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7화

497화 Episode 95. 개천(開天) [현재 BY-9158의 화면 송출이 일시적으로 중단된 상태입니다.] 비유가 임의로 한 일일 것이다. 비형의 죽음 때문일 수도 있었고, 아니면 방주로의 전송 과정에서 문제가 발생했기 때문일 수도 있었다. 어느 쪽이든 도망 중인 지금의 우리에겐 잘 된 셈이었다. 눈앞의 사람만 없다면 더 좋았을 것이다. “안나 크로프트.” 나는 바람에 흩날리는 예언자의 금발을 바라보았다. 우거진 숲의 인근에서 추가로 기척이 느껴졌다. 아마 그녀의 직할 부대인 ‘차라투스트라’겠지. ―돌멩인가 자갈인가 왜 쟤한텐 안 통해?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지금 ‘환생자들의 섬’에서 있었던 일을 모두 설명할 수는 없었다. 한수영은 내 대답을 기다리는 대신 내 손목을 강하게 움켜쥐었다. 그리고 다른 한 손으로 안나 크로프트를 노려보며 손가락을 겨누었다. 그 끝에 사나운 [흑염]의 불꽃이 일렁이고 있었다. “비키든지 뒈지든지.”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부딪쳤다. [예상 표절]을 발동한 한수영의 동공에 새파란 귀기가 어리자, [대악마의 눈동자]를 가진 안나 크로프트의 눈에도 붉은 기운이 일렁였다. 미래를 읽는 두 사람의 시선이 부딪치자 희미한 스파크가 튀어 올랐다. 그 균형을 잠시 유지하던 안나 크로프트가 입을 열었다. “김독자, 이 층을 빠져나가고 싶겠죠?” 한수영이 정색하며 으르렁거렸다. “야, 나 무시하냐?” “내가 당신을 도울 수 있어요.” “아까 전엔 죽이겠다고 달려들더니?” 한수영의 말과 함께, 주변 성좌들의 기척이 느껴졌다. 주변 지형을 마구잡이로 파괴하며 우리를 찾는 녀석들도 있었다. 시간을 오래 벌기는 힘들었다. “어쩔 수 없었어요. 거기서 당신들 편을 들었다간 우리가 쓸려나갔을 테니까.” “지금은 상황이 다른가?” “이런 식으로 계속 시간을 끌 건가요? 지금 급한 건 내가 아니라 그쪽일 텐데요.” “그쪽을 신뢰할 근거가 있습니까?” “근거를 제시하면 믿는 타입이었던가요?” 다른 상황이었다면 이 도움을 기쁘게 받아들였을 것이다. 하지만, 안나 크로프트는 성운 전체와 직계약을 맺은 존재였다. “당신은 성운 <아스가르드>의 화신입니다.” [성운 <아스가르드>의 거대 설화들이 오랜 잠에서 깨어납니다!] 그리고 하필 이 층은, <아스가르드>의 성좌들이 머무는 선실이었다. 안나 크로프트는 순순히 인정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죠. 나는 저들의 화신입니다. 그럼 더욱 이상하지 않습니까? 내가 당신들을 보고 있는데, 왜 저들이 달려오지 않는지.” 나 역시 인근에서 서성이는 성좌들을 보고 있었다. 그들은 마치 우리의 대화를 듣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녀가 모종의 방식으로 성좌들의 시선을 차단한 모양이었다. “무슨 생각이지?” 나는 안나 크로프트의 심유한 눈을 마주 보았다. [전용 스킬, ‘독해력’이 발동합니다!] 「안나 크로프트는 누구보다 현실적인 대의를 중시하는 화신이다.」 어떤 의미에서 이 세계의 가장 큰 올바름을 추구하는 이는 안나 크로프트였다. 유중혁의 대의가 분노와 증오로 만들어진 것이라면, 안나 크로프트의 대의는 정의로 만들어졌다. 절대 다수의 생존. 그녀의 목표는 자신이 태어난 라스베이거스를, 미국을, 나아가 지구 전체를 이 시나리오의 지옥 속에서 보존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번 세계선에서 미국은 멸망했다.」 그녀의 고향은 대멸망이 일어났던 그날 사라졌다. 이제 남은 이들은 그녀를 따르는 소수의 ‘차라투스트라’뿐이다. 그럼에도 안나 크로프트의 표정은 어둡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의 표정은 어떤 열의로 가득했다. 드디어 자신이 원하는 세계에 가까워진 사람의 표정. 배 전체에 울려 퍼지는 부드러운 진동을 느끼며, 나는 입을 열었다. “당신은 이 방주를 차지할 생각이군.” 거의 동시에 나와 같은 해답에 도달한 듯, 곁의 한수영이 침음했다. 그러자 안나 크로프트가 빙긋 웃었다. “역시 이야기가 빨라서 좋군요.” “성좌들을 몰아내고 방주를 차지하는 건 쉽지 않을 겁니다.” “하지만 인류에게 주어진 마지막 기회에요.” 안나 크로프트의 계획은 명백했다. ‘최후의 방주’는 다른 세계선으로 설화의 씨앗을 옮기는 거대 설화 병기. 성좌들을 물리치고 이 방주의 통제권을 얻을 수만 있다면, 그녀는 새로운 세계선으로 인류를 이송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곳에서, 모든 것은 다시 시작되는 것이다. “단 하나의 성좌도 살려둘 순 없어요. 설령 그게 당신이라 해도.” 그 말을 들으며, 나는 ‘멸살법’의 오래된 문장을 떠올렸다. 「안나 크로프트의 ■■은 ‘완전한 밤’이다.」 그 어떤 별빛도 비추지 않는 암흑의 세계. 안나 크로프트는 인간이 다시 그 어둠 속에서 자유로워지길 원하는 사람이었다. 그녀가 꿈꾸는 세계라면, 내 일행들도 모두 살아남을 수 있겠지. 나는 조금은 외로운 느낌을 받으며 입을 열었다. “그럼 한시적인 동맹이겠군요. 방주의 ‘핵’이 있는 곳까지만 동행하는 겁니다.” “그때까진 내 [미래시]의 힘을 빌려주겠어요.” 곁에 있던 한수영이 나를 향해 메시지를 보냈다. ―거짓 간파로 계속 확인하고 있었는데, 거짓말은 없어. 딱히 포커페이스를 발동한 것 같지도 않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동맹을 받아들이겠습니다.” * 나는 비형이 남긴 설화를 더듬으며 주변의 지형을 읽었다. 「삼림 지대의 바깥쪽. 창공에 닿은 가지 쪽 출구.」 안나 크로프트를 따라가는 동안 내가 깨달은 것은, 우리가 서 있는 장소는 벌판이 아니라 나무의 한 층위였다는 것이었다. ―세계관 구현을 제법 잘해놨네. 한수영이 감탄했다는 듯 중얼거렸다. 정교하게 구현된 <아스가르드>의 세계관을 보고 있자니, 최후의 방주가 얼마나 오랫동안 준비된 물건인지 실감이 났다. 이것이 우주수 이그드라실의 전부는 아닐 것이다. 기껏해야 표본 정도겠지. 그럼에도 이 나무는 충분히 넓고 광대했다. 아마 <아스가르드>의 성좌들은 이 설화를 기반으로 다음 세계선에서도 기득권의 지위를 누리며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안나 크로프트는 그런 성좌들을 가만히 바라보더니, 이내 고개를 돌리고 전방 탐색에 집중했다. 그런 안나 크로프트를 보던 한수영이 물었다. ―그런데 저 녀석 괜찮을까? 성운을 배신한 대가가 클 텐데. 내가 답하기도 전에 먼저 입을 연 것은 안나 크로프트였다. “내 사정은 당신들이 상관할 바 아니에요.” “······뭐야, 너 이런 것도 엿들을 수 있어?” “오래 말이 없으니 밀회를 나누고 있을 거라 짐작했을 뿐이에요.” “믿고 있는 뒷배라도 있나 봐?” 한수영의 말에, 안나 크로프트의 표정이 처음으로 굳어졌다. “무슨 소리죠?” “일개 화신이 ‘성운’ 전체의 시야를 차단하는 게 상식적으로 가능할까 싶어서 말이지.” 한수영의 말이 맞다. 그 어떤 화신이라 해도 그런 일을 해낼 수는 없다. 나는 안나 크로프트의 뒤쪽을 가만히 노려보았다. [전용 스킬, ‘독해력’의 집중도가 더욱 높아집니다!] 짐작 가는 것이라면 있었다. 그녀의 뒤쪽에서 부드럽게 뭉그러지는 혼돈의 기운. 그 너머에서, 안나 크로프트의 눈동자와 닮은 붉은 눈동자가 언뜻 보이는 것도 같았다. 애초에 성좌들이 보는 채널에 간섭할 수 있는 종족은 이 세계에서 둘뿐이다. 쿠구구구구! 허공에서 날벼락이 떨어진 것은 그때였다. 일대의 대지가 갈라지고, 주변의 기후가 심상치 않게 흔들렸다. 폭풍이 오는 소리였다. [성좌, ‘외눈의 아버지’가 자신의 외눈을 천천히 깜빡입니다.] 츠츠츠츠츠츳! 안나 크로프트의 안색도 하얗게 질리고 있었다. 98번 시나리오에서 싸웠던 창조신 ‘라’도 저 정도의 박력은 아니었다. 아까 본 토르조차 능가하는 아득한 격. 이 세계관의 최강자가 지금 막 잠에서 깨어난 것이었다. “······오딘.” 우리는 달리기 시작했다. 아무리 <김독자 컴퍼니>가 강해졌다고 해도, <아스가르드>의 땅에서 신화급 성좌인 오딘을 맞상대하는 것은 멍청한 짓이었다. [성좌, ‘외눈의 아버지’가 자신의 세계를 바라봅니다.] 무시무시한 시선이 세계를 훑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뭔가가 우리를 바라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이쪽이에요! 빨리!” 안나 크로프트가 가리키는 방향에서 이그드라실의 상층부로 통하는 나무줄기가 나타났다. 우리는 그 줄기 위를 달려갔다. 그리고 거의 동시에, 바닥의 줄기들이 힘을 잃고 무너지기 시작했다. “더 빨리!” 나는 온 힘을 다해 달리며 바람을 움직였다. [전용 스킬, ‘바람의 길 Lv.???’이 발동합니다!] 지금까지 모은 거대 설화의 영향으로 더욱 강력해진 바람의 길이 일행들에게 가속도를 붙였다. 가능하면 [마왕화]를 전개해 날개를 펼치고 싶었지만, 전송 직전 다친 한쪽 날개의 회복이 더딘 상태였다. 두두두두두두두! 뭔가가 우리의 뒤를 쫓고 있었다. [성좌, ‘하프와 호른의 신’이 아버지의 명령을 듣습니다.] [성좌, ‘사랑과 고양이의 여신’이 아버지의 명령에 따릅니다.] [성좌, ‘멸망의 늑대에게 팔을 잃은 자’가 울부짖습니다!] [성좌, ‘큰 뿔 다리의 수호자’가 누군가의 존재를 눈치챘습니다!] “이제 다 왔어요!” 말과 함께 돌아선 안나 크로프트가 뒤를 향해 양손을 뻗었다. 일순간 주변의 정경이 변하며 일대의 시야가 사라졌다. 안나 크로프트의 특기인 [환영 결계]였다. 한순간 주변이 암전된 성좌들이 기함을 했다. 츠츠츠츠츠츳! 안나 크로프트의 눈이 충혈되더니, 곧이어 그녀의 입과 귀에서 피가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자신의 성운에 직접 대항한 대가였다. 안나 크로프트는 그런 상황에도 굴하지 않고 외쳤다. “이리스! 셀레나! 동료들을 데려가!” 우리보다 앞서 달리던 두 사람이 ‘차라투스트라’를 데리고 가지의 끝을 향해 나아갔다. “달려요! 바로 앞이니까!” 피를 쏟는 안나 크로프트는 어느새 한쪽 무릎이 꺾이고 있었다. 도저히, 혼자서 달릴 수는 없는 상황이었다. “한수영.” 내 말이 떨어지기도 전에 한수영이 안나를 안고 달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는 가지의 끝에 도달했다. 무지개 빛이 감도는 신비한 다리가 그곳에 있었다. 「다른 층으로 통하는 무지개다리, [비프로스트].」 신화 속에서나 나오던 환상의 다리가 눈앞에 놓여 있었다. 셀레나와 이리스 일행은 이미 다리를 절반 이상 건너간 상태였다. 나는 [전인화]를 발동해 추진력을 이용해 단번에 건너가려 했다. 그런데. 콰아아아아앙! 허공에서 빛이 번뜩인다 싶더니, [비프로스트]의 중심이 뚝 끊어졌다. 창공을 가르는 거대한 창이 회수되고 있었다. 나는 그 창이 무엇인지 바로 알아보았다. 신왕(神王) 오딘의 무기, 궁니르(Gungnir). 그는 다른 세계로 통하는 다리를 직접 끊어버림으로써 우리를 제거하기로 결심한 것이었다. 나는 뒤쪽에서 쫓아오는 성좌들의 무리를 바라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이곳에서 오딘과 싸우면, 우리는 필패한다. 쿠구구구구! 결국 답은 다리를 건너가는 것뿐이었다. 하지만 끊어진 다리의 폭은 너무나 컸고, 그 사이에는 오딘이 생성한 폭풍이 불고 있었다. [바람의 길]이나 [전인화]를 전력으로 발동해도 저걸 건널 수 있다는 보장이 없었다. 한수영이 답답하다는 듯 외쳤다. “빨리! 방법 없냐고!” 한수영에게 흔들리는 안나 크로프트가 피를 꾸역꾸역 토하며 말했다. “내 미래시도······ 완전한 건 아니에요······ 다만 이번만큼은······ 확실히 봤어요. 이 다리에서······ 우리 네 사람이 건너는 걸······.” ······네 사람? 물어보고 싶었지만, 지나치게 피를 많이 흘린 안나 크로프트는 어느덧 말이 없었다. 그 순간, 내 머릿속에 어떤 장면이 떠올랐다. 「김독자는 생각했다. ‘그게 될까?’」 하지만 다른 수가 없었다. 하늘을 올려다보자, 채널의 격변에 당황한 성좌들의 간접 메시지가 쏟아지고 있었다.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채널 화면을 보고 싶어합니다!] [성좌, ‘흥무대왕’이 갑작스런 채널 암전에 불평합니다!] [성좌, ‘대머리 의병장’이 사라진 김독자를 찾습니다!] “비유! 화면을 틀어!” “뭐? 돌았어?” 지금 채널을 열면 방주 안의 모든 성좌들은 내 위치를 눈치채게 될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채널을 열어야만 가능한 일이었다. 츠츠츠츠츠츳! [다수의 성좌들이 펼쳐진 화면에 깜짝 놀랍니다!] [일부 성좌들이 당신의 위기를 깨닫고 경악합니다!] [소수의 성좌들이 이 상황에 대한 기시감을 느낍니다.] 성좌들이 말하는 기시감이 무엇인지, 나도 잘 알고 있었다. 「언젠가, 그들은 끊어진 다리를 함께 건넌 적이 있었다.」 끊어진 동호대교 위로 발동했던 ‘데우스 엑스 마키나’. [절대다수의 성좌들이 그때의 상황을 기억합니다!] [성운 ‘김독자 컴퍼니’의 거대 설화들이 움직입니다!] 성좌들의 시선과 함께, 개연성이 요동쳤다. [‘무대화’가 발동합니다!] 츠츠츠츠츠츠······! [‘데우스 엑스 마키나’가 발생합니다!] 그때 성좌들이 재현했던 바로 그 다리가, 눈앞에서 재현되고 있었다. + [데우스 엑스 마키나 ― 짝수 다리] 설명 : 성좌의 가호로 만들어진 빛의 다리. 오직 ‘짝수’의 인원만이 다리를 건너갈 수 있다. 홀수의 인원이 다리를 건너려 할 시, 다리는 즉시 소멸한다. + 짝수 다리. 정말 오랜만에 듣는 이름이었다. “한수영! 안나를 데리고 달려!” “뭐?” “빨리!” 나는 한수영에게 [바람의 길]을 발동해 강제로 다리를 건너게 했다. ―야! 에이 씨, 모르겠다······! 나는 멀어지는 한수영의 뒷모습을 보며 등을 돌렸다. 어느새 안나 크로프트의 [환영 결계]를 빠져나온 성좌들이 하나둘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나는 그들을 향해 격을 개방하며 생각했다. 「짝수 다리는, 반드시 짝수의 인원만이 건널 수 있다.」 멀리서 한수영의 목소리와 분노한 오딘의 포효가 번갈아 들려왔다. 그리고 나는 [부러지지 않는 신념]을 뽑았다. 여기서 죽을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안나 크로프트는 ‘네 명’이라고 했다.」 달려드는 성좌들을 향해 [전인화]의 전격을 방출하는 순간, 성좌들의 후미에서 폭발음이 들려 왔다. 누군가가 탱크처럼 성좌들을 깨부수며 이쪽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익숙한 설화. 방금 이 층으로 소환된 이가 있었다. 뿌옇게 차오른 설화의 안개 너머로 녀석의 얼굴이 나타났다. ―그대로 달려라. 김독자. 적들을 모조리 쳐내고, 성좌들의 골통을 박살낸 놈이 흉흉한 눈빛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저 녀석이랑은 건너기 싫었는데. ―이번엔 던지지 마라, 개자식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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