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8화

458화 허튼짓을 하면 당장이라도 [흑천마도]를 휘두를 생각이었는데, 뜻밖에도 ‘은밀한 모략가’는 순순히 대답했다. 심지어 진언조차 쓰지 않았다. “그래. 나는 여기 갇혔어.” 처음으로 들어본, ‘은밀한 모략가’의 순수한 목소리였다. 그러자 유미아가 활짝 웃으며 답했다. “우리 오빠한테 풀어달라고 하자. 우리 오빠 엄청 세거든.” 그 순진한 목소리에, ‘은밀한 모략가’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나는 이곳에서 나갈 수 없다.” “뭐? 왜?” ‘은밀한 모략가’는 대답하지 않았다. “혹시 우리 오빠가 너한테 무슨 짓 했어? 뭐라고 나쁜 말로 협박한 거지?” “······아니다.” “그럼?” ‘은밀한 모략가’는 이번에도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하지 않은 채로, 가만히 유미아를 들여다보았다. 이제 그에게는 존재하지 않는 존재를, 한참이나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처음으로, 아주 희미하게 웃었다. “내가 그렇게 결정했기 때문이다.” 그 미소를 보며, 유중혁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게 무슨 말이냐는 듯 떠드는 유미아의 목소리와, 그런 유미아를 가만히 바라보는 ‘은밀한 모략가’가 그곳에 있었다. 천천히 손을 들어 올린 ‘은밀한 모략가’가, 얇은 막을 사이에 두고 유미아와 손을 겹쳤다. 비슷한 크기의 손. 시공간을 초월해 겹쳐진, 하지만 결코 만날 수는 없는 손바닥이었다. “어? 어······.” 눈을 깜빡이던 유미아의 몸이 흔들린 것은 그때였다. “왜 졸리지······.” 유미아의 몸이 천천히 바닥으로 쓰러지자, 달려간 유중혁이 유미아를 품에 안았다. “네놈, 무슨 짓을······!” 【······그냥 좋은 꿈을 꾸게 해준 것뿐이다.】 유중혁은 잠든 유미아를 내려다보았다. 실제로 유미아의 화신체에는 아무런 이상 징후도 보이지 않았다. 그저 “비치발리볼”이라든가 “오징어 파티” 따위의 알 수 없는 잠꼬대를 중얼거리며 새근새근 잠들어 있었을 뿐. 유중혁은 복잡한 눈으로 ‘은밀한 모략가’를 노려보았다. 아무리 약해진 ‘은밀한 모략가’라도, 유미아를 이용한다면 이 상황을 벗어나는 것은 어렵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다만, 잠든 유미아의 얼굴을 하염없이 바라볼 뿐이었다. “······네놈의 세계에서, 미아는 어떻게 됐지?” 【살아남았다.】 즉답이었다. 【그리고 죽었다.】 그 또한 즉답이었다. “그게 무슨······.” 입을 여는 동시에, 유중혁은 그것이 무슨 의미인지 바로 깨달았다. 그래서, 다시 입을 다물었다. 가늘게 흐느끼는 듯한 스파크. [끊어진 필름 이론]의 맥락 속에서 두 존재의 기억이 진동하며 설화가 움직이고 있었다. 「어떤 세계선에서, 유미아는 오랫동안 살아남았다. 심지어는 그가 죽은 후에도.」 1864번을 살아온 자의 세계란, 대체 어떤 곳일까. 「하지만 어떤 세계선에서, 유미아는 죽었다.」 회귀자는 누구보다 더 많은 ‘현재’를 살아가지만, 사실은 과거의 망령일 뿐이다. 과거를 바꾸지 못했기에 다음 회차를 살아가야만 하는 존재. 0회차, 1회차, 2회차, 3회차, 4회차······ 1863회차. 눈앞의 존재는 그 어떤 회차의 유중혁도 아니었다. 그는 그 모든 세계에 속한 유중혁이자, 모든 세계를 부채로 짊어진 유중혁. 그렇기에 누구보다 유중혁인 유중혁이었다. 【나를 동정하는군.】 “누가 네놈 따윌······.” 【내가 불행하다고 생각하는가?】 이것은 자기 자신에 대한 연민일까. 유중혁은 알 수 없었다. 그러쥔 [흑천마도]의 칼날이 희미하게 떨리고 있었다. 무엇을 망설이는가. 대체, 이제와서 무엇을 망설인단 말인가. 고작 녀석의 과거사 좀 들었다고······. 은밀한 모략가’가 입을 열었다. 【알고 있는가? 네가 타고 있던 지하철 앞칸에는 모든 회차에서 죽는 소년이 있다.】 뜻밖의 물음. 유중혁의 머릿속에 자연스럽게 지하철의 풍경이 떠올랐다. 첫 번째 시나리오. 그가 매번 겪어야 하는 지옥의 첫인상. 하지만 유중혁은 그런 소년에 대해서는 알지 못했다. 그런 식으로 죽어간 사람이 너무나 많았기 때문이다. 【몇 번이나 회귀하며 그 죽음을 막아보려고 했지만, 무리였다.】 “······.” 【어린 소년이었다. 신유승보다도, 이길영보다도 어렸지. 그런데 그런 아이가, 강제로 ‘자격 증명’을 해야 했다. 무려 1863번의 삶 동안. 그 아이는 싸움 한 번 제대로 해보지 못하고 죽었다. 죽고, 죽고, 또 죽었다.】 유중혁은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은밀한 모략가’가 물었다. 【1863번을 회귀한 사람과, 1863번의 삶 동안 기억도 없이 죽음만을 반복한 아이 중, 어느 쪽이 더 불행하다고 생각하지?】 “그건······.” ‘은밀한 모략가’는 말하고 있었다. 너의 동정은 아무 의미도, 가치도 없다고. 그럼에도 유중혁은 그 말을 온전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분명 불행의 경중을 비교하는 것에는 의미가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불행이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스타 스트림>은 모든 존재의 삶을 기승전결로 만들려고 하지. 하지만 본래 삶이란 기승전결이 아니다. 기에서도, 승에서도, 전에서도. 언제든 끝날 수 있는 부조리한 것이지. 그러니 이곳에서 내 삶이 끝나도, 이상한 일은 아니다.】 지하철의 그 소년도, 저런 표정을 짓고 있었을까. 유중혁은 알지 못했다. 고요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은밀한 모략가’. 한참이나 그 눈을 들여다보던 유중혁이, 시선을 피하며 [흑천마도]를 내렸다. “······이번에 다시 회귀하면 너는 1864번째로 그 아이의 죽음을 보게 되겠군.” 결국, 그의 [흑천마도]가 다시 칼집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이것이 잘못된 선택일 수도 있다. 그럼에도 유중혁은 결정했다. 그 선택이 의외였는지, ‘은밀한 모략가’는 한참이나 말이 없었다. 【너는 김독자의 영향을 너무 많이 받았군.】 “닥쳐라. 네놈 따윈 언제든 죽일 수―” 사람들의 기척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유중혁을 찾는 소리. 김독자와 한수영, 그리고 <김독자 컴퍼니>의 일행들의 목소리. 【인정하기 어렵지만, 한 가지는 확실하다. 이 세계선은, 지금껏 내가 살아온 그 어떤 회차와도 다르다. 어쩌면 이 세계선에서 너희는 정말 ‘벽’ 너머를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네가 원하는 결말일 거라 기대하지는 마라. 그리고 그것이 네가 원하지 않는 결말이라 해도―】 ‘은밀한 모략가’의 진언이 다시 흐릿해져 갔다. 서서히 감기는 눈꺼풀. ‘은밀한 모략가’가 다시 깊은 잠에 빠져드는 것이 보였다. 풀숲을 헤치고 나타난 김독자의 모습과 함께, ‘은밀한 모략가’가 말을 맺었다. 【이 세계가, 실패한 회차라고 생각하지는 마라.】 * “비치발리볼 했다니까요.” 대체 무슨 일이 있었냐는 질문에, 유미아는 그렇게 대답했다. “오징어도 구워 먹고, 오빠랑 비치발리볼 하면서 놀았다니까? 혹시 못 생기면 이해력도 떨어지나?” 우선 그 문장에는 틀린 점이 세 군데나 있다고 말해주고 싶었다. 일단 여긴 바다가 아니고, 나는 그렇게 못생기지 않았고, 이해력도······. “······뭐, 어쨌든 별일은 없었던 모양이네.” 한수영이 한숨 놓았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딱히 유중혁이 사고 친 흔적은 보이지 않았고, ‘은밀한 모략가’도 여전히 깊은 잠에 빠져들어 있었다. 나는 ‘은밀한 모략가’를 [X급 페라르기니] 안에 다시 넣어두었다. 찜찜한 점이 몇 가지 있었지만 지금 당장 따져 물을 계제는 아니었다. “자자, 다들 모여요! 캠프파이어 할 거야!” 캄캄한 산의 어둠을 밝히는 야영장의 모닥불이 매캐하게 피어올랐다. 어느덧 시간은 자정에 가까워져 있었다. 그제야 퍼뜩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잠깐만요! 나 아직 시나리오 안 끝났······!” 제기랄, 유중혁 때문에 까맣게 잊고 있었는데. 머리 위에서 비유가 “바앗바앗”거리며 흥얼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시나리오 제한 시간이 모두 경과했습니다!] 진짜 이렇게 죽어버리는 건가. [서브 시나리오― ‘노동자의 휴일’이 종료되었습니다!] [당신이 해결해야 하는 불만 사항은 총 5개입니다.] [당신이 해결한 불만은 총 1건입니다.] [당신은 직원들의 모든 불만 사항을 해결하였습니다.] [<김독자 컴퍼니>와 관련된 새로운 설화가 발아하고 있습니다.] ······어? “하여간 넌 눈치를 땅에 흘리고 다니는 건지······.” 한수영이 내 옆얼굴을 보며 중얼거렸다. 피식피식 웃는 일행들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순간, 일행들에게 말을 걸 때마다 돌아왔던 대답이 떠올랐다. ―딱히 불만 같은 거 없는데요. 그게 진짜였다고? “여기서 너 탓할 사람 아무도 없어.” 무심한 듯 울려 퍼지는 한수영의 목소리. 일행들은 말없이 화톳불을 쬐었다. 그 침묵에 담긴 마음을 알 것 같아서, 나는 괜스레 울컥하고 말았다. 정희원이 한 마디를 덧붙였다. “뭐, 굳이 하고 싶은 말을 찾으라면 찾을 수는 있겠지만, 그건 ‘불만 사항’이 아니라······.” 뜨끈한 화톳불이 눈앞에 있는데도 뒤가 으슬으슬 추워지는 것은 왜일까. “아무튼, 모처럼 푹 쉬었네요. 누군 제대로 못 쉰 것 같지만.” 유상아의 말에 이지혜가 끼어들었다. “근데 이제 다 끝난 거예요? 촛불 들고 울거나 롤링 페이퍼 쓰는 건 안 해요?” “진짜 수학여행도 아니고 그런 걸 왜 해? 그리고 종이도······.” 한수영의 핀잔을 들으며 잠깐 생각했다. 한수영이 써준 롤링 페이퍼라······ 그거 제법 재밌을지도. 갑자기 말을 멈춘 한수영이 나를 보며 물었다. “써주리?” “됐어, 애들도 아니고 무슨.” “그러고 보니 너 친구도 없었고 MT도 안 갔다며. 그런 거 받아본 적 없겠다.” 이번 여행으로 내 정신력의 총량이 급감한다면 그것은 모두 한수영 때문이다. 추진력 강한 <김독자 컴퍼니>의 몇몇 일행들은 벌써 [도깨비 보따리]를 통해 커다란 종이와 펜을 구입한 상태였다. 하여간 도깨비 자식들 이딴 걸로도 코인을 받아먹다니······. 불길의 맞은 편에 앉은 유중혁도 화가 난 모양이었다. “나는 이딴 건 하지 않는다.” ······아무래도 화가 난 이유는 나와 다른 것 같지만. 아무튼 옹기종기 모인 일행들이 바닥에 제각기 글자를 쓰는 걸 보니 감회가 새로웠다. 친구 없는 불쌍한 김독자를 위한 글짓기 모임 같았다. 그렇게 각자 종이에 자기 이름을 쓰고 돌리는 동안, 이길영이 손을 들었다. “형, [도깨비 보따리]에서 이거 샀는데, 한 번 쏴 봐도 돼요?” 이길영의 손에 쥐어진 장난감을 발견한 신유승이 반색했다. “어? 그거 한강에서 사람들이 날리던 거 아냐?” “안 그래도 그거 생각나서 샀어.” “나도 하나 쏴보자!” “싫어. 네가 사. 2000코인짜리란 말야.” 이길영의 손에는 낙하산 헬리콥터가 쥐어져 있었다. 나도 몇 번인가 본 적이 있었다. 줄을 힘껏 당겼다가 놓으면 하늘로 치솟으며 불빛을 발하는 장난감. 이길영의 장난감이 특이했던 것은, 네 장의 날개가 커다란 네모의 형태를 취하고 있었다는 점이었다. ······그나저나 저딴 게 2000코인이라니. “자, 쏜다!” 이길영이 허공을 향해 낙하산 헬리콥터를 쐈다. 그러자 순식간에 솟구친 헬리콥터가 맹렬하게 회전하며 주변을 불빛으로 물들였다. 꼭 불꽃놀이라도 하듯 밤하늘에 퍼지는 빛의 산란. 이보다 더 화려한 광경에 익숙한 사람들이었음에도, 일행들은 감탄한 표정들이었다. 네모였던 헬리콥터의 날개가, 빠르게 회전하며 원의 형태가 되었다. 그것은 꼭 포탈처럼 보였다. 우리가 살았던 세계로 통하는 포탈. 이제 다시는 돌아갈 수 없지만, 분명 그 자리에 있었던 세계에 대한 향수. 허공에서 시스템 메시지가 들려온 것은 그때였다. [화신 ‘이길영’이 아이템 ‘낙하산 헬리콥터(초대형 광학 스크린)’를 사용하였습니다!] 회전하는 헬리콥터의 날개가 점점 커지더니, 이내 스크린으로 형태로 변하기 시작했다. 이지혜가 인상을 찌푸렸다. “뭐야, 저거 홀로그램 패널이었어? 여기서까지 시나리오 봐야 돼?” “이길영, 너 사용설명서는 제대로 읽고······.” “아니 난 그냥 헬리콥터라길래······.” 이길영이 한 마디하는 순간, 주변에 가벼운 지진이 일었다. 일행들의 표정이 굳어졌다. “이건 또 뭔 지랄이야······.” 한수영의 말과 동시에, 일행들이 허공의 스크린을 응시했다. 스크린을 보는 순간, 모두가 지진의 정체를 깨달았다. 이 지진은 한반도의 것이 아니었다. 광학 스크린에 아메리카 대륙이 드러나 있었다. 그리고 바로 눈앞에서, 그 아메리카 대륙이 통째로 사라지고 있었다. 지구의 아주 깊은 곳에서 솟아오르는 거대한 섬. 그 섬의 출현과 함께, 미대륙이 통째로 지도에서 지워지고 있었다. [해당 세계관의 개연성이 임계점에 도달하였습니다!] [잊힌 섬들의 융기가 시작됩니다!] 표정이 굳어진 유중혁이 조용히 중얼거렸다. “멸망이 시작됐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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