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5화

455화 이게 어떻게 된 영문인지 생각했다. 하나, 나는 꽁꽁 묶여있고. 둘, 내가 모르는 산속에 내던져져 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결론은 납치였지만, 대체 누가 감히 <김독자 컴퍼니>에 침투해 나를 납치하겠는가. 그렇다면 역시······. “······는······.” “······독자······ 풀어줬······?” “앗? ······.” 희미하게 들려오는 대화 소리. 낑낑대며 포승줄을 푼 나는 비척대며 소리가 들려오는 곳으로 갔다. 짙은 산세를 헤치고 30초쯤 나아가자, 널따란 야영지와 일행들의 모습이 보였다. “아, 저기 알아서 오네.” 실실 웃는 한수영이 나를 향해 손을 흔들고 있었다. “뭘 봐? 노동자 파업 처음 보냐?” “아니, 지금······.” “공기 조오타. 독자 씨도 여기 좀 누워 봐요.” 한수영의 옆으로 하늘을 향해 대짜로 드러누운 정희원이 있었다. 정희원이 날갯짓 하듯 팔을 움직이자, 싱그러운 풀들이 드러누웠다 일어나기를 반복했다. 한수영이 경건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풀이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눕는다.” “오.” “정희원도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눕고, 바람보다 먼저 일어난다.” “잘하는데?” 갑작스런 시 낭송 대회와 그에 맞장구를 치는 정희원을 보며, 나는 얼떨떨한 심경으로 물었다. “지금 대체 뭐하는······.” “노동자 혁명의 시다, 자식아.” “그러니까 아까부터 노동자 혁명이니 뭐니······.” “아, 좀 쉬자고. 넌 그걸 꼭 말로 해야 알아 듣냐?” 한수영의 핀잔에 나는 인상을 구겼다. 쉬러 왔다고? “뭔 소리야? 지금 시기가 어느 땐데.” “어느 땐데?” 그렇게 되물으니 할 말이 없었다. 지금이 어떤 시기냐고? [현재 성운 <김독자 컴퍼니>는 마지막 시나리오의 자격을 획득한 상태입니다.] [시나리오 입장 잔여 시간은 28일 12시간 15분 7초입니다.] 나는 페이스에 휘말리지 않도록 침착하게 대꾸했다. “이럴 시간 없어. 마지막 시나리오가 코앞에 있다고.” “그러니까 지금 쉬어야지. 언제 또 이렇게 쉬겠냐?” 한수영이 한숨을 푹푹 쉬며 말했다. “주변을 좀 둘러봐라. 스마트 폰에만 코 박고 살지 말고. 넌 이런 곳까지 와서 일하고 싶냐?” 그 말에 나는 처음으로 주변의 산세를 살폈다. 풍요로운 녹음이 우거진 산속. 어느 산인지는 모르겠다. 지리산인지, 설악산인지, 한라산인지······ 아무튼 아름다운 산이었다. 햇볕은 강하지 않았고, 바람은 서늘하다. 한 마디로 캠핑하기 좋은 날씨였다. 나는 머뭇거리며 말했다. “아 물론 쉬지 말란 게 아니라······ 쉬는 건 좋은데 할 건 하고 쉬자는 거지. 우린 지금······.” “우와, 독자 씨 진짜 꼰대 마인드다. 대표이사는 다 저런가?” 정희원이 내 정강이를 툭툭 치며 말했다. “쉴 땐 그냥 쉬는 거예요, 대표님.” 머릿속이 복잡했다. 내가 계속 대답하지 않자, 나를 노려보던 한수영이 시큰둥한 목소리를 냈다. “그래, 네 말도 맞다. 모두 쉬면 안 되니까 한 사람은 시나리오 해야지. 그럼 네가 일해.” “뭐?” “네가 좋아하는 시나리오나 하라고.” 한수영의 말에 문득 허공을 보자, 진짜로 시나리오 창이 떠 있었다. [서브 시나리오― ‘노동자의 휴일’이 발생했습니다!] 듣도 보도 못한 시나리오였다. 나는 시나리오 창을 열어 보았다. + <서브 시나리오 ― 노동자의 휴일> 분류 : 서브 난이도 : ??? 클리어 조건 : 당신은 성운 <김독자 컴퍼니>의 대표입니다. 당신의 오랜 착취와 가혹행위로 인해, <김독자 컴퍼니>의 직원들은 몹시 지친 상태입니다. 그들은 성운의 대표인 당신에게 큰 불만이 쌓여 노동쟁의를 벌이는 중입니다. 성운의 대표로서 그들의 불만을 들어주고 달래십시오. 당신의 빈약한 커뮤니케이션 능력을 고려해, 불만 해결 목표치는 5명입니다. 제한시간 : 12시간 보상 : <김독자 컴퍼니> 직원들의 신뢰. 실패시 : 사망(?) + 사망? 아니, 무슨 이딴 시나리오가······. 허공을 올려다보자, 비유가 “바앗”하며 울었다. 한수영이 나를 향해 투덜거렸다. “하여간 저 자식은 시나리오로 알려줘야 이해한다니까.” * 나는 초조한 마음에 주변을 둘러보았다. 일행들은 즐거워 보였다. 패러디 시들을 줄줄이 읊던 한수영과 정희원은 동산에 누워 잠들어 있었고, 이길영과 신유승은 코를 맞댄 채 으르렁거리고 있었다. “야, 신유승. 내기하자. 누가 저녁밥 더 큰 걸로 잡아오나.” “이기면 뭐 주는데?” “지는 사람이 소원 들어주기, 어때?” “콜.” 부리나케 숲속으로 뛰어가는 아이들에게, 유상아가 “조심해야 해”라고 당부했다. 야영장 한쪽에는 작은 계곡도 보였는데, 낚시 의자를 가져온 공필두가 하품을 하며 찌를 드리우고 있었다. 그 옆에 앉은 한명오도 뭐라뭐라 중얼거렸다. “내가 바다에만 나갔다 하면 이만한 감성돔을······.” 시원한 계곡의 물소리와, 산새가 지저귀는 소리가 들렸다. 무성한 산의 녹음이 한꺼번에 뭉그러지는 듯했다. 아직도 꿈을 꾸는 것 같았다. 그 애틋함이 내겐 맞지 않는 옷을 입은 것처럼 불편했다. 이래도 되는 것일까. 벌써, 이런 순간을 겪어도 좋은 것일까. 나는 유중혁을 찾았다. 역시 이래서는 안 된다. 놈이라면 내 생각에 동의할 것이다. 보나마나 어디선가 일행들을 노려보고 있을 것이다. 무시무시한 눈빛으로, “지금은 네놈들은······!”으로 시작하는 꼬장꼬장한 소리를 늘어놓고 있을 것이다. 나는 금방 유중혁을 찾았다. 손을 들어 녀석을 부르려는데, 뭔가가 이상했다. 치이이익. 유중혁은, 그곳에서 요리를 하고 있었다. 커다란 불판 앞에서, 현란하게 손을 움직이며 고기를 굽고 있었다. 야채들이 프라이팬 위에서 파르르 날아올랐다. 하늘을 부수는 [파천검도]가 야채와 고기들을 조각내고 있었다. 나는 녀석을 부르는 것도 잊고, 홀린 듯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이란 말인가. 다음 순간, 유중혁의 눈이 나를 향했다. 역시나 특유의 무시무시한 눈빛으로 내게 말하고 있었다. [전지적 독자 시점]을 쓰지 않아도 알겠다. 저 눈빛은 분명 「그렇게 봐도 네놈에게 줄 건 없다」 라는 뜻이다. 녀석의 옆에는 유미아와 이지혜가 호기심 어린 눈을 빛내며 서 있었다. “지금이야.” 유미아가 입을 벌리자, 유중혁이 무심한 얼굴로 젓가락을 움직였다. 어미새처럼 고기를 한 점씩 집어 입어 넣어주는 유중혁. 유미아가 방긋 웃었다. “역시 맛있어.” 그러자 멀뚱멀뚱 옆에 서 있던 이지혜도 입을 벌렸다. 유중혁은 그쪽을 잠깐 보더니 다시 유미아의 입 속으로 고기를 넣어주었다. 그러기를 너덧 번. 이지혜가 입을 앙다물었다. “사부, 진짜 너무한다.” 참다못한 이지혜가 직접 젓가락을 움직이자, 유중혁의 프라이팬이 [주작신보]의 신묘한 궤적을 따라 움직이며 그녀의 손을 피해갔다. 울상을 짓던 이지혜가 결국 뿔이 났다. “지금 해보자 이거지?” 내가 정말 ‘멸살법’의 세계에 들어온 것인지, 아니면 『냉혹미남 회귀자 유중혁이 이럴 리가 없어』에 들어온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이지혜의 젓가락을 피해내며 유미아에게 고기를 먹이는 유중혁은, 여전히 눈썹 하나 깜짝 하지 않는 무표정이었다. 하지만 무표정에서 읽을 수 있는 것도 있었다. 그제야 나는 깨달았다. 유중혁은, 진심으로 이 자리에 임하고 있다. 「왜 이런 시기에, 유중혁은 이런 걸 허락했을까」 <김독자 컴퍼니>의 대표이사는 나만이 아니었다. 여러 가지 의미로 유중혁은 나보다도 훨씬 더 완고한 인간이었고, 심지어 이런 집단을 운용해 본 경험도 풍부한 녀석이었다. 그런데 그런 녀석이, 이 캠핑에 순순히 참여했다. 「정 말 몰라 김독 자」 [제4의 벽]의 목소리와 함께, 눈앞에 문장들이 펼쳐졌다. 「작가님, 이번 회차에선 바다에 한 번 가면 어떨까요?」 그것은 언젠가 내가 달았던 댓글이었다. ‘멸살법’은 그토록 잘 기억하면서, 내가 달았던 댓글들은 까맣게 잊고 있었다. 생각해 보면, 그토록 많은 회귀를 반복하면서도 유중혁이 좀처럼 빠뜨리지 않았던 이벤트가 있었다. 「“오늘은 휴식이다.”」 그것은 휴식이었다. ‘멸살법’의 원작에는 있었지만, 이 세계에는 없었던 것. 그는 중요한 고비를 넘길 때마다 일행들을 데리고 다른 행성의 관광지역에 방문했다. 물론 본인은 시나리오에 필요한 구성품을 구한다는 명목이었지만, 다른 일행들에게까지 그걸 강요하지는 않았다. 「“사부도 이리 와서 같이 놀아요!”」 「“여어, 이지혜. 큭큭. 내 복근을 좀 보라고. 내 흑염룡도 극찬한······.”」 「“오늘 중혁 씨 요리 먹는 거야?”」 그 유중혁조차 그랬는데, 나는 어땠을까. 「······다음 시나리오를 준비해야 합니다.」 항상 쫓기듯 움직였고, 여유는 없었다. 시나리오의 후반부로 갈수록 그런 경향은 더욱 짙어졌다. 늘 코앞의 목표가 있었다. 그걸 해결하지 않으면 시나리오 전체가 망가질 것처럼 굴었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면, 그걸 당장 하지 않더라도 시나리오가 망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야, 이길영! 여기선 스킬 안 쓰기로 했잖아!” “내가 언제! 항상 최선을 다해야지!” 멀리서 사냥감을 가지고 돌아오는 아이들의 목소리. 뒤이어 계곡을 쩌렁쩌렁 울리는 한수영의 목소리도 들렸다. “자, 보물 찾기 이벤트 시작한다! 상품은 흑염룡의 성유물이야!” “뭐야, 진짜? 그 ‘흑염룡’의?” “계곡 속에 숨겨놨으니까 먼저 찾는 사람이 임자야. 아, 스킬 사용은 금지인 거 알지? 그 외에도 자잘한 상품들이―” “성유물은 내거다!” 낚싯대를 내던진 한명오 부장이 계곡 속에 뛰어들었고, 잠시 후 정희원에게 머리채가 잡혀 하늘을 날았다. 어느새 이지혜도, 사냥을 마치고 돌아온 아이들도 계곡 속에 뛰어들었다. “잠깐만, 지혜 누나! 그거 [유령함대]잖아! 작게 소환하면 모를 줄 알아?” “이길영! 치사하게 물방개 길들이기냐?” “둘 다 실격!” 일행들이 다 같이 웃는 모습을 보는 게 얼마만인지 알 수 없었다. 어쩌면 처음인지도 모른다. 시나리오의 끝이 오지 않아도 그들은 웃을 수 있었다. 저렇게 즐겁게 떠들 수 있었고, 이야기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광경을 보며, 김독자는 이상하게 외로워졌다.」 어쩌면 나는 지금껏 ‘멸살법’에 대해― 아니, 우리 일행들에 대해 하나도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결말을 보겠다는 환상에 취해서, 정작 결말로 가기 위해 읽어야 할 무수한 문장들을 모조리 놓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현재 당신이 해결한 불만은 0건입니다.] 별거 아닌 것처럼 여겨졌던 시나리오가, 갑자기 ‘거대 설화’ 만큼이나 어렵게 느껴졌다. 파라솔 위에 걸터앉은 내가 쭈뼛거리며 서 있자, 누군가가 내 어깨를 톡톡 쳤다. “시나리오 해결은 잘 되어 가요?” 싱긋 웃는 유상아가 그곳에 있었다. 내가 힘없이 웃자, 유상아가 말을 이었다. “독자 씨는 커뮤니케이션 능력이 뛰어난 사람은 아니니까요. 회사 다닐 때부터 그랬잖아요.” “······그랬습니까?” “아예 다른 사람들이랑 말을 잘 안 했으니까요.” 무자비한 팩트 폭격에 대답할 말이 없었다. 생각해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어릴 적부터 친구 하나 없는 인생이었다. 사람들과 어울리는 법도 잘 모르고, 회식 자리도 도망칠 궁리만 했다. 차라리 그 시간이 있으면 ‘멸살법’ 정주행하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김 독자 이 제친 구있 다」 그리고 자기가 친구라고 주장하는 약 올리는 무생물 하나. 파라솔에 걸터앉은 유상아가 느긋한 시선으로 일행들을 바라보았다. 캠핑 분위기를 내기 위함인지 오늘은 유상아도 법복 대신 캐주얼한 원피스에 챙이 긴 밀짚모자를 썼다. 어디서든 분위기를 잘 맞추는 유상아. 한심한 리더가 운영하는 <김독자 컴퍼니>에 있기는 아까운 사람이었다. “상아 씨는 혹시, 그날 지하철에 탔던 걸 후회하십니까?” 왜 그런 질문을 했는지는 모르겠다. 지금도 생생한 첫 번째 시나리오의 정경. 「그날, 유상아의 자전거가 도둑맞지 않았더라면.」 만약 다른 곳에서 시작했다면, 그녀는 <올림포스>의 화신이 되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다. 죽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다. 환생의 고통을 겪지 않아도 되었을······. “아뇨.” 그토록 단호한 얼굴의 유상아는 처음이었다. “그러니까 독자 씨도 후회하지 마세요.” “예? 어떤 걸······.” “그냥. 전부 다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고맙다고, 감사하다고 말하는 것만으로도 폐가 될 것 같은 기분. ‘멸살법’은 내게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말해야 하는지 알려 주지 않았다. 유상아는 그런 내 마음을 안다는 듯 생긋 웃고는 누군가를 가리켰다. “먼저 저 사람한테 말을 걸어 보는 게 좋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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