 무슨 수로 가나?] [직접 현현하면 되잖아.] [여기에 너무 오래 갇혀 있어서 돌아버린 건가? 남은 코인으로는 상징체 현현도 불가능하네.] 투덜거린 대머리 의병장이 머리를 닦으며 뒤를 돌아보았다. 그곳에는 단조로운 무채색으로 만들어진 커다란 연무장이 있었다. 92층 시나리오 지역, ‘무한의 성소’. 총 10개의 미션을 클리어 해야만 탈출할 수 있는 이곳에, ‘대머리 의병장’을 포함한 다수의 위인급 성좌들은 벌써 몇십 년째 갇혀 있었다. 외눈 미륵이 투덜거렸다. [빌어먹을 척가놈 때문에 이게 무슨 고생인지 모르겠군.] <무한의 성소> 지역을 처음으로 찾아낸 이는 고려제일검이었다. 「진정한 무인이라면 당연히 가야 할 곳이지. 시련들도 아주 쉬우니 숨겨진 조청 같은 곳이라 할 수 있다.」 척준경 다음으로 시나리오를 클리어한 해상전신은 이렇게 말했다. 「해볼 만한 곳일세. 통과하기만 하면 대단한 성취를 이룰 수 있어.」 척준경과 이순신의 무위를 동경하던 위인급 성좌들은, 그 말에 모두 ‘무한의 성소’로 향했다. 그리고 지금 수십 년째 이 꼴이었다. [우리가 척준경과 이순신이 아니란 걸 그땐 잠깐 잊고 있었네.] 어디서든 재능이 문제다. 대머리 의병장은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연무장 중심에서 병장기의 파찰음이 반복해서 들려 왔다. [저 치들은 아직도 싸우는 건가?] 외눈 미륵의 외눈이 향한 곳엔 드잡이질을 벌이는 두 노인이 있었다. 우락부락한 근육을 가진 호랑이 같은 사내와 호리호리하고 단단한 근육을 가진 여우 같은 사내. 두 자루의 검이 허공에서 부딪치자 강한 스파크가 튀었다. [김유신! 오늘은 반드시 승부를 내겠다!] [계백, 자네는 아직 내 상대가 안 되네.] 그들의 주변부로 「무대화」가 발생하며 황산벌의 전장이 펼쳐지고 있었다. 언젠가 김독자가 [간평의]를 이용해 만들었던 바로 그 전장이었다. 김유신의 용화향도들이 계백을 공격했고, 계백 또한 그에 웅혼한 격을 방출하며 귀신처럼 전장을 누볐다. 대단한 전투였지만, 다른 위인급 성좌들은 따분한 눈으로 그 광경을 지켜볼 뿐이었다. 매금지존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고, 한남군 개국공은 혀를 쯧쯧 찼다. 외눈 미륵이 비웃었다. [저렇게 폼 잡아 봤자 지들도 알아. 이제 여긴 황산벌이 아니라는 거.] 한때는 진심이었던 적도 분명 있었을 것이다. 깊은 은원이 있었고, 죽음으로도 풀 수 없는 한이 있었다. 그들은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황산벌에서 싸웠다. 분명 그런 시절도 있었다. [설화, ‘노을이 지는 황산벌’이 드문드문 이야기를 계속합니다.] 성좌가 되고 난 후 가장 빨리 닳아버리는 것은 성좌 자신의 ‘설화’다. 자신의 이야기가 고갈되어 갈수록, 성좌들의 힘은 약해진다. 무료해지고, 따분해지며, 깊은 우울에 빠지거나 권태에 침식된다. 그런 수렁에서 벗어나기 위해, 성좌들은 필연적으로 다른 설화를 찾게 된다. 이 끔찍한 영원의 굴레에서 잠깐이나마 해방되기 위해, 또 새로운 비극을 찾아 나서는 것이다. 카가강! 병장기가 부딪치는 속도가 점점 빨라지자, 서애일필이 말했다. [그래도 전보다는 힘이 좀 들어갔는데?] [그때 ‘구원의 마왕’이 저들을 소환하고 나서부터 다시 불이 붙은 것 같아.] 매금지존의 말에 성좌들은 동시에 시나리오 채널을 향해 눈을 돌렸다. 다리를 건너가는 김독자와 유중혁의 모습. 이미 반대편에 도착한 한수영이 외치고 있었다. ―김독자! 더 빨리! 시끄럽던 병장기 소리가 멈췄다. 황산벌을 재현하던 김유신도, 계백도 어느덧 숨을 죽이고 있었다. 하나둘 건들거리며 패널 근처로 모여들었다. 몇몇이 김독자가 건너는 다리를 보며 알은체를 했다. [잠깐, 저거 ‘짝수 다리’ 아닌가? 옛날 생각나는군.] [뭔 헛소린가. 자넨 저 때 구독도 안 했지 않은가?] [험······.] 오딘이 김독자와 유중혁을 쫓아오고 있었다. 결코 빗나가지 않는다는 신창 궁니르가 김독자의 등을 겨냥하고 있었다. 심지어 폭풍도 점점 거세어져 둘의 전진 속도는 느려지고 있었다. 외눈 미륵이 소리쳤다. [아니! 오딘 저 자는 그래도 신화급 성좌의 위상이 있지―] [독자군도 신화급 성좌일세.] [신화급이라도 다 같은가! 우리 김독자는 아직 연약한 새내기 신화급이야!] 언제 다투었냐는 듯, 화면 앞에 나란히 앉은 김유신과 계백도 외쳤다. [후손이 수련을 게을리했군.] [간평의로 나를 부를지도 모르겠어. 준비를 해야······.] [계백 그대를? 저런 상황에서라면 당연히 나를 소환하겠지.] 또다시 황산벌이 재현되려는 기미가 보이자, 외눈 미륵이 경고하듯 말했다. [둘 다 닥치고 화면이나 보시지.] [그나저나 저 자가 또 김독자를 던져버리는 건 아니겠죠?] 다리 위를 달리는 유중혁의 오른쪽 팔에 스파크가 튀고 있었다. 모든 성좌들이 우려하던 와중, 갑자기 유중혁이 그 팔로 김독자의 멱살을 잡았다. [내 저럴 줄 알았네! 저럴 줄―] 유중혁은 김독자를 힘껏 앞으로 내던지며 김독자의 등을 발판 삼아 짓밟았다. 마치 서핑이라도 하는 듯 폭풍을 거슬러 나아가는 유중혁. 다음 순간, 오딘이 던진 궁니르가 광대한 빛살과 함께 폭발을 일으켰다. 콰아아아아아아! 빛이 걷혔을 때, 그곳에는 부서진 [비프로스트]의 다리 잔해만이 남아 있었다. [······어떻게 된 거야? 성공인가?] 이내 화면이 전환되며, 다음 칸으로 넘어간 김독자 일행이 나타났다. [······오오, 성공이야!] 마치 자신들의 일이라도 되는 것처럼, 한반도의 성좌들이 서로를 마주 보며 기뻐했다. 심지어 계백과 김유신도 머쓱하게 서로를 보더니 가볍게 주먹을 맞댔다. 그러나 그들의 기쁨은 오래가지 못했다. ―놈들을 쫓아라. 분노한 오딘의 일갈에 <아스가르드> 성좌들이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김독자 컴퍼니>는 오래 달아나지 못할 것이다.」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아무리 김독자라고 해도 저렇게 불리한 무대에서 거대 성운들로부터 오래 달아나지는 못한다. 게다가 채널이 공개되었으니, 곧 방주 내의 다른 성운들도 <김독자 컴퍼니>를 노리기 시작할 터였다. 깊게 내려앉은 침묵 사이로, 누군가가 체념조로 중얼거렸다. [이번엔 힘들겠군······.] [사실, 죽어도 한참 전에 죽었어야 했던 친구지.] 그 말에 몇몇 성좌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까지 김독자의 생존은 기적의 연속이었다. 동호대교의 다리 아래로 떨어졌을 때도, [절대 왕좌]를 깨부술 때도, ‘구원의 마왕’이 되었을 때도, 1863회차에 다녀왔을 때도. 김독자는 몇 번이나 죽었어야 했다. 심지어 그가 ‘외신왕’이 되어 나타났을 때는, 모든 성좌들이 이제야말로 그가 죽을 거라 생각했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그들보다 한참 하위 시나리오에 있던 화신.」 이제 성좌들은 자신들보다 앞선 시나리오를 나아가는 김독자의 뒷모습을 보고 있었다. 누군가는 부러운 눈으로, 누군가는 자조적인 눈으로. 모두가 하고 싶은 말이 있었지만 누구도 감히 그 말을 꺼내지 못했다. 입을 연 것은 계백이었다. [신단수의 예언을 훔쳐 들은 적이 있네. 어쩌면 이 세계선이, 최후의 세계선이 될 수도 있다더군.] 누구도 <김독자 컴퍼니>의 끝이 어디인지는 모른다. 그들이 끝내 어디에 도달할 것인지, 어떤 ■■을 보게 될 것인지 아무도 알지 못한다. 어쩌면 많은 이들의 예상대로 이 세계의 끝에 도달조차 해보지 못하고 끝나버릴 수도 있다. 계백이 자신의 대도를 짚은 채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시선은 연무장의 중심에 있는 포탈을 향해 있었다. ‘무한의 성소’의 마지막 시련이 있는 장소. 김유신이 물었다. [설마 다시 도전할 셈인가? 이번에는 죽을 수도 있네.] [죽으면 여기가 나의 ■■겠지.] 계백의 말에, 김유신이 웃었다. [우리의 ■■은 황산벌이다.] 목을 꺾으며 김유신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세 번째로 일어난 것은 대머리 의병장이었다. [나도 다시 한번 도전해보겠네.] 의기에 찬 그의 눈동자가 빛났다. 그러자 이어서 몇몇의 성좌들이 더 일어났다. 매금지존, 한남군 개국공, 서애일필······ 그리고. [지난번 파티로 갔다가 몰살당할 뻔한 걸 다들 잊진 않았겠지.] 외눈 미륵의 말에 모두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들은 지금껏 이 시나리오의 마지막 관문을 통과할 수 없었다. [하지만 저길 통과하지 않으면 저 치들을 도우러 갈 수가 없어.] 애초에 ‘무한의 성소’의 최종장은 이 정도의 인원만으로 클리어할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일인병기인 척준경과 군함을 이끄는 이순신이 괴물인 것이다. 하다못해, 성좌 몇만 더 있었더라도― 성소의 한쪽 구석이 환하게 빛난 것은 그때였다. [누군가가 ‘무한의 성소’ 10층에 입장하였습니다!] 외눈 미륵이 반색하며 외쳤다. [오, 신입인가?] 빛살 속에서 나타난 이는 두 사람이었다. 잠시 후, 그들이 누구인지를 눈치 챈 외눈 미륵이 멍하니 입을 벌렸다. 아주 큰 사람과, 아주 작은 사람. 먼저 입을 연 것은 작은 사람 쪽이었다. [척준경 말대로군. 아직도 여기에 있었나? 한심한 놈들.] 사나운 패기를 흩날리며 키리오스가 말했다. [네놈들이 미적거려서 내 제자가 죽게 생겼다.] * 빛무리가 일제히 부서지는 광경과 함께, 나와 유중혁은 세계관의 출구로 빨려 나갔다. 정신을 차렸을 때, 나는 유중혁에게 짓밟혀 있었다. “던지지 말라니까!” 유중혁은 내 등을 밟은 것이 불결하다는 듯 가볍게 자신의 전투화를 털었다. 우릴 기다리고 있던 한수영이 다가왔다. 표정을 보니 또 한 마디 쏘아붙일 요량이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안나 크로프트가 먼저 입을 열었다. “무대화를 그런 식으로 사용할 줄은 몰랐군요. 솔직히 조금 감탄했습니다, 구원의 마왕.” 그러자 한수영이 안나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넌 [미래시]로 다 본 거 아니었어?” “다리를 건너는 건 보았지만 그게 저런 다리인 줄은 몰랐습니다.” “완전 사이비네 이거.” 나는 그들의 다툼을 무시하고 주변의 정경을 살폈다. 줄기의 관다발처럼 생긴 통로들이 곳곳으로 뻗어 있었다. 아마 이곳이, 이 ‘최후의 방주’의 복도인 모양이었다. 우리보다 앞서 통로로 진입한 ‘차라투스트라’들은 보이지 않았다. 잠시 눈을 감고 뭔가를 느끼던 안나 크로프트가 말했다. “아마 각자 다른 통로로 흩어진 것 같군요. 다행히 목숨을 잃은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 쪽 일행도 무사한 것 같군.” 유중혁의 말에 나도 고개를 끄덕였다. [해당 지역에서는 타 신화의 영향력이 약해집니다.] [성운 <김독자 컴퍼니>의 맥락이 다시 활성화됩니다!] <아스가르드>의 세계관에서 벗어나자, 일행들의 설화가 조금씩 감지되고 있었다. 곳곳에 흩어진 일행들이 느껴졌다. [설화, ‘구원의 마왕’이 자신의 존재를 알립니다!] 나는 내 설화를 강하게 방출해 일행들이 한곳으로 모일 수 있도록 유도했다. 일행들이라면 어렵지 않게 나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콰아아앙! 우리가 닫고 나온 <아스가르드>의 출입구에서 연달아 폭음이 울려 퍼졌다. 누군가가, 닫힌 문을 열고 나오려 하고 있었다. 누구인지는 뻔했다. “계속 움직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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