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8화
478화
콰아아아아!
전신을 휘감는 제천대성의 격이 오른손의 [여의금고봉]에 집중되었다. 통천하에서 성좌들을 상대했던 그날처럼.
다만 다른 점이 있다면, 지금은 내가 온전히 그 ‘손오공’의 힘을 사용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거대 설화, ‘잊혀진 것들의 해방자’가 당신에게 온전히 깃듭니다!]
“제가 길을 뚫겠습니다.”
[여의금고봉]을 휘두르자, 밀려오던 해일의 중심에 커다란 구멍이 뚫렸다. 하지만 구멍은 순식간에 메워졌다.
【안돼안돼안돼안돼안돼안돼】
999회차의 이지혜가 융기시킨 섬에서 ‘이름 없는 것들’이 기어 나오고 있었다.
도저히 상대할 수 없을 만큼 많은 숫자였지만, 제천대성은 그다지 당황하지 않았다.
[부숴라.]
허공으로 들어 올린 팔이 저릿하다 싶더니, 창공이 먹구름으로 뒤덮였다. 뇌운을 품은 근두운들이 몇 번인가 하늘을 울렸다. 이내 눈부신 푸른 빛이 바다에 산란했다.
콰아아아아앙!
내리친 뇌전 다발이 바다의 모든 것들을 찢어발기며 길을 내었다. 몇 번이고 다시 내리치는 뇌전. 어마어마한 격이었다.
이게 바로 마지막 시나리오에 다다른 제천대성, 최강의 성좌라 불리는 이의 힘.
【가각 가가가가가가가각?】
하지만 몰아치는 뇌전에도 근근이 버티는 녀석들이 있었다.
아까보다 조금 더 크기가 큰 개체들이었다.
【죽 인 다 성 좌】
【모 든 별 들 의 파 멸 이 다 가 온 다】
보다 정확한 언어를 구사할 수 있는 ‘이계의 신격’들. 상위의 개체들이 해저의 터널을 지나 수면으로 올라오고 있었다.
“미친―”
곁에 있던 한수영이 소리쳤다.
쿠구구구구구구!
바다의 지반 전체가 흔들리며 해저에서 용암이 끓어 올랐다.
“모두 물러나!”
우리는 이지혜의 [터틀 드래곤]에 올라타 허공으로 솟구쳤다.
희뿌옇게 물든 해수면엔 꿈틀대는 것들이 가득했다.
【세 계 선 의 멸 망 이 찾 아 올 것 이 다】
세기말적인 대사를 늘어놓으며 강림하는 ‘이계의 신격’들.
언젠가 우리는 저런 존재와 마주한 적이 있었다.
시나리오 초기, [암흑성]의 전장에서였다.
[‘제4의 벽’이 희미하게 술렁입니다.]
어쩌면 벽 안의 사서가 된 [꿈을 먹는 자] 또한 지금 이 광경을 보고 있을 것이다.
“저런 것들을 어떻게 잡으란 거야?”
이를 악문 한수영이 양손으로 [흑염]을 발출했다.
무려 수 킬로미터에 달하는 촉수들이 한꺼번에 바다 위를 솟구치자, 용암 범벅이 된 해일이 산맥처럼 커져갔다.
문득 ‘멸살법’의 한 문장이 떠올랐다.
「융기한 섬에서 흘러나온 재앙은 마침내 지표면의 모든 것을 덮었다.」
이대로 시간이 지난다면 이 세계선의 지구 또한 그렇게 될 것이다.
“제천대성!”
나는 제천대성의 힘을 빌려 다가오는 해일들과 맞섰다.
순식간에 자라난 여의봉이 다가오는 ‘이름 없는 것들’을 쳐냈다. 빌딩만한 파도를 부수고, 날아드는 촉수를 작살 냈다. 그래도 끝이 없었다.
「해일은 점점 더 커져갈 뿐이었다.」
하나의 해일을 이겨내면 두 번째 해일이 오고, 두 번째 해일을 부수면 세 번째 해일이 덮쳐온다.
그리고 그 모든 해일의 중심엔 ‘가라앉은 섬의 주인’과 다른 ‘이계의 신격의 왕’들이 있었다.
[······이번엔 쉽지 않겠군.]
제천대성조차 그렇게 말할 정도였다.
이대로라면 저들에게 도착하기도 전에 우리가 당할 판이다.
“저걸 뚫을 방법이 없습니까?”
[시간이 필요하다.]
그 말을 남긴 제천대성이 격을 모으기 시작했다. 심장 어귀가 급속도로 따뜻해지더니 전신의 설맥이 빠르게 돌았다.
그가 무엇을 준비하는 것인지 알았던 나는 더 캐묻지 않았다. 내 생각이 맞다면, 제천대성은 지금 ‘멸살법’의 최종장에 나왔던 그 기술을 사용하려는 것이다.
문제는 그때까지 나와 일행들이 버틸 수 있을까 하는 것이었다.
「시간을 벌려면 힘을 합쳐야 한다.」
우리엘과 심연의 흑염룡이 제아무리 뛰어난 성좌라고 해도, 그들만으로는 버티기가 어렵다. 게다가 저쪽에는 ‘왕’이 넷이나 있다.
······넷?
콰르르르르르!
날아드는 촉수 다발을 쳐내는 강철의 방패.
내 앞을 가로막은 커다란 어깨를 보며 나는 말했다.
“현성 씨.”
999회차의 이현성이 나를 돌아보았다. 반쯤은 걱정스런 얼굴로, 반쯤은 혼란으로 뒤덮인 얼굴로.
“당신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재앙을 막을 수 있게 도와주십시오.”
가만히 나를 들여다보던 이현성이 물었다.
【약속할 수 있습니까?】
나는 그 약속이 무엇인지 묻지 않았다. 알 것 같았기 때문이다.
“지킬 수 있을지는 모릅니다. 다만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잠시 나를 보던 이현성이 천천히 눈을 깜빡였다.
그리고 다음 순간, 이현성의 눈이 은빛으로 발했다.
【그대의 설화를 믿겠습니다.】
콰콰콰콰콰콰콰!
뱃전에서 거대한 강철의 가지가 자라나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자라난 가지는 이내 사면의 벽을 만들더니, 해일과 ‘이름 없는 것들’과 부딪치며 쾌속 생장을 거듭했다.
잠시 후, 눈앞에는 가운데가 뚫린 정사각형의 통로가 만들어졌다.
질주하는 강철의 벽이 만든 통로였다.
【가십시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통로를 달렸다.
얼마나 달렸을까. 통로 끝에 익숙한 인물이 보였다.
“희원 씨!”
‘이름 없는 것들’의 한가운데에서 정희원이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나와 동료들은 통로를 가로질러 그녀를 도왔다.
“미안해요, 도저히 뚫을 수가 없어요.”
입술을 꾹 깨문 정희원이 허탈하게 중얼거렸다. 절망감 어린 목소리.
그녀는 999회차의 우리엘에게 다가가지도 못한 채 허공에서 날아드는 ‘이름 없는 것들’을 베어내기에 급급했다.
【갸아아아아아아】
쿠지직, 하는 소리와 함께 강철의 벽이 둔중하게 흔들렸다. 당장이라도 우리를 집어삼킬 것처럼 달려드는 ‘이계의 신격’들.
이 통로에서 한발짝만 나가도, 몰려든 녀석들은 피라냐처럼 우리를 뜯어 먹을 것이다.
콰드득, 콰드드득.
‘이름 없는 것들’이 금속 벽을 갉아 먹는 소리가 들려왔다.
“위험······!”
통로의 출구 쪽에서 ‘이름 없는 것들’이 우리를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혀를 빼문 채 광견처럼 달려드는 녀석들.
【아아아아아아!】
하늘에서 섬광 같은 것이 떨어지며 눈앞의 것들이 모조리 잘려나간 것은 다음 순간의 일이었다.
누군가가 바깥에서 우리가 서 있던 통로를 잘라낸 것이다.
잘려나간 통로 너머로 대멸망의 전장이 보였다.
죽어 나간 ‘이름 없는 것들’이 시체의 섬을 이루고 있었다. 잊힌 설화들이 비참하게 죽어간 그 모습을 보며, 아이들이 헛구역질을 했다.
나 역시 잠시 말을 잊고 그 전장을 내다보았다.
누군가가 울음 섞인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대체 왜 이렇게까지······.”
이것이 ‘대멸망’이었다. 원작의 유중혁이 헤쳐나갔던 시나리오.
실제로 그 유중혁은 지금도 이 대전장의 중심에서 ‘이계의 신격의 왕’들과 대치하고 있었다.
콰아아아앙!
마른하늘의 한쪽에서 섬광이 튀는 듯하더니 어느새 건너편에서 굉음이 울렸다. 눈으로 좇기도 힘들 정도로 빠른 움직임. 우리가 서 있던 통로를 자른 이들이 싸우고 있었다.
나는 이곳이 전장이라는 사실조차 잊고 그 전경에 잠시 압도당했다.
[거대 설화, ‘망상설계’가 기염을 토합니다!]
[거대 설화, ‘영원불멸의 지옥도’가 이야기를 계속합니다!]
잊혀진 세계선의 최강자들이 설화를 겨루고 있었다. 몰아치는 [파천검도]와 대항하는 [지옥염화]. 거기에 [흑염]의 잔류가 뒤섞여 용오름을 만들고 있었다.
먹구름 사이로 검강의 격류가 충돌을 일으켰고, 오래된 설화들이 늙은 용처럼 울부짖었다. 하늘이 떠나갈 듯 설화들이 비명을 질러댔다.
눈앞에서 살아있는 역사들이 부딪치고, 소멸했다.
그리고 그 모든 이야기의 중심에 유중혁의 [흑천마도]가 있었다.
유중혁이 번 시간을 허투루 흘려보낼 수는 없었다. 나는 전방을 가리키며 말했다.
“해일의 원인은 ‘가라앉은 섬’ 그 자체입니다.”
먼지구름처럼 몰려든 ‘이름 없는 것들’. 그 뒤에서 해일을 일으키는 상위격의 외신들. 그리고 그들의 중심에 있는 ‘가라앉은 섬’까지.
아마 저 섬의 중앙에 999회차의 이지혜가 있을 것이다.
“섬을 침몰시키는 것이 먼저입니다. 가장 좋은 건 999회차의 이지혜를 제압하는 것이겠지만.”
나는 밀려드는 해일 세례 너머를 헤아렸다.
이 ‘대멸망’을 일으킨 원흉. ‘가라앉은 섬의 주인’인 999회차의 이지혜를 제압하면 재해는 잦아들겠지만, 문제는 거기까지 가는 방법이었다.
한수영이 말했다.
“저쪽엔 999회차의 김남운과 우리엘도 있어. 우리엘이야 유중혁이 상대하고 있다고 쳐도 김남운은 어떡할 거야?”
“걱정 마. 나한테도 생각이 있어.”
여전히 전력은 이쪽이 불리했다. 이미 앞선 전투로 인해 전력의 상당 부분을 소실한 상태였으니까. 하지만 마냥 불리하기만 한 것도 아니었다.
“길영아, 유승아. 벌레들과 괴수들을 풀어서 외신들의 움직임을 최대한 막아. 유상아 씨, 기회를 봐서 이지혜에게 한 번만 더 디버프를 걸어주십시오. 한수영 너는 우리 배후에서 다가오는 ‘이름 없는 것들’을 처리해줘.”
“너는?”
“난 길을 뚫을 거야. 희원 씨는 저랑 같이 가시죠.”
정희원이 고개를 끄덕이는 순간, 나는 격을 개방했다.
[성좌, ‘구원의 마왕’이 자신의 격을 개방합니다!]
타이밍 좋게 전신을 감싸오는 이현성의 설화가 느껴졌다.
[강철화]가 만든 외피가 피부 위로 자라나고 있었다. 확실히, <오즈>에 다녀온 보람이 있었다.
저 ‘이름 없는 것들’의 외피를 효율적으로 부수기 위해서는, 이현성의 [설화 금속]이 반드시 필요했다.
“지금입니다!”
우리는 동시에 허공의 철벽에서 뛰어올라 해일을 향해 강하했다.
이쪽의 움직임을 눈치챈 ‘이계의 신격’들이 동시에 괴성을 질렀다.
두두두두두두두!
멀리서 [설화 금속]이 덧입혀진 공필두의 포탄이 날아들었다. ‘이름 없는 것들’의 외피를 꿰뚫는 탄환들. 그의 포성을 간주 삼아, 우리는 해일 위를 달렸다.
피할 곳 없이 날아드는 촉수를 불태운 것은 한수영이었다.
[성좌, ‘심연의 흑염룡’이 포효합니다!]
[흑염]의 불꽃에 외신들이 고통스러운 비명을 질렀다.
나와 정희원이 그 길 위를 달렸다. 섬 주변의 시공간이 희미하게 뒤틀리는 것이 느껴졌다. 유상아가 힘을 발휘하고 있었다.
“독자 씨, 저기!”
멀리서 섬의 최상부를 차지하고 있는 거대한 [터틀 드래곤]이 보였다.
그 선수상 위에서 999회차의 해상제독이 ‘이계의 신격’들을 지휘하고 있었다.
【하하핫, 어딜 가시려고!】
기다렸다는 듯 999회차의 김남운이 나타났다.
【우리 지혜는 내가 지킨다!】
유중혁과 맞서 싸우는 와중에도 끼어들 여유가 있었던 모양이었다. 어쩌면, 유중혁 녀석의 상태가 위중한 것인지도 모른다. 나는 정희원에게 신호를 보냈다.
“제 걱정은 마시고 유중혁 쪽을 도와주세요. 슬슬 녀석도 한계일 겁니다.”
“죽지 말아요, 알겠죠?”
정희원이 곧장 날개를 펼쳐 유중혁을 돕기 위해 사라졌다.
【애틋한데? 걱정 마. 순식간에 둘 다 보내줄 테니까!】
김남운의 신형이 스르르 움직였다.
수백 개로 갈라진 녀석의 그림자에서 무수한 신형이 튀어나왔다.
「김독자는 생각했다. 이건 피할 수 없다.」
수백, 아니 족히 수천은 되어 보이는 단검들이 일제히 내 전신을 노리고 있었다. 살아있는 듯 움직이는 단검들. 김남운이 터득한 나이프 파이팅의 정수가 그 단검 하나하나에 실려 있었다. 하나하나가 치명상을 입히기에 충분한 공격. 그럼에도 나는 가만히 웃었다.
“널 처음 봤을 때도 내게 칼을 휘둘렀었지.”
【난 너 처음 보는데?】
“김남운, 이 세계의 네가 어떻게 죽었는지 궁금하지 않아?”
그 말에, 김남운의 신형들 중 하나가 미간을 찌푸렸다.
【그깟 놈 어떻게 뒈졌는지 내가 알 게 뭐야!】
나는 날아드는 단검을 [여의금고봉]으로 막아냈다. 몇 개의 단검이 내 허벅지와 어깨를 깊이 그었지만, 다행히 이현성의 [설화 금속]이 녀석의 공격을 대신 받아 주었다.
그러나 거센 빗발처럼 부딪쳐오는 공격에 이현성의 강철에도 금이 가고 있었다.
나는 착실하게 기억을 재현하듯, 날아드는 공격들을 피해냈다.
「오른쪽 옆구리」
「오른쪽 눈」
「왼쪽 대퇴부」
츠츳, 츠츠츳.
희미하게 튀는 스파크.
나는 단검 두어 개를 더 맞은 채 물러섰다.
“이 세계선의 너는 쓰레기였어. 힘없는 노인을 죽여서 첫 번째 시나리오를 깨려는 양아치가 너였지.”
【첫 번째 시나리오는 원래 그런 거야. 그딴 건 안 궁금―】
“너는 지금처럼 단검을 휘두르다가, 볼썽사납게 무릎을 꿇은 채 살려달라 빌었어. 그리고 비참하게 머리가 터져서 죽었지.”
처음으로 김남운의 움직임이 멎었다.
장난스런 얼굴은 온데간데없이, 녀석은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널 그렇게 죽인 놈이 누군지 궁금하지 않아?”
단검이 내 왼쪽 눈을 노리고 날아왔다.
“잠자는 거신을 베기 위해 버려진 검이여. 지금 이곳에 강림하라!”
콰아아아아아아아아!
엄청난 후폭풍과 함께, 눈앞의 모든 것이 이지러졌다.
차원을 건너 소환된 강철의 거신이 그곳에 있었다.
[타르타로스] 최강의 설화 병기, 플루토.
콕핏에서 김남운의 해맑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하하핫! 메뚜기 남, 오랜만······.]
하지만 나는 웃을 수 없었다. 왜냐하면 지금 내가 사용할 방법은, 녀석에겐 지독히 잔인한 방법이었던 까닭이다.
[응? 뭐야 이건.]
자신의 코앞에 둥둥 떠 있는 작은 뭔가를 발견한 김남운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리고 거의 동시에, 저쪽의 김남운이 멍하니 중얼거렸다.
【······거대 로봇?】
[우와아아아아악!]
츠츠츠츠츠츳!
[서로 다른 세계선의 동일 존재가 처음으로 조우했습니다!]
999회차의 김남운에게는 나와 싸웠던 설화가 없다.
하지만 지금은 어떨까.
[‘끊어진 필름 이론’이 발동합니다!]
기억이 이어진다. 서로 다른 세계선의 두 존재가 만나며, 이어지지 않던 설화가 일시적으로 하나가 된다.
눈을 부릅뜬 999회차의 김남운, ‘위대한 심연의 군주’가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이제 녀석도 모든 것을 알았을 것이다.
【너······.】
“맞아. 이 세계선의 너를 죽인 건.”
일대의 시공간이 바뀌고 있었다. 첫 번째 시나리오의 지하철.
내가 김남운을 죽였던 장소.
나는 빙긋 웃으며 말을 이었다.
[‘무대화’가 발동합니다!]
“바로 나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