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3화
463화
Episode 88. 신화급 성좌
우리엘은 기분이 별로 좋지 않았다.
―우리 비유 어디 있니.
성류 방송을 통해 <김독자 컴퍼니>의 지나간 설화들이 흘러나오고 있었음에도, 그것들이 제대로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최근 여러 가지 일들이 한꺼번에 터지면서, 낙천적인 우리엘의 머릿속도 복잡해졌다.
특히 999회차 세계선에서 온 자기 자신을 만나고, 그 기억의 일부를 받은 것이 결정적인 계기였다.
「나는 너의 유일한 동료다, 유중혁. 반드시 시나리오를 끝내고 네 원수를 갚겠다.」
다른 세계선에도 자신이 존재한다는 건 이미 알고 있었다. 하지만 알고만 있는 것과 직접 보는 것이 이렇게 다를 줄은 몰랐다.
999회차의 세계선.
그곳의 자신에겐,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아, 짜증나네. 내가 궁금한 건 다른 세계선 얘기가 아니라고. 지금 우리 애들 설화 따라가기도 벅찬데.]
우리엘이 머리를 감싼 채 투덜거렸다.
안 그래도 최근 <스타 스트림>의 분위기는 심상치 않았다. 마지막 시나리오가 다가올수록, 성좌들 사이에도 묘한 긴장감이 돌고 있었다.
심지어 관리국이 이 세계선을 포기했다는 낭설까지 돌 정도였다.
[<관리국>에서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님을 소환합니다!]
[소환에 응하시겠습니까?]
돌연 들려온 메시지에 우리엘이 번쩍 고개를 쳐들었다.
······왜 하필 이런 타이밍에?
잠시 고민하던 우리엘은 일단 확인 버튼을 눌렀다. 그러자 눈부신 빛과 함께 그녀의 몸이 어딘가로 이동했다.
[전송이 완료되었습니다.]
전송된 곳은 낯선 공터였다.
공터에는 그녀를 포함해 몇몇 성좌들이 이미 도착해 있었다.
[뭐야, 가브리엘. 너도 왔어?]
[관리국은 이런 거 거절하면 스팸 메시지로 계속 귀찮게 구니까.]
주변을 보니 벌써 수십 명에 달하는 성좌들이 모여 있었다.
우리엘처럼 무슨 일인지 궁금해하는 이들이 대다수였다. 아무리 관리국이 깡패라곤 해도, 아무 이유도 없이 이들을 호출할 리가 없다.
심지어 그들 중엔 익숙한 얼굴들도 있었다. 작은 키에 한쪽 팔에 칭칭 감은 붕대······.
[오구오구, 우리 염룡이 아니야!]
단박에 달려간 우리엘이 심연의 흑염룡의 머리에 헤드락을 걸었다.
[큭! 적의 기습인가!]
[나야 나. 대천사 누님.]
[이것 놔!]
우리엘의 품에서 버둥거리는 심연의 흑염룡이 기함을 했다.
그 꼴을 보던 가브리엘이 중얼거렸다.
[······우리엘, 그 녀석은 ‘절대악’이야.]
[알 게 뭐야. 이제 <에덴>도 망해버렸는데. 다들 친하게 지내야지.]
지난 ‘성마대전’을 마지막으로, 성운 <에덴>은 거의 멸절당했다. 강대한 대천사들의 군대는 대부분 전멸했고, 현재 활동 가능한 대천사는 우리엘과 가브리엘뿐이었다.
우리엘은 씁쓸한 감상을 접어두고 다시 주변을 살폈다.
[저거 고려제일검이잖아?]
‘대머리 의병장’과 ‘조선제일술사’, ‘황산벌의 마지막 영웅’을 비롯한 한반도의 성좌들. 그리고 <올림포스>를 비롯한 다른 성운들의 성좌들과 수르야의 모습도 보였다.
우리엘의 눈이 더욱 분주하게 움직였다.
안면 있는 성좌들의 얼굴이 늘어날 때마다 안 좋은 예감이 들었다.
이곳에 모인 성좌들에게는, 모두 한 가지 공통점이 있었다.
간신히 우리엘에게서 벗어난 흑염룡이 중얼거렸다.
[······모두 김독자의 채널에 있던 녀석들이군.]
그 말이 맞았다. 이곳에 모인 이들은, 모두―
······파츠츳.
그때, 우리엘의 기감에 위협적인 격의 움직임이 포착되었다.
누군가가 이 공터 일대를 포위하고 있었다. 하나하나가 설화급 성좌에 육박할 만큼 강력한 격을 지닌 자들.
눈치 빠른 우리엘은 금방 그들의 정체를 간파했다.
[······<파피루스>에 <베다>, 그리고 <황제>라. 무슨 생각들이시지? 사이 안 좋은 당신들이 뭉치다니.]
우리엘은 약간 긴장하면서 중얼거렸다. 아무리 그녀라고 해도, 이렇게 많은 설화급 성좌들을 상대로 대적하는 것은 무리였다. 게다가―
[엉덩이 무거운 늙은이까지······. ‘마지막 시나리오’의 존재께서 웬일로?]
틀림없었다. 아까부터 팔뚝에 오소소 돋은 소름이, 이 주변 어딘가에 있을 초강자의 존재감을 증명하고 있었다.
아무리 <스타 스트림>이 넓다고 해도 이만한 수준의 격을 지닌 존재는 손에 꼽았다. 곁을 보니 ‘심연의 흑염룡’의 표정도 눈에 띄게 굳어 있었다.
틀림없었다. 이 존재는
[모두 모였나?]
완전한, 신화급 성좌.
츠츠츠츠츠츠츳!
진언이 들려온 순간, 주변의 공기가 완전히 바뀌었다. 허공을 떠돌던 산소가 모조리 발화하는 느낌이었다.
주변의 성좌들이 비틀거렸고, 화염 저항력이 강한 우리엘조차 순간 얼굴을 찌푸릴 정도였다.
······‘신화급 성좌’가 대체 왜 이곳에?
명왕이나 메타트론, 제천대성과 같은 극히 드문 경우를 제외하면, 대부분의 ‘신화급 성좌’는 하위 시나리오에 간섭하지 않는다.
그들은 이미 자신의 ‘결’을 완성하고 ‘단 하나의 설화’ 후보에 이름을 올린 자들이기 때문이다.
마지막 시나리오에 도착해, 자신의 설화를 보장받은 자들.
[원숭이 놈과 명왕이 오지 않았군. 하지만 더 늦출 수는 없으니 이야기를 시작하겠다.]
[잠깐만!]
[성좌, ‘정오의 태양’이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를 응시합니다.]
시선을 마주하는 순간, 우리엘은 그 진언의 주인이 누구인지 깨달았다.
<스타 스트림>에는 무수히 많은 ‘태양’들이 존재한다.
하지만 그들 중, 이 우주의 중심을 차지한 태양은 극히 드물다.
특히나 시간의 중심인 ‘정오’를 차지하는 존재라면―
[태양신 라. 당신이 우릴 부른 건가?]
라. 그는 바로 거대 성운 <파피루스>의 최고 성좌였다.
[그렇다.]
[이상하네. 우릴 부른 건 ‘관리국’인줄 알았는데?]
라는 대답하지 않았다.
주변에서 느껴지는 은근한 기척 중에는 대도깨비의 것도 있었다.
우리엘은 침착하게 대응하기로 했다. 만약 저쪽이 정말로 개연성 손실을 감수하고 관리국과 붙어먹었다면, 상황이 정말 좋지 않다.
[그래, 관리국과의 유착관계를 드러낼 만큼 중요한 일이 뭔지 들어나 보실까?]
[내가 너희를 부른 것은 ‘마지막 시나리오’ 때문이다. 곧 ‘단 하나의 설화’가 가려진다. 이 세계선을 대표할 단 하나의 이야기가 정해진다는 뜻이지.]
단 하나의 설화.
이곳에 있는 성좌들 중 그걸 모르는 이는 없다.
왜냐하면 이들이 지켜본 <김독자 컴퍼니> 또한, ‘단 하나의 설화’를 만들어가는 성운이었으니까.
[그래서? 그게 우리랑 무슨 상관인데?]
[너희들 중 대부분은 ‘마지막 시나리오’의 자격을 얻지 못했지. 하지만 나와 함께라면 다르다. 내가 너희를 ‘마지막 시나리오’에 함께 데려가 주겠다. 너희에게도, ‘단 하나의 설화’에 수식언을 올릴 기회를 주겠다는 뜻이다.]
그 제안에 몇몇 성좌들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주로 소속이 없는 위인급 성좌들이었다.
가만히 라를 바라보던 우리엘이 피식 웃었다.
[뭐야, 난 또 뭐라고. 일 없으니 됐어. 얘기 끝났으면 이만 간다.]
그러나 돌아선 우리엘은 발을 내딛지 못했다.
무언가, 아주 강력한 격이 그녀의 발목을 붙잡았다.
[······무슨 짓이지?]
[내 이야기는 끝나지 않았다.]
[들어보지 않아도 알 것 같은데.]
우리엘의 진언에 뾰족한 날이 서 있었다.
하필 다른 채널도 아니고, 채널 BY-9158의 성좌들만을 불렀다.
그리고 그들을 부른 이는, 다른 곳도 아닌 <파피루스>의 최고 성좌.
[지금, 우리보고 <김독자 컴퍼니>를 치자고 제안하려는 거잖아.]
순간, 아주 짧은 침묵이 흘렀다. 라가 물었다.
[······왜 그렇게 생각했지?]
[왜냐하면 그들은 ‘마지막 시나리오’의 자격을 갖췄으니까. 그리고 그들을 해치우면, 자연히 ‘단 하나의 설화’의 유력 후보 하나가 줄어들 테니까.]
성좌들 사이에 파란이 일기 시작했다. 주변을 둘러싼 성좌들의 격이 동요하는 것이 느껴졌다. 우리엘이 코웃음을 쳤다.
[성좌란 족속들은 정말 마지막까지 변하지 않는구나. 그리고 라, 당신은 이미 마지막 시나리오에 도달한 주제에 하위 시나리오에 끼어드는 건 작작해. 제우스나 당신이나······.]
[······.]
[혹시 당신의 아이들이 걱정되는 거야? 당신의 설화를 이어받은 아이들이, 고작 신생 성운 하나 당해내지 못해서 ‘단 하나의 설화’ 후보에 들어가지 못한 게 화가 나는 거―]
엄청난 폭발과 함께, 우리엘의 신형이 땅속 깊은 곳으로 처박혔다.
욕설을 내뱉는 우리엘을 향해 라의 진언이 들려왔다.
[■발, 무슨···.]
[그래, 네 말이 맞다. 이것은 자식을 잘못 키운 부모의 분노다. 종막을 포기한 한심한 패배자들과 십 년도 채 되지 않은 애송이 성운 때문에, 자식들이 미래를 망치는 것을 볼 수 없는 부모의 정당한 분노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우리엘이 마주 외쳐댔다.
[이제야 본색을 드러내시네. 미안하지만, 여기 네 자식들 편들어 줄 성좌는 아무도 없어. 우리가 누구 채널을 보는 구독좌들인지 잘 모르는 모양이네.]
흑염룡과 가브리엘이 손을 뻗어 우리엘을 구덩이에서 꺼내주었다.
그 뒤로 고려제일검과 대머리 의병장을 비롯한 한반도의 성좌들이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그런 성좌들의 눈동자를 마주하며, 우리엘은 알 수 없는 뿌듯함을 느꼈다.
지금 이곳에는 누군가의 설화를 한마음으로 응원하는 존재들이 모여있었다.
첫 번째 시나리오였던 ‘자격 증명’에서부터 시작해 세계선의 운명을 결정할 ‘마지막 시나리오’에 이르기까지.
이곳의 모두가 우리엘 자신과 같은 마음인지까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분명 이들 중 누군가는, 자신의 설화보다도 <김독자 컴퍼니>의 설화를 더 사랑할 것이다. 그녀가 그런 것처럼.
[그래서 너희들이 패배자들인 것이다.]
[뭐?]
[관음에 정신이 팔려서 너희들 또한 시나리오의 일부라는 사실을 잊은 것이냐?]
다음 순간, 허공에 강렬한 개연성의 폭풍과 함께 누군가가 나타났다.
츠츠츠츠츳!
강철의 외관을 가진 인형. 상처투성이의 설화급 성좌가 단단한 빛의 고리에 갇혀 있었다.
[이 녀석은, 너희처럼 멍청한 설화를 응원했다.]
우리엘은 멍하니 그 성좌를 바라보았다.
한 번도 직접 만난 적이 없었던 성좌. 그럼에도 그 모습을 보는 순간, 우리엘은 그가 누구인지 알 것 같았다.
심지어 우리엘은 그와 몇 번인가 간접 메시지를 교환한 적도 있었다.
[성좌, ‘강철의 주인’이 고통에 몸을 움츠립니다.]
강철의 주인.
그는 화신 ‘이현성’의 배후성이었다.
라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오즈>에 가만히 있었다면 안전했을 것을, 이 녀석은 멍청한 설화를 돕겠다고 다른 세계선의 존재와 접촉했지.]
[지금 무슨 짓을―!]
[너희에게 선택지는 없다. 우리를 도와 <김독자 컴퍼니>의 설화를 끝장내든가, 아니면······.]
그 말과 함께, 강철의 주인의 전신을 죄던 빛의 고리가 좁아지기 시작했다. 고통스럽게 몸부림치는 강철의 주인이 우리엘을 보았다.
[성좌, ‘강철의 주인’이 자신을 죽이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고 말합니다.]
[성좌, ‘강철의 주인’이 자신의 설화와 수식언은 이미 다른 존재에게 계승했다고 외칩니다!]
점점 더, 고리가 좁아지고 있었다. 우리엘이 움직였다.
그리고
[성좌, ‘강철의 주인’이 이야기를 포기하지 말아 달라고 말합니다.]
꽈드드득!
맥없이 쪼그라든 강철의 주인의 몸에서 설화들이 터져 나왔다.
설화급 성좌의 허무한 죽음.
채널의 모두가 얼어붙은 것처럼 그 광경을 응시하고 있었다.
별의 죽음 앞에서, 라가 말하고 있었다.
[아니면, 이처럼 죽든가.]
광기 어린 외침과 함께, 우리엘이 자신의 격을 개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