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6화

456화 “고민이요?” “예, 그러니까······ 회사 생활에 어떤 불만이 있으시다거나······.” 내가 제일 먼저 찾아간 사람은 이설화였다. 수색용 연구복을 입고, 작은 돋보기를 낀 그녀는 정체불명의 약초라도 발견한 듯 내 얼굴을 요모조모 뜯어보더니 말했다. “음, 딱히 없는데요.” 말은 저렇게 해도, 불만이 없을 턱이 없다. “회사 대표로서 늘 죄송한 마음입니다. 제가 없는 동안 서울을 잘 보살펴주신 것 잘 알고 있습니다.” “흐음.” “무척 힘드셨을 거라는 것도······.” “진짜로 그렇게 생각해요? 사실은 서울에 있는 게 더 편했을 거라 생각하는 건 아니고?” 날카로운 말투에, 나도 모르게 입을 다물었다. “역시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네. 은근히 비꼰 거죠?” “아닙니다. 절대로.” “다른 일행들이 위험한 시나리오에 뛰어들었다는 건 알고 있어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서울에 있었던 게 편했던 건 결코 아니에요.” 이설화는 고개를 숙인 채 다시 수풀 속에서 뭔가를 찾기 시작했다. “이쯤에 있을 텐데······.” 「이설화는 단 하루도 편히 쉬어본 적이 없었다.」 그녀의 설화가 그녀를 대신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일행들이 사라진 [공단]에서, 이설화는 홀로 병동을 관리하며 환자들을 받았다. 매일 같이 다친 화신들이 밀려왔다. 그들의 죽음을 보았고, 그들의 죽음을 보며 일행들을 생각했다.」 “나는 후반부 시나리오에서 큰 도움이 못 될 거예요. 내 잠재력은 내가 잘 알고 있고, 내 성좌도 위인급에 불과하니까. 하지만 나는 최선을 다했어요.” 확실히, 이설화의 주변을 떠도는 격의 강도가 달라져 있었다. 다른 일행들처럼 전투력이 강해진 것은 아니었지만, 뭐랄까. 스킬의 조예 같은 것이 훨씬 깊어진 느낌이었다. “<김독자 컴퍼니>의 누구든, 숨만 붙어 있다면 난 반드시 살려낼 거예요. 누구도 죽지 않도록 만들 수 있다고요.” 실제로 이설화의 성장세는 원작의 그 어떤 회차에도 못지 않았다. 내 짐작이 맞다면, 이설화는 곧 생사신의(生死神醫)의 경지에 오를 것이다. 실제로 그녀는 내가 꿈꾸는 엔딩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사람이었다. “독자 씨가 읽은 책에서, 나는 어떤 인물이었어요?” 훅 들어온 질문에 나는 잠깐 당황하고 말았다. “중요한 인물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어느 정도로?” 이설화는 ‘멸살법’의 히로인이었다. 하지만 유중혁의 과거 연인이었다고 실토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애초에 유중혁도 그것을 원하지 않는 것 같았고······ 무엇보다, 그것이 정말 ‘이설화’에 대한 온당한 설명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녀는, 정말로 어떤 인물이었나. “그건······.” 내가 말을 이으려는 순간, 이설화가 반색하며 외쳤다. “앗, 찾았다!” 그녀의 손에 작은 꽃이 쥐어져 있었다. 아마도, 그가 찾던 약초인 모양이었다. 나는 그것이 무엇인지 바로 알아보았다. 「백린화(白燐華). 생사환(生死丸)의 마지막 재료.」 겉보기엔 아무것도 아닌 들풀인데다, 그냥 먹어서는 아무런 효과도 없는 약초. 하지만 그 약초가 없으면, 기적의 묘약인 생사단은 결코 만들어질 수 없었다. 어린애처럼 환히 웃는 이설화. ‘멸살법’의 어떤 문장도 가지지 못한 생동감이 눈앞에 있었다. 「이것이 이설화다.」 그래서 나는 ‘멸살법’의 문장을 떠올리는 것을 그만두었다. 그리고, 나의 허접한 언어로 말했다. “당신은 내가 아는 최고의 의사입니다.” 어린애가 만들어 낸 칭찬도 그것보단 낫겠다 싶었다. 그럼에도 이설화는 빙긋 웃었다. “고마워요, 빈말이라도.” “빈말이 아닌······.” “기다려요. 그 빈말, 내가 진짜로 만들 거니까.” 또 다른 약초를 찾아 자리를 뜨는 이설화를 보며, 나는 깨달았다. 애초에 그녀가 정말 궁금했던 것은 ‘멸살법’이 아니었다는 것을. 나와는 달리, 그녀는 그런 소설이 필요하지 않은 사람인 것이다. [현재 당신이 해결한 불만은 0건입니다.] 시나리오에는 진척이 없었지만, 그래도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쉽지 않죠?” 돌아보자, 이번에도 유상아가 있었다. “······예. 쉽지 않습니다.” “당연한 거예요. 지금껏 미뤄왔던 대화를 무슨 이벤트 처리하듯 타파하면 그게 소설이지 현실이겠어요.” “그렇죠.” “그래도 계속하셔야 해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은 누가 좋을까요?” “이번엔 직접 찾았으면 싶지만, 딱 한 번만 더 도와줄게요.” 짐짓 손으로 차양막을 친 유상아가 일행들을 살폈다. 그 순간, 메시지가 들려왔다. [현재 <김독자 컴퍼니>의 계약직 직원들의 불만이 쌓여 있습니다.] ······계약직 직원? 우리 성운에 그런 게 있었나? 그리고 유상아가 어딘가를 가리켰다. “이번엔 저쪽으로 가봐요.” 그곳을 본 순간, 나는 ‘계약직 직원’이 누구인지 깨달았다. * 잠시 후, 나는 내 앞에 도열한 세 사람을 향해 말했다. “여러분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뭔가? 바쁘니까 빨리 말하게. 난 지금 ‘흑염룡의 성유물’을 구하러 가야한단 말일세!” 한명오가 재촉하듯 소리쳤다. 그 옆으로는 시큰둥한 얼굴의 공필두와 입술을 실룩이는 장하영이 서 있었다. 함께 불려온 것이 영 못마땅한 눈치였다. 우리와 함께 시나리오를 계속해왔으나, 아직 <김독자 컴퍼니>에는 정식으로 가입하지 않은 이들. “먼저, 여러분이 아셔야 할 것이 있습니다.” 나는 일단 이들이 모르는 이야기부터 꺼내기로 했다. <김독자 컴퍼니>의 일행들은 알고 있지만 이들은 모르는 정보. 바로 ‘멸살법’에 관한 것이었다. 내 딴에는 큰맘 먹고 꺼낸 이야기였는데, 예상 밖으로 공필두의 반응은 미적지근했다. “나도 한때는 땅값 찌라시들을 믿을 때가 있었지. 네놈은 아직 순진하구만.” “예?” “젊은 것들이란······.” 아무래도 공필두는 내 말을 제대로 듣지도 않은 것 같았다. 반면 한명오는 나름대로 충격을 받은 눈치였다. “자, 자네 설마 그 모든 걸 알고도 내가 그 꼴이 되도록 방치한 건가?” 장하영도, 역시나 다른 의미로 놀란 표정이었다. “그랬구나. 그래서 마계에서도 그렇게 잘 알았던 거야······.” 다행히 일행들의 반응은 그리 심각하지 않았다. 하긴, 이미 회귀자에 환생자까지 나온 마당에 내 이야기는 그렇게 대단하게 들리지 않을지도 모른다. 나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 “이 이야기를 한 이유는 하납니다. 여러분을 <김독자 컴퍼니>에 가입시키고 싶습니다.” 내 말에 세 일행들이 서로를 돌아보았다. 공필두가 말했다. “누구 맘대로?” [화신 ‘공필두’가 <김독자 컴퍼니>에 가입했습니다.] ······혹시 새침데기란 말은 저 아저씨를 두고 존재하는 건가? 이어서 한명오가 질문했다. “부장직은 보전해주는 건가?” “뭐. 그런 직급이 없긴 한데 원하면 만들어 드리죠.” “급여 처리도 확실하게 해주게. 육아 휴직이랑 야근 수당은······.” [화신 ‘한명오’가 <김독자 컴퍼니>에 가입했습니다.] 나는 마지막으로 장하영을 바라보았다. [화신, ‘장하영’이 <김독자 컴퍼니>에 가입했습니다.] “······그러니까 염룡아, 방금 무슨 일이 있었냐면······.” 장하영은 자신의 ‘벽’을 활용해 여기저기 취업 소식을 전하고 있었다. 녀석의 <스타 스트림> 친구들이 보낸 축하 메시지가 연이어 들어오고 있었다. 순수하게 기뻐하는 그 모습을 보며, 새삼 기분이 복잡해졌다. 저렇게 기뻐할 줄 알았다면, 진즉에 가입시켰을 텐데. “근데 김독자. 왜 갑자기 날 가입시킨 거야?” 반짝반짝 눈을 빛내는 장하영이 내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장하영을 <김독자 컴퍼니>에 가입시키지 않은 것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다. 하지만 오늘만큼은, 그냥 그런 이유들을 미뤄두고 싶었다. 나는 장하영이 필요하다. 하지만, 녀석을 <김독자 컴퍼니>에 영입한 것은 단순히 녀석이 결말에 필요하기 때문만은 아니다. “너랑 같이 시나리오의 끝을 보고 싶어서야.” 내 말을 들은 장하영이 눈을 크게 떴다. 처연한 뺨이 덜덜 떨리는 것을 보니 내 마음이 다 안타까웠다. 역시 유중혁의 뺨을 두 대 갈기는 외모의 소유자다웠다. 커다란 눈망울을 끔뻑이며, 장하영이 힘껏 고개를 끄덕였다. “나, 진짜로 열심히 할게!” 주먹을 불끈 쥔 장하영은 다시 타이핑을 시작했다. [축하합니다! 당신은 계약직 직원의 불만을 해결했습니다!] [현재 당신이 해결한 불만은 1건입니다.] 드디어 한 건 성공했다. 대표이사란 정말 힘든 자리구나. [성좌, ‘심연의 흑염룡’이 소문이 사실이냐고 묻습니다.] 뭔 소문?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정말로 장하영에게 고백했냐고 묻습니다.] [성좌, ‘가장 오래된 해방자’가 막내 손오공에게······.] ······대체 뭔 소문이 퍼지고 있는 거지? 뭘 그렇게 열심히 쓰고 있는 건지, 열심히 가상 키보드를 두드려대는 장하영의 모습이 보였다. “야, 저녁밥들 먹어!” 멀리서 한수영의 외침이 들려왔다. 어디선가 풍겨오는 맛있는 냄새에 일행들이 하나둘 모여들자, 한수영이 당연하다는 듯 유중혁을 쳐다보았다. “자, 그 잘나신 요리 맛 좀 볼까?” “······내가 왜 내 요리를 나눠줘야 하지?” 험악한 눈길로 일행들을 노려본 유중혁은, 돌아서며 툭 던지듯 말을 남겼다. “······저기에 먹다 남긴 것들이 있으니, 저거라도 먹든지.” 우리는 유중혁이 가리킨 곳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일행들은 모두 말을 잃었다. 「그들은 요리의 정수를 보고 있었다.」 일행들은 피리 소리에 홀린 생쥐처럼 얌전히 식탁에 앉아,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비볐다. 이길영과 신유승이 잡아온 괴수들과, 이설화가 뽑아온 약초들로 만든 요리. 아니······ 어떻게 그걸로 이런 진수성찬을 만들지? 장담컨대, ‘불사를 꿈꾼 시황제’의 식탁도 이것보단 덜 화려했을 것이다. “와, 내 장례식 때 꼭 요리해줘 사부.” “왜 장례식이야? 불길한 소리한다, 진짜.” 일행들은 요리를 허겁지겁 삼키기 시작했다. 정희원도, 이지혜도, 한명오도, 공필두도, 장하영도······ 모두 정신없이 음식을 먹고 있었다. 심지어 저 한수영과 유상아조차, “잠깐, 그건 내 거야.” “양은 충분하잖아요? 왜 그렇게 욕심을 부리죠?” 요리를 두고 싸우고 있었다. “아저씨, 이것도 먹어봐요!” “형, 이것도!” 내 양옆에 앉은 이길영과 신유승이 내 입속으로 허겁지겁 숟가락을 쑤셔 넣었다. 나는 햄스터처럼 볼을 부풀린 채 밥을 씹으며 아이들에게도 반찬을 먹여주었다. 맛있다. 진짜로 맛있다. 너무 맛있어서, 순간 ‘멸살법’이 현실이 된 것이 감사할 지경이었다. 눈망울을 굴리며 고기를 먹던 신유승이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수학여행 온 기분이에요······.” 그 말을 듣는 순간 멸살법이 현실이 되어서 감사하다고 생각한 나를 쳐 죽이고 싶었다. 수학여행. 이 세계에서, 아이들이 잃어버린 것들 중 하나. 나는 두 아이의 머리에 손을 얹은 채 말했다. “맞아, 수학여행.” 이 여행으로 뭔가를 수학(修學)하고 있는 것은, 아이들이 아니라 나였지만. “아저씨는 시나리오 다 끝나면 뭐하고 싶어요?” “형은 나랑 같이 살 거야.” “너한테 안 물었거든?” 시나리오가 다 끝나면 하고 싶은 것. 보통이라면 그냥 웃고 넘어갔겠지만, 왜일까. 나는 무심결에 한마디를 하고 말았다. “아주 커다란 집을 사서, 다 같이 살면 좋겠네.” 그리고 고개를 들었을 때, 떠들썩하던 주변이 조용해져 있었다. 이지혜도, 정희원도, 공필두도······ 심지어는 한수영까지 입을 벌린 채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정희원이 먼저 포문을 열었다. “······그럼 집은 당연히 독자 씨가 사는 거죠?” ······응? “아저씨 부자니까, 강남에 집 살 수 있겠다.” “내 땅을 팔지.” “기왕이면 애들 학교랑 가까운 쪽으로······.” 무심코 던진 한마디가 이렇게 큰 파장을 불러올 줄은 몰랐다. 그렇게 저녁 식사 내내, 일행들은 내가 돈을 낼 집에 대해 떠들었다. 인테리어는 어떻게 한다는 둥, 방은 몇 개가 필요하다는 둥······. 설거지는 가위바위보에서 진 나와 정희원 담당이었다. [전지적 독자 시점]을 사용하면 무조건 이길 수 있었지만, 이런 여행에서까지 그런 짓을 할 수는 없었다. [새로운 설화를 획득하였습니다!] [설화, ‘양심에 털을 뽑은 자’를 획득하였습니다.] ······그래, 설화도 얻고 좋구만. 뽀득거리며 그릇을 닦고 있는데, 먼 하늘에서 뭔가가 떨어지는 것이 보였다. 유성우였다. 긴 꼬리를 남기며 스러지는 별들. 아마 저것은, 정말로 추락하고 있는 별들일 것이다. <스타 스트림>이 멸망하고 있는 것이다. 곁에서 나와 함께 하늘을 올려다보던 정희원이 말했다. “[극장 던전] 때 생각나네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그때와 비슷하긴 하다. 그때도 던전의 옥상에서 우리는 함께 있었다. 떨어지는 유성우를 보며, 소원을 빌었었다. “독자 씨는 저한테 검이 되어달라 했었죠.” 그곳에서 나는, 정희원에게 동료가 되어달라 말했다. 그리고 정희원은 더할 나위 없이 최고의 동료가 되어주었다. 그녀가 없었다면 나는 여기까지 오지 못했을 것이다. “······근데 진짜로 검이 되어버린 건 다른 사람이네요.” 그 말에, 나는 바닥에 고이 놓여 있는 [강철검]을 보았다. 모두가 쉬고 있는 와중에도, 유일하게 이 행사에 참가하지 못한 일행이 그곳에 있었다. 심장이 뛰지 않는 이현성. 잠깐씩 의식이 돌아오는 듯한 순간도 있었지만, 여전히 그는 검이 된 채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걱정 마세요. 다음 시나리오로 가기 전에 반드시 현성 씨를 깨울 겁니다.” “방법이 있어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비단 이현성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이제 우리는 더 커다란 세력이 필요했다. 우리의 목표는 단순히 시나리오를 클리어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기 때문이다. <관리국>. 그리고 <스타 스트림> 전체와 맞서기 위해서는, 슬슬 우리 편을 들어줄 성좌를 모을 필요가 있었다. [성좌, ‘강철의 주인’이 당신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현성의 배후성은, 그 첫 번째가 될 것이다. 내 의기양양한 표정이 무척 인상 깊었는지, 정희원이 말했다. “근데 독자 씨.” “네.” “여기서 그렇게 폼 잡고 있어도 돼요? 독자 씨 지금 시나리오 중이잖아요. 진짜 납치당하는 거랑 죽는 걸 좋아하는 건 아니죠?” “어······.” 정희원의 말과 함께, 눈앞에 시나리오 창이 떠올랐다. [하루가 저물고 있습니다.] [현재 당신이 해결한 불만은 1건입니다.] 나는 서브 시나리오의 실패 대가를 다시 한번 확인했다. + 실패시 : 사망(?) + 나는 하늘의 유성우를 올려다보았다. “······어쩌면, 여기가 제 마지막 시나리오가 될지도 모르겠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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