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0화
480화
파스슷.
[부러지지 않는 신념]에 설화의 잔흔이 묻었다.
매캐한 연기를 내며 타오르는 설화.
한때 누군가의 역사였던 것이 재가 되어 흩날리고 있었다.
피에 젖은 김남운의 하얀 머리카락이 칼끝에 걸려 있었다.
「그것이 김독자의 선택이었다.」
나는 잿빛 속에 하늘하늘 흩어지는 녀석의 머리카락을 보며 입을 열었다.
“어렸을 때, 난 네가 무지 싫었어.”
한창 ‘멸살법’을 읽던 시절, 김남운은 내가 유일하게 정을 줄 수 없던 인물이었다. ‘멸살법’에 나오는 모든 인물들이 나의 형이고, 아버지이고, 동생이고, 누나였다면.
등장인물 ‘김남운’은 나의 반면교사였다.
“네 정의에는 품위가 없었고, 네 살인에는 기준이 없었지.”
비정상적인 세계에 누구보다 빨리 적응한 18살 청년. 오만함과 방만함으로 칼을 휘두르며 자신의 본성을 어둠에 내맡긴 화신.
망설임 없는 악행과 유치한 대사들.
그러한 특징들이 너무나 명백했기에, 어렸던 나는 마음 놓고 녀석을 미워할 수 있었다.
「마음껏 미워하고 증오할 수 있도록 조형된 악.」
그것이 김남운이었다.
“너는 악인이야. 그때도 그랬고, 지금도 마찬가지지.”
나는 마치 스스로에게 말하듯 중얼거렸다. 칼날에 묻은 설화들이 핏물처럼 떨어지고 있었다.
「어른이 된 김독자는, 다시 한번 김남운을 바라본다.」
‘멸살법’의 인물들이 시나리오 속에서 바뀌었듯, 그 이야기를 읽는 나 역시 변했다.
나는 이제 그가 악인이 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들을 헤아리는 나이가 되었다.
「김남운이 악인이 된 것은, 어쩌면 김독자 자신 때문인지도 모른다.」
내가 그때 ‘멸살법’을 봤기 때문에.
작가에게 의견을 제시하고, 성좌들이 으레 그러하듯 그를 평가하고 판단했기 때문에.
―작가님. 이번에도 꼭 김남운을 동료로 데려가야 하나요?
그가 살아있는 인물이 아니라, 작가가 만든 ‘등장인물’이라고 믿었기 때문에.
지금 생각해 보면 내가 김남운을 미워한 이유는 단순했다.
“유중혁은 언제나 널 동료로 영입했지.”
김남운은 ‘멸살법’의 어떤 인물보다도 나를 닮았다.
“네가 나쁜 놈이라는 걸 알면서, 또 악행을 저지를 것을 알면서도······. 그런 너를 데려갔어.”
만약 내가 김남운이라면 어땠을까.
청일고교 2학년 김남운.
학업에 대한 스트레스와 부모님과의 갈등 속에서 살아가던 평범한 고교생.
그런 고교생이, 보호자도 없이 누군가를 죽이지 않으면 살아날 수 없는 극한의 환경 속에 홀로 내던져진다면.
“처음엔 유중혁이 실리를 따진 거라 생각했어. 너는 잠재력이 높은 화신이니까.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 보면, 너 정도로 성장할 수 있는 인물들은 또 있었어. 그런데도 유중혁은 매 회차가 시작될 때마다 널 동료로 영입했지.”
나라면 김남운과 다른 선택을 할 수 있었을까.
1회차를, 2회차를, 3회차를······ 999회차를 거듭하면서 그때의 ‘김남운’과 다른 선택을 하고 살아남을 수 있었을까.
“······지금 생각해 보면 ‘실리’를 추구한 건 유중혁이 아니라 나였는지도 몰라.”
내가 ‘멸살법’을 처음 읽었던 그때부터 유중혁은 줄곧 ‘28살’이었다.
그때도 지금도 어른인 유중혁은 알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생은 선택의 누적이고, 그 무수한 선택이 쌓여 한 사람분의 설화가 된다는 것을.
태초부터 악(惡)으로 조형된 인물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1회차와 2회차가 다르듯 998회차와 999회차가 다르다는 것을.
그리고 그것이, 그가 회귀를 반복하는 진짜 이유임을.
허공에 멈춰선 칼날.
[부러지지 않는 신념]이 넋을 잃은 김남운의 경동맥을 희미하게 파고든 채 멈춰 서 있었다.
나는 반쯤 한숨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그렇다고 네가 용서받을 수 있다는 뜻은 아니야. 다만 내가 하고 싶은 말은······.”
【김남운!】
뒤쪽에서 밀려오는 어마어마한 격의 표현.
거친 포연의 바다를 헤치고 탱크처럼 이쪽을 향해 달려오는 이가 있었다.
999회차의 이지혜였다.
단지 김남운이 위기에 처했다는 것만으로, 자신의 ‘섬’을 내던진 그녀가 포화를 뚫고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김독자 컴퍼니>의 공격을 정면에서 받아 온몸이 넝마가 되어가면서.
“복 받았네. 저렇게 생각해 주는 ‘동료’도 있고.”
‘동료’라는 말에 김남운의 텅 빈 동공이 흔들렸다.
이쪽으로 오고 있는 것은 이지혜뿐만이 아니었다.
등줄기가 후끈하다 싶더니, 내 뒷덜미를 위협하는 감각이 있었다.
[업화의 불꽃]이었다.
【무슨 꿍꿍이지?】
방금전까지 유중혁과 싸우고 있었던 999회차의 우리엘이 어느새 내 등 뒤에 서 있었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그쪽을 바라보았다.
급하게 전장을 이탈한 까닭인지 그녀의 순백색 날개가 찢어져 있었다. 곳곳에 남은 깊은 상처들. 한눈에 보기에도 치명상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원한과 증오, 승패조차 도외시하고 김남운의 위기에 이곳으로 날아온 것이었다.
이계의 신격이 된 후에도 변하지 않는 것은 있다.
‘단 한 사람’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거는 동료들.
그런 그들이었기에, 유중혁이 없는 999회차의 끝을 볼 수 있었던 것이리라.
“꿍꿍이라. 그건 내가 묻고 싶은 말이야.”
가벼운 착지음과 함께 999회차 우리엘의 뒤를 점한 유중혁의 모습이 보였다. 녀석의 [흑천마도]가 우리엘의 목을 노리고 있었다.
유중혁의 눈빛은 복잡했다. 나를 질책하는 것 같기도 했고, 내 선택에 공감하는 것 같기도 한 표정. 어쩌면 양쪽 다일 것이다. 어차피 이렇게 된 거, 내가 원하는 대로 해보라는 눈빛.
재촉하지 않아도 그리할 참이었다.
“당신과 ‘이계의 신격의 왕’들은, 마음만 먹으면 지구를 멸망시킬 수 있었어.”
내 말에 999회차 우리엘의 동공이 희미하게 흔들렸다.
[현재 ‘대멸망 시나리오’가 진행 중입니다!]
다른 시나리오도 아니고, 무려 98번 시나리오 지역에서 시행되는 ‘대멸망’이었다.
저 하늘의 성좌들조차 영멸을 두려워해 감히 참가하지 못하는 시나리오.
적어도 이 시나리오에서 재앙으로 강림한 ‘이계의 신격’들은 성좌들을 능멸할 무소불위의 힘을 가지고 있었다.
「단 한 번의 손짓에 태평양 일대의 모든 섬들이 궤멸당했다.」
원작에 쓰여 있었던 그 문장을 나는 지금도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마음만 먹으면 외우주의 유성을 불러내 충돌시킬 수도 있는 게 바로 저 ‘왕’들이었다.
재앙으로 강림한 이상 얼마든지 더 커다란 개연성을 끌어다 쓸 수도 있는 존재들.
“왜 처음부터 그렇게 하지 않은 거지?”
그리고 내 모든 계획은, 바로 그 의문에서부터 출발했다.
어째서 그들은 곧바로 지구를 터트리지 않았는가.
999회차의 우리엘은 한참이나 말이 없었다.
【······그것은.】
사실 대답은 이미 짐작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이들은, 원작에 등장한 ‘이계의 신격’들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설령 다른 세계선에서 왔다 한들, 그들은 ‘지구’에서 시작해 시나리오를 클리어한 이들이다.」
지구는 그들의 고향이었다.
그들의 설화가 시작되었고, 그들의 삶이 끝난 곳.
그들은 비극이 되어 살아남았다. 다른 세계선에서 온 외신에게 그들의 소중한 이를 약탈당했다.
이미 다른 세계선의 침공에는 신물이 난 존재들.
그런 그들이······ 정말로 자신들의 목적만을 위해 다른 세계선 전부를 멸할 수 있을까.
“당신들은 우릴 죽일 생각이 없어.”
999회차의 이지혜는 말했다. 이 세계선을 제물로 삼아 자신들의 시나리오를 부활시킬 것이라고.
하지만 정말일까.
이미 <스타 스트림>에 대한 불신으로 가득 찬 그녀가, 대도깨비들과의 약속을 곧이곧대로 믿고 그렇게 행동했을까.
그리고 999회차의 우리엘이, 정말 그것에 동의했을까.
“애초에 그럴 수 없는 사람들이니까. 이 싸움은 처음부터 당신들이 진 거야.”
이것이 내가 내린 해답이었다.
[절대다수의 성좌들이 당신의 판단에 큰 충격을 받습니다!]
999회차를 부정하지 않으면서, 우리의 회차를 지켜낼 방법.
담담한 내 선언에, 999회차 우리엘이 복잡한 눈으로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녀의 곁으로 비척거리며 다가온 999회차의 이지혜가 김남운의 머리 위에 가만히 손을 얹었다.
멍하니 나를 올려다보던 김남운의 고개가 돌아갔다.
김남운이 울고 있었다. 무엇이 그리 서러운지, 꾸역꾸역 울음을 토하고 있었다.
999회차의 우리엘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그 광경을 보고 있었다.
【······이제 그만합시다.】
그 말을 한 것은, 다가온 이현성이었다.
【뭘 그만하자는 거지?】
【당신도 알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엘. 이것은 우리가 원하는 일이 아닙니다. 이런 식으로는 아무것도 해결되지―】
【그럼 어떻게 하면 해결할 수 있지?】
우리엘의 목소리에는 고저가 없었다. 아주 오랫동안 닳은 절망이 갖게 되는 목소리였다.
【나는 최선을 다했다. 그와 약속한 대로 세계의 끝을 보았고, 그럼에도 아무것도 구해내지 못했다. 이계의 신격이 되었고, 복수를 꿈꾸며 살았다. 사실 그 복수에 별 의미가 없다는 걸 알면서도, 그걸 부정하며 여기까지 왔다. 그런데 여기까지 와서 또 무얼 포기하란 것이지? 말해보라, ‘은빛 심장의 왕’.】
【저는 그 대답을 알지 못합니다. 다만, 이들의 이야기가 우리에게 무언가를 보여줄 거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무엇을? 여기까지 와서, 이제 와 우리가 무엇을 더 볼 수 있단 말이지?】
【그건 모릅니다. 하지만 어떤 예감이 듭니다. 999회차의 우리가 지금껏 ‘이계의 신격’이 되어 살아남았던 것은, 이 순간을 위해서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 ······당신도 느끼고 있지 않습니까?】
999회차의 우리엘이 창공을 올려다보았다.
하늘이 울고 있었다. 별들이 함부로 반짝이고 있었다.
[<스타 스트림>이 아주 오랫동안 기다려온 설화의 결말을 재촉합니다.]
주변을 둘러보자 어느새 일행들이 도착해 있었다.
한수영, 유상아, 정희원, 이지혜, 신유승, 이길영······.
포위하듯 ‘이계의 신격’을 둘러싼 그들은, 임전 태세를 갖춘 채 내 신호를 기다리고 있었다.
999회차의 우리엘이 물었다.
【왜 이들은 가능하고, 우리는 안 되는 것이지?】
거칠게 타오르는 [업화의 불꽃]이 울부짖었다.
【······왜, 우리는 실패한 것이지?】
그때, 감히 입을 연 존재가 있었다.
“왜 네가 실패했다 생각하지?”
유중혁이었다.
여전히 [흑천마도]로 우리엘의 목을 겨눈 채, 유중혁이 물었다.
“네가 원하지 않았던 결말은, 모두 실패한 결말인가?”
놀랍게도 나는 그 대사가 누구의 것인지 알고 있었다.
「“설령 이 세계의 끝이 비극이라고 해도······ 너희들이 실패했다고 생각하지는 마라.”」
그것은, 999회차의 유중혁이 죽기 전 일행들에게 했던 말이었다.
999회차의 우리엘이 몸을 떨었다. 아득한 좌절 사이로 아주 희미하게 흘러나오는 희열.
떨리는 목소리로, 우리엘이 유중혁을 향해 다가갔다.
【너는 정말로······ 내가 아는 ‘유중혁’인 것인가?】
유중혁은 대답하지 않았다.
【말하고 싶다. 그를 불러 다오! 단 한 번이라도, 그를 다시 만나고 싶다. 묻고 싶다. 그리고―】
999회차의 우리엘이 애원하듯 유중혁의 손을 붙잡았다. 이제 그녀도 느끼고 있을 것이다. 저 ‘유중혁’의 안에는, 그녀가 사랑했던 999회차의 유중혁도 있다는 것을.
실제로 이 계획을 세우던 당시, 나는 제일 먼저 ‘은밀한 모략가’에게 999회차의 유중혁을 불러 달라고 말했었다.
저 ‘이계의 신격의 왕’들이 의지하는 것은 999회차의 유중혁.
그러니 그에게 도움을 구할 수만 있다면 저들을 설득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미안하지만 그것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은밀한 모략가’는 내 부탁을 거절했다.
마치, 지금의 유중혁이 말하고 있는 것처럼.
“그 녀석을 불러서 어쩌겠다는 거지?”
【그건······.】
“녀석이 항복하라고 하면 그렇게 할 셈인가? 우리 말을 들으라고 하면, 순순히 녀석의 말을 따를 것인가?”
한 마디가 더해질 때마다 999회차 우리엘의 표정이 창백해졌다. 그만 두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유중혁은 멈추지 않았다. 무자비한 검격처럼 쏟아지는 말들. 그리고 어느 순간, 나는 뭔가를 깨달았다.
부탁을 거절한 것은 ‘유중혁’도, ‘은밀한 모략가’도 아니었다.
[999회차의 ‘유중혁’이 침묵합니다.]
나타나길 거부한 것은 999회차 유중혁 본인이었다.
그 순간, 뒤늦은 깨달음이 찾아왔다.
“이렇게나 오랜 시간이 지났는데도, 아직도 너희는 그 녀석이 없으면 아무것도 결정하지 못하는 것인가?”
그제야 모든 것이 이해될 것 같았다. 왜 그가 내 부탁을 거절했는지.
어째서 999회차의 유중혁은 자신의 일행들 앞에 나타나지 않는 것인지.
「999회차의 이야기는 유중혁의 부재를 통해 완성되었다.」
그의 동료들은 오직 그를 되살리기 위해, 다시 만나기 위해, 그의 원수를 갚기 위해서만 살아왔다.
오직 그것을 삶의 이유로 삼으며 견뎌왔다.
「그렇다면, 만약 그 이유가 사라진 후 그들의 삶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
파도가 만들어 낸 포말이 발치를 적셨다. 가라앉은 대양. 아주 먼 곳에서 흘러든 이방인처럼 낯선 바다였다. 그 바다의 중심에서, 섬을 이룬 ‘이계의 신격’들이 숨을 멈춘 채로 자신들의 왕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들의 왕이 말하고 있었다.
【······그런가.】
아주 오랜 세월동안 망망대해를 항해한 끝에, 마침내 목적지를 발견한 배처럼.
【그것이 너의 뜻인가, 유중혁.】
999회차의 우리엘의 떨림이, 서서히 멈추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